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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53,102
추천수 :
2,646
글자수 :
181,157

작성
12.12.05 13:07
조회
3,162
추천
27
글자
6쪽

소야곡 SS 어떻게

DUMMY

세상의 틈바구니 사이에 저택이 하나 있었다.

2층짜리 저택은 신전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신성한 기운을 풍겼다.

넓은 저택에는 방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은 하나뿐이었다.

넓고 하얀 방 안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테라스를 통해 불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 너머로는 환상으로 빚어낸 별들이 빛났다.

“저기 말이야.”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여자가 말했다. 하얗고 아름다운 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녀의 회색빛 머리칼 위로는 새하얀 토끼 귀 두 개가 쫑긋거렸다.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가 반응했다. 창가에 서서 멍하니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바라보던 남자는 돌아섰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 여자가 가늘고 긴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 메키도랑 잔 적 있지?”

예상외의 질문이었지만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한 번 비틀더니 돌아서며 답했다.

“있지.”

있다. 그랬던 적이 있다.

“저기 말이야.”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남자는 이번엔 돌아서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물었다.

“너, 아샤랑도 잔 적 있어?”

“없지.”

남자는 짧게 답하며 여자가 오늘 왜 저러나 홀로 짧게 생각했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곁에 다가가 나란히 섰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환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특별한 거지?”

메키도와는 잤다. 아샤와는 자지 않았다. 하지만 생은 둘을 사랑했다.

사기꾼 모자장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애당초 네 특별함의 기준은 섹스냐?”

여자는 이제껏 신나게 물어봐놓고는 정작 자신은 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멍한 얼굴을 가장하고 환상만 보았다.

생은 다시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르듯이 말했다.

“설명하기 힘들어.”

생각은 많이 해보았다. 고민도 많이 해보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여자가 생의 허리를 찔렀다.

“하긴, 이런 단순한 기준이라면 네가 양성애자가 되어야 할 테니까.”

생은 아샤의 제자들 모두를 사랑했다. 섹스가 기준이라면 생은 그들과도 모두 섹스를 했어야 했겠지.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생은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그들을 사랑했다.

여자는 길잡이였다. 길을 인도하는 자였다. 선두에 서야 하는 자였다. 길잡이 토끼는 고개를 돌려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여자고 너는 남자잖아. 왜 그런 걸까?”

길잡이는 여자고 마법사는 남자다. 둘은 얼마든지 자신의 성별 따위 뒤바꿀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에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자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일반적인 사람이 할 만한 모든 것들을 다 하였다.

생이 고개를 꺾어 패스파인더를 마주 보았다.

“왜 그래 오늘.”

패스파인더는 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물었다.

“넌 가신이 되기 전의 널 기억해?”

태고의 악마가 되기 전의 너, 스스로 메피스토 텔레스를 자처하기 전의 너.

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못 해.”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그 이전이 존재했던 것 같음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잊은 것이 아니었다. 생은 수 만년에 달하는 자신의 삶 모두를 기억할 수 있었다.

길잡이 토끼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그치? 기사 양반은 하는 것 같은데 너랑 나는 왜 못 할까.”

패잔병 기사는 과거를 기억했다. 왕보다도 오랜 삶을 살아온, 진정한 태고의 괴물은 왕을 만나기 전의 자신을 알았다.

똑같은 왕의 가신이다. 하지만 그만 유별나다.

유별나다.

아니, 애당초 같지 않다.

“그는 특별하니까.”

생은 적당히 답했다. 그도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특별한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리 말했다. 토끼가 다시 마법사를 올려다 보았다.

“생.”

“말해, 토끼.”

“넌 어떻게 저들을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길잡이 토끼 패스파인더는 ‘세대’라 불리는 이들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들을 자신과 동격으로 놓지 못했다.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다.

“나도 못 해.”

“하지만 하잖아?”

패스파인더가 추궁하듯 물었다. 남자와 여자는 메키도라는 이름 하나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렸다. 생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창밖의 환상을 보았다.

“하나 뿐이야.”

“하나라도.”

생은 메키도를 사랑한다. 그녀의 행복을 바라기에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행동을 할 정도로 메키도를 사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신들은 ‘세대’라 불리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일한 감정이입의 대상인 가신들 서로를 아꼈다. 때로는 친구이고 때로는 연인이고 때로는 가족으로 서로를 여겼다.

그런데 생은 가신이 아닌 메키도를 사랑했다. 아샤를 사랑했다. 아샤의 제자들을 아꼈다.

“…나도 모르겠다.”

다른 가신들보다 더 많이 싸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족놀이라는 연극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일까.

길잡이는 마법사 대신 환상을 보았다. 갈라진 세상의 틈바구니를 보았다.

“왕을 기다리자.”

“그래.”

생은 창문을 닫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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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브레이커즈 SS #4 어떤 상견례 +24 18.08.08 4,262 104 14쪽
28 소야곡 SS 풍림화산암뢰 +22 18.08.07 2,940 55 19쪽
27 월드메이커 SS #4 하늘로 +39 17.09.06 6,080 131 17쪽
26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3 어떤 조우 #2 +45 17.07.31 7,367 175 11쪽
25 던전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어떤 조우 #1 +49 17.06.29 7,495 167 14쪽
24 월드메이커 SS #3 바람이 불었다. +24 15.09.06 7,515 149 8쪽
23 월드메이커/플레이어즈 SS #2 왕의 별 +27 15.08.31 8,336 159 16쪽
22 강철의 기사들 SS 일지 +11 13.11.20 3,853 46 9쪽
21 강철의 기사들 SS 기도 +1 13.11.20 2,819 30 11쪽
20 강철의 기사들 SS 어느 화창한 오후 +4 13.09.21 4,343 49 8쪽
19 기상곡 SS 해후 +13 13.09.02 5,131 53 5쪽
18 폭뢰신창 SS 생生 +7 13.08.31 8,851 184 35쪽
17 SG SS 사자와 호랑이 +6 13.08.28 4,218 109 1쪽
16 강철의 기사들 SS 천생연분 +7 13.08.15 3,313 134 6쪽
15 소야곡 SS 단막 +6 13.08.14 3,700 96 5쪽
14 SG SS 눈물 +8 13.06.08 3,473 129 5쪽
13 나이트사가 SS 메데이아 +4 12.12.13 3,431 26 9쪽
12 나이트사가 SS 그 날 +3 12.12.11 3,211 30 10쪽
11 나이트 사가 SS 황제의 아이들 +2 12.12.10 3,865 56 9쪽
10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백일몽 +2 12.12.08 3,375 52 12쪽
9 소야곡 SS 사기꾼 모자 장수의 우울 +3 12.12.05 3,255 52 19쪽
8 광시곡 SS 영생자들의 우울 +3 12.12.05 3,362 35 19쪽
7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8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3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6 61 5쪽
3 강철의 기사들 SS 영웅의 시대 +5 12.12.05 5,546 39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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