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풍운재자 1화 혁자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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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풍운재자風雲才子
1. 혁자생존
지나시안과 뮤켄은 만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 둘이서만 조용히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상류 계급에 속하게 되면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 어린 사이에 정략혼을 하게 되는 일이 많으니만큼, 연회에 참석했다가 뒤늦게 불꽃 같은 열정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연애가 치정사건으로 번져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는 한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세레즈 사교계의 관습이었다. 그 점은 사랑과 미의 여신인 프레노시르의 보우 아래 있는 베케이노에서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콘웰 성에도 격정적인 연인을 위한 공간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애당초 마련된 용도가 용도이니만큼 과히 넓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앉아서 쉴 수 있는 긴 의자와 푹신한 쿠션이 있고, 무엇보다 주위의 시선과 소음이 차단된 공간이다. 그러니 지나시안 역시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으리라.
뮤켄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돌아서자, 아니나 다를까 지나시안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연회장에서 범한 무례에 대한 진정 어린 사죄의 표시였다.
사랑한다던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란 점 정도는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던 터라 뮤켄은 전혀 개의치 않은 태도로 본론부터 꺼냈다.
“공녀께서 그토록 원하던 사석이오. 그처럼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내게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던 그녀가 짧게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스바 영지와 저를 태자 전하께 바칠 요량으로 찾아왔습니다.”
뮤켄은 잠시 침묵했다. 태자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내란이 반발할 경우 확장될 전선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입안할 때에도 헤스바 영지의 포섭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을 만큼 오센부르흐 후작가는 확고한 여왕파였다. 그런데 이제 와 이런 방식의 접근이라니.
“그 제안은 오센부르흐 후작님과 전혀 상의된 바가 없어 보입니다만, 혹여 제가 착각을 한 것입니까.”
“아니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은 소녀만의 생각이지요.”
뮤켄은 할 말을 잃었다. 참으로 상황이 고약하게 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나 제가 만약 아버님을 설득하여 저를 제물 삼아 전하께 정식으로 혼담을 넣고 영지의 장래를 도모하고자 대화를 청하였다면, 과연 전하께서는 지금과 같이 제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셨을까요?”
도전적이기까지 한 언사였지만, 틀린 구석은 없었다. 혼담이 들어왔다면 필시 저급한 미인계라 생각하고 일고의 여지의 없이 물리쳤으리라.
함정임을 알면서도 오센부르흐 후작의 덫에 걸려들 만큼 작금의 상황에서 헤스바 영지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뮤켄 자신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공녀께서 취하신 방식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접근 방법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절대로 후한 평을 해드릴 수가 없군요.”
제국 최고의 명문가 출신인 데다 최연소 대공이기까지 한 뮤켄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명문세족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고, 그 가운데서 그가 만일 반드시 왕실의 방계 혈족과 손을 잡아야 한다면 헤스바보다는 마르소비야 대공비의 테넷 영지를 압박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는 이스글론 영지나, 군사력이 쓸만한 길라시안 영지가 더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그래서 뮤켄은 상류 사회에 발이 넓은 동복형 피엘 공을 통하여 진작 길라시안의 그린멜스 후작가에 혼담을 넣어둔 상태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보위 계승에서 멀어진 왕실 방계의 생존 방식은, 때로는 일반 백성들보다 저열할 수밖에 없거든요.”
세레즈 동북부에 치우친 영지의 위치로 보나, 보유한 상비군의 수로 보나, 세레즈 조정에서 후작 가문이 점하는 정치적인 위상으로 보나 헤스바는 아체프렌과 자신에게 딱 계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이 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만, 더 나은 대안이 있는 마당에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잡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공녀의 처지를 십분 이해한다고 말씀드리며 여유를 부리기에는 제가 처한 입장도 꽤 팍팍해서 유감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염문을 터트리는 방식으로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둘만의 자리를 만든 지나시안의 접근 방식은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교환조건이 없는 헤스바와 그녀에게는 주효했지만, 가진 것이 많기에 잃을 것 또한 무수한 콜드베폰과 뮤켄에게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대공 전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 정도 자구책도 없이 전후 급물살을 탈 숙청의 칼날 아래 어떻게 영지와 가문을 지키겠나이까.”
“부족한 이 몸을 그토록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저는 특정 가문의 안위를 호언장담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그 말씀은 겸양이 지나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겸양이 아니고 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자 귓가의 로즈핑크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부딪혔다. 지나시안이 보기에 보위를 계승하는 자가 누구이든 뮤켄 이상으로 차세대 세레즈 조정을 이끌 만한 인물로 적격인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친척인 아체프렌도, 그의 친우이자 태자의 신뢰를 한몸에 사고 있는 미드프레드도 아닌 뮤켄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여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설령 태자 전하가 패한다 하여도 여왕은 대공 전하만은 버릴 수 없으세요. 안타미젤 전하께서는 온유하시나 진정성이 없는 자에게는 곁을 허락하시지 않으시죠. 그런 까닭에 그분께서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대하시는 이는 거의 없는데, 대공 전하가 몇 안 되는 그런 상대라는 점을 저는 잘 알거든요. 그리고 여왕 폐하께서는 아드님이신 안타미젤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그것이 당신의 욕망에 크게 배치되지 않는 한 거부하시는 법이 없으시죠. 그러니 대공 전하께서는 전후에도 지금 그 위치 그대로 조정에 출사하시게 되겠죠. 안타미젤 전하의 보좌이자, 태자 전하와 함께 숙청될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를 대체할 전쟁영웅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자는 현재로서 대공 전하 외에 달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이 싸움에서 지실 리가 없고, 그 이후의 정황을 살펴본다면······.”
“공녀께서는 이대로 세레즈에 내란이 발발한다면 태자 전하께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까.”
“네. 제가 대공 전하와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 그리 재확인을 하실 만큼 기이한 일인가요?”
“저는 승산 때문이 아니라 대의가 태자 전하께 있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만.”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얼굴을 하고서 잘도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구나 싶어 지나시안은 미간은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이토록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대의를 부르짖는 시늉을 할 수 있는 뮤켄이기에 더더욱 그를 거래 상대자로 고른 자신의 뛰어난 안목에 찬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정치란 본디 제 속내를 세련된 가면으로 숨긴 채 상대의 셈속을 몇 수 앞서 헤아리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따로 내줄 것이 없는 만큼, 자신은 뱃속까지 열어 보일 정도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공 전하와 달리 속물인 저는 승산을 먼저 따졌습니다. 일견 여왕과 안타미젤 전하 쪽이 우세해 보일 것이나, 그쪽이 머릿수만 많고 전력이 형편없음은 지난 전쟁에서 이미 충분히 증빙되었다고 생각해요.”
“지난 전쟁과 이번 내란은 진행 양상이 아주 많이 다를 겁니다. 다이레비드는 천혜의 요새이고, 이미 여왕 폐하는 그곳을 점유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번과 같은 선상에 놓고 짐작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여왕 폐하 곁에 전쟁을 지휘할 수 있을 만큼 장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명확한 현실이에요. 태자 전하께 전쟁 자금이 절실한 것만큼이나요.”
“똑같이 약점을 지니고 있다면 공성전을 하셔야 할 태자 전하께서 더 불리하신 게 맞습니다. 농성은 전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 작가의말
조회수가 제가 쓴 글자수 만큼 늘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말까지 소원성취하면 정말 행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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