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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53,061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2.12.05 13:50
조회
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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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글자
19쪽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DUMMY

하늘이 높았다.

파랗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생은 고개를 꺾었다.

대지는 붉었다.

부서지고 갈라지고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생은 숨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생명을 부여잡고 대지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진정한 여덟 드래곤 모두와 싸우고도, 저 투귀들의 왕 아수라와 싸우고도 건재한 그가 서 있었다.


절멸제.


그는 황제였다.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흡수하는 마신이었다.

“놈은 지쳐있다. 여기서 끝을 내야한다.”

저 먼 하늘에서 노래하듯 들려온 좋은 꿈의 목소리에 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된 싸움으로 황제는 지쳐 있었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그러기 위해 모였다. 약속의 날이 아님에도 이 자리에 함께 하였다. 그러니 동지들이여, 이제 종언을 고하자.”

연극조의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생은 시선을 돌렸다. 패잔병 기사, 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일천 여 왈라키아 기사단을 이끌고 서 있었다.

“저자가 왕의 적이라면 그저 벨 뿐.”

날카로운 목소리는 레이디 일렌시아의 것이었다. 백염공 나이틀리와 적염공 키릭스가 그 옆에 서 있었고 수백의 장미 기사단이 그 뒤를 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라-!”

상처 입은 고대의 괴수는 포효로서 자신의 뜻을 알렸다.

“이기려면 지금 뿐이야. 다음은 없어.”

길잡이 토끼는 그녀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생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일파만파의 검을 뽑아든 황제를 보며 생각했다.

‘이길 수 있을까?’

황혼의 거인과 왕의 그림자를 제외한 모두가 이곳에 모였다. 좋은 꿈마저 나선 이상 이 세상에 대적치 못할 적이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렵다.’

생은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 왕 이외에 다른 자에게서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 저 자는 진정 황제로구나.’

킥킥 웃는 것으로 공포를 달랜 생은 숨을 골랐다. 전신에 마력을 이끌었다.

“간다.”

좋은 꿈의 목소리.

칠백의 영혼 담은 편익을 펼치는 황제.

왕의 가신들은 움직였다.



&



“왜 이제와서 황제의 마이너 카피를 만들겠다는 거지?”

그날의 대전이 있었던 것도 이미 수천 년 전인데. 좋은 꿈의 물음에 생은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동그랗게 말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될 것도 없잖아?”

밑도 끝도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은 꿈은 동그란 테이블에 모여 앉은 모두에게 물었다.

“투표로 가지. 원탁은 둥그니까. 일단 나는 찬성.”

좋은 꿈이 가볍게 손을 들며 옆자리에 앉은 길잡이 토끼를 바라보았다. 묘신 패스파인더는 미간을 한차례 모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반대. 그 지긋지긋한 놈의 카피를 만들어서 어디다 쓴다구.”

패스파인더는 신경질적으로 홍차를 들이켰다.

“나도 반대에 한 표 걸지.”

레이디 일렌시아는 짧게 말한 뒤 케이크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조금 험악하게 씹어 삼키는 것이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동지들이여, 허나 나는 찬성한다.”

패잔병 기사는 언제나처럼 연극조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어라 일장연설을 하려 했지만 좋은 꿈이 손을 흔들어 소리를 차단했다. 찬성이 둘에 반대가 둘. 고대의 괴수는 지금 이곳에 없으니 캐스팅 보트를 쥔 것은 생이었다.

“발안자가 반대할 리는 없으니 찬성이 더 많군.”

“그렇네.”

좋은 꿈은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파인더와 레이디 일렌시아는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고 패잔병 기사는 소리 없는 연설을 계속했다.

“장소는?”

“세상 일광. 놈들이 아직 거치지 않은 세상이 좋겠지. 분할구역도 잔뜩 있고.”

“괜찮군.”

“괜찮지.”

좋은 꿈은 홍차를 들이켰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잡지를 한 장 넘기며 말했다.

“만들어라, 우리들의 마법사여.”

“만들겠다, 우리들의 인도자여.”

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에게 인사하며 사라졌다.



&



황제는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예상대로 세상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황제는 가족을 만들었다.

생은 생각했다. 어찌할 것인가.

생은 바라보았다. 저 황제가 가족을 만들고 그들 사이에 안주하는 것을.

‘가족, 가족이라.’

생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바라보았고, 이내 결정하였다.

‘저울추를 맞추도록 하지.’

생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역시 가족을 만들었다.



&



황제가 진격했다.

황제가 세상을 불태웠다.

세상은 별의 아이를 낳았고 별의 아이는 세력을 모았다.

생은 별의 아이에게 접근하였고 그녀의 가족이 되었다. 그녀가 맞이한 새로운 가족들의 차남 역할을 하였다.

그 세월은 십년이 채 되지 못하였다.

이미 수만 년을 넘게 살아온 생의 인생에 있어 그저 한순간도 되지 못할, 그런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strong>그것</strong>을 자각하기 전에는.



&



황제와의 최종 결전이 있기 일주일 전, 이동 요새의 꼭대기에 선 생은 턱을 긁적였다.

“결국 넌 이길 생각이 없는 거네.”

생의 앞에는 금발의 여인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 쥔 유리잔 안에는 붉은 포도주가 가득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별의 아이 아샤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뇨, 그게 우리가 이기는 거예요.”

명목상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아샤는 생을 존대했고 생은 아샤를 하대했다. 생은 턱을 긁적이던 손을 내려 팔짱을 꼈다. 한참이나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던 끝에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네 말대로 우리는 이길지 몰라도,

너는 죽게 될 텐데.

너는 이기지 못할 텐데.

황제가 사라진 세상에 너 역시도 없을 텐데.

“그 자식 많이 울 거야. 메키도도 남 몰래 엉엉 울겠지.”

그 둘만이 아니야. 록은 스스로를 자책한 끝에 죽을 때까지 커다란 부채감에 시달리겠지.

캠벨 그 착한 아이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 거야.

아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고, 어렵게나마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 당신에게만 말하는 거예요. 당신은 울지 않을 테니까.”

생은 팔짱을 풀었다. 입 꼬리를 괴롭게 말아 올렸다.

“나도 일단은 널 꽤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좋아한다’는 펠튼이나 메키도의 ‘좋아한다’와 조금은 다른 거겠죠. 당신은 마법사니까.”

생은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아샤의 옆에 가 주저앉았다. 그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긁적였다.

“뭐, 좋아. 네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난 도울 수밖에. 하지만….”

생은 말끝을 흐렸다. 아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새카만 밤.

달도 별도 모습을 감춘 침묵의 밤.

“정말로… 만족하는 거야?”

네가 바란 결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잖아.

넌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 했잖아.

펠튼의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생.”

아샤는 고개를 들었다. 생을 바라보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고 힘겹게 미소를 그렸다.

“저는 만족합니다.”

그 처연한 미소를 본 순간 생은 소용없음을 알았다. 진정으로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아쉬워….

생은 눈을 깜박였다.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샤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술에 취한듯 볼이 발갛게 물든 아샤. 그런 그녀가 했던 말들. 그런 그녀가 이야기해왔던 것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저 눈에 담긴 수많은 감정.


<strong>“알고 있구나.”</strong>


부지불식간에 말이 나왔다. 똑같은 하대였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하대가.

아샤는 웃었다. 너무나 처연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아는 것일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탓하지 않는 것이냐.”

“탓해서 무얼 하겠어요.”

아샤는 킥하고 웃었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당신은 신인가요?”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럼 당신은 절대자인가요?”

“나는 절대자가 아니다.”

아샤는 술병을 깨끗이 비웠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그러다 말했다.

“왜 그랬나요.”

“말할 수 없다.”

“나는 우리는 당신의 장난감인가요.”

“…말할 수 없다.”

“제가 우스운가요.”

“말할 수… 아니, 그렇지 않다. 절대로 우습지 않…다.”

“드래곤들 중 일부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 역할 놀이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죠. 유희라나 뭐라나… 이것은 당신의 유희인가요?”

“…모르겠다.”

아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은 흠칫 놀랐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샤는 그런 생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비틀비틀 발걸음을 떼었다.

생은 생각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저 아이를 붙잡아야 했다. 붙잡아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생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잘난 마법도 무엇 하나 부리지 못했다.


아샤가 멈춰 섰다.


여전히 등만을 보인 채였지만 멈춰 섰다. 그대로 말했다.

“나는 싸울 거예요. 펠튼과 메키도와 캠벨과 록과… 모두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요.”

아샤의 어깨가 작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한순간 고개를 숙였던 아샤는 이내 다시 어깨를 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란이 죽던 날… 기억하나요?”

아샤의 물음에 생은 숨을 삼켰다.

엘란이 죽던 날.

엘란이 모두를 위하여 희생한 날.

“당신은 그날 슬퍼했어요. 당신이 그것을 인지했든 아니든… 당신은 분명 그날 슬퍼했어요. 울진 않았지만 슬퍼했죠.”

아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멍하니 선 생만을 남겨둔 채 그대로 걸어 아래층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최종 결전의 날.



아샤가 죽었다.



&



킥.

킥킥.

킥킥킥.

킥….

킥킥….

킥킥킥….

킥….



아샤가 죽었다.

그 아이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펠튼이 울었다.

메키도가 울었다.

록은 다 죽어가는 몸으로 울부짖었다.

캠벨은 아무 말도 못하고 혼절했다.

하지만 생은 울지 않았다.

그날 아샤가 말했던 그대로, 생만은 울지 않았다.



생은 생각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생각하고 생각했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와 또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생각하고 생각한다.

“하늘을 대신해 우리가 네놈을 벌하리라!”

생은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상대가 누구인지 인지했다.

백포를 걸치고 장검을 든 남자는 당금 천하제일고수로 손꼽히는 검신 용화성이었다.

“혈랑마존!”

마천문 장문인 검제 백야흔의 일갈을 들으며 생은 생각했다.

생은 이곳에서 혈랑마존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제까지와 달리 그저 작은 규모의 장난질을 하나 벌여보았다.

아샤는 이것을 유희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 자신에게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유희일까? 너무나 길고 긴 인생, 왕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그리고 그 훨씬 전부터 이어온 기나긴 인생 때문에 지루해 미쳐서 놀고 있는 것일까?

혈랑마존으로서 많은 인간을 죽였다.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죽었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죽었다.

생은 생각했다.

왜 자신은 울지 않았을까.

아니 왜 자신은 울지 못했을까.

아니 애당초 왜….

자신은 슬퍼했던 것일까.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소, 시작합시다!”

진선도 제일고수 도신 태상진인이 지면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무림의 열두 지존이라 숭배받는 사황오제삼신이 저마다의 절기를 펼쳤다. 생은 고개를 들었다.


“시끄러, 병신들아.”


말과 함께 마법이 펼쳐졌다. 사방에서 무지개가 꽃피었고 밤과 어둠과 빛과 낮과 불꽃과 바람과 번개와 폭풍우가 발생했다. 삼라만상을 혼란케 하는 모든 현상들이 일어나 무림고수들을 뒤덮었다.



생은 생각했다.


생 자신은 악마였다. 메피스토 펠리스였다.


파우스트에게 갖은 호강을 시켜줘 놓고도 결국 그 영혼을 차지하지 못해 광분하는 악마였다. 가엾은 스파이디를 과거로 되돌려 보낸 마블 코믹스의 악마였다. 호쾌한 포효와 함께 도끼를 휘두르는 바바리안의 휠윈드에 무참히 썰리는 메피스토 펠리스였다.


악마는 이미지였다.

인간은 악을 인지했고, 그것을 보다 인지하기 쉽게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것은 나쁜 용이었고 그것은 사탄이었고 그것은 루시퍼였고 그것은 악마였다.

벨제브브가 악마들의 왕자가 되고 파리 대왕이 되었듯이 메피스토 펠리스는 악마였다.

아스모데우스가 신의 자리에서 악마의 자리로 굴러 떨어지고, 조로아스터교를 지나 기독교에 와서는 끝내 검과 정염의 마왕이 되어 처녀를 탐하는 악마가 되었듯이 파우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각인된 그것은 메피스토 펠리스였다. 그리고 그것은 생이 왕의 가신이 된 날 선택한 스스로의 이미지요 롤 모델이요 캐릭터였다.


생은 킥킥킥 웃었다.

글러먹었다. 어차피 다 글러먹었다.

생은 아샤를 생각했다.

가족들을 생각했고,

메키도를 생각했다.


데빌 네버 크라이.

데빌 메이 크라이.


생은 킥킥 거리며 웃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



생은 그 후로 많은 일을 했다.

세상 강철의 구세주에서 일을 벌였고 또 신나게 싸웠다.

그 밖에 많은 곳에서 유희를 즐기고 또 즐겼다.

기껏해야 10년도 안 되는 세월, 그의 인생에 있어 찰나도 안 되는 세월.

하지만 생은 결코 세상 일광응 잊지 못했다.

결국에는 다시 세상 일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다시 깨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가 다시 세상을 불태우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펠튼이 죽었고,

메키도가 울었다.



&



생은 황제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생은 황제에게 연민을 보내지 않았다.

생은 머나먼 옛날 자신이 가졌던 가족들을 떠올려 보았다.

왕을 만나기 전 자신의 삶. 왕을 만나고, 왕이 왕이 되기 전에 누렸던 자신의 삶.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안녕, 안녕, 안녕.”

황제가 죽었다.

새로운 별의 아이가 이 세상을 구했고 생은 내기에서 이겼다. 메키도는 시집을 갔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마침내 행복을 되찾았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생은 록의 무덤 앞에 서서 익살스럽게 웃었다.

저 바보 같은 큰형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샤와 모두를 생각하며 죽었지. 거기에 생 자신이 끼어있었다니 원.

생은 무덤에 술을 뿌렸다.

“메키도에겐 말하지 않았어. 메키도도 알고 있겠지만 확인받고 싶어 하진 않았으니까.”

록의 죽음. 그들의 장형의 죽음.

왜 무덤을 만들었을까.

왜 그가 죽기 직전에나 그를 찾아갔을까.


생, 펠튼과 메키도를 부탁한다. 너를 믿으마.


장형, 끝까지 우리의 장형. 끝내주게 멋진 형의 유언.

생은 술을 뿌렸다.


메키도가 보고 싶었다.



&



“애를 둘이나 낳고도 여전하네.”

싱글싱글 웃으며 건넨 말에 메키도는 딱딱하게 웃었다. 손가락 끝에 녹색 나염을 일으키며 사나운 눈초리를 날렸다.

“맞는다.”

“네, 누님.”

킥하고 웃은 생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너무 좋아해서 확 보쌈 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든 어린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

“보긴 좋은데… 애무래도 쟤들… 이름을 잘못 지은 거 아냐?”

사이가 좋은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니까. 어째 미묘한 생의 물음에 메키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것 뿐?”

“아니, 뭐… 음…. 그냥 잘 지내나 보러 온 거니까…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적당히 답한 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이제 인류 제국의 황비가 다 되었는지 헐벗은 복장 대신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자신의 누이를 바라보았다.

“잘 살아. 또 보러 올 테니까.”

거짓말은 가볍게, 말하는 자신도, 듣는 자신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자신이 몰래 찾아와서 슬쩍 보고 가는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만나고 가는 일은 없겠지.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드니까.

더 이상은 그런 자신을 감내하기 힘드니까.

모자챙을 가볍게 내리는 것으로 인사한 생은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 저 너머로 사라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생.”

부름에 생은 동작을 멈추었다. 어쩐지 모르게 애절함이 묻어난 목소리에 자신의 누이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타오르는 불꽃, 녹색 눈동자.

최후의 대장장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 두 눈으로 자신의 마지막 남은 남매를 바라보았다.

“난 네 가족인거지?”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준 것일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생은 웃었다. 누이의 물음에 진심으로 응답했다.

“물론, 아샤도, 너도, 펠튼도, 록도, 캠벨도, 엘란도 모두… 이 사기꾼 모자장수의 가족이지.”

그것이 설사 아샤의 말대로 유희였다 할지라도,

좋아했으니까.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메키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래, 믿을게.”

“응, 믿어도 좋아.”

가볍게 답한 모자장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손가락을 퉁겼다.

“안녕.”

안녕 나의 사랑하는 누이.

안녕 나의 사랑하는 가족.

죄책감을 가진 악마는 엉터리니까. 이제 그만 떠나야겠지. 파우스트를 놓치고 분통을 터트리는 메피스토처럼 혼자서 발이나 굴러야겠지.

“안녕.”

메키도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생은 모자챙을 깊숙이 숙였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



“아샤.”

“메키도.”

“록.”

“엘란.”

“캠벨.”

“펠튼.”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 생은 지팡이를 짚었다. 이 세상 최초의 악마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과연 엉터리 세상에 어울리는 구나.

“악마는 악하기 때문에 악마야. 종종 사람들은 그것을 잊곤 하지.”

메피스토 펠리스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수천년 역사동안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뒤집어 쓴, 이제는 묵고 묵은 태고의 악마는 손가락을 놀렸다.

그는 마법사니까.

그는 영원히 지쳐서는 안 되는 마법사니까.

“이것은 악어의 눈물.”

그 모든 비극을 낳은 자가 흘리는 엉터리 눈물. 그러니 빗속에 묻어둬야지.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악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도록.

안녕 아샤.

안녕 메키도.

안녕 모두들.

사기꾼 모자장수는 빗속에서 미소 지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했다.

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자신의 하나 남은 가족이 행복할 수 있도록.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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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31 눈솔
    작성일
    13.07.05 12:45
    No. 1

    음... 미묘하네요..
    그래도, 생은 나빠요. 그의 감정은 스스로가 말한데로 악어의 눈물이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아스트리스
    작성일
    13.07.19 03:19
    No. 2

    생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들ㅠㅠ...
    악역이지만 이렇게보니 멜랑꼴리하네요.
    그나저나 얘가 혈랑마존이었구나ㄷㄷㄷㄷ백야흔도 나오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파이어와인
    작성일
    13.09.03 01:16
    No. 3

    혈랑마존이 생이었군요 ㅎㄷㄷ...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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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2 129 5쪽
13 나이트사가 SS 메데이아 +4 12.12.13 3,431 26 9쪽
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0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5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4 52 12쪽
»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7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5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5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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