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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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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53,090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3.09.21 12:39
조회
4,342
추천
49
글자
8쪽

강철의 기사들 SS 어느 화창한 오후

DUMMY

언제나처럼 화창한 오후였다.

"햇살 좋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한 흔들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워치 로벤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앙과 외부의 사대왕국이 세상의 존망을 걸고 정면대결을 펼친 영웅전쟁이 종결 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애당초 1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영웅전쟁이니만큼 각국이 입은 물리적인 피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중앙의 개방에 따라 생긴 사회적인 여파정도랄까.

하지만 그것도 워치 로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레스베리아 여왕의 부군의 비라는 뭔가 애매모호한 위치에 앉아 있는 워치 로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부모형제 하나 없는 천애고아이다 보니 딱히 챙겨야 할 사람도 없었고, 그저 조용히 평화를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워치 로벤 자신이 비가 되어 왕궁에서 머물다니,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주시자의 눈에 소속된 암살자였는데 말이다.

비가 된 것은 워치 로벤의 의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웃긴 것은 그것이 현재 부군인 티르 아벤트의 의지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워치 로벤을 티르 아벤트의 비로 들인 것은 레스베리아 여왕, 티르 아벤트의 정실부인인 레오나 레지세이어였다.

워치 로벤 자신도 당황했고, 티르도 당황했으며, 시안은 당황을 넘어서 화를 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아벤트 가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것은 레오나 레지세이어였으니 말이다.

비단 레오나가 여왕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웅전쟁의 주역인 티르는 주변에서는 패왕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대단한 남자였지만 레오나와 시안 앞에서는 어쩐지 모르게 기를 펴지 못했다. 레오나가 노려보거나 시안이 주먹을 들어올리면 그저 예예 하는 예스맨이랄까.

영웅전쟁의 실질적인 종결자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인 시안은 레오나 앞에서는 언제나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워치 로벤이었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드는 시안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오나가 하자고 하면 티르고 시안이고 움츠러 들며 예예 하니 모든 것이 레오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워치 로벤 자신은 스스로 인정하기 뭐한 사실이지만 노예근성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 여왕이자 아벤트가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레오나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나 무서워하던 티르와 혼인을 했다. 세 번째 부인이 되었고, 지금 이렇게 궁전 안에 자리한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좋다…."

눈이 절로 감기며 스르륵 잠이 몰려왔다. 하지만 워치 로벤은 잠들 수 없었다.

"워치 언니!"

쾅 소리나게 문을 열며 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워치 로벤의 방 구석구석에 시선을 보낸 시안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었다.

"티르 그 자식 못 봤어요?!"

워치 로벤은 미간을 좁혔다. 시안 상태를 보니 티르를 찾아내면 일단 다짜고짜 주먹 몇 방부터 날릴 기세였다. 워치 로벤은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티르 그 새… 아오! 몰라요! 우선 그냥 가르쳐줘요. 티르 못 봤어요?"

도대체 또 무슨 일일까. 워치 로벤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봤어. 난 오늘 하루종일 방에서 햇볕 쬐고 있었는 걸."

"으으… 방해해서 미안해요, 언니. 이따가 봐요."

워치 로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시안은 다시 방문을 꽝 소리나게 닫고 달려 나갔다.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복도가 쿵쿵쿵 울렸다.

워치 로벤은 갑자기 밀려오기 시작한 두통을 느끼며 흔들의자에 등을 깊이 묻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저 정도로 화난 시안을 보는 것은 거의 두 달 만인데.

'그리고 그날 티르는 천장에 매달려서 백 대 정도 맞았지….'

워치 로벤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다.

"여, 여왕 폐하?"

당황한 워치 로벤이 얼른 흔들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부복했다. 왕실 근위대 넷을 이끌고 워치 로벤의 방안에 들어선 레오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티르를 보지 못했나?"

꾹 억누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워치 로벤은 레오나가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보지 못했습니다."

"…혹여라도 발견하게 되면 즉시 알리도록 해라. 내 오늘 그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터이니."

냉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목소리를 토한 레오나는 그대로 휙 돌아섰다. 근위대를 이끌고 워치 로벤의 방을 나섰다.

다시 꽉 닫힌 방문을 보며 워치 로벤은 한숨을 길게 토했다. 이게 대체 또 무슨 사달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죠? 이게 다?"

워치 로벤은 침대 쪽을 보고 말했고, 침대 밑에 숨어 있던 티르는 머쓱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티르가 워치 로벤에게 다가섰다. 워치 로벤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그렇게 딴청 피우시면 여기 있다고 소리 지를 거예요?"

"크윽, 강해졌구나, 워치 로벤."

옛날에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으면서!

워치 로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벤트 가의 최고 연장자로서 딱 잘라 말했다.

"이제 레오나나 시안 속 좀 그만 썩여도 되지 않나요?"

티르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내가 무슨 악질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것 같은 멘트인데 그건?"

"…기둥서방은 맞잖아요."

티르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정말 강해졌구나."

워치 로벤은 뭐라 답하는 대신 꼿꼿이 서서 티르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죠?"

"아니, 정말로 나도 잘 몰라. 저 둘이 화내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그거 무척 문제 있는 말씀인 거 아세요?"

티르는 그저 훗훗훗 웃더니 돌연 워치 로벤에게 바짝 다가섰다.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낚아채더니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꾸 우리 워치를 찾는 걸지도 모르지."

은근한 목소리에 워치 로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낮이에요."

"그래서?"

나직이 말한 티르는 그대로 워치 로벤에게 키스했다. 워치 로벤은 벗어나려는 듯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애당초 레스베리아 탈인간의 선두주자인 티르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같은 것은 없었다. 호흡 곤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깊고 진한 키스가 끝난 뒤에 발갛게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소, 소리 지를 거에요?!"

하지만 티르는 이번에도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워치 로벤을 단번에 침대로 이끌었고, 다시 한 번 입 맞추었다. 워치 로벤도 결국엔 포기했다. 티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티르!"

"티르!"

방문이 박살났다.

창문이 박살났다.

근위대를 이끌고 방문 앞에 나타난 것은 레오나 레지세이어.

창문을 박살내고 등장한 것은 시안.

두 여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티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끌어안고 있던 워치 로벤을 풀어주고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기, 지금 한창 오붓할 때인데 말이… 08시의 봉인해제!"

기습적으로 외친 티르는 그대로 한줄기 빛이 되어 부서진 창문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광익에 힘입어 빛살처럼 나아갔다.

"추적해, 시안!"

"잡히면 죽었어!"

레오나와 시안이 동시에 외쳤다. 레오나는 근위대를 데리고 급히 복도로 나섰고, 시안은 용갑주를 장착하더니 그대로 티르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홀로 방에 남겨진 워치 로벤은 잠시 멍한 얼굴로 부서진 창과 문을 번갈아 보았고, 이내 한숨을 토했다. 다행히 부서지지 않은 흔들의자에 다시 몸을 묻고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햇볕의 따스함에 몸을 맡겼다.

바람은 불었고, 흔들의자는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공음과 시안과 레오나, 티르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워치 로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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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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