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C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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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50. CPU
조금만 생각해보면 고든 카파가 아무리 문돌이라고 해도 MIT에 입학한 수재인 데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 수장을 10년이나 했으니 CPU의 개념을 알고 제안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문적인 건 전부 나를 비롯한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리고 자신은 재무관리와 경영만 힘쓰던 사람이 갑자기 CPU에 대한 아이디어를 꺼냈으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CPU가 나올 때가 되었다. 원역사에서는 이보다 몇 년 뒤에 나오지만 내 회귀로 인해 반도체 개발 속도가 빨라져 지금쯤 나와야 하긴 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위해 몇 명의 인재를 미리 스카우트해 뒀다. 바로 페데리코 파긴과 테드 호프와 척 페들이 그 사람들이다.
페데리코 파긴과 테드 호프는 원역사에서 인텔 4004를 개발한 사람들이고 척 페들은 애플과 닌텐도 패미컴에 사용되어 유명해진 모스테크놀로지 M6502를 개발한 사람이다.
내가 고든에게 말했다.
“사실 그걸 지금 개발 중이긴 해.”
“어라, 나도 모르게 그런 걸 개발 중이었어?”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고든 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개발은 신우 네가 담당하는 거라 내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이건 고든 카파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재 우리 큐브 컴퍼니의 현실이다. 고든 카파는 이미 세계적 거대 기업이 된 큐브 컴퍼니의 CEO로 할 일이 너무 많아 굳이 개발 제품 하나하나까지 굳이 말하지는 않는다.
고든이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떤 목적으로 팔릴 거 같아? 내가 생각한 건 신호등 컨트롤이었지만 이 방면으로는 네가 훨씬 밝으니까 이 물건의 쓰임새를 훨씬 많이 알고 있겠지?”
“아주 많아. 쓰임새가 너무 많아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야. 일단 네가 말한 신호등 컨트롤 용도로 쓸 수도 있지만 공학용 계산기의 가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소형화도 가능하지 그리고 은행에서 현금인출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야. 그 외에 CNC의 컨트롤 용도로 쓸 수도 있고 뭐 무궁무진하지.”
“역시 이쪽에 대해서는 네가 훨씬 밝네. 그럼 알아서 해.”
나는 페데리코 파긴과 척 페들 그리고 테드 호프를 불렀다. 8인의 배신자나 강대원, 모하메드 아탈라 같은 사람들은 고체물리학 전문가들로 반도체의 물성 자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지 논리회로의 전문가가 아니다.
CPU 제작에 어울리는 사람은 우리 큐브의 기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DEC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더 어울린다. 다만 이번 개발은 DEC의 개발이 아니라 큐브의 개발이어서 큐브의 기술자들로만 개발에 들어갔고 이미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4비트 시스템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니까 8비트로 나가자는 거죠?”
페데리코 파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래 이탈리아인으로 최근에 미국으로 온 것을 재빨리 우리 큐브가 낚아챘다.
“중요한 건 비트 수가 아니지만 4비트 입출력은 너무 느리다는 데 현재 의견이 일치했어요. 그렇다고 16비트 이상으로 하면 가격 부담이 커진다는 게 분명하고요. 일단 입출력은 8비트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 정도만 되어도 앞으로 10년 넘게 충분할 겁니다.”
테드 호프와 척 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 거 같습니까?”
척 페들이 말했다.
“사실 이미 기존의 범용 논리회로 몇 개를 하나로 합치면 되는 거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중복되는 회로 몇 개를 없애고 필요한 명령 몇 개만 더 추가하면 되니까 사실 설계는 거의 끝났습니다. 이제 회로를 다시 정리해서 그리기만 하면 되죠.”
“주소 지정은 어느 수준으로 할 겁니까?”
“역시 16비트 주소 지정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 정도면 64K바이트까지 가능한데 지금은 이거면 차고 넘칩니다. 더 크게 만들면 가격이 올라갑니다. 레지스터를 줄이면 가격을 더 내릴 수 있는데 이건 두 사람이 반대해서 말이죠.”
“저도 그건 반대입니다. 저희는 4인치 웨이퍼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칩 면적이 좀 더 커져도 큰 가격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레지스터는 그대로 두죠.”
솔직히 난 처음부터 CISC 칩이 아닌 RISC 칩을 만들고 싶었지만 이 시대에는 이걸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다. 메모리 가격이 너무 비싸서 RISC 구조를 사용하면 가격이 30% 이상 올라간다.
어차피 우리가 만들 칩은 처음부터 완벽한 구조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세 사람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회로 제작에 들어갔다. 설계 자체는 이미 끝나 있었기 때문에 마스크 필름 제작용 회로도만 그리면 되는 일이었고 그건 세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그쪽 직원들이 할 일이었다.
먼저 흰 종이에 몇cm 굵기로 굵직하게 검은 선을 그려나가서 사방 몇 미터짜리 커다란 흰 종이에 회로를 그려 나가는데 편의를 위해서 여러 장으로 나누어 그린다. 레지스터는 같은 패턴의 연속이라 별로 어렵지 않지만 연산 부분은 좁은 면적에 최대한 밀집하게 그러넣어야 하기 때문에 초기 설계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회로가 다 그려지면 정밀한 이쪽 전용 카메라로 찍어서 필름을 만든다.
사방 몇 미터짜리 회로를 작은 필름 한 장에 담는 작업이라 이 시대에 가장 우수한 카메라 기술이 필요하다. 이렇게 모두 넉 장의 마스크 필름을 만들면 초반 작업이 끝난다.
그 다음은 다른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실리콘웨이퍼 위에 실리콘박막을 도포하고 감광액을 바르고 그 위에 필름을 대고 다시 작게 축소해서 찍어주는데 이때의 카메라는 더 정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약품으로 찍힌 회로대로 깎아내야 한다. 그 작업을 네 번 반복하면 하나의 회로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를 보호막을 씌우고 다이아몬드 칼로 웨이퍼를 자르고 금선으로 패키지 다리에 연결하고 다시 겉껍질을 씌워주면 하나의 반도체가 완성된다.
물론 이건 가장 중요한 공정만 말한 것이고 실제로는 수많은 노하우와 정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공정을 거쳐서 세계 최초의 CPU 8008이 탄생했다.
우리 최초의 CPU는 트랜지스터 4,500개를 집적한 것으로 일단 현재 기술로는 기존 집적회로보다 면적이 4배로 커져야 했다.
4인치 웨이퍼 한 장에서 모두 200개 정도밖에 만들 수 없었고 그 마저도 수율이 나빠 100개 정도밖에 완성품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회사처럼 2인치 웨이퍼를 사용했다면 웨이퍼 한 장에서 10개의 완성품을 건지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여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더 걸려 우리가 처음 CPU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69년이 되어서였다.
*
1969년 7월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큐브와 DEC의 핵심 인물 전원이 한 자리에 모여서 그 장면을 TV로 감상했는데 이때를 위해서 TV를 8대나 이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이 나오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사람이 달에 도착했다. 우주 저 멀리 380,000km나 떨어진 곳에 드디어 사람이 도착했다.
여기에 사람이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참이나 환성을 터뜨리고 미리 준비했던 샴페인을 터뜨려 각자 나누어 마셨다.
그렇게 한참 떠들다가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결국 아폴로 11호에는 우리 컴퓨터를 넣을 수는 없었네.”
켄 올슨이 말했다.
“아무리 우수한 물건이라도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시스템을 그 위험한 아폴로 우주선에 넣을 수는 없지. 대신 우주인들이 큐브의 쿼츠 시계를 차고 갔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 게다가 큐브의 계산기는 가져갔잖아.”
원역사에서 아폴로 11는 오메가인지 롤렉스인지를 차고 갔다는데 이번에는 우리의 쿼츠 시계인 큐브트론을 차고 갔다.
이는 미국에서 발명한 시계라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고 쿼츠시계가 기계식 시계보다 훨씬 고장이 적고 내구성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주에서 우주선(宇宙線) 때문에 쿼츠시계의 전자부품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 10호가 우리 쿼츠 시계를 가지고 나가 본 결과 아무 이상도 없었고 내구성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기 때문에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은 우리 큐브트론을 차기로 했다.
솔직히 우리와 나사는 워낙 깊은 관계여서 우리가 납품하는 물건은 나사가 굉장히 신뢰하는 편이다. 때문에 그 엄청난 IBM도 나사에 컴퓨터를 납품하지 못하고 우리 컴퓨터가 나사에 납품되고 있을 정도다.
이번 아폴로 11호의 관계 센터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은 전부 DEC 제품이고 이번에 아폴로 11호에는 포켓 계산기 말고도 소형의 공학용 계산기 하나가 따로 실렸다.
그건 우리 큐브가 모든 기술을 살려 개발한 제품으로 불과 8KG 무게로 상당히 복잡한 공학 계산까지 해주는 물건이라 아폴로 11호에 실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착륙한 우주선에서 사람이 내리는 장면을 기대했지만 그건 시간이 훨씬 더 걸려서 몇 시간 후에 아폴로 11호의 우주인이 달에 내릴 거라고 했다.
그래도 사람이 달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스탠 올슨이 말했다.
“근데 이제 달에 우리 미국이 먼저 도착했으니 아폴로 계획은 이제 중지인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이미 만들어둔 새턴 로켓과 우주선이 여러 개 있으니까 최소 몇 번은 더 발사될 거야. 그때까지 아폴로 계획은 중지되지 않는 거지. 게다가 그 다음 계획이 있을 거야.”
웨슬리 클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이제 규모는 줄어들 거야. 솔직히 미국이 사람을 달에 보낸 이유는 우리가 소련에게 초기 우주개발에서 졌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이제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했으니 더 이상 돈을 쓰기 싫을걸.”
마빈 윈스키가 말했다.
“너무 팩트로 공격하지마 우리 돈줄 하나가 끊어지는 얘기란 말이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면 전부 미국인이고 미국 출생자들이라 다들 미국의 우주 경쟁 승리가 기쁘긴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중요한 돈줄 하나가 끊어진다는 사실은 모두 자각하고 있었고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스탠 올슨이 물었다.
“우리가 나사에서 얼마나 벌어먹고 있지?”
켄 올슨이 말했다.
“우리 DEC에서는 대략 연간 1억 달러 정도 벌어. 이건 매출액이고 순이익은 대략 절반으로 보면 돼 큐브는 어떻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진짜 핵심 인물들이고 전원 DEC나 큐브의 대주주들이라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었다.
고든 카파가 말했다.
“우리 큐브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버는 군. 대략 1억 5천만 달러 매출에 7천만 달러 정도 벌지.”
고든의 말은 거짓말이다. 1억 5천만 달러 매출은 맞지만 우리는 순이익이 더 높아서 1억 달러가 넘는다. 하지만 매출의 70% 이상이 순이익이라는 사실만큼은 이 사람들 앞에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나와 고든만의 비밀이다. 아니 한 사람 더 부사장 앤디 그로브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앤디 그로브도 우리 부사장인 만큼 우리 비밀을 말하지 않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딱 그 순간 앤디 그로브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조직을 재정비하는 게 어때?”
다들 고개를 돌려 앤디 그로브를 바라보았다.
스탠 올슨이 물었다.
“응? 조직 재정비?”
“그래, 조직 재정비. 일단 DEC는 문제없어. DEC는 지금처럼 계속 컴퓨터 전문 기업으로 나가면 돼. 하지만 큐브는 지금 너무 조직이 비대해졌어. 그러니 나사의 주문이 줄어들 이 시점에 조직을 재정비하는 게 어떻겠냐 이거지.”
TV에서는 계속 아폴로 11호의 착륙 장면이 반복되거나 아폴로 달착륙선의 실내 장면만 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제 조금 지루해져서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돌렸다.
앤디 그로브의 말대로 큐브는 조직이 너무 방대해졌다. 일단 반도체 전문기업이라고 하면서 반도체와 상관없는 상품이 너무 많았다.
조직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앤디 그로브의 의견에는 나도 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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