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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연대기 SS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취룡
작품등록일 :
2012.12.05 12:57
최근연재일 :
2018.09.01 02:42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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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57

작성
12.12.0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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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DUMMY

동생의 이름은 아벨이었으며,


형의 이름은 카인이었다.


형인 카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여 하늘이 열린 이래 최초의 살해자가 되었나니,


모두가 그를 저주하노라.



&



“동방삭.”

대나무 숲 사이로 노을이 졌다. 붉고도 노란 빛은 산산이 부서졌고, 짙어지는 어둠 속에 빛은 점차 보라와 검정으로 변해갔다.

잠시 노을을 바라보던 진은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였다. 얼추 190cm남짓, 기골은 장대했고 팔다리가 길었다.

남자의 이름은 동방삭이었다.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그 체형, 심지어는 성별까지 자유롭게 변환할 수 있는 육체 변이 능력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

세상 월광의 퍼스트 블러드, 최초의 흡혈귀.

진은 천천히 손가락을 놀렸다. 강력한 전사인 동시에 위대한 마법사인 그는 세상의 시스템을 희롱했다. 그 기록으로부터 눈앞에 누운 자의 정보들을 읽어냈다.

동방삭.

약 3천년의 삶을 살아온 자.

최초의 성별은 남자였으며 보름달 아래 피의 부름을 받아 전화한 자.

‘약해.’

진이 그를 발견한 것은 30분 전.

진이 그를 제압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5분여.

진 자신이 강하다기보다는 눈앞의 흡혈귀가 약했다. 육체 능력은 기껏해야 A급 흡혈귀 정도. 육체변이 자체는 뛰어났지만 이래서야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비슷한 혈통능력을 지닌 키메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기실 A급 흡혈귀의 육체능력이란 것이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100미터를 수초내로 주파하고 마음만 먹으면 인간의 반응 속도를 넘어선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한 손으로 수백킬로그램짜리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고 그 생명력은 사지가 찢긴 가운데서도 삶을 이어갈 정도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퍼스트 블러드인데. 이 세상 최초의 흡혈귀인데.

재생력이 딱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A급 흡혈귀보다 조금 나은 정도.

육체 변이 외에 딱히 혈통 능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염력 계통의 힘을 조금 사용했지만 본연의 능력이라기 보단 오랜 수련을 통해 익힌 선술에 가까웠다.

진은 여러 세상을 돌아다녔고, 여러 세상의 퍼스트 블러드들과 대면하였다. 동방삭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약. 조금 우스운 분류지만 마법사형이라 할 수 있을 세상 광시곡의 퍼스트 블러드 아르젠티나의 육체능력도 동방삭보다는 우수했다. 육체변이 능력도 그렇고, 싸우는 방식도 보면 동방삭은 전사형에 가까울 터인데도 이런 수준이라니.

‘하기사, 평준치인가.’

세상 월광에 존재하는 ‘이능의 존재’들은 대체로 다른 세상에 비해 약했다. 얼마 전에 마주했던 동방최강의 요괴라는 대호 동방불패 역시 그저 덩치 큰 괴물이란 인상을 받았을 뿐이었다.

마법이나 도술, 초능력 역시 다른 세상에 비해 그 발전이 미비했다. 그렇다고 딱히 과학이 탁월하게 발달한 것도 아니고.

‘뭐, 상관없겠지.’

이런 세상이 있으면 저런 세상이 있는 법이니까.

세상의 시스템을 희롱하던 손짓을 멈춘 진은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 죽은 듯 꼼짝도 않는 동방삭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존재는 약했다. 퍼스트 블러드이긴 하지만, 설사 소멸시킨다하여 세상이 딱히 반발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였다.

‘죽일까.’

원초적인 유혹에 진은 잠시 고민했다.

동방삭은 다른 세상의 퍼스트 블러드처럼 고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타인의 피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이제까지 수천, 수만의 목숨을 해하였을 터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존재였다.

하지만 진은 망설였다. 하지만 진은 고민했다.

이 세상의 존재를 다른 세상의 존재인 자신이 처단한다는 사실 외에도,

‘자격이 없지.’

유다의 존재를 인정한 순간 진의 내면에 생겨난 모순. 착한 흡혈귀와 나쁜 흡혈귀. 선악을 구분할 권리 따위 진에게 없었다.

진은 동방삭의 목숨을 끊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흑염창파.”

읊조림과 동시에 검은 불꽃이 일어 진을 감쌌다. 숲 저편으로부터 쏟아지는 포화로부터 진을 보호했다.

날아오는 것들은 총탄과 화약과 선술과 도술과 마법과 초능력. 허나 저 모든 것들은 결국 시스템의 궤안에 속한 것들일 뿐. 세상의 시스템 그 자체를 해킹하는 어둠의 이빨 앙그라의 검은 불꽃 앞에는 모든 것이 무력할 뿐이었다.

“괴물 같은 자식!”

저만치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진은 쓰게 웃었다. 동방삭이야 저치들이 알아서 하겠지. 쏟아지는 달빛을 따라 진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



진한 무제 때의 일이었다.

익살스런 문장을 잘 짓는 재인이 하나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했는데,

어느 날 주연에서 그는 스스로 은과 주의 역사를 지켜봤다며 허풍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그를 동방삭이라 불렀다.



&



드라큐라 백작은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다.

영원할 거 같던 제국도 멸망은 순간, 어지럽게 빠른 시간의 흐름 앞에선 한줌 재에 불과했다.

‘나는 이긴 것일까.’

왈라키아 기사단을 이끌고 오스만을 정벌하는 대신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를 움직였다. 움직이고 움직여 마침내 저 거대한 제국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세상은 왜 자신에게 영원한 시간을 주었을까.

세상은 왜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인간 외의 존재로서 살아갈 것을 명했을까.

처음에는 하늘 역시 저 무도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바라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타인의 피를 빨아 그 삶을 연장시켜 가는 와중에 그 생각은 변하였다.

드라큐라 백작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앞에 선 인간에게 물었다.

“대답해보게, 닥터 헬싱.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루마니아 트란실베니아에 소재한 왈라키아 공국에는 무시무시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휘하에 있는 왈라키아 공국 기사단은 강하고 무자비했다.

쓰러트린 적의 시체를 꼬챙이에 꽂아 인육의 숲을 만든 남자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였다.



&



“나도 한 때는 인간이었지.”

텅 빈 교회 한가운데 앉은 남자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추억을 더듬었다.

자신이 더 이상 노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사랑하던 이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고, 나중에는 마침내 그것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순간, 우연찮게 마신 피에 세상 최고의 환희를 느낀 순간.

“세상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어. 나 같은 것들을 찾아다녔지. 요괴, 위어울프, 요정, 정령, 하여간 많고 많은 것들을 찾아다닌 끝에 알게 됐어.”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끝까지. 세상의 이면에 숨은 존재들을 하나하나 만난 끝에 내린 결론.

“내가 최초야.”

피를 빠는 괴물 가운데 첫 번째. 그 모든 피의 원류.

퍼스트 블러드.

“세상에 괴물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애당초 괴물을 만들 것이지, 어째서 인간이던 자신이 괴물이 된 것일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스로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그대로 돌아섰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남자는 쓰게 웃으며 교회를 떠났다.



&



세속에 장생자가 있나니,

그 아이의 이름은 므두셀라라 하노라.



&



“방황하는 유대인 아하스 페르쯔, 동방삭, 메투셀라, 드라큐라….”

인명록을 읽어 내리던 생은 피식하고 웃었다.

“저랑 같은 이름도 하나 있군요. 이거 말이 퍼스트 블러드지 너무 흔한 거 아닙니까?”

세상과, 그 세상에 존재하는 퍼스트 블러드.

세상의 수만큼이나 많은 최초의 존재들.

시작은 인간, 그러나 그 귀결점은 괴물.

성별도, 시대도, 인종도 모두 다르나 그들의 시작은 반드시 인간.

인간으로 태어난 그들이 괴물이 되는 것.


퍼스트 블러드 아르젠티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퍼스트 블러드가 되었다.

세컨드 블러드이나 기실 퍼스트 블러드인 롤랑드는 스스로의 의지로 피와 어둠을 지배하였다.


이는 무척이나 드문 경우, 보통의 경우라면 퍼스트 블러드는 그저 어느 순간 되는 것.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화하는 것.


그것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생은 몰랐다. 심지어는 저 악마들의 세상에도, 저 용들의 세상에도 각각의 퍼스트 블러드가 존재하는 이유 따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알고 있겠지.


생은 고개를 바로 했다. 뻔뻔스럽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진정한 흡혈귀의 왕을 바라보았다.

남자.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각 트렁크에 하와이 셔츠를 입고 새빨간 선글라스를 낀 채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고 있는 자.

불사왕 노스페라투는 고개를 돌렸다. 떠오르는 아침해에 서서히 붉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년백작이여, 동지여, 마법사여, 이 세상 최초의 악마여. 그런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퍼스트 블러드가 존재하는 이유, 인간이 괴물로 전화하는 이유. 세상이 퍼스트 블러드를 탄생시키는 이유.

생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기억의 시작은 언제나 왕과 함께하였다. 왕 이전의 시대 따위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라면.

진정한 불사의 왕.

저 모든 것을 부수는 바람 세피로 아르하시타와 정면으로 대적하고도, 그에 패해 소멸하였음에도 결국 자신들 앞에 다시 나타난 패잔병 기사. 왕의 가신들 가운데서 가장 오랜 삶을 살았으며, 어쩌면 왕보다도 오랜 삶을 살았을지 모를 존재.

생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당신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장생자의 권태로움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가신들에게 그런 권태로움 따윈 없었다.

불사왕 노스페라투는 생의 물음에 쓰게 웃더니 돌아섰다.

“있지.”

“언제였죠?”

“항상.”

“항상?”

“그래, 죽으면 더 이상 그녀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니까.”

불사왕의 말에 생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악마적인 감각은 이내 그것이 왕의 시대 이전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노스페라투, 당신의 진정한 이름은….”

“생이여, 모자장수여.”

불사왕 노스페라투는 생의 말을 끊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며 어쩐지 쉰 것 같은 목소리를 토했다.


“난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네.”


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고 불사왕은, 진정한 퍼스트 블러드는 크게 웃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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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야곡 SS 퍼스트 블러드 +4 12.12.05 3,327 35 11쪽
6 강철의 기사들 SS 성인식 +5 12.12.05 3,466 35 22쪽
5 소야곡 SS 어떻게 +1 12.12.05 3,162 27 6쪽
4 소야곡 SS 밤이 온다 +2 12.12.05 3,305 6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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