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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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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3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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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폭뢰신창 SS 생生

DUMMY

폭뢰신창 SS 생生



인간이 무리를 나눈 이후 줄곧 멈추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전쟁이었다..

천하는 제에 의해 통일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 야만족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았고, 동과 서, 남에 위치한 야만족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제는 황실의 통치가 나라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할 만큼 컸고, 때문에 내부에서의 소요 또한 적지 않았다. 유력자들간의 유혈을 동반한 알력, 백성들의 민란, 도적떼와 자경단의 싸움 등 크고 작은 전쟁은 어디에나 있었다.

제가 세워진 지 이백 년하고 수십 일. 그 날도 제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전쟁이 펼쳐졌다.



전쟁은 지극히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소통법이다. 거의 반드시 사람의 목숨이 오가기 마련이었고,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그 수는 수천, 수만까지도 치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대부분의 전쟁은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는 이와 실제로 전쟁을 하는 이가 달랐다.

이 전쟁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보다는 대의가 있는 편이었다.

‘북방 야만족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

징집되고 끌려오고 빚 대신 팔려오고 가지각색의 병사들이 토굴 안에서 추위와 피로에 지친 몸을 웅크렸다.

패잔병들이었다.

제가 넓은 만큼 북방전선도 넓었다. 특히 이번에는 북부 야만족의 왕 툼바라가 열 두 개 부족을 통합해 넓은 범위의 파상공격을 퍼부은 지라 그렇지 않아도 드넓은 북부 전선이 배는 더 넓어졌다.

북방 총사령관 모용편의 손자인 천부장 모용운은 동료 천부장들을 설득해 도합 오천의 병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치고 나가는 싸움을 시도했다. 전선이 넓어진 만큼 북부 야만족들의 공격진 또한 얇아졌다는 점에서 착안한 공격법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공격은 실패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는지, 아니면 도중에 야만족들이 수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의 군대는 북부 깊은 곳에서 고립되었다. 무너지는 적병을 쫓아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이 원인이었다. 토굴에 모인 패잔병들도 나중에야 안 것인데 야만족 왕 툼바라의 아들이 전선에 있었고, 그 목을 취하기 위해 추적을 멈추지 않은 것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포위된 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죽고 죽이는 난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조건 남쪽으로 도망쳤다. 토굴 안에 웅크린 무리들 또한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춥다.”

누구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토굴에 있는 것은 모두 여섯이었고, 대부분이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기껏해야 배급받을 때 처럼 여러 병사들이 서로 뒤엉킬 때 얼굴 몇 번 본 것이 다인 사이였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사내의 말대로 추웠다. 눈발만 날리지 않을 뿐이지 얼어 죽기 딱 좋은 북방의 기온이거늘, 밤이 되니 온도가 더 떨어졌다. 토굴 안은 냉동고나 다름없어 바닥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 화섭자를 가진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불을 피우지는 못했다. 토굴 밖으로 빛이 새어나가면 수백 장 밖에서도 쉬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불 피우자. 여기서 얼어 죽나 발견 되서 싸우다 죽나. 죽기는 마찬가진데 뭘.”

키가 작고 근골이 두꺼운 사내가 그리 말하며 화섭자를 꺼내들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눈동자를 굴려봐야 다른 자들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다만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기에 남자는 불을 붙였다. 미리 챙겨두기라도 했는지 불씨에 천이며 나무며 장작을 대 모닥불을 피웠다.

빛과 온기가 동시에 퍼졌다. 병사들은 꾸물꾸물 온기를 쫓아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다섯 병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여전히 추웠지만 그래도 온기를 쬐니 좋았다. 사람이란 동물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니, 평소라면 시큰둥하게 반응할 작은 행복도 지고의 행복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시뻘건 모닥불에 모두의 얼굴이 드러났다. 죄다 뗏구정물이 줄줄 흐른 것이 영낙없는 거지 꼴이었다. 십대 후반에서 사오십대까지 찾아볼 수 있는 전장인지라 겨우 다섯 명이거늘 그 안에서도 다양한 나이대가 보였다.

“이름이나 말해보지. 지금 자면 뒤질 것 같으니까. 나는 소학이네.”

개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남자가 그리 말했다. 불을 피웠던 작은 남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나는 무수여. 동네에서 건달 짓 하다가 끌려왔지.”

“청우요. 농사짓다가 끌려왔어요.”

“탁이일세. 끌려온 이유야 다 그게 그거지. 고향에서는 포목상에서 일했네.”

“광저. 이름은 아니고 별명인데… 그냥 다들 그렇게 불러서 이름으로 삼고 있수.”

통성명을 하고나니 그래도 아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일 먼저 이름을 말했던 소학이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밖을 경계하듯 입구 쪽에 웅크리고 있던 자가 시선을 돌렸다. 도망칠 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어린 티가 나는 소년이었다.

“천라.”

“천라?”

“천 씨 성에 이름이 라.”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다시 동굴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는 상대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학은 푸근하게 웃으며 다시 말 한마디를 건넸다.

“낮에는 고마웠다. 덕분에 살았어.”

“나도 고맙다.”

“나도 고마워.”

“어린 놈이 잘 싸우더만.”

“무공이라도 배운 거 아녀?”

꼬리를 잇듯 사내들이 한마디씩을 툭툭 던졌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바깥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해 괘씸했지만 사내들은 이내 소년에게서 신경을 끊었다. 자신들 스스로가 말했듯이 소년 덕분에 살아있는 목숨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질서정연한 퇴각이 아닌, 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마구잡이식 퇴각이었기에 패잔병들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다섯은 소년을 따랐다. 귀신처럼 창을 휘두르며 앞이며 뒤며 옆이며 가로막는 자들을 베고 찔러 죽여 넘기는 소년 뒤를 따라 무작정 달렸다. 그리고 그래서 살 수 있었다.

소년은 정말로 무인인 걸까. 애당초 이제 겨우 십대 중반이나 되었을 아이가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전쟁터로 끌려온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사내들은 묻지 않았다. 그저 저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쓰러지듯 잠들었다.



다음날 패잔병 무리는 토굴을 떠났다. 아침까지 불씨가 남아있어 얼어 죽는 일은 면했다. 다섯 사내는 소년이 아침까지 불씨를 지켜줬다는 것을 알았지만 소년은 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앞장섰고 다섯 사내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모용운은 상당히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에 적어도 제의 국경에까지 도달하려면 십일 가량을 나아가야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야만족 놈들이 모용운이 공격을 퍼부은 경로를 그대로 지나서 내려갈 것이라 생각하면 돌아 내려가야 하니 보름 이상 어쩌면 근 이십일 가량이 걸릴 여정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장에 식량도 물도 아무 것도 없는 판국이거늘.

모든 것이 막막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내들은 일단은 소년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소년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대지는 황량했거늘 소년은 무슨 주술이라도 부리는지 매일 같이 짐승들을 잡아왔다. 때로는 토끼였고 어떨 때는 뱀이었으며 가끔은 커다란 멧돼지를 잡아오기도 했다.

본디 고향에서 사냥꾼 노릇을 했다는 광저는 소년의 성과물에 매일같이 기겁을 했지만 소년은 무엇 하나 제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하도 말이 없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중 보니 결국 숫기가 없는 것뿐이었다. 소년이 잡아온 사냥감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고 가끔은 땅바닥에 쌓인 눈을 녹여 먹으며 칠일 가량을 별다른 일 없이 나아갔다.

팔일 째 되는 날, 운 좋게도 누군가 쓰다버린 초목을 발견한 일행은 서둘러 틈을 막고 불을 피웠다. 소년이 잡아온 토끼를 알뜰하게 구워먹은 뒤 팔자 좋게 바닥에 드러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나중에 뭐 할 거냐.”

“고향 내려가서 장가가야지. 애새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둘만 낳아 잘 기를 거다.”

딱 건달답게 적당히 인상 사납고 덩치 좋은 무수가 물었고, 각진 얼굴에 덩치 좋은 광저가 답했다. 무수는 킥하고 웃었다.

“데리고 살 여자는 있냐?”

“있지. 있으니까 꼭 돌아가야 해.”

흔한 이야기였다. 무수는 더 묻는 대신 이번엔 탁이를 보았다.

“넌 뭐 할 거냐.”

키가 크고 마른 편인 탁이는 뜯어진 투구 끈을 어찌해보려다 포기했는지 바닥에 내던지며 답했다.

“글쎄다, 뭐라도 하지 않으려나. 일단은 형님 일이나 도와주지 뭐.”

“뭐하는데?”

“포목점한다고 했잖아. 그러는 넌 뭐할 건데?”

탁이가 쏘듯이 묻자 무수는 씩 웃었다. 드러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기방 차릴 거다.”

“기방?”

“그래, 아주 그냥 고래등만 하게 하나 차려서 주지육림 속에서 살아보련다.”

입가가 실룩실룩한 것이 상상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소학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꿈이네. 꿈이야.”

“못할 것 같소? 살아만 돌아가면 못 할 거 없지, 암.”

소학의 타박을 가볍게 받아친 무수는 이번엔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앉아 창을 손질하는 소년에게 물었다.

“천라, 너는 어떠냐. 나중에 하고 싶은 거 없냐?”

서로 통성명을 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천라는 이름자 외에 말한 것이 없었다. 사내들은 소년의 나이도 몰랐다. 그저 열 네다섯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 뿐이었지.

모두의 시선이 소년에게 모였다. 소년은 입술을 한차례 오므리더니 창을 손질하던 손으로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자식을 낳아야 해.”

“애새끼?”

직설적인 무수의 표현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를 이어야 해. 그것 말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물려받은 가업이라도 있니?”

어린 놈이 대를 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뭔가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더욱이 신묘한 창술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탁이의 물음에 소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가업이라면 가업일 거야.”

“뭔데?”

광저가 바로 물었지만 소년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대답할 생각이 없을 때 소년이 자주 취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어린놈이 뭐 하나 대답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늘상 저러니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래도 염치란 것이 있는 사내들이었다. 소년에게 딱히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광저는 짐짓 호탕하게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을 이었다.

“뭐, 됐다. 있으면 있는가 보지. 너 그럼 여자랑은 자 봤냐? 대 이어야 한다며.”

마지막에 좀 짓궂게 묻자 소년은 다시 입술을 오므렸다. 티는 잘 안 나지만 얼굴도 살짝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탁이가 광저를 탓하듯 말했다.

“이보게, 아직 애잖아, 애!”

“애는 무슨, 우리 중에서 이놈이 제일 셀 텐데. 하는 짓도 요새 보면 제일 어른이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말이야, 열두 살에 첫경험을 했다 이 말씀이야!”

낄낄 거리며 말한 무수는 얼른 소년에게 다가갔다. 낯선 화제에 얼어붙은 소년의 목을 와라가 끌어안았다.

“천라야, 돌아가면 이 형님만 따라와라. 아주 내가 네게 삶의 새로운 환희와 기쁨에 대해 알려주마.”

“지랄한다, 지랄해.”

사내들은 서로 욕지거리를 토하며 웃었고, 소년은 얼굴을 붉힌 채 입술만 오므렸다.



십 일째가 지났다. 크게 돌아내려오느라 시간을 꽤 소진하긴 했지만 앞으로 오에서 육일 정도면 제의 국경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소년이 앞장 섰고 사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인적이 드문 길이었기에 그래도 제법 마음 편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돌연 앞서 가던 소년이 발을 멈췄다.

뒤따르던 사내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저마다의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나름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소년이 보고 느낀 것을 공감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사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천라…야?”

소년 뒤에 있던 소학이 조심스럽게 물은 순간 소년이 지면을 박차올랐다. 그야말로 쏜살같은 기세로 내달렸다. 잠시 멍해있던 사내들은 벌써 십장이상 멀어진 소년을 쫓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소년에게서 떨어지면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너무나 빨랐다. 무인들이 쓴다는 경공이란 것을 쓰는지 죽을힘을 다하는데도 거리가 자꾸 벌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사내들은 달렸다. 소년의 모습을 완전히 놓친 순간에는 그야말로 아찔했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소년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을 버릴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다시 소년을 찾았을 때, 소년은 커다란 곰의 머리를 창끝으로 꿰뚫고 있었다.

사내들은 저마다 바닥에 널브러져서 헉헉거렸다. 그나마 사냥꾼 일을 하며 체력을 다진 광저가 겨우겨우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폈다.

커다란 곰과 그 곰을 죽인 천라와 천라 등 뒤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

‘비명소리라도 들은 건가….’

못해도 백 장 이상을 뛰었고, 광저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비명 소리를 못 들었거늘.

‘저거 진짜 사람인가.’

키가 팔 척을 훨씬 넘길 곰을 단창에 찔러 죽이다니. 날고 긴다는 노련한 사냥꾼도 못할 짓이었다.

소년은 광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광저가 그 시선에 무어라 말을 하려하자 등 뒤에 웅크린 사람에게 턱짓을 했다. 어떻게 해달라는 뜻 같았다.

광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천라 쪽으로 다가갔다. 엎드린 자는 곰이 죽은 지도 모르는지 두꺼운 가죽 옷 너머로도 오들오들 떠는 것이 훤히 보였다. 광저는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다 끝났다 말하며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왜 그러나?”

일으켜 세운 광저의 표정이 순간 굳자 소학이 일어나서 물었다. 무수 또한 호기심이 동했는지 광저 쪽으로 다가갔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여자잖아?”

“야만족이야.”

광저가 바로 말을 이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푸른색이었고, 눌러쓴 털모자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칼은 탁한 금빛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중원인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엄밀히 말해 지금 제와 싸우고 있는 야만족은 아니었다, 그들과는 다른, 저 먼 북서쪽에 산다는 야만족이었다.

여자는 광저와 무수를 번갈아 보더니 눈을 마주하기도 두렵다는 듯 시선을 땅에 떨구며 벌벌 떨었다.

“죽여야 돼.”

광저가 말했다.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들에 거북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말을 이었다.

“이 여자가 여기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죽여야 돼. 돌아가면 우리에 대해 이야기 할 게 분명해.”

어찌되었건 야만족은 야만족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재수 없게 발목이 잡혀 죽을 수는 없었다.

“하, 하지만.”

탁이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 광저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잘하면 짐승한테 죽은 것처럼 만들 수 있어. 물건 여기저기 흩뿌리고 시체만 꽁꽁 숨기면 돼.”

짐승에게 죽은 것으로 알리라. 설사 시체를 찾아 살해당한 것을 눈치채더라도 그때는 이미 일행이 이곳을 떠난 지 오래이리라.

여자는 중원의 말을 아는지 아니면 그저 돌아가는 분위기만으로 위기를 감지했는지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이국의 언어로 웅얼웅얼 말을 토했다. 얼핏 들어도 살려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광저는 여자의 뒷목을 세게 붙잡았다. 그대로 힘주어 누르며 소년을 보았다.

“천라야, 이 여자는 죽여야 한다. 이해하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저가 아니라 여자를 보았다.

“너보고 죽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어.”

광저에게 목이 붙잡힌 여자는 소년을 볼 수 없었다. 소년은 다시 광저를 보았고,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허락이라 판단한 광저는 남은 빈손 하나로 지급받은 검을 역수로 들었다. 날을 곧이 세워 척수를 단번에 꿰뚫을 요량으로 천천히 여자의 목 뒤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도 짐승에게 죽는 것보다는 날 거다. 내세에는 부디…….”

“잠깐, 잠깐만!”

무수가 광저를 제지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번엔 무수에게 향했다.

“왜?”

“거… 죽이기 전에 말이야. 어차피 죽일 거면 말이야.”

무수의 입 꼬리가 음흉하게 변했다. 광저의 얼굴에는 기막히다는 표현이 떠올랐지만 무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전선에서 끌려 다닌 것만 벌써 이 년이 넘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럴 거 아니야? 굶을 만큼 굶었잖아. 어차피 죽일 거면 한 번 어때? 응? 제법 곱지 않아?”

거절해야할 말이었다. 사람의 도리 운운하기에 앞서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여자의 일행이 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잘 봐, 응? 보라고, 광저.”

무수가 광저의 검을 슬며시 밀어내며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턱을 강제로 붙잡아 그 하얀 얼굴을 모두에게 보이게 했다.

중원인과 색목인은 그 미의 기준부터가 달랐지만 그런 것을 떠나 미인이란 기분이 들었다. 무수의 말 때문인지 사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부쩍 음심이 돋는 것을 느꼈다.

광저조차 눈빛이 흔들리자 무수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낄낄 웃으며 한쪽팔로 여자를 끌어안은 뒤 소년 쪽으로 돌아섰다.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천라야, 어떠냐. 너 생각 있냐?”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년은 당혹으로 물든 눈으로 무수와 여자를 보았다.

“자, 천라야. 이게 여자 몸이다.”

무수가 음흉하게 웃으며 여자의 가죽옷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이 움직였다.

무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는 소년이 움직였다는 사실만을 알 뿐, 소년이 자신을 마티 투과하듯 지나쳐 그 등 뒤에 선 것까지는 몰랐다. 나머지 사내들 또한 소년이 창을 휘둘러 거칠게 날아든 화살을 쳐낸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

벼락처럼 외친 소년은 다시 창을 휘둘러 날아든 화상 몇 개를 쳐냈다. 사내들은 바짝 엎드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말에 탄 야만인 일곱이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제길, 벌써?!"

광저가 욕지거리를 토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날이 넓고 긴 야만족 특유의 환도를 뽑아든 놈들이 삼장 앞까지 다가왔다.

소년이 튕기듯 쏘아져 나갔다. 말 위에 탄 기수가 뿜어내는 압박감이란 땅에 발을 붙이고 선 보병에게 있어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지만 소년은 그런 것 따위 모른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기수의 머리보다 더 높은 허공으로 치달아 창을 뿌렸다.

목 하나가 소년의 창끝을 따라 허공을 맴돌았다. 나머지 하나는 쇄골이 부서지고 가슴이 크게 베여 신음과 함께 낙마했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재차 지면을 박차 나머지 무리를 향해 맹진했다. 하지만 야만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섯 중 셋이 소년에게 달려들고 나머지 둘은 소년을 지나쳐 달렸다. 소년의 지시대로 엎드려 있던 사내들이 대경실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은 욕지거리를 토했다. 사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반전했지만 소년에게 쇄도한 야만족 셋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오장 거리를 두고 두 곳에서 싸움이 일었다. 양쪽 모두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았다. 하지만 양상은 달랐다.

"소학!"

야만족 셋 중 둘을 순식간에 더 해치운 소년은 그리 외쳤지만 두 쪽으로 갈라진 소학의 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려나간 탁이의 팔이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였고, 광저의 가슴에도 피가 흘렀다. 어깨를 꿰뚫린 무수는 꺽꺽 거리며 검을 휘둘렀지만 거의 발버둥에 가까웠다.

그 순간 마지막 세 번째 야만족이 말머리를 돌렸다. 소년은 그를 쫓지 못했다. 다섯에서 이제 넷이 된 사내들을 향해 진각을 밟았다.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려던 청우의 등이 크게 갈라졌다. 다섯이 셋이 되었다. 소년이 도약했다. 야만족 둘 모두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허공에서 창과 도가 엇갈렸다.

지면에 착지한 소년의 허리춤이 붉었다. 하지만 두 야만족은 머리와 가슴을 헤집은 창날에 목숨을 잃었다.

"히히힝!"

주인 잃은 군마들이 미쳐 날뛰며 도망쳤다. 주인의 시체를 등에 지고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잡아야 했다. 말은 도망치는데도 큰 도움이 될 터였지만, 그 전에 말 때문에 더더욱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아니, 애당초 이미 한 명을 놓아 보냈으니 부질없는 일일까.

소학은 돌아볼 것도 없는 즉사였다. 청우 또한 척추가 갈릴 때 유명을 달리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도에 베인 허리를 손으로 짓누르며 숨을 골랐다. 광저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는 탁이의 팔에 서둘러 옷을 감아 상처를 지혈했다. 무수는 시뻘개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한 점을 향해 소리쳤다.

"저 찢어죽일 년이!"

멀지도 않았다. 겨우 육장에서 칠장 거리에서 야만족 여인이 바닥을 기어 도망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무수는 악귀 같은 고함을 지르며 여인의 뒤를 쫓았다. 여인은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내뻗었지만 기어서 도망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여인의 뒷목을 낚아채듯 움켜쥔 무수는 여인이 왜 기어서 도망쳤는지 알았다. 여인의 발목은 정상이 아니었다. 길게 상흔이 남은 것이 얼핏 보아도 걷는 게 고작일 것 같았다.

무수는 비명을 지르며 알 수 없는 이국의 말로 애원하는 여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뒤 개처럼 끌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탁이는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고, 소년은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다. 그나마 평시와 비슷한 이성을 유지한 광저가 죽은 야만족들과 여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돌연 여인에게 달려들어 그 옷을 강제로 벗겼다.

범하고자함이 아니었다. 그 배와 등을 드러내 흔적을 찾았다.

“크크큭, 이런 병신 같은!”

광저가 욕지거리를 흘리며 여인의 등과 배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켰다. 문신같은 것이 아닌, 인두로 짓눌러 만든 조잡한 상흔이었다.

“애당초 노예야. 그것도 성노지. 발목 그어서 뛰지도 못하고 느릿느릿 걷는 게 고작인 년이 도망쳤고, 그래서 쫓아온 거야. 씨발. 진짜 재수도 없구나, 씨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만족의 정병과도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여기까지와 이제 살았구나 싶었는데 도망친 노예를 찾아 나온 놈들과 우연히 마주쳐 죽게 생겼다니.

"도망치자. 빨리 도망치자."

탁이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그리 말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놈들이 더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도망친단 말인가. 놈들에게는 말이 있었다. 천라도 무적은 아니었다. 당장에도 지금 허리를 다쳤지 않은가. 더욱이 놈들이 열 명 이상 몰려온다면 천라가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자신들이 죽고 말리라.

놈들은 천라의 실력을 보았다. 그러니 개떼같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광저와 무수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오갈데 없는 분노를 여인에게 쏟아붓고자 했다.

"범해! 범하고 죽여 버려! 어차피 마지막이야!"

무수가 짐승 같은 눈으로 그리 말했다. 광저도 굳이 무수를 말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여인은 끊임없이 울며 무어라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국의 말이었다.

"도망치자, 빨리, 응? 도망치자!"

탁이만이 그렇게 말했다. 얼굴은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광저가 그런 탁이를 붙잡았다. 무수가 울며 소리치는 여인의 옷을 강제로 찢었다. 소년이 벼락같이 외쳤다.

"그만해!"

창대가 무수를 후려쳐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게 했다. 여인 앞에 선 소년은 배신감과 분노로 뒤섞인 무수의 눈에 대고 말했다.

“어차피 들켰어. 그리고 이 여자 잘못도 아니야. 오히려 비명 소리 듣고 달려온 내가 잘못이겠지.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이나 해. 탁이랑 광저를 데리고 남쪽으로 갈 생각이나 하라고!"

평소의 소년답지 않게 단번에 쏟아낸 말이었다. 광저는 이를 악물었다. 소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내가 남을 거야. 그러니까 탁이랑 무수 데리고 도망가."

"아무리 너라도 죽어."

"안 죽어."

"…왜 그렇게 하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애당초 다섯 사내가 살아남은 것은 모두가 소년의 덕분이었다. 소년이 없었다면 애당초 살지 못했고 여기까지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런데 소년은 여기서 다시금 자기가 길을 막는 사이 도망치라 말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소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억지로라도 웃으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지어보인 표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살고 싶잖아?"

광저 당신 살고 싶잖아. 무수도 살고 싶어 하고 탁이도 살고 싶어 하잖아.

광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 인 뒤 칼을 뽑았다. 여자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년은 무수에게 향했던 창끝을 광저에게 돌렸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이지 마."

이 여자를 죽이지 마. 내가 널 싫어하게 만들지 마.

광저는 눈을 감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갑게 생각하면 여자를 죽일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년의 말마따나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광저는 여전히 씩씩거리는 무수와 탁이를 챙겼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소년에게 말했다.

"혹여라도 살면… 나중에 꼭 북쪽 땅 영월성에 들려서 날 찾아라."

"알았어."

탁이도 무어라 말했고, 무수도 결국엔 감사와 당부가 섞인 말을 하고 떠났다. 그렇게 셋을 떠나보내니 여인과 소년만이 남았다.

여인은 무수가 거칠게 벗긴 옷을 엉거주춤 끼워 입으며 울었다. 소년은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흘리는 저 눈물과 깊은 설움만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소학과 청우의 시신을 바로 눕혔다. 매장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한 번 숙여 보인 뒤 소학의 품에서 화섭자를 챙겼다.

소년은 여인을 등에 업고 달렸다.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이십장 정도가만 나아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멈췄다. 주변을 둘러봐 적당한 나무와 바위틈을 찾아 그 밑을 파헤쳤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가 웅크릴만한 구멍을 만든 소년은 여인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여인의 걸음으론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광저에게 딸려 보낼 수도 없었다.

이곳에 숨겨두고 싸우러 간다. 그래서 살아남으면 다시 데리러 온다.

여인은 소년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체념했는지 더는 울지 않았다. 여인은 올해로 열 넷인 소년보다 네 살에서 다섯 살 정도는 위로 보였다. 색목인들의 나이를 짐작키는 어려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몰려오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소년은 땅바닥에 털썩 앉았다. 여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 다섯 사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어차피 여인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살 거야.”

스스로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형들을 죽였어. 결과적이지만… 부모님도 죽였어.”

삼형제였다. 소년의 위로는 두 명의 형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를 대련 중에 죽여 그 혼을 흡수했다. 병약했던 아버지는 수라의 힘을 전해야 한다며 자신에게 계승의식을 치러준 뒤 죽었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단지 자식을 낳고 그 힘을 전해주기 위해서? 언제 올지도 모를 약속의 날에 대비하기 위해서?”

귀신의 혈족. 뇌신의 일족. 언젠가 오고야 말 약속의 날을 위해 사는 자들.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흉신에 대적하기 위해 그 힘을 이어온 자들.

“나는 하고 싶은 게 뭘까.”

탁이는 포목점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광저는 장가를 가겠다고 했고 무수는 기방을 차리겠다고 했다. 청우는 커다란 자기 땅을 가질 거라 했고 소학은 살아돌아가 자식새끼들에게 주책이나 떨며 살고 싶다고 했다.

소년은 그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가족 모두를 잃은 뒤 산에서 내려왔다. 완성되지 않은 수라는 세상에 나서면 안 되는 법이었지만 그런 법칙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세상을 나돌았고 그러다보니 전선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죽고 죽이고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전장.

소년은 숨을 길게 토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여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푸근하게 웃었다.

“우리 말, 아무 것도 할 줄 몰라?”

얼마나 무서울까. 광저 말대로 노예였다면 정말로 힘들었을 텐데. 겨우겨우 도망쳤더니 곰을 만나고, 거기서 또 사나 싶었더니 이번엔 범하겠다고 달려드는 무수 때문에 옷까지 찢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죄다 자신을 죽이려고만 하고. 이번엔 어린놈이 땅에 파묻고는 혼자서 구구절절히 신세 한탄하다가 웃는다.

소년은 실소했다. 이제 그만 가보고자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여인이 입술을 열었다.

“밀리아.”

소년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낮췄다. 여인의 파란 눈동자를 보았다.

“미리아?”

“밀리아.”

여인의 이름이리라. 그녀는 어째서 지금 이름을 말해주는 것일까. 소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반쯤 내밀어진 여인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그래, 밀리아. 나는… 천라야.”

"철라."

"천라."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리 준비해둔 나뭇가지로 구멍을 가렸다. 마지막으로 여인과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여기에 있어,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알아들었을까.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멍을 모두 가린 소년은 돌아섰다. 한 자루 창을 움켜쥐고 기감을 널리 퍼트렸다.

대지를 질타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거센 맹진이 느껴졌다.

서른. 정말로 죽음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숫자.

“다녀올게.”

소년은 말했다. 지면을 박차 똑바로 나아갔다.



&



소년은 살아남았다.

온 몸이 피로 물들고, 전신에 검상이 일곱 개나 남았지만 죽지 않고 살았다.

소년은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대신 여인과 함께 더욱 멀리 돌아 북서쪽으로 갔다. 북쪽 땅의 경계를 지나 서쪽 땅으로 향했고, 수라들의 땅에 돌아갔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색목인인 밀리아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소년은 강했지만 세상이 보기에는 덜 자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여비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돈을 줘도 색목인이 불길하다며 받아주지 않는 곳도 많았다. 노숙을 하는 날이 더 많았고 때때로 북방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일이었다.

불편했다. 혼자일 때보다 모든 것이 어렵고 험난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밀리아는 조금씩 중원의 말을 배웠고, 손발을 동원해가며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나마도 왜곡되는 일 투성이였지만 즐거웠다. 식사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길도 혼자 걷는 것보다는 함께 걷는 것이 좋았다. 어깨를 나란히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밀리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 태어났고, 형제자매는 몇이었고, 어쩌다가 끌려가 노예가 되었는지, 저 먼 땅에서 제의 북방까지 온 연유는 무엇인지.

소년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소년은 많은 생각을 했다. 광저와 무수, 소학과 탕이와 청우가 했던 이야기들, 그네들이 하고 싶다는 일들, 전장에서 본 수많은 죽음과 삶들. 그들 각자가 하고 싶어 했던 것들.

'살아간다.'

밀리아와 여행을 하며 많은 것들을 보았다. 홀로 세상을 나돌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했다.

전염병이 돈 마을을 지났다. 먼저 간 자식을 땅에 묻으며 서글피 우는 어미를 보았다.

기근이 든 마을을 지났다. 자식을 팔아먹는 아비가 있었다.

이제 겨우 초경이나 했을 것 같은 아이가 길바닥에 거적을 깔고 몸을 파는 것을 보았다. 어디 맡기지도 못한 어린 동생들을 옆에 두고 서툰 솜씨로 손님을 끄는 것을 보았다. 없는 돈과 먹을 것이나마 나눠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제 입보다 동생들 입을 먼저 챙기는 누이의 모습을 보았다.

부잣집에 태어나 한평생 호의호식하는 자를 보았다. 투전판에 빠져 처자식을 팔아먹는 광인을 보았다.

하나하나 모두가 삶이었다.

걸음이 느린 밀리아와 함께하느라 여정은 길었다. 거의 일 년 가까이를 여행한 끝에야 서쪽 땅에 닿았다. 찾는 이 드문 강을 건너 수라의 산에 올랐다.

소년은 밀리아에게 함께 살자고 말했고, 밀리아는 참으로 모양 없는 청혼이라며 소년을 타박했다. 하지만 수줍게 웃으며 함께하자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년은 살았다.

밀리아와 처음 관계를 가져 여자를 알았다.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사는 것을 배웠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아이를 보았다. 밀리아가 낳은 아이를 기르며 아버지를 알았다. 밀리아를 보며 어머니를 알았다.

살았다. 살아갔다.

청년은 자주 세상에 나갔다. 역대의 수라들과는 달리 밀리아와 아이를 데리고 세상곳곳을 둘러보았다.

광저를 만났다. 아이를 일곱이나 낳은 탓에 매일 같이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를 도와 호랑이를 잡았다.

무수는 죽었다. 저잣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다 죽었다는데 죽인 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탁이는 포목점을 하고 있었다. 한쪽 팔이 없었지만 그래도 부인 하나를 얻어 자기 닮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청년은 수라의 산에 돌아왔다. 많은 삶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청년의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밀리아는 오래 살지 못했다. 그녀는 집안에 유전된 병 때문이라 말했다. 청년은 온 세상을 돌며 온갖 귀한 약재를 구했지만 소용없었다. 밀리아는 서른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천라의 홍안을 보았다. 그 손을 마주잡고 사랑한다 말한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천라는 죽음을 배웠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천라는 살았다. 살아갔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깨닫고, 삶을 이해하고.



세상이 시끄러웠다. 혈랑마존의 공포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천라는 알았다.

놈이었다. 귀신의 일족이 삼백년 세월동안 기다려온 그 흉신이었다.

천라는 청년이 된 자신의 아이에게 일별했다. 밀리아의 무덤에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주하였다.

흉신에 대적하였다.

삶이 일깨워준, 한 자루 영혼의 창을 들어.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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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81 極限光
    작성일
    13.08.31 21:11
    No. 1

    폭뢰신창을 빨리 봐야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공국의밀사
    작성일
    13.08.31 21:23
    No. 2

    감사합니다. 비록 한 화지만 한 편의 글을 읽은 것같습니다. 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나탈마왕
    작성일
    13.09.01 02:44
    No. 3

    잘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3.09.01 05:42
    No. 4

    블로그에 연재하신 연대기내용 보려면 서이추해야하는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9 취룡
    작성일
    13.09.21 12:39
    No. 5
  • 작성자
    Lv.68 묵의신부
    작성일
    14.03.31 22:16
    No. 6

    폭뢰신창 마지막에 있던 글이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티미.
    작성일
    14.08.17 07:28
    No. 7

    오늘 드디어 폭뢰신창 다봤습니다!!!! 최근 한 소설 3~4개를 같이 보느라고 완독하는데 시간이 꽤나 걸린... 이 SS는 폭뢰신창 이북버전으로 수정전의 버전인가보네요..ㅎㅎ
    그런데.. 수정하시면서 오타가 생기신듯!!!! 책에는
    "소년도 자신의 이야기를 햇다. ~ 소년은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사이에 천화는 밀리아 처럼 울지 않았다.라고 나오네요.. 천화라니!!! 천라인데!!ㅋㅋ
    이 천라가 천화의 조상인 그 최강의 수라 맞죠??? 무튼... 이것보다 궁굼한게...
    여기 나오는 밀리아는 나사에 나오는 밀리아랑 연대기식 동명이인인가요??? 그러기에는 너무 약하기도하고 비중이나 아우라가... ㄷㄷㄷ ㅠㅠ
    밀리아 연대기에 나오는 여캐중 호감도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캐릭터인데.. ㅠㅠ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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