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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53,120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3.09.02 22:58
조회
5,131
추천
53
글자
5쪽

기상곡 SS 해후

DUMMY

노을 지는 하늘 아래 홀로 선 늙은 남자는 재치 가득한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서큐버스 부른 적 없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해서.”

남자와 서로의 그림자가 맞닿을 거리에 선 여자는 하얀 블라우스와 짧은 검정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자의 말마따나 서큐버스인지 반쯤 드러낸 가슴을 비롯해 온 몸에서 색기가 줄줄 흘렀지만 그 얼굴만은 그렇지 않았다. 충분히 요염한 미녀였지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이 색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끔 하였다.

남자는 오래 전에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백 년도 더 지난 옛날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잊지 않았다. 잊지 못했다. 그래서 두 팔을 벌리며 노래하듯 말을 쏟아냈다.

“본래 서큐버스들은 하루라도 계약 맺었던 계약자가 죽으려고 하면 방문해주나? 이거 이거, 에프터 서비스가 장난 아닌데?”

익살맞게 웃었지만 여자는 웃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련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런, 알아차렸구나.”

“…당신은?”

여자가 물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쓴웃음을 곁들여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 어쩐지 닮아도 너무 닮았더라.”

“망할.”

여자도 어깨를 늘어트리며 실소했다. 이런 막장 같은 이야기라니.

남자와 여자가 가까이 섰다. 남자는 늙었지만 허리가 굽지 않았고, 여전히 키가 컸다.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넌 어떻게?”

“처음부터 감이 무지무지 안 좋았고, 나중에 아는 언니한테 들었어.”

여자에게 있어 남자는 첫 계약자가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계약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본래라면 백년 도 넘은 시간에 파묻혀 기억 속에서 사라졌어야 할 남자였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잊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잊지 못했던 남자는 물었다.

“엘레오놀은?”

“사라졌어. 나도 어린 시절 이후에는 보지 못 했는걸.”

죽은 걸까, 아니면 그저 실종된 걸까. 무엇이든 차이는 없었다. 어쨌든 보지 못한다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좋은 여자였지. 너도 좋은 여자고 말이야. 누구 딸인데.”

정을 가득 담아 말했지만 여자도, 남자도 결국엔 어색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모르겠다. 역시 같이 보낸 시간이 없어서 그런가… 그냥 막연하네.”

“그거 다행이구나.”

어떤 의미로 다행이라는 것일까. 여자는 굳이 묻지 않았다. 남자를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있잖아, 서큐버스가 계약자의 아이를 낳는 일은 별로 없어.”

“알아.”

그래서 네가 내 아이일 거라는 생각을 처음에는 하지 못했어. 엘레오놀이 설마 내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어.

“이런 거… 진짜 취향 아닌 것 같다.”

여자는 한숨을 토하며 물러서려 했다. 어쩐지 모르게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를 손이 아닌 말로 붙잡았다.

“사바스.”

여자의 이름.

“이리 오렴.”

남자의 부름.

사바스는 결국 이를 악물었다. 물러서지 못하고 남자의 품에 안겼다. 아주 조금이지만 눈물도 글썽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그 귓가에 속삭였다.

“만나서 반갑다, 나의 아이야.”



“나쁜 놈이었어. 마음고생만 잔뜩 시키고.”

남자는 죽었다. 노환이었다. 육백 년을 넘게 살았지만 그도 결국에는 인간이었다.

“좋은 남자 만나, 이런 놈팽이 만나지 말고.”

남자의 부인은 비석 앞에서 그리 말했다. 내용만 보면 타박이었지만 여자는 그것을 그렇게 듣지 않았다.

남자의 부인은 울고 있었으니까. 비석을 어루만지며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으니까.

여자는 남자의 부인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남자의 오랜 동료였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부인에게 물었다.

“그래도 사랑했지?”

저 바보천치를.

“응.”

당연하잖아.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남자의 부인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조금 더 울었다. 여자는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리부는 사나이.

여자의 아버지. 같이 한 시간이라고는 그 옛날의 하룻밤과 죽기 전 십여 일이 전부인 사람.

여자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동안이나 묘지 앞에 머물렀다.



&



술에 잔뜩 취한 여자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자신의 상사를 보았다. 모처럼의 회식자리건만 부인에게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고하는 것에만 정신을 파는 공처가, 아니 애처가인 상사의 모습에 입술을 삐쭉였다.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사랑하는 걸까.

여자는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의 부인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다시 상사를 보았다.

“부럽네.”

어깨를 으쓱인 여자는 더 부러워 하는 대신, 과거의 기억에 빠져드는 대신 술잔을 들었다. 언젠가는, 뭐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저런 날이 올지도.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자는 한 모금 술에 미소 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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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월드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왕의 별 +27 15.08.31 8,337 15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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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강철의 기사들 SS 기도 +1 13.11.20 2,819 30 11쪽
20 강철의 기사들 SS 어느 화창한 오후 +4 13.09.21 4,343 49 8쪽
» 기상곡 SS 해후 +13 13.09.02 5,132 53 5쪽
18 폭뢰신창 SS 생生 +7 13.08.31 8,851 184 35쪽
17 SG SS 사자와 호랑이 +6 13.08.28 4,218 109 1쪽
16 강철의 기사들 SS 천생연분 +7 13.08.15 3,313 134 6쪽
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3 129 5쪽
13 나이트사가 SS 메데이아 +4 12.12.13 3,431 26 9쪽
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1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6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5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8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7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3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6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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