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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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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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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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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글자
22쪽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DUMMY

강철의 기사들 SS #4 성인식



세상에는 용병이란 자들이 있었다.

용병.

돈을 받고 무력을 파는 자들. 푼돈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

용병은 싸우는 자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싸움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하였다. 상단 호위 일도 하였고, 몬스터 토벌 일도 하였고, 영지 전에 병사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값싼 무력. 하지만 분명한 무력. 그렇기에 국가는 용병들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용병들은 뭉치지 못했다. 다른 전문직들이 그러하듯이 조합을 만들지도 못했다. 용병단 역시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다.

사람들은 용병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거칠었다. 그들은 살인과 싸움에 익숙했다. 정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용병들도 자신들이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푼돈에 목숨을 걸다보니 그들의 감각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사물을 가늠하는 척도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살인마, 강간범, 무장 강도.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대륙 사대국 가운데 용병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나라는 호른이었다. 호른은 상업이 발달했다. 물류의 이동이 활발했다. 용병들의 주된 업무는 상단의 호위였다.

로엔그린 상회는 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수한 상회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상회들이 세워졌다 무너졌다는 반복하는 마당이니 일백년이나 그 세를 이어왔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밤이 어두웠지만 달이 밝았다. 로엔그린 상회를 상징하는 성배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 아래 모여 앉은 용병들은 모닥불의 온기를 쬐며 잡담을 늘어놓았다.

“벌레를 죽이는 것과 동물을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달라.”

모닥불 앞에 앉아 나직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붉은 머리 행크였다. 이제 서른을 갓 넘은 그는 십년 넘게 용병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나 몸에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그는 운과 실력을 모두 갖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신입 용병들이 미소가 멋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행크는 나이프를 뽑아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죽일 때 표정을 볼 수 있거든.”

벌레를 죽일 때 우리는 표정을 보지 못한다.

동물을 죽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표정을 보게 된다.

“죽음의 순간 짓는 그 표정… 그 표정을 본 순간 공감하게 되지. 아, 얼마나 아플까 부터 시작해서 내가 저렇게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이르기까지 말이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에 따라 그것을 자신에게 대입하고 만다.

그렇기에 산 것을 죽이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동반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벌레를 죽일 때와 달리 우리는 사람을 죽일 때 자신 역시 죽을 수 있음을 실감한다. 행크는 모닥불 주위의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모닥불 바로 앞에 앉아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두 놈 빼고는 모두가 산전수전 모두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행크는 목소리를 낮췄다.

“살인은 첫 경험과도 비슷해. 하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설레고 두근거리고 어떤 의미론 두렵기까지 하지. 하지만 막상 해보고 나면, 그리고 몇 번인가 더 하고 나면 거기에 두려움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어떤 놈들은 겨우 이런 거였냐며 허무해하기까지 하지.”

사람은 참 쉽게 죽는다.

칼에 찔려도 죽고 화살에 맞아도 죽는다. 허벅지같이 살이 많은 부위도 잘못 찔리면 정맥을 다쳐서 과다출혈로 죽는다. 인간은 온몸이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동물이기에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죽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는 순간 느낀다. 아, 별거 아니었구나.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또 은근히 잘 안 죽기도 하거든. 칼을 몇 번이나 맞아놓고도 좀비처럼 일어나서 싸우는 놈도 있고 말이야.”

팔 다리가 잘려도 안 죽는다. 칼과 창에 찔려도 쉬이 죽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은 의외로 질기다.

“아무튼 살인은 그래. 그러니 아까 말 한대로 첫 경험과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지.”

마지막에 가서는 조금은 음흉하게 웃었다. 저마다 휴식을 취하며 행크의 이야기를 흘려듣던 용병들 역시 끈적끈적한 웃음을 터트렸다. 행크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구석에 누워있는 소년을 보았다.

“근데 넌 아직 모르겠다?”

“시끄러.”

날카롭게 답한 소년은 누운 상태로 몸을 돌렸다. 소년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자 행크는 킥킥거리며 신입들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놈은 사람 꽤나 죽인 주제에 아직 여자를 모르거든.”

“행크!”

소년이 결국엔 언성을 높였다. 이래봐야 더 놀릴 뿐이란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칼과 녹색 눈,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았지만 용병 생활만 4년째인 소년의 노성에 행크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티르. 그만하지.”

말은 저래도 얼굴을 보니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잠시 으르렁 거리던 소년, 티르는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바탕 유쾌하게 웃은 용병들은 잡담을 이어나갔다.



&



“짜증나 죽겠어.”

아침나절, 야영지에서 다소 떨어진 수풀에선 티르는 바지춤을 풀며 꿍얼거렸다. 등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볍게 넘겨라. 아니면 무시하든가. 저치들도 그다지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티르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한숨을 토했다.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신입들 들어올때마다 저 지랄이니 원. 다른 용병단을 찾든가 해야겠어.”

“크하핫, 그러게 누가 솔직하게 말하라 그랬나. 거친 삶을 사는 놈들일수록 욕망에 충실한 법이지. 다 네 잘못이다, 티르. 허풍이라도 쳤어야지.”

이번에는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티르는 이번에도 돌아보는 대신 앞만 보았다. 살짝 움찔하더니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일까, 부드러운 손길이 티르의 목뒤를 가볍게 스쳤다.

“우리 고객님 다 컸네?”

“우와앗?!”

농염한 여자의 목소리에 티르는 대경실색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겨우겨우 바지춤을 끌어올렸다.

“베아트리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치자 하늘색 머리칼의 미녀가 티르 앞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까르르 웃었다.

“왜요, 고객님?”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모습이 솔직히 너무 예뻤다. 하지만 티르는 그 예쁜 얼굴에 넘어가는 대신 욕지거리를 토했다.

“아, 젠장!”

목욕하거나 용변 볼 때는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거기다 급하게 바지춤을 올리다보니 바지며 손에 좋지 못한 액체가 묻었다. 여인은, 마녀 베아트리체는 재차 깔깔거리며 티르의 뺨을 꼬집었다.

“지저분한 남자는 인기 없답니다?”

그리고 그대로 연기처럼 화해 사라졌다. 이를 악문 채 부들부들 떨던 티르는 이내 다시 한숨을 토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내가 앓느니 죽지.”

“그런데 티르.”

젊은 남자가, 검마 백야흔이 다시 말을 걸었다. 티르는 눈동자만 굴려 온통 하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다.

“왜?”

“그 손에….”

백야흔은 거기까지만 말했고, 티르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떼었다. 하늘을 향해 노성을 지른 뒤 물가를 향해 달렸다.



‘티르야, 티르야 많이 삐졌니?’

머릿속에서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티르는 상큼하게 무시했다. 영들을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은 티르 자신뿐이었으니까. 못들은 척 하며 그만이었다.

행크가 이끄는 새매 용병단은 로엔그린 상회와 장기 계약을 맺고 활동 중이었다. 이번 일 역시 상단의 호위였는데, 평소보다 화물의 양이 많았다.

티르는 슬쩍 시선을 선두로 돌렸다. 이제까지 주로 상단을 인솔해왔던 버피 영감 옆에 선이 가는 미남이 말을 몰고 있었다.

“젊지? 아마 너랑 동갑일거다.”

행크가 슬쩍 귀엣말을 했다. 티르는 팔짱을 꼈다. 행크가 계속해서 말했다.

“상단의 후계자인 모양이다. 이제 곧 성인식의 날이니까.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것 같아. 앞으로 우리 고용주가 될지도 모를 사람이란 소리지.”

티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제의 후계자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단정하게 정리해서 묶은 머리칼.

“흐음.”

“왜?”

“아냐, 아무 것도.”

티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행크는 피식 웃더니 다시 선두로 돌아갔다.

‘베아.’

티르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베아트리체를 불렀다.

베아트리체가 대답했다.

‘응, 저거 여자야.’

어지간히 신경 써서 남장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봐야 천리를 꿰뚫는 마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여자인 것을 감추고 남자 행세를 하며 상단을 이끄는 상회의 후계자.

‘뭐, 별 일 있겠어.’

후계자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건 간에 티르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으니까.

‘왜? 여자잖아? 누가 알아? 산적들의 습격을 받아 상단이 혼란스러워진 사이 네가 저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둘만 고립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소설을 써라. 아주 그냥.’

베아트리체에게 일침을 가한 티르는 다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대체.”

어렵사리 찾아낸 좁디좁은 동굴 안, 비에 잔뜩 젖은 상태로 겨우겨우 숨을 고른 티르는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도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 자체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이었다. 다만 그 중에 오크가 끼어있었고, 그 오크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늑대들을 부리긴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줄만한 상황이었다. 4년 동안 용병질 하면서 이런 일들을 두어 번 정도는 겪어 보았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도적들 사이에 마법사가 끼어있었다.

정말이지 엿 같은 상황이었지만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저 상회의 후계자란 작자에게 암살 기능자가 달려든 것이었다.

암살 기능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

그들은 용병과는 달랐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것에 특화된 그들은 전장이고 어디고 마주치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전마 갈천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티르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을 터였다.

어찌되었건 티르는 급히 몸을 날려 암살 기능자의 공격을 막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후계자가 탄 말이 광견병 걸린 개새끼마냥 폭주를 시작했다. 티르는 급한 김에 말 위에 뛰어올랐고, 암살 기능자들은 그런 티르와 후계자를 쫓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암살 기능자들을 어떻게 떨쳐내긴 했지만 상단까지 떨쳐내 버렸다.

“거기다 비까지 미친 듯이 오네.”

티르는 푸념을 토하며 고개를 돌렸다. 좁아터진 동굴 안쪽엔 상회의 후계자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저거 저대로 두면 죽겠지?”

‘이미 체온이 많이 떨어졌으니까. 티르 너와 달리 꽤나 약한 몸인 것 같다.’

‘크하핫, 티르 정도로 몸이 좋은 놈도 드물 건데 평가가 너무 박하군.’

티르는 적당히 넘겨들으며 후계자에게 다가섰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얼음장 같은 것이 진짜로 죽을 거 같았다.

“어, 어떡하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백야흔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이라도 피우면 좋겠지만 만만치가 않군.’

불을 피우려고 해도 딱히 태울만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자칫 잘못하면 아직도 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암살 기능자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그럼 그거 밖에 없네, 그거 밖에!’

베아트리체가 꺅꺅 거리며 손뼉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단박에 짐작한 티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

‘왜에, 방법이 없잖아?’

티르는 베아트리체 대신 백야흔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백야흔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은 그것 밖에 방법이 없어 보이긴 한다.’

‘크하핫, 뭘 주저하나. 해치워 버려!’

“해치우긴 뭘 해치워!”

낮게 으르렁 거린 티르는 다시 후계자를 살펴보았다. 숨이 가늘었다. 정말로 위험해 보였다.

“제길.”

욕지거리를 토한 티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젖은 옷이라도 우선 벗겨야 했다.

‘깔깔깔, 우리 티르 손 떠는 것 좀 봐!’

티르는 애써 베아트리체를 무시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모를 상태로 후계자의 옷을 모두 벗긴 뒤 갑옷 덕분에 그나마 말라 있는 자신의 내의로 몸을 닦아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떡해, 어떡해! 티르 얼굴 터질 것 같아!’

티르는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아야 했다. 쉼 호흡을 한 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 역시 옷을 벗고 후계자를 끌어안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경오온 개공 사리자….”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이내 마음의 평정을 깨부수는 사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지? 말랑말랑하지? 꽉 끌어안고 싶지?’

티르는 듣지 않았다. 의식을 집중하는 동시에 흐트러트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였으니 의식을 높은 곳에 두어 육신과 분리시켰다.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을 애써 차단했다.

‘아, 안되잖아.’

티르가 고승도 아니고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도 지옥도 아닌 시간을 보낸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후계자가 깨어났다.



크리스 로엔그린은 눈을 깜박였다. 바로 옆에는 왠 잘생긴 소년 하나가 미묘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크리스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소년이 알몸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크리스 자신도 알몸이었다. 크리스는 천장을 보았다.

“꺄아아아아읍!”

비명이 도중에 끊겼다. 후계자의, 크리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티르는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말을 쏟아냈다.

“일단 진정. 그쪽은 로엔그린 상회의 후계자. 나는 상단에 소속된 용병. 이름은 티르. 우린 습격 받았었고, 나랑 그쪽이랑 함께 도주했었고, 도중에 비 쫄딱 맞았고, 그쪽은 다 죽어가는 상태로 의식 잃었었고. 여기까지 이해가능?”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몸부림을 쳤다.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티르는 짜증이 솟구쳤다. 크리스의 몸을 강하게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재주껏 숨 고르고 생각해봐. 그리고 진정해. 진정 다하고 나면 고개 끄덕이고.”

크리스는 다시 몸부림치는 대신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천천히 말했다.

“좋아, 이제 입 막은 손 땔게. 하지만 비명 지르면 안 돼. 널 노린 건 암살 기능자들이었고, 그 끈덕진 것들이 아직 주변에 있을지 몰라. 그러니 비명 지르지 마. 그리고 너랑 나랑 둘 다 홀딱 벗은 건 네가 상상하는 그렇고 그런 일 때문이 아니야. 빗소리 들리지? 네가 다 죽어 가는데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이해했어?”

이해했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티르는 입을 막은 손을 땠다. 겨우 풀려난 크리스는 약속대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티르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난생 처음 여자에게 뺨을 맞은 티르는 눈을 껌벅였다.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라고 반하는 대신 마주 손을 들어올렸다.

“이게!”

‘티르!’

베아트리체가 급히 소리를 질러 티르를 제지했다. 티르는 눈을 꽉 감고 움츠러든 크리스와, 그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이성을 되찾았다.

‘너야말로 진정해, 티르. 여자로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야. 알았지?’

‘…알았어.’

티르는 그대로 돌아앉은 뒤 아직 덜 마르긴 했어도 그럭저럭 입을만해진 옷가지를 뒤로 넘겼다.

“아직 덜 말랐으니까 입는 건 그다지 추천하는 바가 아니긴 한데…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 티르는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입었다. 잠시 후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티르라고 했나?”

“그래.”

“넌 아무 것도 못 본 거다. 알겠나?”

크리스는 나름대로 위압감 있게 말했지만 티르가 듣기에는 아니었다. 티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여자인거?”

“…그래.”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전에 말이야… 감사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너 구하다 그야말로 죽을 뻔 했는데 말이야.”

티르의 지적에 크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돈 받고 하는 일이지 않나? 그러라고 고용한 것이기도 하고. 거기다 이렇게 파렴치한 짓까지 당했으니 내가 딱히 네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아, 그러시군요.”

‘방금까지 다 죽어가던 년이 말하는 모양새 하고는.’

전마 갈천이 티르의 마음을 대신하듯 투덜거렸다. 티르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간에 비 그치면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가 여자이건 말건 나한테는 관심 밖이니까 네 말대로 돈이나 더 얹어서 줘.”

“…알겠다.”

둘 사이엔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어째서 남장을 하고 다니는지, 왜 암살 기능자들에게 습격을 받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대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본인이 암살 기능자에게 쫓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크하핫, 간단하군. 거대한 상회와 그 상회의 늙은 회주. 회주의 유일한 자식은 딸.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남장까지 불사하지만 회주의 형제들은 눈에 가시인 딸을 제거하고 상회를 물려받을 생각을 한다. 크하하핫, 너무 뻔해.’

백야흔과 갈천의 말을 들으며 티르는 턱을 긁적였다. 갈천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긴 하지만 꽤나 그럴듯하기도 했다. 로엔그린 상회 정도면 그런 더러운 뒷공작이 오갈만도 했으니까. 성인식을 치루고 나면 후계자가 본격적으로 상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테니 그 전에 제거하자는 수작일수도 있었다.

‘아아, 가녀린 미소녀의 혹독한 운명을 동정한 티르는 그녀의 힘이 되어줄 결심을 하는데~.’

‘그런 건 없어.’

베아트리체의 망상을 조기에 진압한 티르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 대략 3시간 정도가 흘렀지만 티르와 크리스는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티르야 영들과 대화하면 되었지만 크리스는 그렇지도 않거늘 답답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도망칠 때 워낙 미친놈처럼 달리다보니 본래 상단이 지나야 할 루트로부터 상당히 이탈하긴 했지만 찾아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상단의 목적지를 알고 있는데다가, 여차하면 그냥 큰 도시에 자리하고 있는 로엔그린 상회 지부를 찾아가도 되니 말이다.

문제가 될 것은 오직 하나.

‘온다.’

전마 갈천의 경고에 따라 티르는 시선을 멀리하였다. 마녀 베아트리체가 천리를 내다보는 눈을 빌려주었다.

다가오는 암살자의 수는 도합 일곱 명. 아직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크리스 역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안심해.”

티르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드는 대신 검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크리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엄청나게 강하니까.”

칠인의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르는 차갑게 웃었다. 달을 베는 대태도를 휘둘렀다.



“여어, 고생했다.”

맥주 조끼를 든 행크가 티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티르는 적당히 맥주를 받아 마신 뒤 한숨을 토했다.

“후아, 말도 마슈. 죽는 줄 알았네.”

암살자들이 생각보다 강한 것도 강한 것이었지만 크리스라는 짐을 달고 싸우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잖냐. 공까지 세우고. 확실히 네 놈이 괴물같이 강하긴 한가보다.”

“됐어, 됐어. 나 좀 쉴게.”

“자식.”

행크는 낄낄거리며 티르의 옆에 앉았다. 맥주를 몇 잔 들이킨 뒤 다시 한 번 티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보다 티르, 너도 이번에 성인식 치르지 않나?”

호른에서는 태어난 날과 무관하게 1년에 한번 정해진 날에 성인식을 치렀다. 온 국민의 성인식이라고 해야 할까. 17살인 티르 역시 이번에 성인식을 치를 나이였다.

“그렇긴 한데?”

티르가 고개만 돌리고 대답하자 행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때? 생각 있으면 내가 모처럼 좋은 곳으로 모시고. 너도 진짜 어른이 되어야지.”

잠시 무슨 말을 하나 생각하던 티르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됐거든요?”

“빼지 말고. 내가 최고급으로 불러줄게.”

“휘휘, 저리가슈.”

“그래 간다. 다음 소집일은 3일 뒤니까 잊지 말고 나와.”

티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행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티르는 눈을 감았다.



티르는 처음으로 살인을 했던 날을 기억했다. 하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죽였던 자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예전에는 기억했지만 지금은 하지 못했다.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써서는 검을 들지 못하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에 무감각해져도 문제였지만 그때마다 크게 반응해도 문제였다.

티르는 크리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무슨 사정을 가졌던 그건 크리스의 운명이니까. 딱히 도와줄 마음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다. 티르 자신이 무슨 절대자도 아니고 목숨 한 번 구해줬으면 됐지. 크리스 말마따나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잊으면 되는 것이었다.

“성인식이라.”

자신의 숙소 침대에 누워 티르는 천장을 보았다.

집을 나온 지도 벌써 4년. 이제 곧 티르도 18살이 되었다.

율리아는 잘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 하신가 몰라. 에이다도 잘 일겠지.

티르는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소리 내어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쓰게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성인식이라고 뭐 특별한 거 있나. 그냥 나이 한 살 더 먹는 거지.”

“정말 그럴까요, 고객님?”

눈동자를 굴리자 침대 머리맡에 자리한 마녀 베아트리체가 보였다.

“베아?”

베아트리체는 답하는 대신 몸을 빙글 돌렸다. 순식간에 마운틴 포지션을 점하더니 사악하게 웃었다. 티르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리였다. 양팔이 어느새 침대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가, 갈천?!”

누가 봐도 갈천의 솜씨였지만 갈천의 대답은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몸을 살짝 눕혔다. 티르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베, 베아?!”

“누울 땐 마음대로지만 일어날 땐 아니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티르는 성인이 되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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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브레이커즈 SS #6 어떤 상견례 #3 +26 18.09.01 4,713 91 14쪽
31 브레이커즈 SS #5 어떤 상견례 #2 +26 18.08.20 3,647 92 9쪽
30 던전메이커 SS #5 유리아의 던전디펜스 #1 +26 18.08.17 4,392 89 12쪽
29 브레이커즈 SS #4 어떤 상견례 +24 18.08.08 4,263 104 14쪽
28 소야곡 SS 풍림화산암뢰 +22 18.08.07 2,940 55 19쪽
27 월드메이커 SS #4 하늘로 +39 17.09.06 6,081 131 17쪽
26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3 어떤 조우 #2 +45 17.07.31 7,367 175 11쪽
25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어떤 조우 #1 +49 17.06.29 7,495 167 14쪽
24 월드메이커 SS #3 바람이 불었다. +24 15.09.06 7,515 149 8쪽
23 월드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왕의 별 +27 15.08.31 8,336 159 16쪽
22 강철의 기사들 SS 일지 +11 13.11.20 3,853 46 9쪽
21 강철의 기사들 SS 기도 +1 13.11.20 2,819 30 11쪽
20 강철의 기사들 SS 어느 화창한 오후 +4 13.09.21 4,343 49 8쪽
19 기상곡 SS 해후 +13 13.09.02 5,131 53 5쪽
18 폭뢰신창 SS 생生 +7 13.08.31 8,851 184 35쪽
17 SG SS 사자와 호랑이 +6 13.08.28 4,218 109 1쪽
16 강철의 기사들 SS 천생연분 +7 13.08.15 3,313 134 6쪽
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3 129 5쪽
13 나이트사가 SS 메데이아 +4 12.12.13 3,431 26 9쪽
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1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6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5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8 35 11쪽
»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7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3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6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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