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수에즈 봉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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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46. 수에즈 봉쇄 2
3차 중동전이 발발하기 좀 이전 1967년 신년에 나는 내 주머니에 현금이 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DEC와 큐브를 통해 벌어들인 돈과 DEC의 상장으로 번 3억 달러가 있었지만 그동안 한국에 투자한 돈이 많았고 또 선박 주문을 통해 소비한 금액도 많아서 돈이 좀 부족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이 모자란 게 아니라 자금 회전이 원활하지 못했다.
DEC와 큐브를 통해 벌어들이는 그 많은 돈은 뭐냐고 할지 몰라도 그건 대부분 DEC와 큐브에 재투자되고 있다.
원역사에서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8인의 배신자의 합류로 반도체 최강 기업으로 떠오르다가 망한 이유도 벌어들인 돈을 재투자하지 않고 본사에서 모조리 가져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니 지금 아무리 큐브와 DEC가 잘 나간다고 해도 번 돈을 재투자하지 않고 함부로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간 언제 뒤쳐질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 반도체와 컴퓨터의 세계다.
그래서 큐브의 상장을 결심했다.
사실 큐브의 순이익은 DEC에 비해 좀 낮은 편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꽉 잡고 있으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인텔이 CPU 시장을 장악했어도 마이크로소프트보다 큰 회사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겠다.
우리가 만드는 반도체가 시장을 과점한 상태라고 해도 아직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못하다. 때문에 우리가 얻는 이익은 반도체보다 오히려 전자계산기, 라디오, 무전기 그리고 캐리어와 3*3 큐브 판매가 더 규모가 클 정도다.
DEC가 대충 매출액 20억 달러에 순이익이 4억 달러 정도라면 큐브는 매출액 10억 달러에 순이익 2억 5천만 달러 정도다.
21세기라면 이 정도 순이익으로도 상장 목표를 훨씬 높게 잡을 수 있으나 1965년 현재는 PER 10배 상장이 좀 어렵다.
그래서 월스트리트의 전문가와 의논했는데 내 예상보다 그들의 평가가 월등히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DEC가 22억 달러 매출에 3억 8천만 달러의 순이익으로 44억 달러로 평가받았는데 비해 큐브는 매출 10억 달러에 순이익 2억 5천만 달러인데도 DEC보다 높은 50억 달러 상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DEC는 IBM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는데 비해 우리는 경쟁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고 또 반도체의 미래를 시장이 굉장히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월스트리트의 담당자는 내게 60억 달러를 제안했고 나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월스트리트의 담당자가 말했다.
“대신 이번에는 주식을 좀 많이 풀어주셔야 합니다. 지금 큐브는 정 박사님 단독 소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 박사님이 가지고 계신 지분이 너무 높습니다. 미국의 주식시장은 이런 주식을 싫어합니다. 솔직히 20% 이상을 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안 된다고 해도 최소 10% 이상은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지분을 낮춰나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만약 그 정도 풀지 않는다면 이번 상장에서 60억 달러는 불가능합니다.”
담당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나처럼 단독 소유에 가까운 형태는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결국 나는 담당자와 의논하여 전부 15%를 풀기로 했다.
큐브를 창업하고 지금까지 나는 몇 번이나 내 주식을 보너스로 풀었고, 지금 큐브의 주식 보유량은 큐브의 CEO인 고든 카파가 3% 그리고 8인의 배신자가 각각 0.4%, 강대원과 모하메드 아탈라가 각각 1% 그 외에 직원 2만 명이 보유한 스톡옵션이 2%였다. 그 외에는 미국에서의 내 법적 보호자였던 케인 부부와 나를 미국으로 데려와 준 빌 모건이 약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지분은 건드리지 않고 내 보유지분 15%를 시장에 공개했고 총 9억 달러의 현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시장에 공개한 큐브의 주식은 60억 달러에서 출발해서 계속 고공행진을 거듭해 첫날에만 2배나 오른 120억 달러까지 올랐고 그 다음 날은 조금 떨어져 시장에 공개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100억 달러 정도의 선에서 조정에 들어갔다.
이는 회사 순이익의 40배에 달하는 거액이었고 이 시대에는 정말 희귀한 경우였다. 시장이 반도체의 미래를 얼마나 낙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국 나는 9억 달러의 현금을 확보한 외에도 남은 지분 74%로 대략 7, 8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DEC의 지분을 합치면 어떻게 계산해도 100억 달러가 넘었다.
이 시대 부자라고 하면 대부분 하워드 휴즈와 폴 게티를 꼽는데 그들의 재산은 아무리 높게 계산하더라도 50억 달러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부자였다.
당연히 파티가 벌어졌고 빌 모건과 케인 부부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다들 부자가 된 기쁨을 누렸다.
*
나는 주식공개로 확보한 현금으로 많은 중고선을 매입했는데 이 시기가 오랜 해운 경기 침체가 절정에 달한 시기여서 중고선 가격이 정말 쌌다.
1956년의 수에즈 위기 당시에 잠시 반짝했던 해운 경기는 그 이후 오랜 침체기에 들어갔는데 3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수에즈 봉쇄까지 모두 10년이 넘는 장기 침체로 수많은 해운업자가 도산하는 등 해운업계 자체로 보면 역사상 최악의 장기적 불경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가장 큰 원인으로 주목된 것은 일본 조선업의 부상으로 배가 너무 많아져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은 전시표준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조선 공법을 선보였고 이를 바로 배운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때 미국이 선보인 공법을 더욱 발전시켜 대량의 선박을 싼 가격에 세계시장에 선보였고 현재 시점에서는 세계 조선 시장의 50%를 장악했다.
그리고 70% 장악도 시간문제라고 하던 시점에 우리 한국의 조선소가 등장했다. 아직 한국 조선소에 선박을 주문하는 업자는 없었지만 내가 직접 한국 조선소에 주문을 넣어 이들 선박으로 해운사를 확대했다.
그리고 이때 바로 수에즈 운하가 봉쇄되었다. 이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항로는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석유였다. 다른 물자는 몰라도 석유는 아시아에서 수입하는 방법뿐이었고 그 길이 막히고 돌아가는 길은 최소 3배가 넘었다.
당연히 기존보다 3배의 선박이 더 필요했는데 중고선까지 전부 합쳐도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일반 화물선의 선박 운임이 20배나 폭등했는데 유조선은 더했다. 석유의 운임은 50배나 폭등했다.
미국이 2차대전 때 만들었던 16,000톤의 T2 유조선은 이 시기에 이르면 대부분 고철로 분해되고 남은 배는 대개 10만 달러 전후로 거래되었는데 이를 구매한 사람들도 대개 몇 번 쓰고 고철로 처분했다.
그런데 이 10만 달러짜리 T2가 400만 달러로 올랐다. 물론 이건 가장 극적인 경우고 이보다 좀 비싸게 거래되던 중고선은 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극적으로 오른 건 동일했다.
우리가 3천만 달러를 들여 건조한 26만 톤 유조선은 1억 5천만 달러에 팔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남궁진 사장이 말했다.
“자네 말은 이번 수에즈 봉쇄가 앞으로 몇 년간은 절대 풀리지 않는다고 했지?”
“그렇죠, 어쩌면 10년 가까이 갈지도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절대 배를 팔면 안 되네. 전부 신하해운에 소속시켜 유럽 항로에 투입해야 해.”
“그래도 일시불로 1억 2천만 달러 이득이면 좀 아깝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 그건 2년이면 뽑아. 지금 석유 운임이 얼마인지 알고 있나? 남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톤당 48달러야. 우리 배 한 번 운행에 1천만 달러가 생긴다고. 우리 유조선은 최신형이라 속도도 빠르고 기름을 싣고 내리는 것도 아주 빨라서 더 좋지.”
나는 남궁진 사장의 말대로 배를 팔지 않고 신하해운에 소속시켜 유럽 항로에 투입했다.
이 시기 유조선은 10만 톤에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수에즈 막스라고 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가 바로 10만 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수에즈를 통과하지 않는 것을 상정한 배가 일본에서 건조되기 시작했다.
배는 크면 클수록 운송량에 따른 비용이 줄어든다. 그래서 일본은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좀 더 대형의 선박을 원했고 그 최대가 바로 26만 톤 VLCC였다.
내가 처음 26만 톤 VLCC를 만든다고 했을 때 의외로 남궁진 사장이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다. 해운 경기 불황의 시대에 그나마 이윤을 남기려면 그런 대형 선박이 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문한 36척의 26만 톤 유조선 가운데 모두 14척이 완성되어 있었고 기존에 운행하던 배가 4+8척 모두 12척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건조한 선박 이외에 내가 그동안 구입한 중고선 중에서 상태가 좋은 놈들을 포함해서 신하해운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 외에 조선소에도 일감이 몰려들었다. 이미 일본이나 다른 조선소들을 일감이 꽉꽉 들어찼고 그 다음으로 조선소를 만든 우리 조선소에 주문이 몰려들었지만 남궁진 사장을 그 대부분을 걷어차 버렸다.
남궁진 사장은 장기적인 시장 전망을 계산하더니 지금은 남의 배를 주문받을 때가 아니라 우리 배를 만들 때라면서 다른 주문보다 우리 신하해운이 운용할 배 중심으로 건조를 시작했다.
“자네가 수에즈 봉쇄를 예언했으니 이 봉쇄가 장기적으로 간다는 자네 말도 무조건 믿고 전략을 짜겠네. 그렇다면 지금은 무조건 우리 배를 더 만들어야 해. 지금도 해운 운임이 엄청나게 올랐지만 진짜 피크는 3년쯤 뒤가 될 거야.”
그렇다고 조선소에서 외부 주문을 아주 안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필요한 배 건조 시간 이외에 약간의 시간이 남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에 받을 주문을 조금 끼워 넣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선 수가도 기존보다 몇 배로 받아낼 수 있었다.
남궁진 사장은 내가 사들인 중고선박도 우리가 보유할 건 우리가 보유하고 팔 건 팔아야 한다면서 상당수를 신하해운에 소속시켰다.
한국의 신하해운이 갑자기 세계시장에 큰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하해운에 어마어마한 돈이 몰려들면서 해운 인력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해양대와 수산대에서 항해사 실습을 딴 졸업생들은 모조리 우리 회사가 고용했다.
그렇게 해도 인력이 부족해서 외국에서도 많은 인력을 고용했다.
1967년 초반에 현금이 부족하던 일도 이제 옛말이 되었다. 남궁진 사장도 모르는 일인데 나는 오로지 중고선 거래 하나로 65억 달러를 벌었다. 그러니까 내가 신하해운에 소속시킨 중고선들 빼고도 그렇게 벌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정말 너무 큰 이익이라 엄마에게도 비밀로 해서 이 세상에 아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1968년 나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고 바로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아빠가 물었다.
“그러면 작년에 모두 얼마를 번 거니?”
“신하해운이 모두 9억 달러를 벌었고 중고선 거래로 55억 달러 그리고 큐브와 DEC에서 번게 7억 달러를 벌었죠. 그리고 한국과 베트남에서 번 게 달러로 계산하면 대략 2억 달러 정도 벌었죠.”
나는 성인이 되면서 아빠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아빠는 처음에는 어색해 보였지만 한국에서 성인이 아빠에게 반말하는 건 곱게 보이지 않는지라 그대로 수용했다.
아빠가 말했다.
“73억 달러라 이거 누가 알면 진짜 큰일 나겠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중고선으로 얻은 이익은 남들에게 잘 숨겼으니 알기 어려울 거예요.”
나는 중고선의 매입부터 판매까지 전부 철저하게 분산해서 움직였고 조금이라도 신분이 들통날 위험이 보이면 거래를 취소했기 때문에 이익은 조금 줄어들어도 비밀은 지킬 수 있었다.
미국 CIA 같은 정보기관에서는 어쩌면 알고 있을지 몰라도 CIA는 안보를 대공산권 정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보기관이라 서방의 경제 움직임 정보를 알기는 어려웠다.
아빠가 말했다.
“이제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니 정체를 조금씩 드러내도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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