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선전포고 4화 태자의 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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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자의 대의
수비대장과 함께 성루를 걷던 아체프렌은 성의 전면에 못 보던 장대들이 쭉 늘어서고 잡혀 온 병사들이 그 위로 묶이는 것을 목격했다. 상황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일목요연했다. 투항을 권고하는 저의 글을 보고 탈영한 병사들을 잡아 온 모양이었다. 마치 저 보란 듯이.
“로크라테의 장수가 나를 시험하는구나.”
아체프렌의 나직한 한 마디에 슈발츠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병사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동원수단이고, 저들이 저리 나올 것을 예상못한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탈자가 늘어나게 되면 저런 대응은 결국은 적장에게도 자충수가 될 터이니 전하께서는 보시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되도록 이 내란으로 무고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하는 아체프렌의 진의를 십분 이해하기에 슈발츠로서는 더더욱 그렇게 권할 수밖에 없었다. 저의 글을 보고 탈영하였다가 처형당하는 이들을 보는 태자의 마음이 얼마나 참혹할 것인가. 아체프렌은 저토록 잔혹한 장면을 지켜보아야만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인종이 아니었다.
백성을 아끼는 아체프렌의 마음은 진정이었고, 그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그를 곁에서 겪으며 절감했기에 슈발츠는 존경하는 주군을 잃고서도 방황하지 않고 아체프렌을 따를 수 있었다. 곤란한 지경에 처해서도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로엘대공의 그림자가 이제 갓 성인식을 지난 이 어린 왕자의 뒤에도 짙게 깔려있었다. 그 그림자가 여실하게 느껴질 때마다 슈발츠는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주공을 떠올렸고, 그의 마지막 유지를 다시금 가슴에 되새겼다.
태자를 지키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민이 근간이 되는 새로운 세레즈를 만들라는.
그러나 아체프렌은 슈발츠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서 피하는 대신에, 외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슈발츠가 빠르게 따라붙으며 만류했다.
“적이 조만간 공세를 취해올 듯싶습니다. 전면으로 투석기와 충차가 돌출해있고, 궁수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이동 중입니다. 그리 앞으로 나서시면 위험합니다, 전하.”
“나를 심려하는 장군의 그 마음은 아름답게 여긴다. 허나 내게 돌아오라는 글을 보고 나를 따르겠노라 탈출하였던 병사들을 버리고 돌아선다면 내 어찌 저들의 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레즈의 계승자로 나를 교육하였던 무수한 스승들 가운데 그 누구도 내게 내 백성을 버리고 무책임하게 돌아서는 비겁을 가르치지 않았다.”
“소신이 아무리 어리석기로 전하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하겠나이까. 하지만 부디 대의를 생각하소서.”
“내가 왕위를 원하는 까닭은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여 다치고 죽는 자가 없고, 배가 고파 남의 것을 훔치는 자가 없으며, 쓰는 말이 다르며 타고난 살 색이 다르단 연유로 이 땅 위에서 발 딛고 살면서도 차별로 고통에 받는 이들이 없어지고, 배우지 못하여 가진 능력을 펼치지 못해 억울해하는 자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나의 대의에 백성이 빠진다면 내가 과연 도성의 세느비엔느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아체프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슈발츠 장군, 그대와 첸트로빌 성에 모인 하크스의 백성들이 나의 소중한 신하이며 백성이듯, 저기 장대에 매달린 이들뿐만 아니라 내게 활을 겨누고 내가 디디고 선 성을 부수고자 충차를 들이미는 저 병사들 역시 어리석고도 가여운 내 백성이다. 진즉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나를 지키고자 애를 썼던 로엘 대공과 다른 공경들을 지키지 못한 내 과오가 실로 크나, 더는 내 그대들의 충정 뒤에 숨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아니할 것이다.”
아체프렌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바늘 하나 비집고 들어갈 여지도 없으리만큼 단호했다. 아체프렌을 말릴 수 없어진 슈발츠는 태자의 안위를 지키고자 수하들에게 손짓하였으나, 아체프렌은 그마저도 거부했다.
“군사를 뒤로 물려라. 나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나 자신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내 백성에게 활과 무기를 겨누지 않겠다.”
*
“태자가 성루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뭐라? 그것이 정말이냐?”
로크라테군의 참모장 쿤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모두에게 둘러싸여 보호만 받는 왕족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앞둔 적군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실로 예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소장도 직접 태자의 실물을 본 적이 없어 확실치는 않으나 금발 벽안의 갓 성년을 지난 듯 보이는 청년이옵고, 몇 년 전에 초상화로 보았던 모습이 얼굴에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확실해 보입니다.”
“이런 미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태자의 대응에 절로 잇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실제로도 아체프렌은 하크스의 본성 첸트로빌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바 없었다. 그랬던 태자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기에 하필 이 시점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래서 장병들의 반응은 어떠하냐, 아니 직접 나가 보는 게 좋겠군.”
혀를 차며 막사를 박차고 나온 쿤츠는 정말로 성루 앞에 홀로 모습을 드러낸 태자를 보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시늉조차 없이, 그는 무장도 하지 않은 단신으로 성루 앞에 돌출되어 있었다. 성 아래서 사정거리가 긴 석궁을 쏘면 쓰러뜨릴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난생처음으로 왕족을, 그것도 원래의 약조대로라면 지난 유월 그의 성인식을 맞는 19세 생일을 맞이하여 세레즈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어야 할 태자의 모습을 이토록 가까이서 영접한 병사들은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자랑스러운 세레즈의 장병들이여, 사랑하는 나의 백성들이여. 나는 이 나라의 태자 아체프렌 듀피겔드 벤 세레스티아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태자의 음성이 고요를 가르고 울러 퍼졌다. 장병들은 소리를 높여 고성을 지르지 아니하여도 또렷하고 명료하게 울리는 태자의 맑은 음성에 홀린 듯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 땅 위에 세레스티아 왕조가 들어선 이래 금빛 보관을 쓴 그 어떤 국왕도 작위는커녕 기사조차 달지 못한 일반 사병들을 대상으로 자랑스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칭호를 붙여준 바 없었다. 왕국의 영광을 위해 출병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본인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선 적병을 상대로임에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병사들은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서서히 내려앉는 저녁 햇살 아래, 태자의 화사한 금발이 불붙은 듯 붉은 기운을 드리웠다.
- 작가의말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해서 오늘은 좀 짧습니다. 주말동안 컨디션 관리해서 월요일에는 조금 더 길게 돌아오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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