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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몽키님의 서재입니다

세레나와 불가사의한 미궁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글래스몽키
작품등록일 :
2017.03.09 18:09
최근연재일 :
2018.12.25 23:38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58,281
추천수 :
3,597
글자수 :
481,064

작성
18.03.03 00:14
조회
490
추천
37
글자
21쪽

구명 8

DUMMY

동생에게 막말을 한 덕분에 세레나는 이전보다 짜증이 가신 상태였다. 그래도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녀는 걸음을 빨리했다.

1회차와 비슷한 시점에 3층으로 가는 계단에 도달했고 대화는 2회차보단 1회차 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세레나가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걷자 기사들이 그녀의 탓이 아니며 투위블은 무사할 것이라 주절거리는 게 조금 듣기 거슬렸다.

‘수정 치는 횟수를 줄여야해.’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을 것도 없다. 세레나 때문에 홀로 남은 투위블만 구하고서 바로 올라오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투위블이 계단만 확인하고 가자고 하면 신께서 노하셨네라고 거짓말을 하든 동티가 날 거라고 경고하든 우기기만 하면 땡이었다.

요는 그녀의 연기력에 달려 있었다.

‘허접해도 괜찮겠지만.’

지도가 모두 밝혀진 기적 앞에서 연기력이 허접하면 어떤가. 지도가 다 뚫리고 계단까지 나와 있는데. 계단까지 가는 숨겨진 길을 찾는 건 본래 미궁 탐사가 목적인 탐사대의 몫이지 세레나의 몫이 아니었다.

세레나는 두 번이나 스스로 찔렀던 목을 어루만졌다. 남들은 꿈에서 목을 찔려도 아파서 환통이 남는다는데 그녀는 진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커녕 가렵지도 않았다.

괜한 질문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세레나는 5층에 도달한 후 마법 지도를 쥐기로 했다. 구조대는 큰 위기나 갈등 없이 무난하게 4층에 도달했다. 이전과 같은 루트를 거쳐 미궁양이 있는 광장에 도달했고 올리브는 금속 공을 꺼냈다.

“호오, 그렇게 묵직한 물체를 가방에 놓고 날래게 움직이다니. 대단하군.”

“이 정도는 기본이지.”

올리브가 금속 공을 광장 쪽으로 굴렸다. 함정이 작동되자 올리브가 기세등등하게 설명했다.

“트레저헌터들이 가볍게 걷는 정도의 압력과 무게에 맞춰 특별제작한 물건이라구! 비싸요, 아주 비싸요~.”

“제구력이 상당하군, 마치 바람이 공을 일직선으로 밀어주는 것 같아. 과연 황야의 바람.”

영이 느끼하게 올리브의 제구력을 칭찬했다. 황야의 바람이 바람둥이의 바람인 걸 알고 있는 올리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도구에 관심이 많은 마법사들이 쑥덕였다.

“굉장이 유용하오.”

“모험가들의 노하우를 얕보면 안 되겠소.”

이후엔 1회차와 똑같았다. 어디서 살 수 있느냐, 나도 소개받아 겨우 산 거다. 이어 미궁개 얘기가 나오자 올리브가 대놓고 말을 돌렸다. 1회차 땐 느끼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가 확실했다.

올리브만 아니라 영 또한 미궁 개에 대한 주제를 떨떠름하게 여겼다. 세레나는 대충 짐작가는 게 있으면서도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란 생각에 탐사대를 재촉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 투위블 경이 얼마나 외롭겠나.”

“아하하, 맞아! 공주님 맞아요.”

미궁 개 화제를 벗어나고 싶은 올리브가 재빠르게 세레나의 말을 받았다.

“지금 이 아래에서 기사님이 엉엉 울며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데서 시간 잡아먹어 되겠어요? 자! 갑시다!”

함정을 모두 파악한 구조대가 전력으로 계단까지 질주했다. 뒤늦게 구조대의 존재를 알아챈 미궁양이 피어로 구조대의 발을 붙잡았다.

메에에에에에에.

미궁양의 피어에 구조대는 저항을 시도했다. 빡침이 수그러든 세레나는 이번엔 저항에 실패해 철푸덕 넘어졌다. 브브 또한 제 발에 엉켜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이 오네와 스라이가 둘을 챙겼다.

“에구, 공주님 괜찮아? 무릎 안 깨졌어요?”

“괜찮으신가.”

“괜찮으십니까!”

“얼굴로 넘어진 게 아닌데 무슨 난리인가. 이게 더 부끄러우니 어서 가세나.”

앞선 두 번은 안 넘어졌는데 세 번째에 넘어진 게 창피했던 세레나는 5층에 내려가자마자 거짓말할 거리를 하나 늘렸다.

‘그래. 뛰어가던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아 놀라 넘어졌다고 하면 되겠어.’

나날이 거짓말 솜씨가 늘어난다. 세레나는 미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얼굴에 철면을 깔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비에타의 미궁 구조대(긴급 편성)는 무사히 비에타의 미궁 5층에 도달했다. 오네는 투위블이 떨어진 층을 확인하기 위해 마법 지도를 펼치고 검은 점이 찍혀 있자 안도의 한숨을 내위었다.

“투위블 경은 이 층에 있다.”

“다행입니다, 대장님.”

“천만다행이오.”

“기사님 운 좋네. 6층이나 7층이면 진짜 큰일이었는데.”

“공주님과 투위블 경이 떨어진 곳은 어두웠는데 이곳은 어둠이 느껴지지 않는군.”

“위층처럼 구역별인가?”

“투위블 경이 언데드를 피해 무사히 빛의 구역으로 이동해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투위블 빛 밝혀놓고 잘 쉬고 있으니 염려말지니.

세레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연기를 시작했다. 신내림 3탄이다.

“아아, 머리가!”

“공주님! 현기증이 이십니까?”

“어디 아파? 요?”

세레나가 두통을 호소하자 구조대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세레나는 이런 연기에 몰두하는 자신이 싫어 도리질쳤다. 그러자 다들 통증이 심해 그러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실은 내가 방금 고꾸라진 건 미궁양의 피어에 눌려서가 아니다.”

“예?”

“지도를 줘보게.”

혹시?

오네는 순순히 세레나에게 마법 지도를 건넸다. 세레나의 손에 마법 지도가 들리자마자 백지에 가까웠던 지도가 점과 선, 색으로 물들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올리브의 반응이 격렬했다.

“세상에! 이번에도 신께서!”

“음음. 공주님은 실로 총애 받으시는 분이야. 나 또한 신의 총애를 받는 선택받은 자로서 진즉부터 알아봤지.”

올리브는 놀라서 지도와 세레나의 얼굴을 번갈아보고 영은 꼭 자기가 지도를 밝힌 것처럼 으스댔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레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연기를 계속했다. 아직 장막이 내려오지 않았으니 무대는 진행 중이었다.

“동료를 아끼는 그대들의 마음을 미궁의 신께서 어여삐 여겨 내게 친히 5층의 지도를 알려주셨다. 또한 투위블 경의 위치까지 알려주셨으니!”

세레나는 손가락으로 투위블 경이 짐을 챙겨놓고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을 장소를 짚었다. 검은점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다.

“이 곳! 이 곳에 낙오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괜한 실랑이를 막기 위해 세레나는 두통이 더 심해진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영이 후다닥 달려와 세레나를 부축했다.

“아아, 머리가!”

“이런. 신성이 과해 부작용이 일어나셨습니까?”

“어서 빨리 투위블 경을 찾아 이 미궁을 벗어나자꾸나! 신께서 재촉하신다!”

투위블 경은 1회차, 2회차 때와 동일한 지점에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1회차 땐 낮잠을 늘어지게 자서 구조대에게 허탈함을 안겨주고 2회차 땐 체조를 열심히하고 있더니 3회차 땐 수통을 잡고 입술만 적시는 선으로 홀짝여 혼자 고립된 현실을 보여주었다.

투위블은 구조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구조대도 투위블이 공주가 찍어준 장소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랐습니다!”

“우리도 경이 진짜 여기 있을 줄 몰랐소!”

미궁에서 벌어지는 기적의 중심엔 세레나 공주가 있을 지니. 올리브는 공주가 보인 신통함에 혀를 내둘렀다. 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고 세레나의 상태를 살폈다.

“공주님. 말씀하신 대로 떨어진 기사를 찾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머리가...”

“이럴 수가. 공주님이 부상이라도 입으신 겁니까?”

투위블은 영의 부축을 받은 세레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놀랄 만도 했다. 공주 대신 파티와 떨어졌다가 간신히 파티와 재회했는데 공주의 상태가 안 좋아보이니까. 정의의 기사 투위블이 정색하고 대장에게 따졌다.

“설마 제가 떨어지자마자 탐색을 속행하신 겁니까? 어떻게 그런 짓을! 대장님 실망입니다! 아니, 짐이 있으니 올라가셨다 다시 내려오신 게 확실하군요. 허면 몸이 불편하신 공주님을 억지로 이끌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대장님 실망입니다!”

지켜보는 오네의 주먹이 울었다. 오네는 건틀릿 낀 오른손을 쓰다듬다가 세레나의 꾀병을 보고 손을 내렸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부하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느니 이동하면서 대화하는 편이 나았다.

“복귀한다.”

“예, 알겠습니다. 투위블 경, 들 수 있는 짐만 챙겨서 따라오시오.”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한 오네가 스라이에게 세레나를 업을 것을 지시했다. 세레나는 거절할까 하다 받아들였다. 스라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조금 쉬고 싶었다.

그렇게 2층으로 돌아간 세레나는 계단을 앞두고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에겐 죽음을 도구로 쓰지 않을 거라느니 뭐라느니 잘난 척 다해놓고서 쓰레기 같은 동생 하나 살리겠다고 두 번이나 자살했다. 쪽잠을 자느라 리처드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꿈에서 마주쳤다면 리처드의 명치를 치든, 자신의 명치를 치든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어리석은 짓 하지 말아야지.’

“여기서부턴 내 발로 가마. 고맙다.”

“공주님을 모실 수 있게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진짜 미궁의 신인지 길찾기의 신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세레나가 어떤 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선 신관보다 더 신과 잘 통하는 인물이니 스라이는 세레나가 일국의 공주일 때보다 더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다른 탐사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특히 영은 틈만 나면 동종 직업인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했으나 본인의 궁수 코스프레와 세레나의 무시로 실패했다. 영은 어둠이 함께라면 외롭지 않다며 음침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으, 올리부눈 공주님 엄눈 탐사는 시로시로.”

올리브는 귀여운 척을 하다 못해 무시무시한 소리도 같이 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님 중 아무나 6층으로 냅다 떠밀 걸 그랬네. 미궁의 신께서 6층 지도도 하사하실지 누가 알아? 아깝다.”

“올리브. 신을 얕보지 마라. 특히나 이곳은 미궁이다. 신은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알고 있어.”

“실수인 척, 사고인 척 하면 되잖아. 그리고 농담이잖아, 제로. 농담 몰라? 어둠이 농담은 싫어하나보지?”

“어둠은 우스개를 좋아한다!”

“그럼 아무거나 해봐.”

“노, 농담따먹기는 하릴 없는 작자들이나 하는 실없는 일, 일이다!”

영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그녀는 괴담엔 재능이 있었지만 농담엔 재능이 없는 듯 했다. 올리브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럴 땐 그냥 네 허리에 손을 얹으라고! 넌 존재 자체가 농담거리니까!”

“푸풉.”

마법사 둘이 동시에 빵 터졌다. 오네는 쯧, 혀를 차고 부하들의 무례를 사과했다.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이 튀어나올 정도로 평화로운 복귀였다. 2층에 도달하자 경비대가 달려와 짐을 대신 받았다. 세레나는 혹시나 싶어 날짜를 물었다. 미궁 내에서 대충 계산한 시일과 얼추 일치했다.

‘역시 수정이...’

추정컨대 그 층에서만 시간이 달리 흐를 것이다. 세레나는 수정을 쉼없이 치느라 눈앞이 번쩍였던 것을 회상하고 고개를 저었다.

“......”

“무슨 일이냐.”

떨리는 목소리로 날짜를 대답한 경비병의 상태가 이상했다. 자꾸 세레나를 보고 덜덜 떨고 세레나가 묻는 말에 답했음에도 그녀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제국군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 했다.

‘설마.’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감히 공주님의 질문에 답하지 않다니.”

오네가 추궁하고 나서야 병사가 입을 열었다.

“소, 송구하오나 세레나 공주님. 세라프 왕세자께서 벼, 병사하셨습니다.”

“뭬야?”

세레나의 눈앞이 번쩍였다. 세레나는 미궁양의 피어에 당했을 때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마침 곁에 있던 오네가 그녀를 받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히 고해 올려라.”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듣기로 급병을 앓아 돌아가셨다고...”

세레나는 뒷목을 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미궁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다. 1회차와 2회차 때 세라프의 사망시점이 두 달 가까이 앞당겨진 것이다.

‘도대체 뭐야!’

세레나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사람들이 그녀를 미궁 밖으로 빼내 간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세라프의 죽음은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누가 우리 꽃쓰레기를...”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들 것을 가져와! 빨리!”

“놓아라! 내 발로 걷겠다! 랜디 백작부인은 어디에 있지?”

“1층에서 공주님이 나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레나는 그녀를 부축하려는 사람을 뿌리치고 1층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 힘 풀린 다리가 몇 번이나 말썽을 부렸지만 타인의 도움은 모두 거절했다.

1층으로 올라가니 미리 병사의 연락을 받은 필리아가 세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짓물러 있었다. 예쁘긴 여전히 예뻤지만 예쁜 얼굴이 반갑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필리아는 세레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공주니이이임. 세자 전하께서, 전하께서어어어.”

“나도 들었다, 필리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세자 전하께서 왜 돌아가셔? 그렇게 건강했는데 병사라니. 말도 안 된다. 암살이냐? 흐지야? 제국이야?”

평소의 세레나라면 주위 이목을 신경 써서 귓속말 했겠지만 지금의 세레나에겐 그런 여유가 부족했다. 그나마 비에타의 수작이냐 묻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으허허허허헝.”

필리아는 세레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만 했다. 세레나는 조금 힘을 써서 필리아의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해 윽박질렀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

“히끅, 흐윽, 흐윽. 저, 전하는.”

“그래! 전하는!”

“공주님이 미궁에 들어가시고 내내 화를, 흐윽, 화를 내시다가아, 비에타의 독주를 마시고 그만. 으아아아앙.”

근래 술을 끊었다가 도수 높은 술을 물처럼 마시다 급성 알콜 중독으로 죽었단다. 왕가의 손님이 갑자기 죽었으니 다들 독살을 의심해 철저한 조사와 검시가 이루어졌으나 결론은 급성 알콜 중독이었다.

세레나는 다시 뒷목을 잡았다. 이번엔 진짜 뒷골이 땡겼다.

‘이 놈의 새끼.’

사인이 너무 허탈해 이 쓰레기를 살릴 필요가 있나 회의감이 들 정도다. 하지만 세레나는 금방 마음을 고쳤다. 사인이 어떻든 이 쓰레기는 살릴 필요가 없었다. 살리고 싶은 이유는 세레나의 고집, 그 하나였고 그 하나면 충분했다.

세레나는 세라프가 오래오래 살아서 늙어죽길 원했으니까.

“영! 날 살리지 마!”

세레나는 목에 단검을 꽂았다.

눈앞이 번쩍이고 바닥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세레나는 쓰러질 뻔 한 몸의 중심을 잡고 앞을 주시했다. 미궁의 신이 그녀 앞에 있었다.

세레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

“제 동생이 자꾸 죽는 건 그 애가 죽을 운명이라 그런 게 아니란 말씀이죠?”

“그렇단다.”

신이 자취를 감추고 세레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불퉁한 세라프의 얼굴을 보자 입술로 시선이 절로 갔다.

‘저 놈의 주둥이.’

죽을 것도 모르고 술을 처마신 주둥이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세레나는 극한의 인내로 폭력을 참았다.

‘이번만, 이번만 참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세라프.”

“뭐, 뭔데.”

“사지 멀쩡히 죽지 않고 돌아올게. 일주일만 기다려. 정확히 일주일 뒤에 돌아올 테니까 이번만 날 믿어주지 않을래?”

갑자기 누나가 다정하게 굴자 세라프는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은 세레나의 손이 떨리는 걸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누, 누가 기다려준대!”

“요즘 계속 금주했지? 금주도 잘 지키고, 심심하면 산책이나 하면서 일주일만 기다려.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거울을 쪼개 나눈 정인에게도 하지 않을 법한 말을 하고 떠났건만, 사망 플래그를 세운 건 세레나인데 죽은 건 또 세라프였다.

“어허허허헝, 공주니이이임. 세자 전하가 세자 전하가 산책 중에 넘어지셔서 그만!”

‘아놔.’

“방 밖은 위험해! 방에서 기다리렴! 일주일 뒤에 돌아올 테니까 그 동안 방에서 책이나 읽어!”


“으허허허허헝, 공주니이이임. 세자 전하가 세자 전하가 생전 안 읽으시던 책을 읽으시다가아아아! 비에타 왕실에서 과거에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책을 고르시는 바람에!”

“아니 무슨 책을 골랐다고 죽어!”

“페이지마다 독이 발라져 있는데 그걸 모르고 침 묻혀서 넘기시다가!”

‘아놔.’

“너 책 싫어하지? 그냥 잠이나 자라. 넌 수면이 부족해. 성장기 소년은 잠을 자야 키도 큰다더라. 이불 밖은 위험해! 그냥 나오지를 마!”


“으허허허허헝 공주니이이이임!”

세레나는 이번엔 진심으로 화냈다.

“왜! 왜! 왜! 아 왜! 왜! 이불이 걔를 잡아먹었니? 침대 밑에 괴물이라도 숨어 있었대?”

“침대에서 누운 채로 스프를 드시다가 목에 스프가 걸리셔서 그만.”

“씨발 나 안 해. 안 살려.”

세레나는 자살용으로 써먹던 단도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공주가 날붙이를 바닥으로 던지는 거친 행동을 보이자 펑펑 울던 필리아가 움찔했다.

“으허헣어, 공주님. 얼마나 충, 충격을 받으셨으며언.”

“나 안 해. 내가, 내가 도대체 몇 번을.”

쉬지 않고 5층을 왕복한 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가. 사람 목숨 하나 살린다치면 값싼 편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도 휴식이 있을 때에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세레나는 기억한다. 육신은 휴식해도 정신은 쉬지 못했다. 난데 없는 혹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가 무슨 개복치야? 하다하다 스프 마시다 죽어? 장난해? 여지껏 살면서 술처마시고 도박이나 한 주제에 미인이랍시고 요절하려는 거야? 그런 거야?’

가인박명이라면 필리아는 왜 멀쩡히 살아있는데! 유부녀라?

세레나는 분노해 벽을 치고 땅을 쳤다. 사람들은 동생을 잃고 광분하는 공주의 모습에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 세레나는 자신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저들의 눈빛도 지긋지긋했다.

비에타의 미궁 2층을 공략할 때에도 안 했던 5회차에 6회차까지 달렸다. 그런데도 세라프가 계속 죽으면 죽을 운명이라고 밖에 받아들 수 없지 않은가. 미궁의 신은 사람의 죽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지만 세라프의 죽음은 신의 말과 위배되었다.

“마지막...”

산발한 세레나가 치를 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나만 남은 주황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자 영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세레나는 거친 호흡을 내쉬며 그녀가 던진 단검 쪽으로 기어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번엔 영에게 자신을 살리지 말라 말할 정신도 없었다. 세레나는 영이 되살리지 못하게끔 확실하게 검을 꽂아넣고 힘이 남아있을 때 옆으로 그었다. 절반 이상 잘린 목이 옆으로 기울며 바닥이 가까워지고, 눈을 뜨자 세레나의 앞엔 신이 있었다.

“죽을 운명 따위 없다고 했잖아요! 피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운명은 정해져있지 않다.”

“그럼 왜 자꾸 죽는 거데요! 지가 무슨 개복치도 아닌데 왜 자꾸 죽어! 어떻게 죽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야! 데드 엔딩 수집하라는 거야 뭐야! 내가 옆에 있어야 죽지 않게 챙겨주든 조언을 하든 뭘 할 거 아니야! 이건 뭐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지 멋대로 죽는데 날더러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질답이 아닌 일방적 한풀이었다. 세레나가 광분해 말을 쏟아내는 동안 시간이 다했다. 세레나는 핏줄이 선 눈으로 개복치만도 못한 동생을 노려보았다. 세라프는 멀쩡했던 누나가 갑자기 눈에 핏줄을 세우자 흠칫 몸을 떨었다.

“뭐, 뭐야.”

“...그래. 안 보이는데서 죽는 것보단 보는 데서 죽는 편이 살리기 쉬울 지도.”

“죽어? 누가? 누가 우리에게 암살자를 보낸대?”

세레나는 태평한 소리를 하는 세라프의 입을 꼬집었다. 갑자기 입술을 꼬집히자 세라프가 신경질내며 세레나의 손을 쳐냈다. 세레나는 순순히 놔주는 대신 이번엔 왕자의 멱살을 잡았다.

“가자.”

“뭐? 야! 야야! 무슨 짓이야!”

“그렇게 불만이면 같이 가자. 같이 미궁 가자. 가면 되겠네, 미궁.”

“공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비병이 세레나와 세라프를 막았지만 세레나가 눈에 쌍심지를 키자 기백에 밀려 물러났다. 뒤에서 병사가 애처로이 외쳤다.

“폐, 폐하께 이를 겁니다아!”

“마음대로 고해라.”

여왕의 허락은 이전에 받았던 걸로 퉁치면 된다. 졸지에 미궁에 끌려가게 된 세라프가 뭐라 외치며 반항했지만 빡친 세레나의 손은 동생의 반항을 허락지 않았다. 세레나는 구조대가 돌아올 때까지 세라프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미궁에서도 그렇게 죽어나자빠지는지 두 눈, 아니. 한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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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신탁 1 +3 18.10.21 471 38 15쪽
81 구명 11 +4 18.10.20 504 34 13쪽
80 구명 10 +7 18.10.20 484 37 11쪽
79 구명 9 +5 18.03.12 510 42 15쪽
» 구명 8 +8 18.03.03 491 37 21쪽
77 구명 7 +4 18.03.02 475 37 18쪽
76 구명 6 +3 17.04.30 639 38 16쪽
75 구명 5 +1 17.04.28 570 38 11쪽
74 구명 4 +4 17.04.28 585 39 7쪽
73 구명 3 +5 17.04.28 527 35 9쪽
72 구명 2 +2 17.04.26 540 34 7쪽
71 구명 1 +2 17.04.26 537 35 12쪽
70 비에타의 미궁 4층 6 +2 17.04.25 583 32 10쪽
69 비에타의 미궁 4층 5 17.04.25 524 41 10쪽
68 비에타의 미궁 4층 4 17.04.25 521 41 14쪽
67 비에타의 미궁 4층 3 +1 17.04.24 559 33 10쪽
66 비에타의 미궁 4층 2 +1 17.04.24 552 38 9쪽
65 비에타의 미궁 4층 1 +2 17.04.24 594 40 10쪽
64 비에타의 미궁 3층 2 +1 17.04.23 558 40 12쪽
63 비에타의 미궁 3층 1 +3 17.04.23 600 38 12쪽
62 최종보스의 의무 2 +4 17.04.22 604 37 17쪽
61 최종보스의 의무 1 17.04.22 591 42 11쪽
60 복습 3 +5 17.04.19 619 3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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