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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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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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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66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5.09.06 03:29
조회
7,514
추천
149
글자
8쪽

월드메이커 SS #3 바람이 불었다.

DUMMY

월드메이커 SS #3 바람이 불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소중한 하루도, 잊고 싶은 하루도, 언제나와 같은 그저 평범한 하루도.

흘러갔다.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언제나 두 손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시간은 그렇게 흘러만 갔다.



녹색유성은 무덤 앞에 섰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다시 한 번 서글픈 미소를 머금었다.


아더 팬드래건.

유더와 녹색유성의 아이.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고, 평화를 누렸다.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복된 삶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녹색유성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고, 청년은 노인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앞에 사람들은 약속된 순간을 맞이하였다.



브리타니아의 위대한 왕 유더 팬드래건.

검신 크누트의 피를 이은 자.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을 때 유더 팬드래건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를 대신하듯 엉엉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는 녹색유성에게, 그의 영원한 레이디에게 마지막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녹색유성은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무겁게 쌓여만 가는 시간의 무게 속에서도 그 말을 잊지 못했다.



하나가 되었던 세계는 다시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그것은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여럿으로 갈라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하얀유성은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누이와 온기를 나누었다.


칼과 칼집.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단짝.


같은 날 태어난 남매는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 비록 언제나 함께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세상 속에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을 걸어갈 수 없었다.


울지 마. 바보야.


어린 아이같은 유언은 울음을 막지 못했다. 샹그리라의 위대한 왕이 세상을 떠난 날, 녹색유성은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낮과 밤이 한데 얽혀 새벽과 황혼을 낳고.


검은곰과 하얀사슴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1세대 엘더인 그들은 장수하였고, 그들이 낳은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더 오랜 삶을 누렸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녹색유성과 같은 아픔을 공유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녹색유성의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늘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벼락소리와 녹색번개는 물론이고 작은나무 역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기에, 둘의 죽음은 1세대 엘더 모두가 사대신의 곁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과거의 추억은 역사가 되었고,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어느덧 누군가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홀로 남겨졌다.

미친듯이 불어오는 시간의 바람 속에서 홀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기지 못하고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마저, 너마저 떠나버리면 나는.


검은곰과 하얀사슴도 떠나고, 그로부터 수년 뒤 저도 모르게, 불현듯 자살을 생각했던 날 들려왔던 목소리.

저 높은 곳에서, 하늘로부터 전해져온 울부짖음.



녹색유성은 쓰러질 수 없었다. 결코 멈추지 않을 시간의 바람에 몸을 맡길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을 만나기를 저어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완전한 고독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결국 사람을 그리워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다시 한 번 떠나가는 인연에 슬피 울기를 반복한 것이 몇 번이었을까.



천 년이 흘렀다.

자애로운 사대신께서는 다른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드셨다.


그리고 그랬기에,

녹색유성은 울부짖었다.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었던 날 이후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이 감춰두었던 진심을 토로했다.


그녀가 볼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의 이 울부짖음이 그녀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하지 못할 테니까.



아이의 아이를 마주했을 때, 그 얼굴에서 아이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수십 대가 지나, 피가 섞이고 섞여, 이제는 그 아이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머나먼 후손을 마주했을 때.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 아이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자신을 인지 했을 때.


울었다.

이제는 눈물이 모두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녹색유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울지 마 바보야.


하얀유성이 말했었다. 그 바보.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또렷이 기억났다. 주름진 그 얼굴도, 어린 시절의 해맑은 얼굴도,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해 엉엉 울던 땅꼬마 시절도.

모두가 생생히. 마치 어젯밤의 일이었던 것처럼.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저씨. 아니에요. 아줌마. 두 분이 계셔서 그래도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두 분이 보고 싶었요. 만날 변태라고 놀려서 미안해요 아저씨. 하나도 재미없는 바보 같은 농담이지만 듣고 싶어요. 두 분을 만나고 싶어요.


너무 울어 힘이 없었다. 탈진할 것만 같았다. 그간 참고 참았던 설움이 한 데 터져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녹색유성은 아이처럼 불러보았다.


엄마. 엄마. 엄마.


1세대 엘더로 인정받았지만, 완전한 1세대 엘더가 아니었던 그녀. 녹색번개는 아더만큼이나 빠르게 녹색유성의 곁을 떠났다.


천둥이 치는 날 밤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해 하얀유성과 서로 얼싸안고 벌벌 떠는 밤에,

따스하게 안아주던 두 손. 천둥소리도 하나도 무섭지 않게 해주던 그 따뜻한 품.


조곤조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

그리고 그 사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사람.


만날 멋있는 척하면서 뻔한 말 밖에 할 줄 몰랐던 그.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러더니, 마지막 날마저도 유치한 장난을 치고자했던 바보.


그의 마지막 숨결.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언제나처럼 너무나 뻔하고 뻔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말. 앞으로도 계속될, 그가 없는 삶을 지탱할 단 하나의 말.


사랑합니다, 나의 레이디.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찾아온 밤의 장막이 하늘을 뒤덮었고, 차가운 밤공기가 녹색유성의 지친 숨을 달래주었다.


녹색유성은 바닥에 널브러져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지상을 지켜보는 별을 마주하였다.


아버지. 아니, 아빠.


녹색유성은 바보같이 웃었다. 눈을 감았고, 그대로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선명한 눈물 자국 위로 스쳐지나가는 투박한 손가락을, 엉망이 된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서툰 손놀림을.



바람이 불었다.

아침의 영광을 이끌고자 하는 새벽의 시간에 녹색유성은 눈을 떴다.


여전히 눈물자국은 선명했다. 너무 울어 지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쩐지 모를 아늑함 속에 녹색유성은 일어섰다.


새벽이었다. 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녹색유성은 하늘을 우러러 끝내 왕의 별을 찾아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그마치 천 년을 넘게 살아왔으면서 새삼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줌 싼 자리를 들킨 어린아이처럼 민망함과 쑥스러움 속에 두 손으로 눈물자국을 지우고자 했다. 하얀유성과 함께했을 때처럼, 유더와 마주했을 때처럼 어리숙하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았다.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왕의 별에 인사했다.



시간이 흘렀다.

새벽이 불러온 아침의 영광이 지상을 비추었고, 아련한 눈으로 왕의 별을 바라보던 녹색유성은 짐짓 씩씩하게 돌아섰다. 성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흘렀다.


녹색유성은 하루를 살아갔다.

내일을 이어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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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월드메이커 SS #4 하늘로 +39 17.09.06 6,078 131 17쪽
26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3 어떤 조우 #2 +45 17.07.31 7,361 175 11쪽
25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어떤 조우 #1 +49 17.06.29 7,489 167 14쪽
» 월드메이커 SS #3 바람이 불었다. +24 15.09.06 7,515 149 8쪽
23 월드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왕의 별 +27 15.08.31 8,335 159 16쪽
22 강철의 기사들 SS 일지 +11 13.11.20 3,853 46 9쪽
21 강철의 기사들 SS 기도 +1 13.11.20 2,819 30 11쪽
20 강철의 기사들 SS 어느 화창한 오후 +4 13.09.21 4,342 49 8쪽
19 기상곡 SS 해후 +13 13.09.02 5,131 53 5쪽
18 폭뢰신창 SS 생生 +7 13.08.31 8,850 184 35쪽
17 SG SS 사자와 호랑이 +6 13.08.28 4,218 109 1쪽
16 강철의 기사들 SS 천생연분 +7 13.08.15 3,313 134 6쪽
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2 129 5쪽
13 나이트사가 SS 메데이아 +4 12.12.13 3,431 26 9쪽
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0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5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4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7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5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5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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