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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와 불가사의한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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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몽키
작품등록일 :
2017.03.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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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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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25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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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8

DUMMY

약쟁이를 친부로 둔 왕자는 약을 멀리하는 대신 술을 잡았다. 세레나가 다시 살아가게 된 세계는 미성년자의 음주를 권장하지 않았지만 금지하지도 않았다. 금지했다 하더라도 세라프의 지위면 법을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폭음할 수 있었다.

세레나는 술맛이 뭔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어린 나이에 술병을 붙잡은 세라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술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한 번도 정신을 놓을 만큼 과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라프는 기본이 과음, 폭음이었다. 한번 술병을 따면 끝을 볼 때까지 마시는 나쁜 음주 습관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음주예절을 가르쳐줄 이 없는 주위 어른의 부재? 아니면 다음 왕도 이용해먹기 쉽도록 술을 권한 주위의 나쁜 어른?

지금은 고인이 된 흐지의 국왕은 약기운이 빠졌을 땐 심약한 양반이었다. 주위 사람에게 손찌검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질릴만큼 국왕에게 맞았다. 왕은 환각을 보았고 종종 주변 인물을 괴물이나 적으로 착각했다. 위대한 약의 힘이 그에게 용기를 선사해, 왕은 제 눈에 들어온 괴물과 적을 용서하지 않았다.

국왕은 딸이 아니라 확각 속 괴물을 때렸다. 그래서 세레나는 부왕의 중독 증세를 경멸했으되 폭력을 증오하진 않았다. 사실 약쟁이에겐 경멸이란 감정도 사치였다.

그렇다면 아들인 세라프는 어떠한가. 아버지가 환각에서 헤매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폭행을 휘둘렀다면 아들은 술에 취해 쌓아둔 모든 감정을 폭행으로 풀었다. 아버지가 약기운이 빠졌을 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면 아들은 모두 기억했다. 바로 이것이 세레나가 세라프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시고, 때리고, 부수고, 놀음하고. 세라프는 착실하게 망나니의 정도를 걸었다.

‘요즘 좀 안 마시는 것 같더니.’

알콜중독자가 용케도 오래 금주하더라니. 세레나는 세라프가 금주하기 시작한 시기를 계산해보는 대신 세라프의 빈약한 참을성을 비웃었다. 과로한 정신과 영혼이 동생을 헤아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감싸고 아끼는 일보다 비난하고 헐뜯는 일이 쉽다. 상처가 낫도록 보듬어주는 일보다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이 쉽다. 내가 아픈 것보다 남이 아픈 게 낫다.

세레나는 다시 태어난 후 자신이 일상가족힐링물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고 내내 쉬운 길만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쉬운 길만 걷고 싶은데 어찌될런지 모를 일이다.

세라프의 방은 가관이었다. 곳곳에 깨진 술병이 나뒹굴고 방안은 독한 도수의 술냄새로 술이 약한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취할 지경이었다. 와중에 사람도 팼는지 피로 추정되는 액체도 보였다.

술에 취한 쓰레기는 문을 열고 들어온 세레나를 향해 술병을 던졌다. 술병이 세레나를 빗나가 문에 부딪쳤다. 병이 깨지면서 남은 술이 세레나에게 튀었다. 병조각에 맞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꽃쓰레기가 술독에 빠졌단 얘기를 듣고 치솟았던 노화가 차갑게 식었다. 대신 다른 분노가 차올랐다.

세레나는 기겁하는 시종들을 공주의 미소로 문밖으로 내몰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세레나의 얼굴에서 공주의 미소가 사라졌다.

“너 미쳤니? 감히 나한테 술병을 던져?”

“뒤지고 싶은 거잖아. 안 맞았으면 됐지.”

술에 처박힌 인간치곤 발음이 명료했다. 세라프는 세레나에게 던져서 사라진 술 대신 새 술을 집으려고 손을 휘저었다. 몸은 혀처럼 멀쩡하지 않은지 손동작이 굼떴다.

독한 술기운에 나른해진 눈가와 몽롱한 눈동자는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릴 만큼 아름답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혹적이었다.

“나가주십시오. 누님과 할 말이 없습니다.”

싫으면 뒤지시든가. 세라프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잡은 술병을 들어올렸다. 언제라도 세레나에게 던질 수 있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세레나는 뒷목이 당겨서 손에 든 약병을 던질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너만 성질있냐. 나도 성질있다.’

본래 성질머리대로라면 공격할 의사가 없는 척 다가가 뒤통수에 약병을 내리치고도 남는다. 하지만 세레나는 준법정신 투철한 교양있는 판타지 세계 시민이기에 그러지 않았다. 세레나는 공주님의 미소를 띄우고 세라프 앞에 약병을 올려두었다.

“술은 적당히 하시는 게 건강에 좋습니다, 왕세자 저하.”

대화하기 싫다고 찡찡거리는데 굳이 붙들어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레나는 망설임없이 돌아섰다. 문을 향해 걷는데 한숨이 나올 정도로 뒤통수가 따가웠다. 썩 꺼지랄땐 언제고, 세라프의 시선이 집요하게 세레나에게 들러붙었다. 끈적끈적하기가 바닥에서 말라가는 핏물 못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넌 뭐든 쉽지?”

세라프가 종종 투덜거리듯하는 말이 다시 나왔다. 세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타인의 인생을 쉽다고 재단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특권이긴 하다. 세상에 쉬운 인생 없고 날로 먹는 인생 없는데.

“뭐든 쉬우면 비에타가 아닌 흐지로 돌아갔겠죠?”

“왜 그런 말을 해? 넌 복수할 생각도 없잖아.”

세라프가 잠긴 목으로 끊어 말했다. 목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분노가 격해져서다. 채 스무해도 살지 못한 소년의 몸 어디에 저렇게 복수와 증오가 가득찼을까. 그래도 밑바닥 인생들보단 쉬운 삶을 살았을텐데 꾹꾹 눌러담다못해 터져나오는 한은 언제 그렇게 모은 것일까. 동생을 감싼 격정이 세레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난 어지간해선 복수 찬성파야. 복수는 덧없다느니,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느니 이런 말 싫어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리 경우는 다르잖아. 우리의 경우에 복수하면 자멸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세레나가 미궁을 공략하면서 데스 노트라도 얻지 않는 이상 자멸로 향하는 외길이었다. 자멸하지 않으려면 말그대로 미궁이라도 공략해서 지원군을 얻어야 했다.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넌 처음부터...”

세라프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은 것이다. 세라프는 입을 다물었지만 세레나는 눈치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챘다.

“처음부터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고?”

“그래!”

세라프가 칼에 찔린 듯 고통스럽게 외쳤다. 세레나는 동생의 고통에 공감해주지 못했다. 그런 누나의 마음을 알아챈듯 세라프가 이어 말했다.

“복수할 생각 없었잖아. 리처드가 소드마스터인 걸 몰랐을 때도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았잖아. 그냥 버리려고 했잖아. 부모님도, 흐지도, 나도!”

“버리다니, 내가 언제. 나에게 걸린 현상금이 너무 크니까 가능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피해를 줄이는 쪽으로.”

“화낸 적도 없잖아.”

세라프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화내지 않았잖아! 슬퍼하지 않았잖아! 너는 분하지도 않아? 리처드 그 미친 새끼가 기어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을 사칭하는데 어떻게 그리 태연해?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슬프지도 않아? 슬프지 않다면 화라도 내는 게 정상 아니야?”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었다. 세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세라프는 눈을 불태우며 이를 악물었다.

“난 그 새낄 죽일 거야. 죽여서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헤집어서 돼지밥으로 던져줄 거야. 원수가 소드마스터면 복수를 포기해야하는 거야? 부모가 죽고 나라를 뺏기고 생명을 위협당하는데 상대가 소드마스터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거냐고! 세레나! 넌 옛날부터 그랬어! 항상 나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포기하라고 말했지. 그건 진짜 이상해.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왜...”

세레나는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세라프에게 포기를 가르쳤다. 세라프는 곧 나쁘고 편한 것들을 배워 모범적인 왕세자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실상 그는 한번도 포기한 적 없었나보다. 부모의 사랑, 누나의 사랑을. 누군가에겐 기본적으로 주어진 당연한 것이나 그에겐 한 번도 주어진 적 없는 애정을 소년은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있으면 기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살아만 있으면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아버지가 갑자기 제정신을 차려 약을 끊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 슬픔을 떨쳐내고 남매를 향해 웃어줄 지도 모른다.

약쟁이에 중증 우울증 환자. 둘 다 자식의 목숨을 위협한 전과가 있으며 진짜 죽을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세라프에겐 사랑하는 부모였으며 기대의 대상이었다.

리처드는 그들에게서 가능성을 앗아갔다.

세라프는 그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넌 내게 항상 포기하면 편하다고 말했지. 그 말은 틀렸어. 포기하면 하나도 편하지 않아. 지금 돌아가는 꼴을 봐. 뭐든 쉬운 잘나신 누님께선 생명도 포기하려고 하고 있잖아.”

세레나가 자기 목숨 귀한 줄 알고 복수를 포기하겠다면 세라프는 기꺼이 따를 수 있었다. 세레나가 복수가 너무 하고 싶어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겠다면 세라프는 기꺼이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뭔가? 복수도 생명도. 모두 포기하고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는 꼴이라니.

소년의 분노는 불과 같았고 지극히 정당했으나 다만 그뿐이었다. 세라프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말이 잘난 누이에게 닿지 않으리라 여겼다. 잘난 세레나는, 너무 잘나서 뭐든 쉬운 세레나는 이번에도 동생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후 같잖은 연민의 눈빛이나 보낼 게 분명했다. 아니면 이상한 말이나 하든가.

“세라프. 네가 생각하는 세계의 멸망은 뭐니?”

이것 보라지. 세라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레나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세라프는 술을 마신 후 대답했다.

“포기.”

죽음은 너무 당연한 종말이기에 도리어 끝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세라프에겐 그랬다.

“그래서 복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세라프는 대답대신 입에 술병을 가져갔다. 세레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 복수하고 싶으면 술부터 끊어야겠네. 그만 둔 검술 연습도 시작하고. 사촌이 소드마스터인데 그 재능이 네게 있을지 누가 알아.”

“그 더러운 찬탈자와 같은 피가 흐르는 게 혐오스러우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그래. 알았어.”

세레나는 깨진 술병의 잔해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세라프는 누나가 나간 문을 원망스레 노려보다 재차 술병을 던졌다. 문에 부딪친 술병이 깨졌다. 꼭 세레나에게 던진 세라프의 진심처럼 산산조각났다. 세라프는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 숙였다. 적어도 이 부분에선 세레나의 말이 맞았다. 포기하면 편하다. 뭐든 쉽고 뭐든 잘난 고상하신 누이는 절대 세라프에게 그가 바라는 사랑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라프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어째서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

“제발 날 사랑해줘...”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도 좋아. 날 좋아해줘. 내가 나쁜 짓을 해도 좋아. 날 좋아해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지지해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공감해줘. 내가 뭘하든 어떤 사람이든 날 사랑해줘. 가족이잖아, 누나잖아, 부모님이 그러지 않으니까 누나라도 그래야 하는 거잖아. 지독하게 이기적인 욕구를 한 문장에 응축해 토해내고 서러움이 복받치기 전에 세라프는 술병을 들었다. 집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그의 눈에 술깨는 약이 들어왔다.



병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문 밖의 시종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세레나는 눈짓으로 방에 들어가려는 시종을 막았다. 세레나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이 물었다.

“술을 드리지 말...까요?”

“원하시는 대로 내드리게. 왕세자 전하와 술로 싸우는 건 지긋지긋하구나.”

사실은 싸운 적 없다. 남들 보는 앞에서만 적당히 잔소리하는 시늉을 한 적 있는 게 고작이다. 시종일관 공주님 미소를 유지한 세레나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포기하기 싫다... 라.”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시작하기 전에 포기하고 싶어져 세레나는 사지를 퍼덕였다.


작가의말

메리 크리스마스!

+

왜살지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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