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풍운재자 5화 태자의 특사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5. 아체프렌의 특사
데니아크는 끝을 모르게 길게 뻗어 내린 붉은 융단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 자신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왕좌를 잠시 바라보았다.
스치듯이 시야 속으로 들어온 선홍색 융단은 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 밟아 서기가 민망해질 정도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또렷한 빛을 드리운 융단이 드넓은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좌우로는 주눅이 들만큼 많은 수의 커런스의 조정 대신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늘어서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데니아크는 짧게 숨을 들이켠 다음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수십여 개의 눈빛을 의식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융단 위로 한 걸음 내디뎠다.
비록 데니아크 자신이 아체프렌의 특사(特使)라는 점을 내세웠다 하더라도 아직 국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일개 왕자 한 명이 보내온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웅장하고 공식적인 접대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뮤켄에게 출발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만 해도 세레즈 내부에서만 분분하던 아체프렌 왕자에 대한 소문이 어느 사이엔가 이곳 커런스로까지 퍼져나간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자의 사절을 이렇듯 정중하게 맞이할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달리 말해 이들이 현재 세레즈가 내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체프렌의 사절을 흡사 태자 자신이 방문해 온 것에 준하여 영접하는 것은, 세레즈가 처해있는 그 미묘한 정치적인 알력과 그것이 차후 국제적인 관계에 미칠 영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세레즈의 분열이 주는 파급 효과는 물론 지금 당장은 명시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커런스 국내외에 작용하고 있는 세레즈의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만 감안하더라도, 그것이 작금의 커런스 내부 상황 못지않게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다. 아체프렌과 안타미젤, 이 두 사람 중 어느 누구에게도 명시적이라 할 만큼 세레즈의 권력이 또렷하게 집중되지 아니한 현시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인식은, 그 누구보다도 커런스의 국왕 유스티안 Ⅶ세 본인이 잘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왕의 직계 자식이 그리 많지 않은 세레즈나 코네세타와는 달리, 그는 권력에 대한 정확한 균형감각 하나만으로 수십여 명의 형제자매를 물리치고 선대왕의 삼남이라는 위치에서 국왕의 위치까지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신을 두고 팔백여 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커런스의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개성과 생기가 없는 인물이라고 조롱 섞인 비난을 하는 축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커런스에 온 것을 환영하오.”
데니아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커런스의 국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운을 떼어냈다.
“분에 넘치는 환대에 진심으로 감읍하나이다. 마유엘 레 데니아크, 아국(我國)의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커런스의 국왕 폐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데니아크의 대답에 유스티안 Ⅶ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어왔다.
“그대는 아체프렌 왕자의 칙사라고 전해 들었소만.”
데니아크는 여유 있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꾸했다.
“예, 폐하. 소인 역시 주군이신 아체프렌 듀피겔드 벤 세레즈, 세레즈의 35대 국왕 폐하의 어명을 받자와 커런스의 국왕 폐하를 뵈러 왔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나이다.”
준비해 왔던 대답을 마치자, 일순 홀 안이 작게 술렁거렸다. 당황스러울 테지. 다소 느긋한 생각을 하며 데니아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록 34대 국왕 카르세오 Ⅴ세가 서거한 이래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레즈에서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지만, 암묵적으로나마 세느비엔느를 세레즈 35대 국왕으로 승인하여 세레즈와 커런스 양국 간에 국교를 지속시켜 왔으니, 저들이 아체프렌을 국왕으로 지칭하는 자신의 발언에 당혹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술렁거림은 국왕의 낮은 헛기침 소리로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래, 하여간 아체프렌 왕자가 그대를 여기까지 파견한 연유가 무엇인가?”
애써 데니아크의 발언을 못 들은 척하며 유스티안 Ⅶ세가 말을 꺼냈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어쩔 수 없는 동요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데니아크는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 지금 당장 세느비엔느의 손을 놓기는 어려울 테지. 아직으로서는 양측의 전력 탐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니 말이야. ’
그리 생각하며 데니아크는 얄미울 정도로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씀을 올리기에 앞서 아국의 국왕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교지를 읽겠습니다.”
처음에야 실수인가 했었으나, 벌써 이것으로 세 번이나 아체프렌을 세레즈로 국왕이라 지칭했다.
이제 더 이상 실수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신 접대용으로 쓰이는 아마다스의 홀 안에 모여 있던 커런스의 대신들은 아직까지도 처음 느낀 그 당혹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세느비엔느 Ⅰ세가 현재 세레즈의 집권자라는 것은, 지금 세레즈의 도성인 다이레비드를 그녀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객관적인 정황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을 뿐더러, 설령 요 근래 들어 조심스럽게 퍼지기 시작한 그 소문 그대로 아체프렌이 살아있어 세레즈 어딘가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손 쳐도, 아직은 기존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는커녕 스스로의 귀환에 대한 공식적인 성명조차 발표하지 않은 실정이다.
대관절 생존 여부조차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국왕이 세상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데니아크 역시 홀에 흐르고 있는 커런스 대신들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쉽게 승부를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우아하기 그지없는 손놀림으로 자신이 가져온 기나긴 교지를 펼쳐 들었다.
그러자 홀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커런스 궁내부 소속의 의전관(儀典官) 둘이 빠르게 다가와 교지를 읽기 쉽도록 받쳐 들었다.
“지고하시고 위대하시며 준엄하시고 현명하시며 지극히 존귀하신 세레즈 35대 국왕 폐하의 찬연(燦然)한 위명을 받자와 본 교지를 작성하는 바이다.”
데니아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뒷짐을 진 채 낭랑한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중간에 한장면 누락되었는데 컨디션 난조로 완성을 못시키는 바람에 주중에 써서 31장 4화 밑에 첨부로 올리거나, 아니면 연참대전 후 회차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꾸준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