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닉슨 쇼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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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57. 닉슨 쇼크 3
1970년 지금 우리의 독립 반도체 주력 상품은 74시리즈 TTL 논리회로와 1Kb 디램이다. CPU를 만들기는 해도 이쪽은 아직 주력 상품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CPU가 반도체 세계의 주력이 되는 이유는 PC의 등장 덕분인데 이 PC를 만드는 데 아직 문제가 많다. PC를 아직 내놓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바로 디램의 용량 부족이다.
우리가 만든 디램이 기억장치의 혁명으로 각광받고 있기는 한데 아직 용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전의 자기코어 메모리에 비하면 훨씬 진보하고 소형화된 물건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조금 생각해 보면 간단한데 현재 1Kb 디램 하나에 20달러다. 이건 비트 단위이고 1바이트가 8비트라는 걸 생각하면 1KB(B를 대문자로 쓰면 바이트, 소문자 b로 쓰면 비트다)
1K 바이트 만드는데 160달러, 그야말로 컴퓨터 가동의 최저선이라고 할 수 있는 4K 바이트를 만들려면 메모리에만 640달러가 들어간다. 그런데도 이걸로는 게임은 꿈도 꿀 수 없고 진공관 컴퓨터 초창기 시절의 몇 가지 계산 프로그램 정도밖에 못 돌린다.
우리가 직접 디램을 제조하는 회사니까 우리가 직접 만드는 원가로 따지면 저만큼 들지는 않긴 해도 그래도 어마어마한 가격의 물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단순 가격만 문제가 아닌 게 조금 쓸 만한 16K 바이트를 달려면 디램만 128개를 달아야 한다.
나는 일단 순리대로 4K 디램 개발을 지시했다. 일단 이거라도 나와야 어떻게 PC 시대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범용 대형 논리칩 나왔고, 시계용 칩 나왔고, 메모리 나왔고, CPU 나왔으니 중요한 반도체 다 나온 거 같지만 중요한 거 몇 개가 빠졌다. 그래픽 칩은 본격적인 게임기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지나야 하니까 제쳐두고 CCD와 사운드칩이 필요했다.
CCD(Charge-Coupled Device: 전하결합소자)는 길 아멜리오를 고용해서 그에게 개발 팀을 맡기고 있다. 원역사에서 애플 CEO로 있다가 스티브 잡스를 도로 불러오는 바람에 애플에서 쫓겨나는 그 사람 맞다.
이 사람 경영자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 CCD 개발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원역사에서 CCD는 최초로 벨 연구소에서 개발되는데 당연히 이 시대에는 우리 큐브에서 먼저 개발했다. 뭐 개발이라고 해도 진짜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고 원리를 개발했다는 정도다.
이게 본격적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팔아먹는 수준까지 이르려면 최소 80년까지는 가야 한다. 그래도 지금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개발해서 특허를 내둬야 뒤떨어지지 않고 큰소리치며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사운드 칩도 비슷하다. CCD가 빛을 디지털 신호로 바꾼다면 사운드 칩은 소리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기술이고 이 기술은 아무래도 CCD에 비해 간단한데 그래도 쓸모는 무지무지 많아서 컴퓨터나 게임기의 사운드 처리뿐만 아니라 신디사이저를 개발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건 이미 초보적인 신디사이저에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발되어서 실제로 막 사용이 시작되었다.
1970년에 등장한 우리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아직은 가격이 무지 비싸고 그에 비해 성능도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수요는 꽤 높은데 우리의 신디사이저에 이전에 들려주지 못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에서 나오는 특유의 그 야릇한 전자음만이 아니라 기존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만들어 줘서 그랬다.
그래서 요즘 신인 뮤지션들에게 우리 기계는 진짜 꿈의 기계 소리를 듣고 있다.
저 기계만 있으면 나도 남들이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스타가 될 꿈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2천 달러가 넘는 기계는 이 시대의 가난한 스타 지망생들에게는 너무 거액이라 어느 정도 성공한 음악가만이 구입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보다 고용량의 디램을 개발하고 CCD와 사운드 칩을 개발하는 사이에 1971이 되었고 결국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한다는 천지가 경동할 발표를 했다.
세계 경제를 통째로 흔들어 버리는 워낙 엄청난 일이라 혼란의 연속이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폭락한 주식을 마구 수집했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일본에서 일어났는데 희한하게도 일본 정부는 닉슨의 발표 이후에도 엔을 평가 절상하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 정부의 경제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아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너무 놀라운 상황이라 일본 정부가 얼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기회가 생기기만 기다리는 피라냐 같은 투기꾼들이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온 세계의 투기 자본이 모조리 일본 엔화 매집에 들어갔고 여기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외국의 자본만 엔화 매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본 자본이 가장 왕성하게 엔화 매집에 들어갔다.
일본이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엔화 절상을 발표한 것은 다른 나라보다 10일이나 늦었고 이 열흘의 시간 동안 세계의 자본이 끌어간 엔화는 1달러 360엔으로 환산해서 모두 7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일 뒤 일본 정부가 발표한 엔화 절상 안은 1달러당 308엔이었다.
가령 100달러어치 엔을 샀으면 절상 발표 뒤에 엔을 팔면 117달러가 되었다. 10일 만에 17%라는 놀라운 이윤을 거두는 일이었고 그건 고스란히 일본 국민의 손해가 되었지만 놀랍게도 이 사실에 대해 책임지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정치가도 경제인, 경제 관료도 어느 누구 하나도 여기에 책임지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돈을 번 사람들을 추궁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시장에 진입하여 20억 달러어치 엔을 매입했다. 그러니까 작년부터 투자했던 거 말고 닉슨의 발표 이후에 엔을 매입한 액수만 20억 달러라는 말이다.
이 한 번의 거래로 나는 3억 4천만 달러를 벌었다.
훗날 이 닉슨의 발표로 인한 사태를 닉슨쇼크라고 부르게 되는데 나는 여기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일본 엔화가 그렇게 큰 변동을 겪었다면 한국 원화는 어떤지 궁금하겠지만 한국 원화의 변화는 없었다.
애초에 한국 원화는 외국에서 인정받는 화폐가 아니었고 달러에 고정한다고 해서 한국 원화에 투기하는 투기꾼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몇 명 있었는데 파산해서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한국 원화는 지금도 암달러가 공정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는 나라로 달러 가격이 오르면 올랐지 내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버지의 신하그룹이 개입하는 바람에 원역사에 비해 훨씬 한국 경제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한국 경제는 여전히 일본 경제의 1/20도 안 된다.
한국 인구가 막 3천만이 되었는데 일본 인구는 1억이 넘었고 1인당 GNP는 2,500달러에 이르렀는데 비해 한국의 1인당 GNP는 고작 340달러였다.
사실 340달러도 신하그룹 때문에 이만큼이지 원역사에서는 250달러였다.
250달러와 340달러의 차이가 신하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조금 더 컸다.
우리 신하가 선점해 버리는 바람에 다른 회사들이 성장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뭐 그만큼 한국 성장이 빨라진 부분이 있어서 그만큼은 빼야 하지만 하여간 조금 더 큰 건 맞았다.
남궁진 사장이 일본을 방문한 내게 물었다.
“이번 투기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러다 일본에서 몰매 맞을지도 몰라.”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사장님은 이 기회에 엔화 안 사셨어요?”
남궁진 사장이 파안대소했다.
“나라고 안 했을 리가 없잖나. 왜놈들은 자기 나라인데도 마구마구 사들이는데 내가 안 하면 바보지. 내가 일본 정부가 뭐가 예뻐서 그걸 안 해.”
“혹시 일본 정부에서 무슨 경고라도 받으셨어요?”
“아니 아무 소리 없어. 괜히 이 이야기 꺼내면 자민당과 총리에 대한 지지율만 떨어지니까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야.”
“그거 다행이네요. 난 우리에게 뭔가 보복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그랬다가는 당장 자기 모가지가 위험하니 그러지는 않겠지 뭐 조용해지면 나중에 은밀하게 손을 쓸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지. 솔직히 이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못할 거야. 솔직히 자기네가 일을 제대로 안 한 증거니까. 그나저나 자네는 웬일로 일본에 온 건가? 이번에도 엄마랑 하린이 보러 온 건가?”
하린이가 일본 학교에 다니면서 엄마도 같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고 간혹 엄마를 보러 일본에 오곤 했다.
“일본에 왔으니 엄마랑 하린이도 당연히 볼 거지만 그보다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실상을 관찰하러 왔어요.”
“아직 일본 반도체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지 않나? 트랜지스터도 IC도 자네들이 압도하고 있잖아.”
“지금은 그래도 언제까지 일본이 그대로 있을지는 모르죠. 섬유, 조선, 기계, 전자 모두 일본을 우습게 여기고 있을 때 일본은 갑자기 성장해 있었어요. 반도체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남궁진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섬유는 일본이 미국보다 더 커버렸고 조선은 거의 세계를 석권한 상태지. 미국 조선산업은 아예 상대도 안 되고 겨우 한국 조선산업이 일본을 뒤쫓는 실정이고, 기계와 전자도 진짜 언제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지 모르겠어.”
“기계 쪽은 미국도 신경 쓰는 분야라서 미국 시장까지 쉽게 내주지는 않겠죠. 그래도 세계 쉐어는 분명히 상당 부분 잃을 거예요. 전자는 더할 거고요.”
“전자가 그렇게나 차이가 나나?”
“아직은 RCA의 샤노프 씨가 멀쩡해서 텔레비전 시장을 내주고 있지는 않은데 그래도 일본의 성장이 워낙 빨라야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전자제품이 미국 시장을 석권해 버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큐브는 임금이 더 저렴한 한국에서 생산하니까 경쟁력이 있지?”
“큐브의 경쟁력 자체는 별문제 없는데 지금처럼 미국에서 개발하고 한국에서 생산하는 형태는 바뀌어야 할지도 몰라요. 결국 가격 경쟁으로 가면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게 되죠.”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일본의 전자 분야 기술자들의 실력은 무서웠다. 순수한 학자도 아니고 전자 회사에 다니는 기술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에사키 레오나가 바로 그 사람으로 소니의 전자기술자인데 트랜지스터를 다루다가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의 터널효과를 발견했다.
그리고 일본에는 이 정도 실력의 기술자가 득실득실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금은 미국의 1/4 이하이니 미국 전자산업이 일본과 경쟁하려면 이 개발비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국에서 뛰어난 기술자 양성을 위해 한국의 대학들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한국이 일본 수준의 인력을 배출해 내려면 아직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내가 말했다.
“솔직히 반도체 산업도 안심할 수 없는 게 반도체 산업은 장치산업이라 기계만 잘 갖추면 어디서 만들어도 비슷한 물건이 나와요. 일본이 전자로 번 돈을 반도체에 투자하면 우리와 비슷한 물건이 금방 튀어나올 수 있어요?”
“특허와 지식재산권은 어쩌고?”
“특허는 우리만 독점하기 어려워요. 다른 회사의 특허를 우리가 사용해야 할 일도 많아 서로 특허를 교환해 가며 사용하는데 좀 특별한 발명이라고 특허를 오래 독점하는 건 어려워요.”
“일본이 큐브가 교환해야 할 정도로 뛰어난 특허가 있었나?”
“그 정도는 아닌데 특허가 공개되면 돈만 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식재산권은 더 어려워요. 아직 반도체 회로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지식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아직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재산권도 인정하지 않아서 우리가 청원 중인데 이게 꽤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그 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도전할 거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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