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연재수 :
901 회
조회수 :
3,838,305
추천수 :
118,862
글자수 :
9,980,317

작성
23.08.02 09:05
조회
2,488
추천
108
글자
26쪽

REMO : ....or Maybe Dead!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맨해튼 월가의 증권거래소 골목은 관광 측면에서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차라리 옆 블록의 트리니티 교회가 더 볼 것이 많다.

그럼에도 뉴욕 증권거래소는 맨해튼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 번 쯤 방문하게 되는 투어 코스다.

증권거래소 내부는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된다.

당연히 영화 촬영도 불가하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오전 9시 30분에 개장한다.

오후 4시에 폐장한다.

<REMO> 제작진은 1시간 동안 증권거래소 앞 도로에서 촬영을 허가받았다.

혼잡도를 고려할 때 공휴일에 촬영을 할 수도 있지만, 하루 촬영 진행비가 두 배 이상 소요된다.

휴식보장 룰로 인해서 이후 일정도 밀리면서 스케줄이 복잡해진다.

한국에서 이런 촬영을 할 때면 융통성이 기대할 수 있다.

허가 시간 전에 은근슬쩍 조명장비를 미리 가져다 놓거나, 약간의 리허설을 한다거나.

실제 <민중의 적> 로케이션 촬영하며 여러 차례 그런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허가된 시간부터 정확하게 카운트된다.

엄격하게 허가시간을 준수한다.

그 때문에 비용이 몇 배로 소요된다.

<REMO> 제작진은 증권거래소 뒷골목을 대기 장소로 미리부터 빌렸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허가시간에 재빨리 증권거래소 앞 도로로 이동해 촬영을 진행하기 위해서.


“서둘러!”

“셋!”

“올 스탠바이!”


한정된 시간에 한 커트라도 더 찍으려면 번갯불에 콩 볶아야 했다.


“GO!”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의 왜소한 등 그 너머.

거대한 성조기가 걸려있는 뉴욕증권거래소가 보인다.

남자는 아르메 고야크(하틀리 도프 주니어 역)라는 보스니아인이다.

1편의 시골마을의 교사이자 흑마법사다.

롱 쇼트로 잡힌 화면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하틀리 도프 주니어의 등으로 다가간다.

슈퍼크레인으로 촬영했다.

주인공의 첫 등장 못지않게 악당의 첫 등장도 무척 중요하다.

첫 장면에서 어떤 인상을 남기냐에 따라 악당의 캐릭터가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컷! 오케이!”


여러 차례 테이크를 찍을 여유가 없다.

곧바로 다음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슈퍼크레인이 같은 포지션에서 최고 높이까지 떠올랐다.

그런 사이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모니터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배우가 전용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동안 좀비로 인해 난장판으로 변하는 증권거래소 앞거리 부감 쇼트를 촬영했다.

NG고, OK고 따질 겨를이 없다.

무조건 찍고 봤다.

셋업은 단 세 번 뿐.

하틀리 도프 주니어의 뒤에서, 정면에서, 증권거래소 계단 위에서.

실제 카메라를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단 40분.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해치웠다.

동원 된 50명의 엑스트라는 평상시의 모습을 두 번 연기했고, 좀비 공격에 혼란에 빠진 상황을 두 번 연기했다.

나머지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의 단독 쇼트를 촬영했다.


“컷! 오케이!”

“철수!”

“조금만 서두릅시다!”


촬영현장으로 진입하질 때와 마찬가지도 철수도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30분도 안 되어 뉴욕증권거래소 앞은 언제 영화촬영이 있었냐는 듯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갔다.


❉ ❉ ❉


“Occupy Wall Street!”


이전 삶에서 2011년 9월 월가점거 운동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시민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월스트리트엔 황소(사는 사람)와 곰(파는 사람)은 없고, 오직 돼지(욕심꾸러기)들뿐이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월가점거 운동 시위대의 피켓 문구다.


[탐욕의 소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계급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자.]

[민중에게 권력을.]

[은행들이 지불하게 하라.]

[월가 모든 곳을 점거하라.]


<레미제라블>의 구호가 아니다.

월가점거 시위대의 구호와 푯말에 적힌 문구들이었다.

이전 삶에서 시위대가 맨해튼 은행지구 주코티 공원을 한 달 넘게 점거했다.

월가점거 운동이 한창일 때는 무려 2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기도 했다.

광장을 막은 시위대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시위행진을 벌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7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자본이 사악하다는 걸 모르는 지식인은 없다.

뉴욕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황소동상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 촬영하는 랜드마크다.

그 안에 숨겨진 추악한 탐욕은 관심이 없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 맨해튼에 들어서면 시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월스트리트가 오른쪽으로는 뉴욕시 법원이 나온다.

법원에서 근무하는 일부 판사들은 월가를 지나칠 때 잠시 창문을 연다.

그리고 침을 뱉는다.

도덕적 해이는 판사가 판단을 내릴 문제가 아니다.

판사도 인간이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월가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구역질이 날 수밖에 없다.

구역질나는 인간들의 일터가 월스트리트니 침이라도 뱉지 않고는 판사들의 짜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GARAM Invest라는 미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개인신탁투자회사를 소유한 류지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까지 듣곤 한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판사가 창밖으로 침을 뱉다니 그게 뭐하는 짓이야?”


맨해튼 거주 부자들에게 월가를 향해 침을 뱉는 판사가 제법 유명하단다.


“판사 신분임에도 언론에 대고 월가를 비난하지. 얼마나 증오심이 크면 그럴까마는 판사가 그러는 건 좀 그래.”


션 블랙이 쓴 최종편 스크립트에는 전쟁반대 시위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했다.

보스니아계 흑마법사 아르메 고야크가 반전시위대를 지나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류지호는 초고의 반전 시위를 월가점거 시위로 바꿨다.

션 블랙은 조디 워커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을 풍자한 것인데, <REMO>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놓고 반전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류지호는 소위 ‘네오콘’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불손한 사상가로 찍힌 상태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자칫 미국에서 사업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JHO Company Group은 ‘네오콘’에 반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제작·배급하고 또 그들의 주장을 담은 영화에도 동시에 관여한다.

네오콘이라 불리는 부류의 사람들은 할리우드와 대놓고 척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인들이 단결해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무척 성가시고 짜증나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 모기가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정도이겠지만.

이전 삶에서 2020년대 미국의 네오콘을 흉내 내는 한국의 대통령이 탄생해서 말마다 자유, 인권,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했는데, 의도와는 달리 중요한 가치를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지구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국이 감히(?) 도전할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놓고, 체제와 국력 경쟁 모두에서 미국보다 몇 발 뒤처져 버린 러시아마저 부활시키게 만든 철지난 네오콘을 흉내 내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인해 연설 때마다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진다.

암튼....


‘반전 시위는 뉴욕보다 워싱턴DC가 더 어울리기도 하고.’


맨해튼 공원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지긴 하지만, 대규모 반전시위는 주로 수도인 워싱턴DC에서 벌어지는 편이다.

비록 초고와 달리 반전시위가 월가점거 시위로 바뀌었다곤 해도, 반전 메시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크면 그 아이들이 다른 어머니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시위대 피켓에 숨겨놓은 문구다.

네오콘의 꼭두각시 조디 워커의 전쟁의 광기를 꼬집는 말이다.

로버트 폭스의 PARKsTV를 저격하는 풍자도 슬쩍 얹었다.

류지호는 광대와 좀비로 분장한 시위대를 등장시켰다.

시위대 일부를 히피족 혹은 별난 사람들의 집단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PARKsTV를 암시하는 리포터는 딴 소리를 한다.


[뉴욕 금융거리를 행진하려는 시위대에 수천 명의 노동자와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노동자에 대한 전쟁을 멈추라’라는 구호를 외쳐 반전운동이 계급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시위대에는 그 어떤 노동자와 노동조합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광대분장을 했거나 어설픈 좀비 분장을 한 시민과 히피족들만이 있을 뿐.


[대기업, 특히 은행과 로비스트들 편에 선 정부는 정신 차려라.]


<REMO> 최종편이 한창 촬영 중이던 센트럴파크 귀퉁이에서 들려오는 구호다.

물론 실제 상황은 아니다.

영화 촬영에 동원된 엑스트라들이 외치는 구호다.

촬영할 때는 시위대 모습을 꼼꼼하게 화면에 담는다.

편집을 하고 나면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겠지만.

류지호는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뭔가를 관객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촬영은 넉넉하게 해 두어야 한다.

풍부한 쇼트를 편집실로 보내야 밀도 높은 편집이 나올 테니까.

시위대 모습은 보스니아인 아르메 고야크가 맨해튼 곳곳을 돌아보며 마주하게 되는 일상 가운데 하나다.

해석에 따라서 지난 닷컴버블붕괴 시기 대기업들의 회계부정과 무차별 로비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와 관련된 대사들이 은근슬쩍 깔려있기도 하고.

류지호는 세계 금융시장에서 거물 투자자다.

영화를 통해 월가를 공격하는 것이 위선처럼 느껴지는 관객도 있을 터.

개봉 후에 나올 질문에 대한 답변도 이미 생각해두었다.


“영화감독에게 이 시대의 사회현상은 좋은 소재이자 고민거리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함께 고민하고 싶었을 뿐.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난 영화를 사랑하고 그래서 영화의 편이다. 지나친 억측은 사양이다.”


실제 월스트리트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은 19세기 이후 20~30년마다 바뀌었다.

자유방임 그리고 거품.... 다시 위기.

경제위기가 찾아오면 미국인들은 월스트리트를 ‘악의 소굴’로 규정했다.

그럴 때만 잠시 규제가 강화되었다.

대신 시장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그러면 다시 효율을 중시하는 흐름이 되살아난다.

또 다시 문제가 터지고 다시 규제를 한다.

무한반복이다.

일반인들은 그 속에서 생존이 최우선이다.

미국의 자본시장과 시스템으로 부를 쌓을 수 있는 류지호 같은 이들에게는 부를 뻥튀기 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런 주제에 금융자본을 비판한다고?

위선일 수도 있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감독으로써 류지호의 시선까지 위선은 아니다.


✻ ✻ ✻


털썩 주저앉은 아르메 고야크에게 시위에 참여한 여성이 묻는다.


[괜찮아요? 경찰을 불러줄까요?]


그녀의 친절이 부담스럽다.

아르메 고야크가 얼른 자리를 떠난다.

그는 맨해튼의 살인적인 교통체증을 경험하고, 얼치기 관광객에게 바가지요금을 씌우는 뉴욕의 명물 엘로우캡도 경험한다.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타임스퀘어를 구경하기도 하고, 트리니티 교회도 얼쩡거린다.

미국의 교회에서 그들의 신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응답할 리가 없다.

그런 장면들 속에서 아르메 고야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류지호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에게 내면을 숨기는 연기를 주문했다.

사실 아르메 고야크는 걸어 다니는 폭탄과 다르지 않다.

언데드를 부리는 흑마법사로 좀비 바이러스를 무차별 유포할 수 있는 생체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다들 촬영이 곧 끝나겠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류지호의 목소리가 센트럴파크에 울려 퍼졌다.


“NG!”


NG가 나왔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스태프들이 보기에 NG를 외칠 만큼 이상하거나 누구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의 의도를 알아채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일류와 그 이상의 클래스를 가른다.


“어디 불편해?”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류지호는 스태프들에게 잠시 쉬어 가자고 말 한 뒤, 하틀리 도프 주니어와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연기하는데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불편한 거라도.”


류지호가 차분하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마다 그렇지 않다며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고개를 저을 뿐.

조감독 터커 레이튼이 류지호를 향해 손목시계를 들어 보였다.

다른 현장이었다면 재촉을 했겠지만, 터커 레이튼은 주의를 주는 선에서 멈췄다.

다른 감독처럼 쪼아대지 않아도 류지호는 알아서 시간을 잘 사용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는 크루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류지호는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난 감독이다.

배우와 연기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서 머릿속으로는 촬영 분배에 대해 분주하게 계산을 하고 있을 터.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류지호에게 스트레스를 일부러 줄 이유는 없었다.


“......”


한편 류지호는 이유도 모른 채 답답해하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를 가만 내버려뒀다.

몸이 아프거나 캐릭터의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간혹 배우들은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은 아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들은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 그런 현상을 겪는다.

그런 경우에 감독이 다그칠 수도 있고 좋게 타이를 수도 있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 같은 배우는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순간적으로 캐릭터에 빠져들었다가 ‘컷’ 사인과 동시에 쉽게 빠져나오는 타입의 배우이기 때문이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어쩌다가 그런 타입의 배우가 되었는지 모른단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게 되었고,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나.


“흠....”


미묘함.

일반적인 배우였다면 좀 전 찍은 테이크로 충분했다.

그런데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커트마다 연기의 편차가 있는 배우다.

그 점이 류지호의 고민이다.

끝내줄 때는 정말 미친 연기를 보여준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연기 기술자처럼 평범해진다.

방금 장면이 그랬다.

쓸 만하긴 한데, 이전 보여준 모습이 있어서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는.

맨해튼에서 촬영한 장면마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지워지고 아르메 고야크만 있었다.

방금 찍은 부분은 이전에 찍은 장면과 비교해 너무 평범했다.

TV시트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연기 기술 같다고 할까.

연기 기술자를 낮춰보거나 좋지 않다는 건 아니다.

분명 나쁘지 않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는 찜찜함이 있다.

배우 본인도 만족을 못할 터.

이대로 ‘OK'를 확정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여줬던 연기에 흠집이 생긴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아르메 고야크의 중요한 대사를 읊조렸다.


“안식 없는 삶. 어둠속에서 영원히 살기를.... 입에는 붙는데, 뭔가....”


류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단어를 중얼거렸다.


“절망, 후회, 참회....”


사실 아르메 고야크라는 보스니아계 흑마법사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테러리스트치곤 다소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가 묘사하는 살육에 미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할 생각이 없는 평범한 시골교사였을 뿐이다.

발칸반도의 내전을 겪으며 아내와 딸을 잃자, 힘없는 민족 그리고 약자로서의 자신혐오로 괴로워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세계 최강대국에게 중오심을 품게 된다.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고 악마와 거래를 하고 만다.

천사와 악마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까.

자신이 파괴할 뉴욕을 거닐다 한 가족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 인종청소에 희생되는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악마와 거래를 했지만, 무고한 시민이 희생될 미래에 죄책감을 느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나 소시오패스처럼 묘사하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성 여지를 뒀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그 같은 감정처리가 쉽게 연기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냥 네 마음대로 해봐. 아무것도 계산하지 말고.”

“난 계산하진 않아.”

“아르메 고야크에게 깊이 몰입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짧은 모노드라마를 연기한다고 생각해.”

“아무 생각 없이?”


류지호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솔직히 넌 진지한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도 아니고, 그리 지적인 스타일도 아니잖아?”


킥킥.

키득거리며 하틀리 도프 주니어도 순순히 인정했다.


“스탠바이~”


풀어졌던 현장 분위기가 바짝 조여졌다.


“GO!”


재개된 촬영에서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느닷없이 울어버렸다.

가만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센트럴 파크 벤치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진 것.

펑펑 울었다.

약속대로 류지호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진정할 때까지 컷을 외치지 않았다.


‘이 커트를 스펜서가 어떻게 편집에서 붙일지 모르겠지만, 앞 쪽에 찍어둔 몽타주 시퀀스를 들어내도 될 것 같은데....’


뉴욕의 명소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센트럴 파크 한 가운데에서 미국을 망치려는 테러리스트가 오열하는 장면은 어딘지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미국인 입장에서 최악의 테러리스트에 대해서 감독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잘못 다루면 영화를 완전히 망치는 장면이다.

이런 강력한 장면이 살기 위해서는 이 후 장면들에서도 캐릭터의 심리묘사가 더 치밀하고 더욱 섬세해야 한다.

감독 입장에서 좋은 연기가 나왔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영화 촬영기간 동안 한 번 오기도 힘든 소위 ‘그분’이 오시면, 감독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버릴 것인지.

살릴 것인지.

살린다면 캐릭터 톤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어찌되었든 센트럴파크 장면은....


“Pretty Good.....!”


❉ ❉ ❉


뉴욕에서의 2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대규모로 판을 벌여 몹씬을 촬영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진이 빠진다.

이전 삶에서 조감독 류지호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난리를 쳐대야 했다.

감독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나면 큰 보람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이 작품 끝나고 꼭 입봉하고 만다!”


힘든 촬영을 마치고 나면 매번 하던 다짐이었다.

감독이 되고나니 다를 바 없었다.

조감독이 하는 꼴이 하도 답답해서 감독이고 나발이고 계급장 떼고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고 나면 류지호가 했던 것처럼 조감독들이 똑같이 다짐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반드시 입봉하겠다고.

할리우드 현장은 그런 거 없다.

감독과 조감독이 언제 또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함께 일할 때는 돈독한 관계다.

언제 또 함께 작업하게 될지 알 수 없기에 쿨하게 헤어진다.

류지호와 터커 레이튼처럼 매번 함께 작업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그런데다 할리우드 조감독은 프로덕션 과정에 들어가면 감독 편이 절대 아니다.

견제를 하는 포지션이다.

촬영준비를 해주지만, 촬영 진행에 있어서는 스튜디오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할리우드 조감독에게는 계획된 대로 진행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매 촬영 완수해야 할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 촬영속도를 올려야 한다고 수시로 감독에게 조언(압박)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일만 한다.

그리고 할리우드 촬영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DP(Director of photography)다.

한국영화현장은 제1 조감독이 각 부서에 지시를 하지만, 할리우드는 DP가 한다.

막말로 감독이 ‘레디 고’ 사인을 내고, ‘오케이’만 외치면 된다.

촬영현장에서 감독과 배우가 오랜 시간 연기에 대해 대화하는 것도 거의 없다.

연기는 배우의 영역이다.

사전 블로킹(pre-blocking)에서 감독이 완벽하게 배우에게 동선이나 감정을 인지시킨 후에는 배우가 연기한 것 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게 된다.

참고로 블로킹(blocking)은 연극용어에서 온 것으로 배우의 행동선과 무브먼트를 총괄하는 연기용어다.

감독이 어지간한 거장이거나 친분관계가 있지 않는 한 배우에게 NG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감독이 OK할 때까지 촬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당장 배우가 태업에 들어갈 수 있다.

다음 날, 스튜디오 임원이 현장에 찾아와 해고와 관련해 협작을 할 수도 있고.

할리우드 상업영화 현장은 효율성과 약속으로 돌아간다.

약속은 다른 말로 계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할리우드 현장의 신뢰는 인간적인 믿음이라기보다 개개인의 전문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한국에 다녀올 거야?”

“그럴 생각이야. 터커는?”

“가족과 지내다가 토론토로 넘어가려고.”


이런 식이다.

충무로 스태프들은 하루라도 먼저 촬영현장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미국 스태프들은 촬영이 없는 날은 주로 가족들이나 연인 혹은 친구들과 어울린다.

금요일 촬영이 끝나면 퇴근 후 무조건 휴일을 즐긴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식이다.


“토론토에서 봐.”

“잘 다녀와. 월요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고."

“세실리아와 아이들에게 안부 전해주고.”


촬영이 끝났는데, 감독과 헤드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얼쩡거릴 이유가 없다.

류지호는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토론토 로케이션에서는 헤드 스태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원이 현지에서 고용하는 이들로 교체된다.

아이오와주 디모인 로케이션 역시 그곳에서 스태프를 구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면 또 다시 현지에서 활동하는 스태프를 고용하는 식이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 특성 상 동부 스태프를 서부로 데려가 비행기 티켓을 제공하고 숙소까지 마련해 주면서 일을 시킬 이유가 없다.

제1 조감독 터커 레이튼도 토론토 현장으로 복귀할 때 항공료는 본인이 부담한다.

그가 토론토 현장에 합류한 시점부터 <REMO> 예산이 들어간다.

게다가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근로계약조건, 최저임금체계가 다르다.

아이오와주 고용조건은 또 다르다.

해외 로케이션까지 있으면 더욱 복잡해진다.

그래서 어지간한 할리우드 영화는 한 지역에서 주로 세트를 지어 영화를 찍는다.

미국 여러 주를 쏘다니며 촬영하면서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스태프 크레디트는 어떻게 정리할까.

제작사와 스태프 조합 간 규약이 명확하게 마련되어 있다.

프로덕션 기간의 일정 시간 이상 근무, 일정 조건 이상 기여, 계약시 조항 명시 등.

할리우드 제작파트는 매우 세분화 전문화 되어 있고, 기본협약의 내용은 어떤 상황, 어떤 스태프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아주 자세하게 마련되어 있다.

영상미디어 업계 스태프들의 최저임금에 대한 책자는 1,000 페이지에 이를 정도다.

그 외 권리와 의무를 정리한 책자는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따라서 수백 명이 <REMO> 최종편에 참여하지만 실제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다.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면 된다.

한국영화처럼 개나 소나(특히 투자자) 크레디트 롤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감독이 레디 고만 외쳐도 될 정도지.”


좋은 컨디션으로 촬영현장에 출근해 주어진 분량만 소화한 후 퇴근하면 중간은 간다.

그 만큼 비인간적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국 영화판이다.

사실 창의적인 활동은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완료된다.

크랭크인 한 순간부터는 전문화·분업화된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천하의 스티븐 아들러 감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매주 프로덕션 리뷰가 스튜디오에 보고된다.

감독과 스태프들이 프로덕션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튜디오 담당 임원에 세세하게 전달된다.

할리우드 감독이 스튜디오에 고용된 일개 기술자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A-List에 이름이 오른 순간 백팔십도 달라진 삶이 펼쳐진다.

영화 작업을 할 때도 일정 부분의 재량권을 보장 받는다.

이전 삶에서 <덩케르크>를 제작할 때 Eye-MAX 필름, CG를 배제한 정통방식을 고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감독이 흥행감독 반열에 올랐기에 스튜디오가 받아들인 면도 있지만, 감독이 제작비 안에서 쓸 수 있는 재량권이 대폭 늘어난 것도 있었다.

이 시기 스티븐 아들러, 제이미 캐머론 등 A-List 감독들은 전체 제작비에서 15~20% 정도 예산 운용 재량권을 보장 받는다.

1억 달러 예산에서 최대 2,000만 달러를 감독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내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다든가 자녀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등의 사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어떤 용도로든 사용할 수 있다.

로케이션 이동시 제공되는 항공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해도 되고, 호텔 객실을 좀 더 호화로운 곳으로 옮겨도 된다.

촬영 기간 매 식단에 캐비어 요리를 추가시켜도 된다.

그런데 재량권을 그런 식으로 쓰는 감독은 세상에 없다.

이미 최고 대우와 대접을 받기 때문에 예산 재량권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꼭 하고 싶은 장면에 더 힘을 준다던가, 예비비나 촬영 회차를 늘리는 방향으로 재량권을 행사한다.


500만 달러.


류지호가 <REMO : The Destroyer>에서 보장 받은 예산 재량권이다.


2,200만 달러.


이번 최종편에서 류지호가 쓸 수 있는 예산 재량권이다.

<REMO : .....or Maybe Dead!>의 예산은 1.5억 달러.

대략 15%에 해당되는 규모다.

그 의미는 할리우드 영화 다섯 편(학생 작품 포함) 만에 류지호가 A-List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04 민중의 적 : EMBARGO. (4) +2 23.09.04 2,200 84 25쪽
603 민중의 적 : EMBARGO. (3) +4 23.09.02 2,404 104 24쪽
602 민중의 적 : EMBARGO. (2) +2 23.09.02 2,292 73 24쪽
601 민중의 적 : EMBARGO. (1) +9 23.09.01 2,526 105 24쪽
600 총수란 호칭이 더 어울리는 남자? (2) +16 23.08.31 2,560 102 23쪽
599 총수란 호칭이 더 어울리는 남자? (1) +4 23.08.30 2,531 107 25쪽
598 할리우드 겉멋 그 자체... +3 23.08.29 2,536 97 26쪽
597 안티 카페 아니겠죠? +4 23.08.28 2,438 103 25쪽
596 잡초가 아니라 꽃을 따가는 것이다. (2) +4 23.08.26 2,536 108 24쪽
595 잡초가 아니라 꽃을 따가는 것이다. (1) +5 23.08.26 2,379 103 23쪽
594 신상필벌(信賞必罰). (4) +6 23.08.25 2,478 100 22쪽
593 신상필벌(信賞必罰). (3) +4 23.08.24 2,481 107 23쪽
592 신상필벌(信賞必罰). (2) +5 23.08.23 2,506 106 25쪽
591 신상필벌(信賞必罰). (1) +7 23.08.22 2,560 97 22쪽
590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2) +3 23.08.21 2,547 104 25쪽
589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1) +5 23.08.19 2,564 88 23쪽
588 인수·합병이 여의치 않을 것 같은데. +8 23.08.18 2,585 97 23쪽
587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2) +4 23.08.17 2,559 111 23쪽
586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1) +2 23.08.16 2,585 111 24쪽
585 PayMate Mafia. (3) +2 23.08.15 2,614 117 22쪽
584 PayMate Mafia. (2) +4 23.08.14 2,623 118 23쪽
583 PayMate Mafia. (1) +4 23.08.12 2,785 103 24쪽
582 두 번째 오스카! +8 23.08.11 2,687 111 23쪽
581 인간들이 배가 불렀어, 아주! +3 23.08.10 2,590 100 22쪽
580 Pix-Art. +7 23.08.09 2,571 103 23쪽
579 부자 되세요, 꼭이요~ +4 23.08.08 2,632 109 27쪽
578 마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8 23.08.07 2,641 107 22쪽
577 흘러가게 놔두라고 하십니다. +6 23.08.05 2,712 100 22쪽
576 REMO : ....or Maybe Dead! (11) +8 23.08.04 2,590 106 27쪽
575 REMO : ....or Maybe Dead! (10) +4 23.08.03 2,557 104 2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