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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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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69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7.09.0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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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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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월드메이커 SS #4 하늘로

DUMMY

“앞으로는 만나기 힘들 거야.”


녹색유성이 문득 말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먼 산을 쳐다보고 있던 용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난도 잘 치고 농담도 제법 좋아하는 녹색유성이었지만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왜?”


용호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사실 두 사람은 애당초 자주 만나던 사이가 아니었다. 만난 횟수를 전부 헤아려 봐야 열 손가락을 겨우 넘길 수준이었으니까.


남녀사이였지만 딱히 특별한 사이인 것 역시 아니었다.


그냥 친구.


아니, 그래서 특별한 것일까. 두 사람 모두 그냥 친구라는 것을 가진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용호는 마신왕이었다. 마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고의 존재였고,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아끼고 사랑하고, 친구 같은 신하들이 많았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군신 관계였으니까. 위와 아래가 정해져 있으니까.


녹색유성도 비슷했다. 그녀는 그녀의 세상에서 홀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이였다. 그녀는 마지막 엘더였고, 사대신 모두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를 경애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녀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친구가 되었다.


마계를 지배하는 마신왕.


사대신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마지막 엘더.


각자의 세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는 정점에 거하는 자들.


녹색유성은 그래서 미소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귄 친구에게 소박하게 말했다.


“이번에 승천하기로 했거든. 우화등선이라고 해야 하나?”


용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는 녹색유성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고, 이내 겨우 짜낸 답을 내놓았다.


“준신?”


“맞아. 사대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어. 이제 때가 되었다고.”


녹색유성은 지상에 남은 마지막 엘더였다. 때문에 그녀는 천 년의 고독을 삼켜야만 했다.


먼저 떠나간 이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


사대신은 녹색유성의 고통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슬퍼할까 두려워 마음속으로만 울던 녹색유성을 그대로 방치해둘 생각도 없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녹색유성을 신계로 불러들일 때가. 그녀에게 신의 지위를 내려 자신들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게 할 때가.


용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알았다.


수호의지.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는 이들. 그렇기에 세상에 종속되는 이들.


수호의지는 자신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녹색유성이 용호 자신을 만나러 마계로 넘어오는 일은 무리일 터였다. 플레이어들의 세상에서 만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아쉽네.”


용호가 말했고, 녹색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용호는 그녀가 진정으로 아쉬워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친구였으니까.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다.”


녹색유성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던 용호는 순간 눈을 깜박였다.


“어, 설마 내가 마지막?”


“그럼 다른 세상까지 건너와서 네게 제일 먼저 말해야겠어?”


녹색유성이 작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용호는 인상을 구겼다.


“너무하구만.”


서로가 서로에게 몇 없는 친구인데.


녹색유성은 다시 웃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자연히 작아지고 은은해진 그런 미소가 아니라, 아이같은 밝은 미소였다.


“반가웠어. 다음에는 네가 우리 세상으로 와.”


“넘어가서 기도하면 나타나나?”


“글쎄, 그렇게 되려나?”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보고 웃었다. 과연 다시 만나는 것은 언제일까.


녹색유성은 잠시 주변을 살펴 카이완이 없다는 걸 확인하더니 그대로 용호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용호는 그런 녹색유성을 꽉 안아주었다.


“안녕.”


“또 봐.”


“그래.”


녹색유성과 용호가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진짜 안녕.”


녹색유성이 키득 웃으며 돌아섰고, 용호는 가만히 서서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번뇌력이 상승하고 있다.]


“아, 좀.”


용호의 머릿속에서 아몬이 속삭였고, 용호는 콧잔등을 긁었다. 새삼 녹색유성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져보았다.



&



녹색유성은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흔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써 하얀 머리칼을 가렸다. 겨우 그 정도로 숨겨질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녹색유성을 보고 빼어난 미녀라는 생각을 떠올릴 자는 있어도, 십대초인의 정점이자 인계 최강의 존재인 녹색유성을 떠올릴 자는 없을 터였다.


녹색유성은 천천히 걸었다.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눈앞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큰 마을이었다.


천 년의 세월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녹색유성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번지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큰 마을.


엘더들이 처음으로 세운 마을. 녹색유성 자신이 태어나고, 혼례를 올린 장소.


웃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새어나왔다. 바보처럼 울면서 녹색유성은 걸었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밤이었지만 녹색유성은 그 안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달이 밝은 밤은 녹색신님의 시간이었으니까.


큰 마을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커다란 궁전에는 인기척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녹색유성의 방문을 알지 못 했다. 사실 녹색유성은 용호에게 작은 거짓말을 했다.


용호는 마지막이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세상에 사는 이들 가운데서 녹색유성의 승천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세상에도 그저 서신만을 남겨두었다.


녹색유성은 숨을 길게 토했다. 그대로 바람이 되어 궁전 안에 들어섰다. 궁전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폭풍을 부르는 자.


엘더의 신검.


천 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위대한 신검은 장식대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녹색유성은 새삼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번개폭풍께서 저 검을 높이 들어 올리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동생 하얀유성이 아버지께 물려받은 폭풍을 부르는 자를 휘두르며 전장을 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녹색유성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승천은 좋았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사대신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충족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떠나간 이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연함이 슬픔을 막지는 못 했다.


준비가 되었니?


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자애로운 황색신님의 목소리였다. 녹색유성은 끅끅 울음을 삼킨 뒤 얼굴을 닦았다. 방금까지 울던 게 거짓말처럼 활짝 웃었다.


“네.”


황색신은 굳이 녹색유성의 억지웃음을 지적하지 않았다. 신력으로나마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준 뒤 다시 속삭였다.


눈을 감으렴. 하늘로 오르자꾸나.


녹색유성은 눈을 감았다. 사대신께서는 새로운 신의 자리를 마련해두셨다고 했다. 사대신 모두의 하위 신인 영웅신의 자리라 하셨다.


사대신 모두의 신력이 전신을 충만케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려한 의식이라든지,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중이 바라보는 큰 제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위에서 봐.

천천히 오려무나.

기다리고 있을게.

느긋해도 괜찮단다.


사대신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미 신탁을 통해 수없이 들은 그분들의 목소리였지만 녹색유성은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하늘까지 혼자서 올라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느긋하게 오라고 하시는 걸까?


녹색유성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다. 온통 검은 세상 사이에 하얀 길이 있었다. 구름 다리라고 해도 좋을 그 위에 녹색유성 자신이 홀로 서 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는 계속 하늘로 향했고, 그 끝에는 밝은 빛이 있었다.


신계로 가는 길.


녹색유성은 단숨에 오르고자 했다. 풍신을 쓰면 몇 걸음 만에도 주파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 그런 마음을 품었을 때, 녹색유성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서두르지 마렴.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듣지 못 한 목소리였다.


녹색유성은 입술을 벌렸다. 멍한 소리를 토했고, 갑자기 쏟아진 눈물에 눈앞이 흐려졌다.


여전히 울보구나.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울보는 자기가 아니라 하얀유성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엉엉 울며 자그마치 천 년간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아빠.”


아빠.


아버지.


“그래, 내 딸아.”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올라왔다. 그대로 녹색유성을 꽉 끌어안았다. 녹색유성은 울면서 웃었다. 남자의 품은 울퉁불퉁하고 딱딱한 근육투성이었지만 세상 무엇보다도 편안했다.


번개폭풍.


엘더의 왕.


기간토 마키아에서 사대신과 엘더는 물론이고 이 세상 전부를 구해낸 전설왕.


그가 눈앞에 있었다.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천천히 가며 이야기하자꾸나.”


번개폭풍은 녹색유성을 안아들었다. 마치 아기를 안는 것 같은 자세에 녹색유성은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활짝 미소지었다. 그대로 번개폭풍의 목에 매달렸다.


지난 천 년의 이야기.


번개폭풍은 그다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화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녹색유성에게는 지난 천 년 동안 쌓아둔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요. 그때 검은곰 아저씨가 말이에요.”


녹색유성은 아이처럼 재잘거렸다. 번개폭풍은 어린 아이가 그날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것 같은 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를 반쯤이나 지났을까.


녹색유성이 이제 다리가 반 밖에 남지 않았음을 속으로 아쉬워할 때였다.


“여기까지구나.”


번개폭풍이 멈춰섰다. 녹색유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밝은 웃음이 걸려 있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기까지라니.


녹색유성은 무어라 묻지도 못했다. 그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번개폭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번개폭풍이 그런 녹색유성의 뺨을 어루만지면 말했다.


“미안하구나.”


“안 돼요. 안 돼······.”


녹색유성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떨어지기 싫다며 번개폭풍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번개폭풍이 그런 녹색유성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냈다. 울며 매달리는 딸의 등을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단다. 저렇게 기다리고 있잖니.”


기다리고 있다.


녹색유성은 눈을 깜박였다. 사대신님들을 말씀하시는 걸까?


아니었다. 사대신님들을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 번개폭풍이 아니꼬움을 담아 낮춰부를 수 있는 상대.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 녀석을.”


번개폭풍이 말했다. 녹색유성은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이제야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녹색유성은 눈을 부릅떴다. 번개폭풍이 웃었다. 그리고 아니꼬움을 한껏 담아 말했다.


“마음 바뀌기 전에 데려가라. 그때 그랬던 것처럼.”


녹색유성은 여전히 번개폭풍을 보고 있었다. 차마 뒤돌아서지 못 했다. 그리고 번개폭풍이 그런 녹색유성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그대로 가볍게 어깨를 밀어 녹색유성을 뒤돌아서게 했다.


칠흑 사이에 자리한 하얀 길. 그 위에 선 자. 까마득한 옛날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녹색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천 년 전 엘더의 감옥에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순간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나의 레이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유더 팬드래건.


녹색유성은 더 이상 참지 못 했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하며 유더에게 달려갔다. 그대로 꽉 끌어안았고, 몇 번이나 입술을 맞추었다.


“죽일 놈.”


번개폭풍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고, 유더는 더 이상 번개폭풍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천 년 만에 마주한 레이디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의 레이디. 당신의 기사가 돌아왔습니다.”


언제나처럼 느끼하기 짝이 없는 뻔뻔한 말.


녹색유성은 유더의 가슴을 때렸다. 그의 목에 여전히 걸려 있는, 녹색유성 자신이 레이디의 증표라며 잘라준 녹색 머리칼로 만든 목걸이를 보며 울고 웃었다.


하얀 다리는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유더는 녹색유성과 깍지 낀 손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


“아버지 검신께서 약속을 지키셨어.”


“약속?”


“아스트랄 라인에서 천 년만 버티면, 그때는 어떻게든 빼내주시겠다고 했거든. 지금은 무리지만, 천 년 정도 시간을 주면 나 하나쯤은 될 것 같다고.”


별을 순회하는 위대한 영혼의 흐름.


아스트랄 라인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 법치에 함부로 관여하는 것은 수호의지에게조차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천 년 전의 검신은 지금처럼 막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혈자가 아스트랄 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켜보았다. 그것이 순리였으니까.


하지만 유더는 자신의 아버지 검신께 터무니없는 제안을 했다. 지금 힘들다면, 가능해질 때까지 버텨보겠다고. 저 위대한 영혼의 흐름 속에서 유더 자신을 지켜내 보겠다고.


녹색유성은 눈을 깜박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입술을 벌리더니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로?”


“정말로.”


“어떻게.”


아스트랄 라인이었다. 수천, 수만 수준이 아니라, 수백, 수천억의 영혼이 하나 되어 흐르는 위대한 흐름이었다.


그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낸다? 그것도 자그마치 천 년의 세월동안?


“말도 안 돼.”


“돼. 장인어른도 하셨잖아? 그리고 아버지 검신께서도 많이 도와주셨어. 보호해 주셨다고 할까?”


유더는 여유롭게 답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이내 녹색유성에게 몸을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힘들었어. 엄청나게 힘들었어. 정말 진짜로 힘들었어.”


과연 그것이 힘들었다는 말로 표현 가능한 일일까?


녹색유성은 경이에 찬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다시 묻고 말았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번개폭풍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이미 엘더들 사이에서 준신이나 다름없던 존재였다. 하늘에 박힌 왕의 별이 그의 존재를 기억했다. 왕의 별을 통해 세상을 굽어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유더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신들께서 보호해주셨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천 년의 세월동안, 혼탁한 아스트랄 라인 속에서 정신를 유지하는 것은 온전히 유더 스스로의 몫이었다.


“없긴 왜 없어. 이게 있었잖아.”


유더는 장난스럽게 녹색유성의 머리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사랑하는 레이디와의 약속도 있었고.”


녹색유성은 유더를 보았다. 그리고 결국 웃고 말았다.


“바보야. 터무니없는 바보야.”


“레이디 밖에 모르는 바보지.”


윙크한 유더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먼 곳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번개폭풍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유지했다.


“녹색유성.”


“유더.”


유더는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행동이었지만 녹색유성은 당황하지 않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유더는 녹색유성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대로 위를 올려다보며 능글맞고 느끼하고 한 대 쳐주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모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나의 고귀한 레이디시여.”


하늘로 오르는 길.


저 신계에서 펼쳐질 새로운 삶.


그 곁을 함께하는 최고의 기사.


녹색유성은 굳이 말로 답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유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걸었다. 발걸음은 거북이와 결전을 펼쳐도 좋을 정도로 느렸지만,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알았다면 기다렸을 텐데. 지난 천 년의 세월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유더는 잠시 난처한 얼굴이 되더니 슬쩍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못 할까봐.”


알면 기대하게 되니까. 녹색유성이 오직 유더 자신의 귀환 하나만을 바라보게 되니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면.


자신이 돌아오지 못 했을 때 녹색유성은 어떻게 될까.


유더는 굳이 그 모든 이유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녹색유성은 이해했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하나뿐인 기사의 팔을 끌어안았다.


“바보야.”


“바보 아닌데.”


유치한 말 장난.


하지만 이것으로 좋았다.


다리 너머에서 신계의 빛이 빛났다. 사대신의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녹색유성은 빛을 바라보았다. 천 년의 무게를 모두 털어내고, 어린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fin>


작가의말

시기상 던메SS인 어떤 조우 이후입니다. :D


덧1) 나사의 황제가 아스트랄 라인에서 버틴 것과는 좀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게 좀 설명이 길어서(...) SS 본편 내에 삽입하려다가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orz (뜬금없이 나사 이야기 꺼내기도 그렇고요 ;;) 이건 블로그에 관련 포스팅을 하나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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