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창작연

왕도와 패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창작연
작품등록일 :
2019.04.01 11:16
최근연재일 :
2020.02.09 22:13
연재수 :
271 회
조회수 :
116,307
추천수 :
2,679
글자수 :
1,047,762

작성
19.11.26 06:00
조회
121
추천
5
글자
7쪽

[외전] 세월 12

DUMMY

세레즈력 370년, 여름.



햇살조차 눈이 부실 만큼 화창한 유월의 오후, 로제스티나가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 국왕과 정비(올해 초봄, 내가 권유했던 그대로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정비 자리에 올랐다. 그나마 신료들과 왕실 웃어른들의 태반 이상을 적으로 돌리면서 그리 할 것을 고집한 폐하의 강경한 의지 덕분이었지만.) 사이에서 태어난, 왕실의 적장자를.


제국 최고의 부와 명예를 양 손에 거머쥐고 태어난 그 아기는, 국왕 폐하를 닮아 하늘의 태양이 무색하리만큼 찬연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예쁜 아이라고들 했다. 폐하께서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탄생한 그 아이의 존재가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그 아이에게 차후 이 나라의 왕위를 계승시키리라고 천명하였으니까. 하여 폐하의 첫 아이, 아체프렌 듀피겔드 벤 세레스티아는 이름을 얻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비공식적으로나마 이 거대한 제국의 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세레즈 왕실의 정통한 후계가 태어나 도성 전체가 온통 떠들썩하게 들떠 있는 가운데, 오로지 나 혼자만이 무채색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세레즈력 370년 겨울.





나는 가만히 바라본다. 흐릿한 불빛 아래 흡사 안개처럼 하얗게 빛나는 이브닝 가운을 입고 있는 여인을.


도도하게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는 그 얼굴의 생김 생김을 하나 하나 주의깊게 살펴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 도톰한 아랫입술 덕분에 조금은 육감적인 느낌이 든다. 자그마하지만 균형 잡힌 얼굴의 중심선 역할을 하고 있는 콧날은 어디까지나 날렵하고 단정한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다가 나는 당연한 순서를 밟아가듯 콧날을 따라 올라가 그 위에 위치해 있는 두 눈을 쳐다본다. 흔들림 없이 나를 직시하고 있는 그 초록빛 눈동자를. 화창한 여름날 의 오후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숲 속의 호수처럼, 혹은 잘 다듬어진 에메랄드처럼 깊고도 부드러운 빛을 품고 있는 그 아름다운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마치 초록색의 섬광과도 같은 그 두 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정열적인 눈동자와는 대비되어, 한층 더 차갑게 굳은 듯한 그 얼굴을 마주보다가 어쩐지 나는 조금 거북스러운 기분이 되어 시선을 조금 더 들어올린다. 작지만 섬세한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 아래로 구불구불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가만히 두고 보기가 안타까울 만큼 매혹적이다. 화사하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위태로움을 가진 금발이나, 타오르는 불길처럼 선연한 붉은 머리카락, 그렇다고 밤하늘처럼 까맣고 윤기나는 흑발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인의 머리카락은 역설적일 만큼 화려하다. 파아란 정맥이 그대로 내다보일 만큼 섬세한 목덜미를 지나, 달빛처럼 우아하면서도 은은한 광택을 품고 있는 새틴 드레스 위로 잔물결이 퍼져나가듯 흘러내린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절로 손을 엮고 입맞춤을 하고 싶을 만큼 육감적이지 않는가.


넘칠 것 같은 정열을 품고 있는 그 초록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머리 끝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여인의 모습 전반을 훑어내리듯 살피며 나는 그리 결론을 내린다.

생명의 없는 돌조각처럼 무표정한 이 얼굴에 조금은 나른한 미소를 담아내고, 어쩐지 조금 은 서글픈 듯한 빛을 드리우고 있는 이 눈동자에 색정과 욕망을 드리운다면. 마주 보이는 이 얼굴은, 몇 세대 전 이름 뿐인 한미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국왕 폐하를 위시로 상류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과 끊임없는 염문을 일으키며 이십여년 가까이 사교계에 군림했었던 마리로사 슐리히테롤을 연상시킬 만큼 요염하고 육감적이며 ···천박하다고.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다. 창녀와 같은 건, 내가 아니다. 그래, 그 여자야. 폐하를 홀리고, 이 나라를 어지럽혔던 그 여자. 비천한 여자는 로제스티나인 거야. 나는 내 몸을 무기로 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나는 아니야···!'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악의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나는 어쩐지 더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내 목덜미와 가슴 언저리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던 시녀들의 손을 조금은 거칠다 싶게 뿌리쳤다.


"비 전하···!"


'하지만, 내가 그 여자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날 원치 않는 남자와의 형식적인 동침을 강요받으며, 밤화장을 하고 있는 내가 과연 깨끗하고 고고하다 할 수 있을까. 자아를 잃고, 명예를 잃고, 자존심마저 잃고. 급기야는 망가진 인형처럼 주위에서 휘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내가 그 여자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 하룻밤을 위해 속살이 내리비칠 만큼 얇고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창녀처럼 몸을 던져야 운명의 내가······!'


"이만하면 되었다. 물러 가거라. "


'그래도 너만은 고결하다고 주장할 참인가, 줄리에트?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처녀마냥, 이 하룻밤이 그 사람이 네 애정과 헌신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일 작정인가? 이리 처참한 상황 속에 내던져서도, 너 자신을 죽음보다 더 수치스럽게 만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노라는 가당찮은 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하오나 아직 향유를 다 바르지 아니하였는데······."


"물러들 가라는 말, 안 들리느냐?"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도 차마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시녀들을 향해 나는 언성을 조금 더 높였다.


"당장 나가!"


육중한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침대가 아니라, 흡사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제단처럼 보이는 푹신한 시트를 원망스러운 듯 응시하다가, 나는 비틀린 미소를 던지며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잘 듣거라. 줄리에트. 그 여자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또 아들을 낳았지만. 내 너를, 내 소중한 딸을 이대로 그늘 속에서 일생을 보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가 필요하단다, 줄리에트. 너의 피를 이은 이 나라의 왕위 계승자가.'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나의 뇌리에 아버지의 말이 스쳐갔다.


'적당한 때가 이르면··· 내 움직일 것이다, 줄리에트. 너는 그 하나만 새겨두거라. 내 너도, 너의 아이도 결코 그 여자의 뒷편에서 살게 좌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도와 패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빠르게 읽는 시놉시스 (1부-2부) 업데이트 19.05.12 832 0 -
공지 2부 왕위계승전쟁 인명록 19.05.08 496 0 -
공지 1부 펜데스칼 전쟁 인명사전 19.04.27 821 0 -
공지 주요인물 21인 TMI 인물소개(완성) 19.04.04 1,856 0 -
271 [외전] 청혼 그 이후 - 실연 下 20.02.09 141 4 9쪽
270 [외전] 청혼 그 이후 - 실연 上 20.02.07 131 4 7쪽
269 [외전] 청혼 이후 下 20.02.05 139 4 8쪽
268 [외전] 청혼 이후 上 - 미드프레드의 이야기 20.02.03 126 2 7쪽
267 [외전] 청혼 下 20.02.01 97 4 7쪽
266 [외전] 청혼 中 20.01.31 122 3 7쪽
265 [외전] 청혼 上 - 브라우웰&미드프레드 이야기 20.01.30 129 4 7쪽
264 39장 이삭줍기 7화 악우 20.01.29 142 5 8쪽
263 39장 이삭줍기 6화 베케이노의 기다림 20.01.28 126 5 8쪽
262 39장 이삭줍기 5화 자금의 출처 20.01.27 120 4 11쪽
261 39장 이삭줍기 4화 희소식 20.01.24 126 4 7쪽
260 39장 이삭줍기 3화 다시, 시작 20.01.23 131 3 8쪽
259 39장 이삭줍기 2화 태자가 던져놓은 포석 20.01.22 133 3 7쪽
258 39장 이삭줍기 1화 귀환 20.01.21 126 4 7쪽
257 38장 적의 적 7화 적의 적을 사용하는 법 下 20.01.20 130 5 8쪽
256 38장 적의 적 6화 적의 적을 사용하는 법 上 20.01.18 135 5 8쪽
255 38장 적의 적 5화 전쟁이란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20.01.17 135 7 8쪽
254 38장 적의 적 4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2 20.01.16 142 6 10쪽
253 38장 적의 적 3화 아직은 버릴 수 없는 패 +2 20.01.15 130 6 8쪽
252 38장 적의 적 2화 공짜가 아닌 성의 20.01.14 119 7 7쪽
251 38장 적의 적 1화 늦은 선물 20.01.13 130 5 8쪽
250 37장 붉은 바람 6화 옥좌란 20.01.11 137 6 9쪽
249 37장 붉은 바람 5화 대관식 직전, 흉몽 20.01.10 114 5 8쪽
248 37장 붉은 바람 4화 뿌리는 자, 거두는 자(회차변동) 20.01.09 130 5 8쪽
247 37장 붉은 바람 3화 왕자의 관용 20.01.08 149 7 10쪽
246 37장 붉은 바람 2화 잠 못 이루는 밤 20.01.07 183 8 8쪽
245 <제3부 다이레비드 공방전> 37장 붉은 바람 1화 기만책 20.01.06 136 6 8쪽
244 [외전] 세월 28 (끝) 20.01.04 130 5 10쪽
243 [외전] 세월 27 20.01.03 103 4 9쪽
242 [외전] 세월 26 20.01.02 104 5 9쪽
241 [외전] 세월 25 19.12.28 97 3 8쪽
240 [외전] 세월 24 19.12.20 101 4 8쪽
239 [외전] 세월 23 19.12.18 101 5 7쪽
238 [외전] 세월 22 19.12.17 105 4 9쪽
237 [외전] 세월 21 19.12.13 114 5 7쪽
236 [외전] 세월 20 19.12.11 104 5 7쪽
235 [외전] 세월 19 19.12.09 112 6 9쪽
234 [외전] 세월 18 19.12.06 112 6 8쪽
233 [외전] 세월 17 19.12.03 129 5 7쪽
232 [외전] 세월 16 19.11.30 114 5 7쪽
231 [외전] 세월 15 19.11.29 125 4 7쪽
230 [외전] 세월 14 19.11.28 118 4 8쪽
229 [외전] 세월 13 +2 19.11.27 116 4 9쪽
» [외전] 세월 12 19.11.26 122 5 7쪽
227 [외전] 세월 11 19.11.25 124 5 11쪽
226 [외전] 세월 10 19.11.23 128 5 9쪽
225 [외전] 세월 9 19.11.22 115 5 7쪽
224 [외전] 세월 8 19.11.21 115 5 7쪽
223 [외전] 세월 7 19.11.20 125 4 7쪽
222 [외전] 세월 6 19.11.19 127 5 9쪽
221 [외전] 세월 5 19.11.18 140 5 12쪽
220 [외전] 세월 4 19.11.16 156 5 7쪽
219 [외전] 세월 3 19.11.15 152 5 12쪽
218 [외전] 세월 2 19.11.14 170 5 11쪽
217 [외전] 세월 1 -세느비엔느 여왕의 외전 19.11.13 198 6 15쪽
216 36장 선전포고 6화 무혈입성(2부 完) +2 19.11.12 235 7 11쪽
215 36장 선전포고 5화 백성들의 왕 19.11.11 179 8 9쪽
214 36장 선전포고 4화 태자의 대의 19.11.09 194 9 7쪽
213 36장 선전포고 3화 로크라테군의 대응 19.11.08 174 7 7쪽
212 36장 선전포고 2화 전서 19.11.07 194 7 9쪽
211 36장 선전포고 1화 항복 +2 19.11.06 185 8 8쪽
210 35장 붉은 숲 전투 6화 투항 권유 19.11.05 194 7 7쪽
209 35장 붉은 숲 전투 5화 공세 19.11.04 186 7 8쪽
208 35장 붉은 숲 전투 4화 매복 19.11.02 197 6 9쪽
207 35장 붉은 숲 전투 3화 유인 19.11.01 189 6 7쪽
206 35장 붉은 숲 전투 2장 작전과 신뢰 +2 19.10.30 208 8 8쪽
205 35장 붉은 숲 전투 1화 괴물용병 19.10.28 164 6 9쪽
204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6화 첸트로빌 공성군 19.10.25 197 5 10쪽
203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5화 전투 준비 19.10.23 312 5 8쪽
202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4화 요란한 출병 19.10.21 202 7 7쪽
201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3화 관점의 차이 19.10.18 181 7 7쪽
200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2화 백의종군 +4 19.10.16 205 7 9쪽
199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1화 아크레이드의 입장 19.10.14 183 7 9쪽
198 33장 흑운의 그림자 6화 급변하는 정세 19.10.11 188 8 8쪽
197 33장 흑운의 그림자 5화 미드프레드와 메이샤드 19.10.09 197 6 9쪽
196 33장 흑운의 그림자 4화 유훈 19.10.07 208 6 9쪽
195 33장 흑운의 그림자 3화 음독 19.10.04 203 7 8쪽
194 33장 흑운의 그림자 2화 번뇌 어린 선택 19.10.02 215 6 7쪽
193 33장 흑운의 그림자 1화 짬짜미 19.10.01 203 8 9쪽
192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8화 줄다리기 하 19.09.30 189 7 9쪽
191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7화 줄다리기 上 19.09.30 185 8 7쪽
190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6화 휘장 너머의 소녀 19.09.28 224 8 9쪽
189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5화 은밀한 초대 19.09.27 219 8 8쪽
188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4화 아비와 딸 19.09.26 207 8 12쪽
187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3화 커런스의 입장 19.09.25 190 8 9쪽
186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2화 공주의 선언 19.09.24 204 8 9쪽
185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1화 공주의 결단 19.09.23 246 8 7쪽
184 31장 풍운재자 6화 승부수 19.09.21 227 7 9쪽
183 31장 풍운재자 5화 태자의 특사 +2 19.09.20 235 8 7쪽
182 31장 풍운재자 4화 싸움준비 19.09.19 288 8 7쪽
181 31장 풍운재자 3화 해적이 된 초원의 아이 +2 19.09.18 246 8 11쪽
180 31장 풍운재자 2화 이이제이의 계책 +4 19.09.17 247 12 8쪽
179 31장 풍운재자 1화 혁자생존 +2 19.09.16 282 10 9쪽
178 30장 흐르는 별 7화 거절할 수 없는 청 +2 19.09.12 254 9 13쪽
177 30장 흐르는 별 6화 원유회 19.09.11 248 11 8쪽
176 30장 흐르는 별 5화 이면의 계책 +2 19.09.10 230 9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