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16
형을 해치고, 제 아버지의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올라간 국왕의 자리에서, 내 아들이 행복해 하리라고 전 생각할 수 없어요. 아시나요, 아버지? 내 아들의 이름 앞에, 제 혈육을 해하면서 국왕이 된 자, 라는 수치스런 별명 따윈 붙여주고 싶지 않은 이 심정을, 어미로서의 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래요. 어쩌면 제가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르지요.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그 사람을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바보같은 여인이라 그런 지도 몰라요.
하지만 들어주세요. 제 바람은 그저, 내 아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랍니다. 그저 그 뿐이에요. 아시겠어요?
"내가 단지 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너를 희생시켰노라 생각하느냐? 내 딸을 왕비로 만들어 내 자신이 국왕의 장인, 왕실 외척이라는 권세를 탐하여 너를 입궁시키고 네게 아들을 낳으라 강요했는 줄 아느냐. "
한참의 침묵 끝에 터져나온 아버지의 대꾸가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아버지를 올려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심경으로 입궁하였는지, 내 모를 것이라 생각했더냐. "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속내를 드러냈다 생각한 적 없었는데.
"만일, 네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폐하의 뜻이 아무리 강경하다고 하여도, 내 결정이 세레즈와 왕실에 대한 불충이 된다 하여도, 아니 세레즈 전역을 적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널 입궁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단 한 번도 당신께 내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는데.
"............그래. 폐하를 향한 네 마음이 아플 정도로 절실히 전해져 와서, 내 그간 부러 모른 척을 하고 있었느니라. "
아버지께서는 다 아시고 있군요.
야속한 내 사랑이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돌아봐주지 아니하였던 내 마음을
아버지께서는 말 한 마디 없이도, 이미 아시고 있었어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한 너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하게 생각해 온 너를. 행여나 네 마음 속에 작은 티끌 하나 생길까 두려워하며 애지중지 키워온 내 하나 뿐인 딸을 돌아봐주지 않는 국왕의 비로 보내면서, 내 어찌 내 자신의 향락과 권세를 생각할 수가 있겠느냐. 바로 내 앞에서 네가 눈물짓고 있는데. "
제가 제 감정을 속이며 울고 있을 때, 아버지 역시도 눈물 짓고 있었노라 하시는 것인가요. 그런 것인가요?
"많이 생각하였다. 아니, 단 한 시간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내 어찌하는 것이 네게 좋을까. 내 어떻게 해야 네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폐하의 행동에 분노하고, 외롭고 고달픈 왕궁을 선택한 너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나는 그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느니라. 행여나 내 무책임한 울분이 너를 해할까 두려웠기에. "
분명히 눈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젖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에트. 네 지금 내게, 그 여자가 낳은 아이를, 네 아들 안타미젤과 똑같이 생각하노라 하였느냐? 그가 왕실의 적장자라고, 폐하의 장자이며 안타미젤의 형이라고, 그러니 그쪽이 우선이라고 말했느냐? 그게 네 소망이고 바람이라고? "
언성을 높이긴 커녕, 석고상 같은 얼굴은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 일인지 그의 목소리가 울음소리 마냥 통렬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애써 억누르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 담담함이, 도리어 내 가슴을 먹먹하게 짓눌러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서글프게 가라앉은 아버지의 눈빛 앞에서 단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네 후궁에 머물고 있어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는 법이라 하였지. ......그렇다면 네가 폐하를 위하여 나를 설득하고자 하는 이 순간, 도성 한 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역시도 안다 하려느냐? "
지금 내 귓가에 다가오는 말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수도에는 새로운 파동이 일고 있다. 일찌기 해군통수부를 위시로 한 군부 세력의 일부가 이반되었고, 빌레니스 대공을 비롯한 중북부의 영주들과 왕실 처족의 일부, 그리고 신전 세력의 일부가 분열되어 너와 안타미젤, 그리고 폰다 가를 주시하고 있어. 내 아직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무슨 뜻이지요, 그것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것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네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 역시도. "
지금......
리온이, 국왕 폐하가 나와 안타미젤을 의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인가.
내가 내 아들을 왕태자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이 어린 애가 제 형을 해치고 차기 국왕위를 노리고 있노라고,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내 아들이기 이전에, 당신의 피를 이었기에 내겐 단 한 시도 사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던 안타미젤을. 당신의 눈빛을 닮았기에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리만큼 귀중한 보배였던 이 어린 아이를.
당신은 그저 제 형의 자리와 권리를 위협하는 방해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인가.
아버지의 말이 던진 최초의 충격이 절망보다 더한 슬픔으로 변하여 내 전신을 내리 누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래서 오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이 아이의 탄생을 기뻐해주지 않고, 축하해주지 않고, 냉혹하게 외면했던 거였어?
"로제스티나 레 부르셀, 보통이 아닌 계집이다. 하긴 외양만으로 이 나라의 왕비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터인데, 내 너무 가볍게 보았던 게야. 그것이 내 실수였느니라. 하지만, "
머릿속이 하얗게 퇴색되어 간다. 뒤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더 이상 그 여자가 네 자리에 올라 앉아 안타미젤과 폰다 가를 위협하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
꺼끌꺼끌하니 내 귓가를 맴돌고 있는 아버지의 말이 함의하고 있는 바를 머릿속으로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나는 그저 멍하니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는 그런 내 반응을 오인한 모양인지 내 손을 가만히 붙잡은 채, 염려 말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너는 그저 지켜 보고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내 다 알아서 할 터이니. "
- 작가의말
몸살이 심해서 주말에 좀 쉬고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감기가 좀처럼 안 낫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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