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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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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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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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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DUMMY


한 연방 서라벌 외각 지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는 넓은 벌판 위에 홀로 외롭게 선 건물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는데다가 지붕 위에는 역십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는지라 어쩐지 모르게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평소에는 을씬년스런 분위기답게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몇 년 만에 건물주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건물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바까지 달린 커다란 응접실.

전용석이라고 해도 좋을 바 끝자리에 걸터앉은 진은 말없이 유리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떠있는 얼음의 수는 셋.

우수가 젖어나는 그 모습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진에게 있어서는 제자 비슷한 존재인 시현의 물음에 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텐더가 서야할 자리에 서서 술병을 고르던 장신의 남자가 진 앞에 새 술잔을 내밀었다.

“천하의 검은 불꽃답지 않게 우중충하기는. 뭔지는 몰라도 담아두고 혼자 꿍하기보다는 털어놓는 게 좋지 않을까?”

검은 불꽃.

진 자신의 이명. 세상 광시곡 최강의 마법사인 동시에 암살기능자인 그를 다른 이들이 경탄과 공포 섞어 부르는 별칭.

진은 고개를 들었다. 녹안을 빛내며 시원하게 웃고 있는 사내, 진 자신에게는 어찌어찌 매부라 할 위치에 있는 티르 아벤트를 보았다.

진은 잠시 고민하듯 뜸을 들이더니 이내 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봐봐.”

진이 지갑을 펼쳐 보여준 사진은 시현과 티르가 이미 몇 번이나 본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세 사람. 진과 그 부인인 유다, 그리고 양녀인 린이었다.

뜬금없이 내밀어진 가족사진에 티르는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

유다는 여전히 우주괴수 급으로 예뻤고 린도 유다 때문에 가려서 그렇지 파릇파릇한 여대생답게 생기 넘치는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이건 신종 부인, 딸 자랑법인가.

티르가 무어라 말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귓가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가족에 대해 뭔가 걱정이 있는 것 같군. 아마도 딸 문제일 것 같다.’

검마 백야흔의 충고에 티르는 다시 진의 얼굴을 보았다. 과연, 얼굴 한가득 수심이 어려 있었다.

“…린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실제로 만나적은 두 번인가 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저 팔불출 진 밑에서 잘 크고 있나 했는데, 혹시 어디 나쁜 길에라도 빠져든 건 아닐까.

티르의 물음에 진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겼어.”

“뭐?”

“린이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한탄 섞인 목소리에 티르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눈동자를 굴려 시현을 보았다. 시현 역시 뭐라 표현 못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설마 그게 다는 아니겠지. 애지중지하는 딸네미한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침울해하는 팔불출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율리아 시집가는 날 네가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는 기억 안나?’

베아트리체가 언제나처럼 놀리고 들어왔지만 티르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진은 술잔을 단번에 들이키더니 깊은 한숨을 토했다.

“돌연 겁이 나더라고.”

“겁…이요?”

약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시현의 되물음에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유다가… 린을 입양한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어.”

20년이란 숫자에 시현은 지금까지 잊고 있던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진은 겉모습이야 어쨌든 이미 40대에 접어든 남자였다.

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교복입고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는 결혼도 할 거고, 아이도 낳겠지. 그리고 결국에는….”

진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하지만 티르도 시현도 진이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사는 시간이 달라.”

진은 티르가 내밀었던 새 술잔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시간이 달랐다.

진과 유다는 그대로인데 린은 자꾸만 자란다. 셋이 나란히 서 있으면 누구도 부모자식으로 보지 않는다. 잘해봐야 친구 사이 정도로 볼 뿐이다.

최고위 흡혈귀라 할 수 있을 아르젠티나의 아이인 유다는 늙지 않는다.

3단계 카시리오션에 도달한 진 자신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 지 오래다.

하지만 린은 그렇지 않다.

시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피하고 있던 문제.

티르는 턱을 긁적였다. 그 역시 진과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고, 사실은 지금도 하고 있었으니까.

나인티 나인 나이츠의 수장이자 대천사인 티르에게 성장의 개념은 있어도 노화의 개념은 없었다.

달의 여왕인 동시에 청허류의 정통 계승자이며, 진과 마찬가지로 3단계 카시리오션에 도달한 시안 또한 노화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레오나는 달랐다. 처음 결혼할 당시 십대였던 그녀도 이제는 벌써 서른 근처에 도달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여동생인 율리아도, 그녀의 남편인 슈나이더도, 수하인 워치 로벤도, 모두가 자연스런 세월의 흐름을 따라 나이를 먹고 있었다.

“도환선배도… 이제는 거의 쉰이야. 여전히 근육도 탄탄하고 이래저래 정정하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히카리와는 달라. 확실히… 좀 늙은 기분이 들어.”

진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티르는 군말 없이 진의 잔에 새 술을 채워주었다.

“주변에… 늙지 않거나 장생자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도드라지는 기분이야. 뭔가… 기분이 이상해.”

진의 인간관계를 그다지 넓지 않았다. 고향이라 할 수 있을 세상 광시곡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꼽아보면 진의 말마따나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 도환과 린 단 둘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히카리는 인류의 여신 헤라가 만들어낸 고등인류 하이시안이었다.

비숍은 불로장생의 비밀을 관통한, 실로 정점에 도달한 연금술사였다.

해명 대장은 판데모니엄과 교착한 여신의 검이기에 이미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에실리안은 고등한 마법사였고, 진명은 웨어 라이칸 슬로프 로드였고, 크리슈나와 월야는 말할 것도 없는 강력한 흡혈귀였다.

시선을 세상 광시곡 밖으로 돌려도 매한가지였다.

로드 카시리온과 13대행자 가운데 보통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현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현아와 더스트, 아라, 아르켄은 엘프였고, 클레어는 죽어도 영혼만 무사하다면 어떻게든 전생하는, 실로 불사의 왕이라 해도 좋을 퍼스트 블러드였다. 세진은 오크인지라 솔직히 늙어도 잘 모르겠고, 라므는 영령이었고 세류는 요괴였다. 롤랑드는 마왕이고 이그타르트는 인조인간이고 메데이아는 전뇌 생명체에 가까웠다. 그나마 늙어가는 티를 낼 수 있는 로렌초 조차도 천검인지라 노화의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뭔가… 수를 써볼까.”

진이 흘리듯 꺼낸 말에 티르와 시현이 거의 동시에 흠칫했다. 수를 쓴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는다.

전통파 전사라 할 수 있을 티르나 시현과 달리 진은 강력한 마법사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삭이 물려준 육망성 평의회의 모든 마법이 담겨져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빡세게 연구해서… 보통 사람도 먹을 수 있는 현자의 돌을 만들거나… 아니면… 아니다,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진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티르와 시현은 진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흡혈귀로 만들 생각을 잠깐이라도 했던 것이겠지.

퍼스트 블러드 그 자체라 해도 좋을 시현에게는 별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진에게는 다를 테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본래 흡혈귀 사냥꾼이었다. 유다는 아예 흡혈귀 박멸을 생업으로 삼던 일족의 최후 생존자였다. 결과적으로는 흡혈귀들과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현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딸아이를 흡혈귀로 만드는데 거부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 진이 마음을 먹는다 할지라도 유다가 그런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영화나 소설에 흔히 나오는 영생자의 고뇌. 그네들과 달리 진의 주변에는 똑같이 늙지 않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늙어가는 주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었다.

“사실… 난 이게 겨우 사십년 정도밖에 살지 않았어. 3단계 카시리오션에 도달했으니… 막연히 나도 크리슈나 씨처럼 천년, 이천년 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너무 막연해. 천년 정도 살고 나면 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을까….”

시현은 이번에도 말을 자아낼 수 없었다. 그 역시 어렸으니까. 진은 그나마 사십대라도 되지 시현은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이었으니까.

아무 말 못하기는 티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제 겨우 서른이었다. 전생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세상 무적함대에 직접 강림하기 전까지는 딱히 이렇다 할 인간관계가 없었고, 강림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존자들과 박 터지게 싸우다 죽었을 뿐이었다. 진정 오랜 삶을 살아온 영생자의 고뇌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티르는 짐짓 호쾌하게 술을 들이켰다. 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네 말마따나 우리 주변엔 오래 산 사람들이 많잖아? 조언을 구해보자고. 당장 이 부부동반 모임만 해도 거의 다가 영생자잖아?”

영생자가 넘쳐흐르는,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인구 구성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사실이었으니까. 시현 역시 짐짓 기운찬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당장 여기서도 조언을 구할 수 있겠네요. 우리 가운데 가장 오랜 삶을 살아온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시현과 진과 티르는 바 너머, 그러니까 여자들이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보았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로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술과 카레를 반반 섞어 마시고 있는 붉은 머리의 괴인이 보였다.

“히히히! 카레카레! 시현아 카레 맛있어!”

헤실헤실 웃더니 이쪽을 보며 손까지 흔든다.

“…취, 취해서 저래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개진 시현이 마주 손을 흔들며 변명했고, 티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기각.”

세 남자는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동시에 숨을 삼켰다.

“후후후… 우리 시안이 차아아암 예쁘네에에에에♡”

“으아악 언니! 얼굴 너무 가까워요 언니!”

흑단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미녀가 새하얀 머리칼의 미녀의 허리며 가슴을 끌어안고 얼굴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둘 모두 천하절색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미녀다보니 그야말로 오묘하고 야릇한 풍경이었다.

“…유다도 취하면 늘 저래.”

진이 시선을 슥 돌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시현 역시 얼굴을 붉히며 - 하지만 시선은 떼지 못하며 -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금안까지 쓰고 계신데요? 저거 심각하지 않아요?”

“괜찮아, 괜찮아. 알아서 잘하겠지.”

티르는 적당히 답하며 일전에 구입한 디지털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티르! 뭘 찍는 거야! 도와… 아아아악 언니!”

시안이 절규하든 말든 티르는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뒷감당이 두렵지 않은 것일까.

“우와… 티르 형 용감하네요.”

“저놈은 애처가가 아니라서 그래.”

“내가 애처가가 아닌게 아니라 댁들이 공처가인 거겠지.”

아무튼 세 남자는 다시 얼굴을 맞댔다. 이 자리에 모인 일동 가운데 그나마 유일한 ‘보통 사람’이라 할 수 있을 레오나는 이미 테이블 위로 뻗은 지 오래인지라 딱히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로드 하고는 상담해 봤어요? 로드야말로 진정 영생자의 고뇌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 같은데.”

시현의 물음에 진은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뭐랄까… 이런 일로 로드께 걱정을 끼치기가 뭐해서… 너도 알다시피 로드가 오지랖이 넓잖아.”

“아니, 뭐… 그렇긴 하죠.”

진과 시현, 티르가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오랜 삶을 산 것은 영혼의 힘의 군주 된 자인 로드 카시리온이었다. 그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세월만 해도 이천 년에 달했고, 영혼의 감식을 통해 알아낸 나이는 일만 이천 세에 달했다.

“뭐… 장모님이야말로 주변에 영생자 밖에 없으니까.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요.”

시현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모르게 오늘 맡은 역할은 고개 끄덕이는 사람인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티르가 다시 진을 보았다.

“린하고는 이야기 해 봤어?”

“미쳤나?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

술기운이 올라서 그런지 진이 평소보다 강한 어조로 되받아치자 그나마 덜 취한 티르가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니, 그래도 본인 문제잖아. 그리고 린도 댁이랑 형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알 거 아냐?”

“…유다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알아.”

“그럼 댁은?”

“대충… 비슷한 그 무언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어찌되었든 20년째 그 모습 그대로니까.”

진의 대답에 티르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모르긴 몰라도 린이가 받는 스트레스가 은근 장난이 아니었겠는데.”

“…응?”

“아니, 생각해 보라고. 자기 엄마 아빠가 안 늙어. 늙는게 좋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이제는 거의 또래로 밖에 안 보이잖아? 나라면 은근히 스트레스 받았을 걸?”

“그, 그런가?”

예상치 못한 지적에 진이 흔들리자 시현이 추가타를 꽂아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학부모 참관 때마다 넌 왜 엄마 아빠가 아니라 오빠랑 언니가 오냐고….”

“으윽….”

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다가 형수님이 좀 예뻐야지. 린도 꽤 미녀긴 하지만… 솔직히 형수님은 너무 심하잖아.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도 장난 아닐 거야.”

“크윽….”

그러고보니 일전에 유다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린 남자친구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만나면 엄마한테 반할게 뻔해! 딸 남친을 뺏어갈 생각이야?! 절대 안 돼!’라고 윽박질러서 의기소침해졌다는… 참으로 유다스러운 이야기.

“크으윽….”

티르가 다시 진의 술잔을 채웠다.

“아무튼 린은 요새 뭐하는데? 그냥 대…학이라고 했나? 아무튼 학교 다니나?”

“학교도 다니고… 히카리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어.”

“오오, 그럼 됐네. 초고위 마법사들은 오래 살잖아. 나중에 마법으로 젊은 외모도 유지하더만.”

티르가 걱정 없다는 듯 호쾌하게 웃자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위 마법사는 아무나 되냐….”

“왜? 재능 없어?”

“없는 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대성할 것 같지는 않아. 존재감도 낮고….”

“으음… 그럼 카시리오션 쪽은 어때? 3단계까지 파파팍 치고 올라가는 거야.”

진은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 말은 일단 네가 3단계부터 찍고 말하시지.”

“3, 3단계야! 나도!”

“어거지 3단계잖아. 영들의 도움을 받은.”

“크윽….”

정말로 분한 듯 신음을 흘렸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티르가 리타이어 하자 시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뭐… 정 수가 없으면 저랑 같이 불로초라도 찾으러 다녀봐요. 진혁네 동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도 같으니까.”

“…그래. 고맙다.”

“아니에요, 자, 한 잔 받으세요.”

시현은 술을 따랐고 진은 받아 마셨다. 그리고 티르는,

“오오, 본게임이다. 동영상 촬영. 동영상 촬영.”

시안의 악에 바친 원망을 한 귀로 흘리며 디지털 카메라를 조작했다.



&



아침 해가 떠오를 시간.

술 냄새가 진동하는 응접실 내부로 묘령의 처자 하나가 들어섰다.

“으윽, 냄새. 취하지도 않는 인간들이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히카리를 따라 머리를 백금발로 염색한 여인, 린은 한 연방인 특유의 검은 눈동자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커다란 카레통에 얼굴을 쳐박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의 뒤통수가 - 가끔 꿈틀꿈틀 거리는 - 심히 신경 쓰였지만 린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오오, 과연 여왕폐하.”

테이블 한 구석에는 레오나가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바른 자세로 앉아 잠들어 있었다. 입가에 남은 침 자국만 없다면 퍼펙트 할 텐데.

“이 아줌마 또 이랬네.”

응접실 바닥에는 속옷까지 반쯤 찢어진 시안이 안쓰러운 포즈로 웅크리고 있었고, 유다가 그 위를 이불이라도 된 마냥 뒤덮고 있었다. 린은 히카리에게 선물 받은 마법 지팡이를 들고 짤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술에 쩔어 축 늘어진 유다를 보이지 않는 힘으로 공중에 띄운 뒤 남자들 쪽을 돌아보았다.

“…으…, 린이 왔니.”

바 위에 나란히 나자빠진 티르와 진 사이로 시현이 손을 들어보였다. 심히 괴로워보이는 표정이었다.

“다들 얼마나 마신 거야? 그리고… 클레어 언니 저거 괜찮아?”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대충대충 답하며 시현은 바 위로 어기적어기적 손을 뻗었다. 뭘 찾아 헤메는지 너무 뻔히 보였달까. 린은 냉장고에서 물 한통을 꺼내 시현에게 내밀었다.

“자, 마셔.”

“고마워.”

그리고 그대로 꼴깍꼴깍. 린은 그런 시현 대신 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유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문을 외워 진의 몸을 공중으로 유영시켰다.

“모셔가려고?”

“어, 아무래도 여기 두는 것보다는 방에 두는 편이 낫겠지. 다른 사람들은 오빠한테 맡길게.”

“으응. 아,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 생겼다며?”

시현이 묻자 린은 피식 웃었다.

“어, 이번이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인가.”

“어?”

“아빠나 엄마나 워낙 참견이 심하니까 여태까지 말 안했을 뿐이야. 특히 엄마는… 아오. 아무튼 이번 녀석도 그다지 오래 만날 것 같지는 않고.”

“…그렇구나.”

“그래, 첫사랑이랑 끝까지 잘되는 케이스는… 이상할 정도로 내 주변에 많지만 세상 전체의 시선으로 보면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키득 웃은 린은 그대로 돌아섰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토했다.

“그런데 린.”

“응?”

“진…형이랑 유다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자기가 꺼내놓고도 이상한 질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린 역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약간은 까칠한 어조로 되물었다.

“술 덜 깼어?”

“아니, 그… 그냥.”

시현이 어영부영 얼버무리자 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눈동자만 굴려서 공중에 나란히 뜬 진과 유다를 번갈아 보더니 히카리의 제자답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우리 아빠랑 엄만데.”

“그래.”

그러면 된 거겠지.

시현은 마주 웃었고 린은 돌아섰다. 축 늘어진 진과 유다가 공중에 붕붕 뜬 상태로 그 뒤를 따랐다.





덧)

레스베리아 왕성, 가장 높은 곳. 평소라면 조용한 그곳에 오늘은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처가가 아닌게 아니라 공처가가 아니라고? 그리고 뭐? 동영상 촬여어어엉?!”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시안이 펼치는 난무를 그대로 얻어맞고 있는 티르.

티르는 비명을 지르는 틈틈이 레오나를 향해 간절한 구원의 시선을 보냈지만 레오나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

“아바마마 왜 맞는 거야?”

순진한 왕세자의 물음에 워치 로벤은 그저 한숨을 내뱉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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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3 129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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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6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5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3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8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7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3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6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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