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7
세레즈력 368년 여름.
"줄리에트. "
아직 명료하지 않은 의식 속으로 귀에 익은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들어올려, 흐릿하게 잠겨있는 시야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한다.
"···어머니."
"그래, 줄리에트.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심하거라, 얘야.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어머니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눌러 나를 다시 침대 위로 눕힌 뒤, 곁에 서있는 시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무얼하고 있는 게냐. 얼른 마실 것이라도 내오지 않고."
얼른 대답하고 물러나는 시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다시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어머니는 덧붙였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
어머니의 그 말에, 애써 의식 저편으로 접어두려고 했던 유모의 말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 했다.
"꼬박 이틀을 홍역 앓듯 해서 네 아버지도 심려가 무척 많으셨단다. 전의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고···. "
팔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어머니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말, 사실인가요? 폐하께서······"
무언가 말을 이어가던 어머니가 굳어진 얼굴로 조개 마냥 굳게 입을 다문다.
어머니의 말 없는 외면에, 가슴 한 끝이 아릿하게 울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긴 침묵 끝에 어머니가 포기했다는 듯 낮게 대꾸한다.
"그래. 좋은 일을 앞두고 네가 상심할까 저어되어, 일부러 내 알리지 말라고 했단다. "
'상심'이라는 말만이 날카로운 울림을 가지고 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아는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는데, 다시금 전신을 덮쳐오는 이 까마득한 기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배신감, 실망감, 아니면 절망감···?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이리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네 마음이 상했겠지만. 어찌하겠느냐, 줄리에트. 이 또한 거의 모든 왕비들이 겪는 일인 것을. "
모든 왕비들이 겪는 일, 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가슴 안에 차갑게 맺힌다.
"잘 듣거라, 줄리에트. 하늘 아래 국왕 폐하의 정혼녀는 너 하나 뿐이다. 폐하께서 어떠한 여인을 들이신다고 해도, 그들은 기껏해야 후궁 아니면 시침녀에 지나지 않아. 그 일은 네가 이렇듯 상심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일인 게야. "
어머니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껏 이리 하신 일이 없는 폐하이신지라, 네 충격이 크겠지만. 너무 염려 말거라, 줄리에트. 네 아버지가 그 일로 도성에 가셨으니, 모두다 무사히 무마될 게다. "
무마될 것이라, 하셨나요?
무엇이···, 아니 무엇을 무마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여인을 성 안에서 내쫓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폐하께서 그 여인에게 정을 붙이는 일이 없도록, 그리 하시겠다는 거예요?
하. 하.
어쩐지 웃음이 난다.
우스울 것 하나 없는 일인데도.
"···공연한 일을 하셨군요. "
"줄리에트, 그게 무슨 말이냐. "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조금 내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버님께서 무어라 하시든, 폐하께서는 절대로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아버님께서는 무용지물로 돌아갈 수고를 하시는 거지요. "
달라질 것은 하나 없는데.
"줄리에트! "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모른다.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다. 국왕 폐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나는 어머니의 굳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문을 연다.
"폐하께서 북부 영지 순례 직전에 저를 찾아 이곳에 들러주셨던 것, 생각나세요?"
나는 그 때 일을 떠올리듯, 눈을 내리감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때 폐하께서는, 우리의 결혼식이 연기된 사실 그 하나 때문에 제게 무척이나 미안해 하셨어요. 그것은 폐하의 잘못이 아닌데도. 행여나 제가 그 일로 상심하고 있을까 염려되어, 그 촉박한 일정을 잘라내서 부러 제게 들러주셨던 거에요. "
그 분은 그런 사람이에요. 아무리 자신의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위에 있는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라구요. 아시겠어요, 어머니?
"그래, 폐하께서 너를 그리 아껴주시니···"
고개를 흔든다.
"아니오. 그게 아니에요. "
어째서 모르세요, 어머니?
그분은요, 국왕 폐하는,
뜻하지 않게 미뤄진 결혼식에 행여라도 제 마음이 다쳤을까 염려되어, 힘들고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직접 찾아와 주셨던 분이세요.
열 여섯 살에 우연처럼 저를 한 번 만나신 이후, 국왕이 되신 지금까지 시침녀조차 찾지 아니하셨던 분이세요. 아니, 이제껏 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눈길조차 돌리신 일이 없지요.
폐하께서는 그만큼 성실하고, 자신이 짊어지신 책임이 어떤 것인지 아는 분이세요.
그런 분이, 만난지 한달도 안되는 여인을 궁 안으로 들이셨어요. 결혼을 약속한 정혼녀를 내버려 두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녕 모르시겠어요?
"폐하께서는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무분별한 결정을 내리실 분이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그리할 수 있기엔, 그 분이 현재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나 가혹할 테니까."
그래요. 단순한 관심이나 흥미 때문이었다면, 이리 하시지도 않았겠지요. 차라리 외면하셨을 거에요.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애써, 돌아서려 하셨을 거에요.
설혹 그 분이 제게 갖고 있는 감정이, 저와 동등한 무게가 아니라 해도.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해도.
그저, 제게 미안한 감정 때문이라도···
폐하께서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의무와 책임을 우선해야 한다고 배워온 분이니까,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느니 자신이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분이니까.
"진심인 거에요, 그 여인에게. "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내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알면서도.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지 알면서도.
도의와 책임감의 무게로도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 이끌림 때문에, 그리 하신 거에요.
7년 전의 그 봄날, 바로 제가 그랬듯이.
내 안의 슬픔으로 나는 그만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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