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수에즈 봉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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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45. 수에즈 위기 1
우리 큐브가 개발해 준 새로운 IC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회귀로 인해 벌어진 역사의 변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베트남 전쟁에서의 역사가 좀 변한 것 같았다.
이전보다 뛰어난 공대공미사일은 미군과 베트남군의 공중전에서 꽤 유의미한 수준의 변화를 만들어 낸 듯 공중전에서 미군이 고생한다는 뉴스는 확실히 줄어든 듯 보였다.
레이시온은 이후에도 몇 번이나 우리 큐브를 방문하여 독자적인 칩의 제조를 의뢰했다.
마치 훗날의 TSMC처럼 팹리스 공장을 위한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처럼 변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래도 우리는 생산 전문이기도 하지만 설계 전문이기도 한 기업이라 남의 주문만 처리한 건 아니고 우리도 곧 독자적인 고집적도의 범용 칩을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레이시온에 공급했던 칩과 비슷한 트랜지스터 300개 수준의 집적도를 가진 칩이었는데 하나에 250달러라는 거액이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다만 이런 칩의 경우 다리가 수십 개씩 되어서 소형화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SMT(Surface Mounted Technology; 표면실장기술)을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기는 한데 아직 그건 내놓을 단계가 아니다.
우리가 미군에 공급한 칩이 분명 유의미하고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전쟁 명분이 생기는 일도 없었고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의도대로 끌고 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가는 게 보였다.
이 시기는 냉전이 가장 첨예해진 시기이기도 해서 격동의 시대라 불릴만큼 세계적으로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내게 직접적인 피부로 와닿는 사건은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내가 몇 년 일찍 한국의 경제개발을 시작한 덕분에 한국의 경제력은 원역사보다 훨씬 발전한 상태였다. 그 덕분에 한국의 입장이 원역사보다 좀 더 유리해졌다.
그러니까 원역사에서는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워낙 급했는데 비해 지금의 한국은 그만큼 급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1964년 마침내 광양에 일관제철소 건립이 시작되자 한국 경제의 성장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고 외국에서 차관 도입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고작 4천만 달러가 차관으로 들어왔는데 비해 1965년에는 3억 달러의 차관이 들어왔다. 거기에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미국의 원조 자금도 많이 늘어났다.
때문에 한국은 원역사보다 훨씬 여유를 가지고 일본과의 협상에 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점점 뒤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 즉 한일 국교정상화는 내 관심이 아니었다. 어차피 군사정부가 지금은 비록 민선 정부로 이양되었다고 해도 이 부분에서 원역사와 달리 일본의 사과를 받아낸다거나 배상액을 더 받아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일본도 정치적으로 과거사를 사과하면서까지 국교정상화를 밀어붙일 여건이 아니었고 또 미국의 압박이 있었다.
대신 나는 내 돈벌이에 집중하기로 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해운이었다. 물론 반도체와 컴퓨터가 가장 큰 돈벌이이긴 하지만 이건 기술 발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있어서 시간적으로 지금 당장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나는 울산에 정유공장과 석유화학공단을 이미 만들어두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까지 석유를 수송할 유조선이 필요했고 처음에는 걸프와 엑슨의 유조선을 이용했지만 이제 내 유조선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마침 옥포와 울산에 대형 조선소가 건설 중이었고 나는 모두 4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주문했었다. 모두 합쳐서 26만 톤 급의 VLCC로 가격만 해도 1억 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내가 만드는 조선소에 내가 내 돈으로 유조선을 주문하는 식이었으니 당연히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나는 1966년 4척의 유조선을 모두 인도받게 되었고 동시에 다시 동일한 26만 톤급 유조선을 8척을 주문했고 동시에 36척의 건조계획을 발동했다.
이번에는 신하해운과 신하조선의 사장을 동시에 맡고 있는 남궁진 사장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남궁진 사장도 이때는 내가 신하그룹의 실질적인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궁진 사장이 말했다.
“정 박사 자네 미쳤나? 모두 1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건가? 게다가 아직 광양제철소가 완공되지도 않았는데 선박 건조에 필요한 철강은 또 어디서 조달할 건가?”
나는 한 장의 자료를 내 밀며 말했다.
“하나의 조선소에서 같은 설계로 선박을 대량 건조하면 이렇게까지 가격이 떨어집니다. 철강이야 광양제철이 아직 완공되지 않아도 전기로에서 충분히 생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민 자료에는 처음 건조했을 때 3천만 달러가 들어갔던 건조비가 이런 대량 건조로 전환하면 비용이 점점 떨어져 1천만 달러 미만으로 떨어진다는 자료가 적혀 있었다.
남궁진은 그 자료를 꼼꼼하게 읽어보더니 말했다.
“어떤 조사 결과로 얻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네. 난 선박 건조에 이렇게까지 비용이 줄어든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 믿을 수 없어.”
“그러나 미국도 과거 리버티 선과 T2 유조선을 대량으로 건조한 이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야 전쟁 중에 모든 국력을 총동원한 결과 아닌가. 지금은 그때와 달라. 한국이 그렇게 큰 나라도 아니고 부자 나라도 아닐세.”
“그러나 한국에는 값싸고 좋은 인력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그래도 이건 무리일세. 제발 부탁이니 이건 취소하게. 자네가 왜 이런 모험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조선소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아도 걱정이 없어. 이미 준비 중인 컨테이너선 건조와 유조선 건조만으로도 전혀 걱정 없어. 애초에 이렇게 대량으로 건조해 봤자 우리는 수송 물량을 채울 수도 없어. 게다가 26만 톤은 너무 거대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도 없는 크기야. 유럽에 팔아먹으려고 해도 안 팔린다는 뜻이지.”
나는 이미 우리 조선소에 기존의 컨테이너선보다 훨씬 거대한 대형 컨네이너선을 여러 척 주문했고 건조에 들어가 있었다.
“컨테이너선 건조가 유조선 건조를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국내 석유 수요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의 석유 수요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도 이건 정도가 지나쳐. 자네가 천재라는 건 나도 인정하고 있네. 그러나 이 일만큼은 절대 자네 말에 그대로 따를 수 없네. 그렇게 하려거든 날 해임하고 다른 사장에게 맡기게.”
남궁진은 견실한 해운 전문가로 한국에서 이만한 인물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거기다 그는 진심으로 우리 조선소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남궁진 사장이 배수진을 치자 결국 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일단 제 말대로 36척의 절반인 18척은 건조를 계속해 주세요. 그리고 나머지 절반인 18척은 이 18척 건조 다음 일감으로 비워두시고요. 대신 절대 다른 일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유조선의 대량 건조가 손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면 제가 주문을 취소하고 그때부터 다른 선박의 주문을 받겠습니다.”
조선소에서 일을 수주받을 때는 대개 3년의 건조 물량까지 받는다. 배라는 게 하루아침에 건조되는 게 아니고 설계부터 시작해서 조선소에서 건조 시간을 미세하게 조정하고 마침내 건조 시간을 배정 받아서 완전히 건조되는 때까지 대개 3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 조선소는 옥포와 울산 둘 다 이제 막 완성되었고 조선소 하나당 겨우 유조선 2척을 완성했는지라 지금 조선소가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내가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8척을 추가로 주문해서 일감의 일부를 채웠다.
컨테이너선이 완공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다시 내가 주문한 유조선 8척이 있으니 이 배들을 한꺼번에 건조하지 않고 천천히 완공해 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수주를 받아서 일감을 채워 넣으면 다음 조선 경기가 찾아올 때까지 적자를 보지 않고 조선소 운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유조선 8척을 주문할 때까지는 남궁진 사장도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자금 여력이 충분하고 지금 이 배들을 건조해 두면 아무리 상황이 변하더라도 손해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걸프와 엑슨의 유조선에 의지하던 한국의 석유 수송 물량만 새로 건조한 유조선 8척으로 바꾸면 일감 걱정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어지는 36척 건조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에는 그만한 석유 수송 일감이 없고 이걸 다 채우려면 일본이나 다른 수송물량으로 채워야 하는데 지금 전 세계를 뒤져봐도 그런 수송 일감이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선박이 남아도는 상황인데 지금 같은 때에 초대형유조선 36척이 한꺼번에 시장에 풀리면 진짜 시장 자체가 예측 불가능해진다. 지금 같은 시장 상황에서 완성한 초대형유조선 36척은 건조되자 마자 중고선박 시장에 등록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초대형유조선 36척 건조가 이루어지면 조선소는 일감 걱정이 없어지고 풀로 가동해야 하니 처음부터 연속적인 흑자가 가능해지지만 해운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36척이나 되는 대량의 물량을 주문하려는 이유는 앞으로 몇년 간 이 두 개의 대형조선소를 내 주문으로 가득 채우려는 뜻이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니 나도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 조선소의 흑자만 생각하는가? 조선소가 흑자가 되어도 해운이 적자가 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나. 아니 자네에게 진짜 이런 초대형유조선 36척을 만들 자금은 있나?”
“자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자네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알 수 없으니 자금 문제로 자네를 추궁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진짜 지금은 이런 물량의 수요가 없어.”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게 해운 시장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그런 사건이 없어. 자네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그런 수송 물량이 생길 걸로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네. 베트남 정도로는 그런 수송 물량이 추가 될 수 없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전쟁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런 일감이 생길 가능성은 없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건이 진짜 생기면 어떻겠습니까?”
남궁진 사장이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물었다.
“혹시 미국이 소련과 전쟁을 계획하고 있나? 진짜 핵전쟁까지 각오한 건가?”
남궁진은 내가 미 국방성 핵심 관계자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뭔가 전쟁을 징조를 느끼고 유조선을 대량으로 건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순간적으로 느끼고 얼굴이 파랗게 변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소한 제게 그런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해운업계에는 어쩌면 미소간의 전쟁보다 더 큰 사건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남궁진은 미소전쟁보다 더 큰 해운업계의 사건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 말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러나 만에 하나 자네 말이 사실일 경우 우리 유조선 건조는 그야말로 돈을 긁어 들이는 화수분이 되겠지.”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 남궁 사장님은 여기에 대비해서 유조선 건조만 서둘러 주십시오. 괜히 제가 손해를 볼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기술자들이 보다 빨리 이 유조선 건조에 익숙해지도록 관리해 주십시오.”
*
당연히 내가 남궁진에게 한 장담은 3차 중동전과 그로 인한 수에즈 봉쇄 이야기였다.
나는 1967년이 되자마자 중고선 시장에서 낡은 유조선을 긁어모으다시피 사들였다. 거기다 팔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조차 몇 배 비싸게 선박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선박을 매입했다.
이때는 나도 자금이 부족해져 선박용 자금을 대출하기도 하고 주식 일부를 처분하기도 했다.
내 예상은 원역사 그대로 3차 중동전이 1967년 6월에 일어나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며칠 날짜가 바뀌었을 뿐 조금 더 이른 5월 29일에 일어났다. 딱 일주일 개전이 더 빨라졌는데 결과는 원역사와 똑같이 6일 만에 완전히 결정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원역사 그대로 수에즈 운하 한쪽을 점령함으로써 수에즈 운하가 완전히 봉쇄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봉쇄는 내가 남궁진에게 장담한 대로 미소간의 전쟁 그 이상의 충격을 해운업계에 안겨주었고 당연히 수에즈 운하의 봉쇄는 선박 운송료의 폭등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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