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곡 SS 단막
날카로운 도검처럼 늘어선 빙벽들 사이로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서리 거인들과 서리 용들의 주서식지인 만년설에는 단 하루도 눈보라가 멎는 날이 없었다.
그런 땅에서, 한기의 화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서리 거인과 서리 용을 제하고는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혹한의 땅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좀 더 꽉 안아줘. 춥단 말이야.”
빙벽과 빙벽이 맞닿는 지점에 뚫린 자연 동굴 안을 발열마법을 건 짐승가죽으로 완전히 뒤덮다시피 한 뒤, 바람 한 줄기 새어 들어올 틈 없이 입구를 막았지만 극한의 땅이 지닌 한기 그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칭얼거리듯 말하며 몸을 꼼지락 거리더니 조금 더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의 행동에 남자는 곤혹스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
“왜?”
하얀 머리칼의 여자가 고개를 빼꼼히 들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빛 하나 없어 어둠 그 자체였지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해맑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남자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한 끝에 겨우 말을 만들어냈다.
“저도 일단 남자입니다만…….”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의 남자는 말끝을 흐리며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렸다. 여자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새하얀 목선이, 온기를 나누겠다며 옷을 벗어던진 탓에 고스란히 드러난 속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반응에 키득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불편하면 남자로 변할까?”
“아뇨, 그냥 이대로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재빨리 답한 남자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여자와 하체가 맞닿지 않게 하기 위해 허리를 부자연스럽게 비틀었다. 그리고 몇 차례 시도 끝에 역시나 소용없다는 사실을 확인 한 뒤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로드.”
“자꾸 왜.”
“그냥 마법으로 온도 높이죠.”
“체온이 더 좋아. 그리고 진은 따뜻하단 말이야. 유다가 그런 얘기 안 해?”
“하긴 합니다만…….”
왜 하얀 머리칼이 옷에 묻어있냐는 둥, 왜 로드의 향수냄새가 그리 나냐는 둥의 말을 더 자주 하지만 말입니다.
여자의 천연덕스런 물음에 참으로 한심하게 답한 남자는 한숨을 토했다.
차라리 이게 유혹하는 거라면 마음이 편했으려나. 여자는 딱히 다른 의도가 없었다. 지금 말하는 것처럼 그저 자신의 품이 따뜻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믿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남자 취급 안 해준다고 삐져야 하나.
“…헤헤.”
속으로 갈등하던 남자는 여자의 작은 웃음소리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자신의 가슴에 반쯤 짓눌린 여자의 앙가슴으로 가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끌어올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요.”
“아니, 그냥 참 다행이구나 싶어서. 우리 진이 그때 못 만났다면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었겠지? 지금처럼 기대지도 못하고. 많이 힘들었을 거야.”
여자는 그대로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인 끝에 여자의 어깨를 안았다. 그 새하얀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로드.”
“왜?”
“아뇨, 아무 것도.”
“실없기는.”
남자는 여자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응석을 부리며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자신과 그녀의 양부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이렇게 행동하지 못했다. 달콤한 사랑을 속삭일지언정 그가 걱정할까 두려워 약한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정말로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오로지 남자 혼자뿐이었다. 여자는 그래서 남자를 믿고 의지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것에 감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로드.”
새삼스럽게 그리 말하며 남자는 여자를 좀 더 꼭 끌어안았다.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볼을 살짝 비비며 화답했다.
“잘 자, 진.”
내 동생, 내 부하, 내 친구.
남자는 한참 전부터 눈을 감고 있던 여자를 따라 눈을 감았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잠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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