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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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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71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2.12.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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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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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10쪽

나이트사가 SS 그 날

DUMMY

해가 지고 있었다.



&



지옥의 겁화가 지나간 땅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달빛 아래 황무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집도, 나무도,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졌다.

카뮤는 멍하니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되는 카뮤는 두 손을 늘어트렸다. 오른손에는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한 GPS가 들려있었다.

카뮤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저 노을만 보았다. 뺨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아무 것도 없는 땅.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땅.

카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서러운 울음을 토했다.

황혼이 번졌다. 하지만 카뮤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그런 카뮤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섰다. 카뮤는 여인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엉엉 울었다. 여인은 카뮤의 옆에 앉았다.

여인은 카뮤에게 왜 우냐고 묻지 않았다.

너무나 뻔 한 이유였으니까.

여인은 카뮤에게 가슴을 빌려주었다. 두 팔로 카뮤를 끌어안아 주었다. 여인의 품에 안겨 카뮤는 계속 울었다.

“다 죽었어요.”

카뮤는 여인을 몰랐다. 여인도 카뮤를 오늘 처음 보았다. 하지만 카뮤는 계속 말했다.

“나만 남기고 모두 다 죽었어요.”

카뮤는 ‘그 날’ 다른 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살 수 있었다.

“여기는요, 우리 동네가 있던 자리에요.”

집이랑 학교랑 친구들이랑.

카뮤는 여인의 가슴에서 얼굴을 뗐다.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가 우리 집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카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우, 우리 동네만이 아니에요. 다 없어졌어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었어요. 용왕님들도 모두 다 죽었어요.”

도시가 사라졌다. 나라가 사라졌다. 대륙의 절반이 불탔다. 아홉 마리의 드래곤들이 나섰고, 죽었다.

“붉은 왕이라는 여자래요. 흡혈귀들의 여왕이래요. 나쁜 년인데… 찢어죽일 년인데….”

카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신문도 봤다.

괴물. 마녀.

“다들 욕해요. 다들 그 마녀를 죽이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누구도 나서지 않아요. 나서지 못해요. 그 마녀가 너무 무서우니까.”

드래곤 아홉을 동시에 상대해 모두 죽였다. 대륙의 절반을 불태웠다.

혼자서.

단 혼자서.

괴물이다. 대적할 수 없다. 자연재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복수…할 거예요. 죽여 버릴 거예요. 반드시, 반드시!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카뮤는 악에 바쳐 외쳤다.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외쳤다. 여인은 그런 카뮤를 다시 끌어안았다.

카뮤는 여인을 마주 안았다.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이제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떠올랐으니까.

“엄마가…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 아빠, 친구들.

“엄마가….”

카뮤는 말을 맺지 못했다. 꺽꺽거렸다. 감정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여인은 카뮤를 보듬었다. 눈물을 흘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했다.

“…미안해, 미안해.”

여인은 울면서 사과했다.

사과했다.

카뮤는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의 품을 벗어났다. 멍청한 얼굴로 여인을 보았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

붉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부… 붉은….”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왕 클레어 데스필드는 그저 말없이 카뮤를 마주하였다. 카뮤는 비명을 질렀다.

“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발작하듯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으아아아!”

카뮤는 괴성을 토했다. 이제 겨우 열두 살인 어린 아이는 지금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다. 눈을 꽉 감고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그리고 붉은 왕은 그런 카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단검이 붉은 왕의 배에 꽂혔다. 날카로움이 부드러움을 파헤치는 감각에 카뮤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더 큰 무언가가 카뮤를 움직이게 하였다.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카뮤는 단검으로 몇 번이나 붉은 왕의 배를 찔렀다. 카뮤의 손이 피로 물들었다. 카뮤는 결국 단검을 손에서 놓쳤다. 슬픈 얼굴로 자신을 마주하는 붉은 왕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돌아서서 도망쳤다.

붉은 왕은 카뮤의 뒷모습을 보았다.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대로 누웠다.

해가 졌다.

황혼도 끝났다.

밤이 찾아왔다.

“하지 마.”

붉은 왕은 말했다.

“그 애는 잘못이 없어.”

붙잡기 위한 말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어둠 사이로 밤이 도래했다. 마왕 롤랑드는 바닥에 누운 붉은 왕을 보며 잇소리를 토했다. 쥐어짜낸 목소리를 토했다.

“가자.”

돌아가자. 이런 데 있지 말고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붉은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은 욕지거리를 토했다. 단번에 손을 뻗어 붉은 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강제로 끌어당겨 눈높이를 맞췄다. 욕지거리를 토했다.

“왜 여기서 궁상이야! 미쳐서 그런 거잖아!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네 의지로 그런 게 아니잖아!

붉은 왕은 눈을 떴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눈으로 마왕을 보았다. 울기 일보직전인 마왕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대륙이 불탔어. 사람들이 죽었어.

마왕도 알았다. 붉은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날 봐, 날 보라고! 클레어!”

마왕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호소했다.

“나는 마왕 롤랑드다. 왕을 죽이고 그 신하들을 죽이고 수도를 궤멸시키고 수백에 달할 기사와 마법사들을 죽인 마왕이다!”

롤랑드의 과거. 그가 세컨드 블러드로 각성해서 일으킨 일들.

누이동생을 죽이고, 영지민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까지 끝내 죽이려 했던 왕과 그 신하들에게 한 일들.

“그런 내게 너는 뭐라 말했지? 그런 나를 네가 어떻게 했지?”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마왕의 손에 죽은 기사와 마법사들은 대부분 정의로운 자들이었다.

마왕은 그래서 나날이 죽어갔다. 그 마음이 썩어 들어갔다.

그런 마왕을 살려준 불꽃.

그런 마왕을 다시 일으킨 불꽃.

“슬프면 울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모두에게 빌어! 속죄해! 내가 함께 해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달라.”

아냐, 롤랑드. 너 때와는 달라.

“다르지 않아!”

롤랑드는 다시 소리쳤다.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붉은 왕은 그런 롤랑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달라. 달라, 롤랑드.”

롤랑드도, 붉은 왕 자신도 아는 것.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나는 언제 또 미칠지 몰라.”

롤랑드는 이를 악물었다. 붉은 왕은 계속 말했다.

“지금보다 더 미쳐 날뛸지도 몰라. 그러니까 안 돼.”

그리고 너무 많이 죽었어.

용서를 빈다고 될 일이 아니야.

도저히 속죄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

“너!”

붉은 왕은 롤랑드를 똑바로 보았다.

“너무 많이 죽였어. 책임을 져야 해. 내가 남아있으면 다른 아이들도 힘들어져.”

세상 전부가 흡혈귀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책임을 요구했다.

“웃기지 마! 엘프나 인간의 압박? 우습지도 않아! 겨우 그 정도로 굴복할 것 같아? 그리고 죽는다고 다 될 것 같아?! 웃기지 마! 도망치지….”

롤랑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붉은 왕의 입맞춤이 롤랑드의 말허리를 잘랐다.

롤랑드는 눈을 감았다. 붉은 왕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정열적인 키스가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의미하는 바가 분명한 작별의 입맞춤.

두 사람의 입술이 멀어졌다. 붉은 왕과 롤랑드는 서로를 마주하였다. 붉은 왕은 울면서 웃었다.

“롤랑드.”

롤랑드는 이를 악물었다. 붉은 왕을 끌어안았다. 울지 않기 위해 발악하며, 흘러내린 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넌 바보야.”

붉은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뮤가 그러했던 것처럼 롤랑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 따스함에 얼굴을 묻었다.

달도 없는 밤이 깊어갔다.



&



“노래해 줘.”

공중거성 제네시스의 가장 높은 곳, 엘프들과 인간들과 세상의 모든 종족의 대표들이 모여 지켜보는 곳에서 붉은 왕은 그렇게 말했다. 결국에는 울음을 터트리고 만 올리비에의 뺨을 어루만지며 난처하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올리비에는 울면서 노래했다.

흡혈귀들의 시조들은 미리 준비한 술식을 행하였다.


시간의 흐름을 이용한 완전한 소멸.

전생하는 붉은 왕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기 위한 의식.


죽는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하여 이미 죽어간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롤랑드의 말처럼 그저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붉은 왕은 롤랑드를 보았다. 시조들을 보았다.


안녕.

모두 미안해.


그 이상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다른 말을 해줄 수도 없었다.

붉은 왕은 모두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눈을 감았다.


술식이 행해졌다. 시간의 흐름이 붉은 왕의 영혼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삼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현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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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3 129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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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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