33장 흑운의 그림자 1화 짬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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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짬짜미
오전 내내 내실 안에서 서성이던 세느비엔느는 내무대신이자 사가의 오라비인 폰다 공작 그레일라스가 도성에 도착하여 알현을 청하였다는 시종장의 보고에 반색을 하며 돌아섰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남부 영지로 내려갔던 그레일라스 공작의 도착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다. 새벽같이 도착한 전서구에 의하면 오전 중에 도성에 닿으리라 하였던 그가 정오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던 까닭에 세느비엔느는 초조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신, 그레일라스 레 폰다, 폐하를 뵙습니다.”
내실로 들어서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그를 잡아채듯, 세느비엔느가 질문을 던졌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님. 그래 로크라테 영주는 만나보셨습니까?”
민망하리만큼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그것은 우아한 표정으로 내심을 감추고 교묘한 화법으로 진의를 은근히 빗대어 말하는 것을 세련된 상류 계급의 모범적인 자세라 여기는 왕성의, 그것도 세레즈 문화의 정점에 있는 여왕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레일라스 공작은 그러나 다급해진 누이의 심사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타미젤의 대관식 일정이 확정된 마당에 하필이면 태자 아체프렌의 귀환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전국이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폐하.”
아체프렌의 모후였던 로제스티나가 왕실 내분으로 사망한 이후 세느비엔느가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되며 그 소생의 왕자 안타미젤 역시 선왕의 적자로 봉해진 바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세레즈 백성들에게 왕가의 정당성을 지닌 이는 안타미젤이 아닌 아체프렌이었다.
선왕께서 젊은 나이에 붕어하고, 태자인 아체프렌을 제치고 왕비였던 세느비엔느가 그의 성인식과 더불어 전위하겠다는 조건 아래 보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세레즈 전역에는 아체프렌 왕자에 대한 동정론이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대다수의 세레즈인들에게 아체프렌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사특한 계모의 모진 핍박 아래 신음하는 슬프도록 처연한 왕자로 보였다.
백성들은 흡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운 태자가 기실은 오만하고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 뺨 치도록 조숙하며 영악하여 항시 받은 것 이상의 강도로 세느비엔느와 자신의 적대 세력에게 보복해 주곤 하였다는 점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설령 알 방도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아둔한 백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봤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태자 아체프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피해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선량하고도 가엾은 이미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아체프렌의 가장 커다란 무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세느비엔느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콜틴이 뭐라 하더이까. 제 의사는 분명히 전하셨습니까?”
그레일라스는 제 심사를 숨기지 못하는 누이를 약간은 안타까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태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세레즈 전역을 휘돌고 있었지만, 아체프렌이 공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조정 차원에서 그의 사망설을 번복한 것도 아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정황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는 한 번 결심하면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일말의 주저도 없었던 선대 폰다 대공을 떠올렸다.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차라리 군대를 풀어 이 시점에 태자를 참칭하는 이와 그를 옹호하는 무리를 모두 잡아 들이라 명했으리라. 안타미젤의 대관식을 앞두고 흔들리는 민심을 아체프렌과 그 지지세력을 박살 내는 것으로 휘어잡고, 왕국 내 만연한 태자에 대한 동정론을 일소하고 철새 같은 귀족들의 마음속 깊이 공포를 심어줬을 터였다. 과격한 결단이나 아체프렌만 없어지면 세레즈의 유일무이한 대안은 선왕의 차자이자 적자인 안타미젤 밖에 없었다. 개국왕인 리하르트 클로히비츠 벤 세레스티아의 직계 혈통에 대한 애정이 깊은 세레즈 백성들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이인 세느비엔느는 선친처럼 독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지키지 않은 전위 약속에 얽매였고, 그건 아체프렌의 생사에 대한 풍문이 무성해지면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편하겠으나, 모질지 못한 주제에 그녀는 야망만은 대단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아체프렌을 죽이고자 살수를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시도는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사악하기 그지없는 아체프렌은, 이러한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암살 시도 실패에 대한 말에 덧붙여 자신은 본인의 귀환을 도성에 장계로 올렸으나 그를 미리 차단한 것으로도 모자라 양자에게 살수까지 보낸 여왕의 졸렬한 처사에 대한 정보까지 싹 다 퍼트렸다. 하크스의 본성 첸트로빌로부터 흘러나왔을 그 이야기가 남부 영지 전체에 구구하게 떠돌며, 여왕의 정치적인 입지를 점점 좁히고 있었다. 하크스의 로엘 대공과 태자 아체프렌은 본인의 귀환을 당당하게 알리고자 하였으나 그에 대한 여왕의 대응이 비겁했으니, 세느비엔느가 옹졸한 인사가 되어버리는 건 당연했다. 비록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레일라스 또한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크라테 영주 콜틴의 시선에서 실망 어린 눈빛을 분명히 읽은 바 있었다.
“폐하의 의지는 알렸으나, 로크라테 영주의 견해처럼 신이 보기에도 아체프렌에 대한 재차 암살 시도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어찌하여야 합니까? 안타미젤의 대관식이 내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대로 아체프렌이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야 두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세느비엔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진정하십시오.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
“진정이라니요? 어찌 오라버님께서는 이토록 태연하십니까!”
여왕의 음성이 히스테릭하게 치켜 올라갔다. 조급한 마음에서 튀어나오는 격한 반응에 그레일라스는 착잡한 기분으로 한숨을 삼켰다. 선왕이었던 펠릭스를 사랑하여 제국 최고의 명문가 공녀로서의 자부심조차 접고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입지가 서지 않은 젊은 국왕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던 순진한 누이는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왕성에서 수십 년의 고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권력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바뀌어버린 누이의 모습은 가슴 아팠지만, 모든 것을 뒤집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무섭다 하여 달리는 호랑이의 등위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는 일, 그레일라스는 이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 내었다.
“우리는 아직 이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아체프렌은 돌아왔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면 혹시, 태자 암살이 아니라··· 목표를 바꾸자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던 여왕의 녹색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왕성에서의 수십년은 헛된 세월이 아닌 듯, 그녀는 그레일라스가 하고자 하는 의도를 빠르게 간파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정치판에서는 흔한 일, 로엘 대공이 아체프렌을 수호하는 한 우리에겐 쓸모가 다한 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공 전하의 대관식을 앞두고 로엘 대공이 제거되면 셈이 빠른 장사치 영주가 많은 남부는 반드시 자중지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 틈을 타 우리는 대관식을 해치우고, 새 국왕의 명으로 민심을 흔드는 반군의 수괴를 제거하는 겁니다.”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지자, 얼굴에 감돌던 성마른 기운도 차츰 잦아들었다. 마침내 평소의 혈색을 되찾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빛을 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라버님.”
“작게는 가문을 위한 일이옵고, 크게는 대공 전하와 세레즈의 앞날을 위한 일입니다.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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