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청혼 그 이후 - 실연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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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래서요?”
순종적으로 내리깔지 않은 미드프레드의 눈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서글프게 빛나지도, 아까 무도회장에서 보았을 때처럼 우수에 차 있지도 않았다.
“제게 무얼 바라십니까? 혹여 제가 변명이라도 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똑바로 직시해 오는 그의 황옥빛 눈동자는 오히려 도전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단호한 빛을 품고 있었다.
“저는 변명 같은 건 할 생각도 없고, 같은 이유에서 새삼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미드프레드는 냉담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오늘 일을 묵과하실 수 없다면, 제 무례에 대하여 저의 주인님께 고하신 연후에 공식적으로 처벌을 청하십시오. 주인님께서 제게 내리시는 처분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의 없이 받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닙니다. 제가 복종을 결심하고 제 생사여탈권을 내어드린 분은 공자님이 아니니까요.”
너는 아니라고 내치는 말을 이 녀석처럼 오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왕족, 그것도 이 나라의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자신을 기망하였으니, 연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불경죄로 처단당해도 할 말이 없을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주춤하기는커녕 차라리 고압적이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기만 한 미드프레드의 태도 앞에서 오히려 할 말을 잃은 쪽은 브라우웰이었다.
처음부터 괘씸하여 혼내주고자 하는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까 확신을 했을 때 곧장 칭죄했을 터였다. 하지만 저는 속은 것도 모자라, 아체프렌의 말만 따라 미드프레드 앞에서 아무 변명 없이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제 마음을 몰라주는 야속함 탓일까. 감정이 앞섰던 마음에 이성이 깃들며 머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서 벌을 청한다고 정말 전하께서 네게 어떤 식으로든 처분을 내릴 거라 여기는 거냐?”
미드프레드를 일러 제 사람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며 자기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사과하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던 아체프렌이다. 설령 이 사태에 원인이 미드프레드 쪽에 있다 하여도 아체프렌이 그리 애지중지하는 미드프레드에게 벌을 내릴 리가 없었다.
하물며 미드프레드로 하여금 정체를 밝히지 못하게 막은 이도,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 법한 순간마다 스스로 나서 상황에 그럴 법한 설명을 덧붙여 브라우웰의 오해를 부추긴 이가 다름 아닌 아체프렌이다. 사촌의 결벽한 성정으로 미루어, 소문이 자자한 총애 탓이 아닐지라도, 본인이 깊이 개입한 마당에 사태 수습을 힘없는 시종에게 떠넘길 리가 만무했다. 저도 아는 일을 늘 그의 곁에서 항시 그를 겪어온 미드프레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아니할 것을 알기에 이리 당돌하게 나오는 거냐?”
브라우웰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미드프레드를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무도회장 건에 한해서는 내가 멋대로 오해한 탓도 있으니 네 생각대로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내게 보이는 무례한 태도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미드프레드. 네가 네 위치에 어울리지 아니한 언행을 한 이상, 나 또한 그를 바로잡기 위하여 내 혈통과 신분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단 말이다. 네가 네 주인의 위광을 빌려 자리를 모면하고자 했듯이.”
그러나 미드프레드는 커런스의 공녀인 줄 알고 함께 춤을 추었을 때도, 그리고 아까 아체프렌 앞에서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을 때도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화장을 지우고 화려한 공단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나타난 지금도 절로 눈길이 갔다. 같은 성별을 지닌 또래의 사내자식을 보고 귀엽다고 느낀 스스로의 감정이 신기하여 그를 다시 찾았다.
다시 찾아서 눈앞에서 보고 자신의 감정이 혼란인지 착각인지 분간해 내고 싶었던 것이다. 혼란에 사로잡힌 브라우웰은 정말 순진하게도 그냥 이렇게 한 번만 더 마주 보고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디, 네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나 또한 네가 그런 것처럼 비겁하게 굴어 봐?”
차갑게 내쏜 말에도 미드프레드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협박을 한다 하여 바로 태도를 바꿔 비굴하게 빌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미드프레드의 꼿꼿한 태도는 여전했다. 들킬까 조바심을 치며 말 한마디마다 동요했던 아까의 모습이 마치 거짓이었던 양, 도자기 인형처럼 단아한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조차 스치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냐? 아까처럼 영악한 혓바닥을 겁 없이 놀려 보시지?”
“상황은 이미 달라졌고, 이제 그럴 연유가 없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어?”
미드프레드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필시 웃고 있는데도 찬 서리가 내릴 것 같은 냉랭함이 얼굴 위에 깃들었다.
“공자님께서 지금 일이 무도회장에서의 일과 분리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무도회장에는 제 주인님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기에 저를 지키시고자 혹여 저의 주인님께서 공자님께 사과하시는 일이 생길까 저어했기에 가능하다면 덮어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뭐가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끝내 거짓을 고하려 했겠습니까. 하지만 다실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공자님께서는 무도회장 건을 덮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셨으니, 이제 남은 건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공자님께 범한 무도한 언행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문책을 정하시고 제게 내리세요. 전 그냥 그에 따르기만 하면 그만 아닙니까.”
“내가 주는 벌 따윈 안 두렵다는 거냐?”
“어차피 가문도 박살 났고, 그 와중에 형옥으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다 겪고 나와 이미 수년 전에 죽었던 것이나 다름없는 몸입니다. 이제와 제가 무슨 형벌인들 무섭겠습니까? 노역이든, 체형이든, 뜻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제게 거부권 따위 없고, 고작 그를 두려워하여 애원할 마음도 없지만, 제 몇 마디 말로 자비를 베푸실 요량이셨다면 애당초 처벌 운운하시지도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브라우웰은, 미드프레드가 단순히 호기를 부리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눈앞으로 닥쳐올 고통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굴종을 하기보다는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고집스럽도록 꼿꼿한 녀석이라는 것도.
속이 상하고 서운해져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위협하고 말았지만, 그를 실행에 옮기고 나면 영원히 미드프레드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점 역시도 간파해 낼 수 있었다.
못된 녀석. 입만 열면 거절만 쏟아내는 괘씸한 녀석인데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브라우웰은 싸울 의지를 꺾어버리는 신기한 존재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싶은 것처럼 새삼스레 미드프레드를 뜯어보았다.
새까만 머릿결과 대비되어 눈으로 빚은 것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깨끗한 이마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 빳빳하게 솟아오른 속눈썹 아래 감추어져 있는 생명력 있는 황옥빛 눈동자. 그린 듯한 콧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온 시선이 살며시 벌어진 입술 위에 닿는 순간, 브라우웰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뒤는 의식할 새도 이어졌다.
“이것으로 빚은 없는 겁니다.”
뭐, 빚?
미드프레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소매로 입가를 쓱 문질렀다. 브라우웰을 향한 미드프레드의 마노빛 눈동자는 자칫 공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나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뵙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추후 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 제게 벌을 내리실 일이 생기거든 그때에는 부디 채찍으로 치는 쪽을 택해주시기를 삼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랜 채무를 청산하고 가뿐해진 사람처럼 주저없이 돌아선 미드프레드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진 책을 주워든 후, 더없이 싸늘한 거절의 말을 흘린 후 브라우웰만을 남겨둔 채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실연 끝
- 작가의말
외전이 끝났으니 좀 쉬었다가 오겠습니다. 원래 눈에 있는 결석이 있었는데 최근 몇달간 너무 과로로 결석이 심해져서 눈이 너무 아프네요. 글을 좀 쉬고 정양하다가 오겠습니다. 컴퓨터 화면 보는 게 너무 괴롭네요.
청혼 이후 하편을 첨가 수정하였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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