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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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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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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2.12.0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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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DUMMY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광활한 별들의 바다를 건너, 무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세상을 인식한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세상에 비유하자면,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생명의 수는 그야말로 한손에 겨우 쥘 만큼의 양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날 이후, 생명은 자신이 태어난 별에만 머물지 않았다. 깊게 내린 밤 너머 저 하늘에 펼쳐져 있던 별의 바다를 건너 광활한 우주에 자신들을 퍼트렸다.


그런 별들 가운데 하나,

남자는 스스로를 디-오, 선택받은 종족이라 부르는 자들 앞에 섰다. 그들의 신을 마주했다


남자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흔히 신사복이라 부르는 정장이었다. 그 복장은 이제는 사라진 나라인 영국이란 곳의 계보를 잇는 것이었다. 스스로 메피스토 펠레스가 되어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악마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남자는, 왕의 마법사는 고개를 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 너머로 디-오들의 신을 보았다.


제법 괜찮은 힘이었다. 생명에 영향을 끼쳐 진화를 이끌고, 그들의 생로병사를 좌지우지할 만한 존재였다. 불로영생을 구사하며 수만년을 살아왔으니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왕의 마법사 사기꾼 모자장수 생 제르몽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 감히 창조신을 참칭하느냐.”


신은 하나다.

이 세상에 신은 오로지 하나다.

신은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신이 존재한다 하여 그가 피조물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오만일 것인가.


디-오들의 신이 노했다. 에너지체라 해도 좋을 붉은 그것은 그 힘을 역사하였다.


생 제르몽은 보았다. 세상의 시스템을 뒤틀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것 없이 그저 보았고, 거짓된 신을 시스템의 뒤틀림 속에 가둬 끝내 소멸시켰다.


거짓된 신이 소멸하였다.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도, 어마어마한 역사를 보이지도 못하고, 그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어 소멸하였다.


자신들의 신이 ‘악마’를 무찔러 주리라 믿었던 디-오들은 당황했다.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래도 용기를 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용기가 아닌 그저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어 소리를 낸 것만은 분명했다.


“다, 당신은… 시, 신….”


모르는 언어였다. 생은 디-오들의 언어를 몰랐다. 애당초 인간과는 전혀 다른 형상을 한 외계인들의 문화나 관습 같은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생은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통해서 답해주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 고작해야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신을 칭할 수는 없다.


‘나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신의 대행자를 돕는 자. 그를 곁에서 보필하는 자. 그의 친구였으나 이제는 그의 손과 발이 된 자이다.’


왕.

엡솔루트 원의 유일무이한 대행자.


생 제르몽은 디-오들을 보았다. 그들 모두에게 물었다.


‘함께 하겠느냐?’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생, 그만 일어나, 생.”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생은 멍한 얼굴로 눈을 떴다. 초록빛 머리칼이 그런 생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좋은 냄새. 그리고 보이는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 사랑하는 이의 얼굴.


“…메키도?”

생이 현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멍청한 목소리를 토하고 말았다. 메키도가 어째서 여기에?


“어제 좀 무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잠 자는 거 아니야?”

메키도는 짓궂게 웃으며 생의 뺨을 어루만졌다. 생은 기억을 더듬었다.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메키도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 그것도 알몸인 채로.


생은 손을 뻗었다. 자신 위에 올라타 있는 메키도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옆으로 살짝 굴러 위와 아래를 바꾸었다. 그대로 메키도의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늘고 긴 목을 탐했다.


메키도가 몸부림쳤다. 키스하기 위해 달려드는 생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지만 이내 생을 밀어냈다.


“헤이, 헤이. 지금은 안 돼, 아침에 아샤랑 펠튼을 만나기로 했잖아?”

생은 눈을 깜박였다.

아샤와 펠튼.

둘을 만나기로 했다.

기억에 있었다.

분명 아샤와 펠튼과 함께 하던 시절.

짧게나마 메키도와 연인으로 지냈던 시절.



&



“아샤?”


아샤는 걷고 있었다. 생에게 뒷모습만 보였다. 첨탑을 내려가고 있었다.


생은 인지했다. 첨탑 위. 내일은 최종결전의 날.

그래서 아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샤가 자신이 황제와 동귀어진 할 것을 말했다.

생 자신만은 울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샤!”

생은 아샤를 불렀다. 그 뒷모습을 붙잡았다.


현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 그래서 ‘후회’했었던 일.


아샤가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멈춰 섰다. 생은 비명처럼 외쳤다.


“희생하지 마라! 내가 돕겠다! 내가… 내가… 도울테니까!”

황제는 이미 창조자인 생의 힘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생은 왕의 마법사였다. 사기꾼 모자장수였다.

악마의 저주는 끝내 그 적을 말살하리라.


“그러니 사라지지 마! 그렇게 죽지 마!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행복해질 수 있…!”

생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샤가 돌아섰다. 생을 보았다. 슬피 울며 웃었다.


“이미 너무 늦었어요, 생”


과거는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으니까.



&



“혈랑마존이시여, 정파라 칭하는 무리들이 몰려들고 있사옵니다.”

귀제갈 사마첨의 보고에 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인지했다.


세상 동방의 분열세상 가운데 하나.

여기서 인간들하고 드잡이질을 했었지.

몇이나 죽였더라. 모르겠다.


“메키도는?”

메키도가 보고 싶어. 메키도는 어디 있지? 왜 기껏 꾸는 꿈 속에서 너 같은 문어대가리를 봐야 하는 건데?


“마존…이시여?”

평소와 다른 혈랑마존의 모습에 사마첨은 당황했다.

생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눈을 떴고, 다시 눈을 감았다.



&



“펠튼! 아샤!”

귀부인들이나 입는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의 메키도가 질색을 하며 소리쳤다. 그런 메키도를 마주하고, 서로 꼭 붙어 앉아있던 두 아이는 생글생긋 웃었다.


“나는 아샤꺼.”

“나는 펠튼꺼.”

까르르 웃은 두 아이는 그대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메키도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역시나 이름을 잘못 붙인 걸까? 아니면 정말 환생이라도 되는 것일까. 친남매에, 거기다 쌍둥이인데 둘이 서로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다.


“쿠쿡.”

“응?”


작게 울린 웃음소리에 메키도가 돌아섰다.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크.’

어둠 속에서 손으로 얼른 입을 가린 생은 손가락을 튕겼다.



&



“생, 여기서 뭐해요. 이런 곳에서 자면 감기 들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생은 눈을 떴다. 왕의 우주선, 그 거대한 이동도시에 마련된 거주구 광장. 겨울을 재현해 하얀 눈이 내리는 곳.


언제적 일일까. 대체 얼마나 오랜 옛날의 기억일까.

생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은 허리에 닿을 만치 길었고, 붉은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났다.


“공주…?”


부름에 공주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생에게 손을 뻗었다.



&



생은 눈을 떴다. 벽에서 등을 뗐다.


왕의 애첩을 자처하는 장미의 기사가 분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창녀 같으니! 왕께서 그리 총애하셨거늘 감히 배신을 해?!”


공주는 왕의 뜻을 거슬렀다. 반박하였다. 왕에게 맞섰다. 더욱이 혼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왕의 기사였던 황금의 거인을 비롯하여 많은 자들을 선동하였다. 왕의 가신들을 반으로 갈라, 그들을 이끌고 왕에게 대적했다.


“찢어 죽일 거야!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결국 이긴 것은 왕이었다. 하지만 왕 또한 잠들 수밖에 없었다.


생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한줌도 남지 않은 우주의 생명.


“밤이 온다.”



&



생 제르몽은 왕의 마법사였다.

그 이름을 사용하기 전부터 그는 왕의 친구였다.

왕은 참으로 오랜 세월 만에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그 옛날, 기억도 나지 않는, 이제는 기억할 수도 없는 그 옛날처럼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말했다.


“공주를 부탁한다, 생. 아니, 내 친구…”



&



“생?”

생 제르몽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메키도가 있었다. 얼굴위로 쏟아진 녹색 머리칼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생 제르몽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 마.”

낮게 으르렁 거린 순간 마법사의 권능이 길잡이의 권능을 파훼했다. 메키도의 모습에서 길잡이 토끼의 모습으로 돌아간 패스파인더는 입술을 삐쭉였다.


“어젯밤엔 그렇게 좋아해 놓고는!”


태고의 악마는 자신의 벗이자, 동료이자, 섹스 파트너이자,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연을 상대하기가 귀찮았다. 그대로 세상의 시스템에 녹아들었다.


“야, 어디가!”

길잡이 토끼가 그런 마법사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마법사는 꿈에서 깨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묘한 충동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생!”

마법사는 길잡이에게 윙크했다. 그녀의 손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영혼을 날려보냈다.



&



세상 엔트리아.

미쳐버린 세상 이데아가 소멸한 현재, 이제는 가장 중요한 세상. 가장 위험한 세상.


그곳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검은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하얀 머리칼의 여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영웅왕 필리우스 하이메슈트는 ‘아’하고 입을 벌려보라는 하얀 여인의 요구에 아주 살짝이나마 얼굴을 붉히며 입을 벌렸고, 그 옆에 선 검정 일색의 남자는 소름 돋는 다는 듯이 자신의 양팔을 끌어안았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야유를 보내거나 낄낄낄 웃으며 영웅왕을 놀렸다.


하지만 영웅왕은 꿋꿋이 입을 벌렸고, 하얀 여인은 그런 영웅왕의 입 안에 고기 한 점을 밀어넣었다. 꼭꼭 씹어 삼키는 영웅왕에게 밝게 웃어보였다.


여전하구나.

여전…하구나?

공주가 아니야.

공주가… 아니야?


생 제르몽은 고개를 돌렸다. 왕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곳엔 무슨 용무냐, 사기꾼 모자장수.”


세피로 아르하시타. 세상 엔트리아의 수호자. 엔트리아의 경비원.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두 모여서 하하호호 웃고 있을 때도 끼지 못하고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불쌍한 작자.


“아니, 아무 것도.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태고의 악마는 물러섰다. 악마의 저주도 저 괴물에게만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저 열세 장 검은 날개의 파괴자에게는 도저히 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애당초 딱히 목적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가라.”


세피로는 짧게 말했고, 생은 얼른 손가락을 튕겼다.



&



생 제르몽은 세상 엔트리아를 떠났다.

세상과 세상의 틈바구니에 홀로 섰다.


왕.

왕의 가신.

공주.

세상.

밤.


사기꾼 모자장수는 모자를 벗었다. 천년동안 지치지 않는, 결코 지쳐서는 안되는 가엾은 마법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염소 수염을 괜스래 잡아 뜯었다.


“메키도나 보러 가자.”


짐짓 경쾌하게 말한 악마는 손가락을 튕겼다.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지.


왕이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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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1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5 56 9쪽
»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5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8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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