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펜데스칼 전쟁> 제1장 표류 1화 난파당한 청년
< 제1부 펜데스칼 전쟁 >
세레즈력 386년 3월,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 아체프렌 듀피겔드 벤 세레스티아,
외교사절의 임무를 다한 후 본국으로 귀환하던 중,
태풍으로 난파하여 적국 코네세타의 남부 영지 케타로스에 표류하다.
-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장 표류
1. 난파당한 청년
아이네즈 티아르는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침대를 향해 걸어오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청년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침대로 다가갔다. 아이네즈는 고개를 그리로 기울인 채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보이나요?”
청년은 그런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기력이 없어서인지 대답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사흘이나 고열에 시달렸던 사람인 만큼 깨어나자마자 쉽게 움직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 아이네즈는 백랍같이 창백한 청년의 얼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핏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뜬 청년은 그제야 초점을 맞출 수 있는지 비교적 긴 시간 또렷하게 아이네즈를 응시했고, 그런 뒤에 눈을 돌려 천장과 주변의 사물들을 쳐다봤다. 처음 눈을 떴을 때와는 달리 확실하게 의식을 되찾은 것 같은 그에게 아이네즈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자신이 보이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일까.
아이네즈는 불현듯 그가 열에 들떠 신음처럼 중얼거렸던 몇 마디의 낯선 말을 떠올렸다. 상대가 외국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이왕이면 서로 말이 통하면 좋겠지만, 설령 청년이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할지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제껏 병구완을 해왔는데, 말 따위가 무에 대수겠냐고 아이네즈는 편히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녀는 상대에게 말을 거는 일을 그만두고는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청년도 파리한 얼굴로 그런 아이네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이 아름다운 청년의 눈동자는 바다보다 더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갓 깨어난 사람답지 않게 맑고도 깊은 청년의 눈빛에, 그와 시선이 마주친 아이네즈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당혹감을 숨기듯 얼른 고개를 돌리며 일어났다.
꼼꼼하고 단정한 아이네즈의 성정답게 병상 주변은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렇다고 멀뚱히 서로를 보고 있는 것도 민망한 일 같아서 그녀는 가져온 물수건의 물기를 짜서 물그릇 주위를 닦기 시작했다.
원래는 땀에 젖은 청년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가져온 수건이었지만 상대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면식도 없는 다 큰 사내의 얼굴을 닦아줄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얼굴이 두껍지 못하였다.
공연히 침대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겉으로야 아닌 척을 했지만, 신경이 온통 청년에게 가 있던 아이네즈는 곁에서 미미한 기척을 느끼고 바로 그를 돌아봤다. 어느 정도 제 혈색을 되찾은 듯 보이는 청년이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이네즈는 바로 탁자로 다가가 작은 수저와 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수저로 물을 떠서 청년의 메마른 입술 위로 흘려주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여 조금이나마 목을 축이게 해준 뒤, 그녀는 편안한 미소로 천천히 말해도 된다는 암시를 주고는 침대 곁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
한참 후 흘러나온 음성은 비록 낮고 힘이 빠져 있었으나, 분명 정확한 발음의 코네세타 말이었으므로,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던 그녀의 우려를 걷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도한 아이네즈는 차분한 얼굴로 답하였다.
“뮤즈 마을이에요.”
“뮤즈······?”
난생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청년이 반문해왔다. 말은 얼추 할 줄 알아도 이 근방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문을 담은 어조보다 상대의 표정에서 그 점을 더 분명히 깨달은 아이네즈는 난감함을 느꼈다.
이 지역 사람도 아니고, 어쩌면 간단한 코네세타 말이나 겨우 할 줄 아는 외국인일 수도 있는 상대에게, 다섯 가구도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까닭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아이네즈는 자신의 마을과 시장 주위의 몇몇 마을을 제한다면 영지인 케타로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잠깐의 주저 끝에 그녀는 청년이 알아들을 수 없을지도 모를 지역 이름은 다 빼고, 평소보다 더 천천히, 또박또박 쉬운 말로 덧붙였다.
“성과 멀리 떨어진 아주 작고 한적한 마을이에요. 우리 집은 다른 집과 한참 더 떨어져 있고요. 낯선 사람이 왔다고 해서 소문이 퍼질 일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사람도 없으니, 몸이 나아질 때까지는 편히 쉬세요. 힘들어 보이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좀 더 기운을 차리고 해요, 우리.”
아이네즈는 그에게 가만히 누워있으라고 손짓을 해 보인 다음 방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문이 닫히자 천천히 눈길을 돌려 방 안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다.
방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탁자와 그리 크지 않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두 식구가 사는 듯, 침대 머리맡으로 옮겨진 의자는 탁자 옆의 의자와 크기도 모양도 비슷해 보였다. 덮개 아래로 드러난 탁자 다리와 마찬가지로 의자에서도 밝은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모두 같은 종류의 나무를 손질해 만든 듯했다. 그 외에는 문 옆에 세워져 있는 제법 커다란 찬장과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가 세간의 전부였지만, 묘하게도 허전하다던가, 투박한 느낌은 없었다. 도리어 깔끔한 방안에서는 어딘가 고상한 느낌마저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정신이 없어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덮고 있는 이불과 베개에서도 풀을 먹여 갓 꺼낸 천 특유의 보송보송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마에서 미끄러져 내린 물수건으로 미루어보건대 며칠 동안 열에 들떠 앓아누웠던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입고 있는 옷에서도 눅눅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아까 그 여인이 땀이 배어들지 않도록 갈아 입혀 준 것일까.’
운신을 위해 고개를 조금 돌리자 뒷골이 쑤시며 관자놀이까지 욱신거렸다. 청년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절로 손이 갔다. 고작 그 정도를 움직인 것만으로도 전신이 결리며 눈앞이 새까매질 만큼의 통증이 밀려들었다. 난파하여 파도에 휩쓸리는 동안 몸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 작가의말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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