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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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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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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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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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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REMO : ....or Maybe Dead! (1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좀비영화 혹은 재난영화.


이 장르는 인류 대재난의 한복판에 떨어진 주인공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사건의 중심으로 향해가는 모습을 통해 이야기의 진정성을 담아내는 것과 함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실감을 주는데 주력한다.


- 전염병처럼 퍼져가는 인류의 대재난을 통해 오늘 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쓸모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 권력과 사회 규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좀비영화에서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것이 메시지가 된다.

영화 전편에 걸쳐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영화가 있고, <월드워 Z>처럼 단 한 개의 시퀀스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월드워 Z>의 경우, 주인공 가족이 마트에서 의약품을 챙기는 시퀀스를 통해 위기상황에 놓인 인간 군상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트 시퀀스는 좀비영화의 영원한 클리셰다.

<REMO> 최종편에서도 그 같은 상황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맨해튼의 부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로 숨어들고, 관광객과 일반 시민들은 지하로 숨어든다.

엘리베이터에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서민을 부자가 매몰차게 외면한다.

자기만 살겠다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린다.

심지어 가동중지 시켜버린다.

엘리베이터에 타지 못해 낙오한 사람은 좀비가 되고 만다.

반면에 부자들은 펜트하우스에서 구조대에 의해 구조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현실의 부조리를 고스란히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REMO>에서는 구조헬기가 추락한다.

기어코 펜트하우스까지 밀고 올라온 좀비떼가 헬기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GO!"


세트장 공중에 헬기가 떠 있고 삼면이 온통 그린 스크린이다.

헬기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펜트하우스 옥상이 세트로 만들어져 있다.

류지호의 큐사인이 떨어지자, 옥상 세트에서 와이어를 매단 Vic&Jay 스턴트맨들이 공중에 떠 있는 헬기를 향해 달려든다.

어떤 좀비는 헬기 안으로 들어가서 생존자를 공격하고, 또 어떤 좀비는 허무하게 아래도 추락한다.


“오오~”


프리비즈를 함께 보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아슬아슬하게 출발하는 헬기로 주인공이든 악당이든 뛰어드는 것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클리셰다.

없으면 섭섭할 정도다.

류지호가 만든 콘티는 기존 클리셰와 조금 달랐다.

막 옥상을 떠나는 헬기를 향해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뛰어들지만, 닿지 못하고 빌딩 아래로 우수수 추락하는 모습에 방점을 찍었다.


“중심 피사체인 헬기를 중심으로 저 멀리에 공군 전투기들이 날아가고, 방송헬기와 구조헬기들이 수 십대가 맨해튼 상공에 떠있는 모습이 CG로 입혀질 거야. 아마 건물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해 검은 연기도 피워대면서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되지 않을까 싶어.”


부자들이 타고 있던 헬기가 좀비에게 공격당해 옆 건물에 부딪치면, 근처를 비행하던 구조헬기까지 덮친다.

연쇄적인 헬기 추락 액션이 VFX로 펼쳐질 예정이다.

지상에서 생존자들이 도망 다니는 장면이나 군대가 좀비를 향해 총질하는 장면만 보여주면 심심하다.

때문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단골 메뉴 중에 하나인 폭발 혹은 추락 시퀀스를 넣었다.

그것도 클리셰를 살짝 비틀어서.

이런 시퀀스를 일부러 넣은 데는 또 다른 의도도 깔려 있다.

헬기 추락 여파로 건물이 파손되고, 지상이 너저분해지고는 미술효과와 함께 헬기 잔해와 시체로 위험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촬영 편의적으로도 옥외 세트에 파손된 헬기 잔해도 좀 놓고, 시멘트 파편이 지붕에 꽂혀있는 차량도 배치해 놓고, 아스팔트 바닥도 헤집어 놓고 하면, 화면이 풍성해진다.

깨끗한 환경과 너저분한 환경을 다양하게 묘사함으로써 연출이 다채로워진다.

각종 장애물과 혼잡한 구조로 레이어가 복잡해지면서 3D 공간감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보스!”


비서 리사 블런트가 커피를 내밀었다.

류지호 옆에 앉아 있는 제이미 캐머론에게도 커피를 건넸다.


“고마워요.”


제이미 캐머론이 촬영현장을 방문했다.

Eye-MAX 3D로 상업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여러 차례 방문을 요청했다.

류지호로부터 계속해서 거절당했다.

류지호는 애를 태울 만큼 태웠다.

최근에 와서야 유니벌스 스튜디오 백랏 촬영에 잠시 다녀가는 것만 허락했다.


“카메라가 크고 아름다워.”

“저게 어딜 봐서요?”

“메카닉에 대한 로망이 없는 모양이군.”

“촬영을 해봐요.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는데.”

“어차피 3D 영화는 아날로그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 완성도가 결정 될 것 같아요.”

“모션 캡처는 끝냈나?”

“Hues & Rhythm Studios에서 한창 마무리 테스트 중이에요.”


충분히 애를 태웠으니까 당근을 줄 차례다.


“본 촬영할 때 보러 오실래요?”

“참관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로서는 고맙지.”

“계속해서 HDW-F900으로 3D 작업하고 있어요?”

“응.”

“내년 봄, DALLSA D-Cinemas에서 4K 카메라 공개하는 건 아시죠?”

“들었네. 캐나다 본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최종 테스트 과정 중이라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군.”

“제일 먼저 제이미에게 내주라고 말해둘게요. 몇 달만 기다려보세요.”


제이미 캐머론은 DP 레이먼트 쿤디와 스테레오그래퍼 레니 립톤과 3D 작업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백랏을 떠났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영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실례다.

제이미 캐머론 이외에도 유니벌스 스튜디오 백랏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주로 디지털 영화와 새로운 포맷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조지프 루카스도 찾아왔다.

유니벌스 스튜디오 사장 겸 운영총책임자 도널드 메이어가 수시로 촬영장을 방문했다.


“크랭크업 하고 나면, 식사 자리 한 번 가집시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메이저 스튜디오 사장 쯤 되는 사람이 자꾸 주변을 얼쩡거리는 이유는 별 것 아니다.

공동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류지호는 20세기 PARKs와 소닉-콜롬비아스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미운 놈과 이익을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 ❉


어떤 영화에나 민폐캐릭터는 있다.

좀비물이나 재난물에서는 기본이다.

맨해튼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던 광대 분장을 한 시민운동가.


[난, 난 아니야... 난 살아있다고!]


좀비 분장을 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버림 받는다.

잠시 후, 사방에서 진짜 좀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광대 분장을 한 남자는 공포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좀비떼들이 달려든다.

광대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


좀비들이 광대 분장 남자를 스쳐지나 간다.

대신 좀비 분장을 한 인간들을 사납게 쫒아간다.


[후우....]


광대 분장을 한 남자가 안도한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좀비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

헌데.


꽉.


느닷없이 좀비에게 물려버린다.

공포감이나 어떤 장면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할 때.

감독은 관객과 심리적인 수 싸움을 벌여야 한다.

템포조절과 타이밍을 어긋나게 하는 것만으로 관객에게 좀 더 큰 충격을 줄 수가 있다.

대표적인 기법이 Jump Scare다.

갑작스럽게 어떤 사물이나 인물, 동물 등이 불쑥 튀어나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연출 기법을 말한다.

남발하면 효과가 급감한다.

영화 전반부에 이런 장면 하나가 들어가면,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관객들이 절로 긴장을 하게 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언제 깜짝 놀랄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련된 연출을 위해서는 긴장의 완급 조절에 능숙해야 한다.

처음 등장할 때는 신선했던 것들이 어느 새 클리셰가 되었다가 결국 식상해진 영화적 기법이 되어버린 것들이 꽤나 많다.

그것들 대부분을 꿰고 있는 류지호다,

연출과 편집 장난으로 마음껏 관객의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할 솜씨가 있다.

암튼 Jump Scare 기법은 3D 영상에 사운드까지 가미되면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좀비사태 이후로 맨해튼의 생존자들은 서로를 불신한다.

누군가의 몸에 조그마한 핏자국만 묻어있어도 무리에서 쫒아낸다.

특히나 헤어졌던 가족과 재회했음에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들이 안타깝다.


[난 멀쩡해. 안 물렸어. 믿어줘.]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들이 무리에 합류하는 걸 보여준다.

그러다 엉뚱한 사람이 좀비로 변해버리는 걸 보여준다.

누구나 개연성을 기준으로 영화를 평론한다.

평가하는 사람은 개연성을 따지는 것이 온당하다.

하지만 만드는 사람은 개연성에 얽매여선 안 된다.

영화라는 것이 의외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꾸 관객의 예상을 빗나게 해줘야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마니아들은 영화 시작하고 10분 만에 반전까지 예상하지만.

일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개연성을 들먹이며 의외성을 의도한 연출을 매도해서 비판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

영화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서사로 포장해 버젓이 전시하는 매체다.

현실성이나 개연성이 영화감상의 첫 번째 기준이 될 순 없다.


✻ ✻ ✻


영화 중반까지 콘 맥클리와 레모는 길이 자꾸 엇갈린다.

그러는 사이 콘 맥클리 무리에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합류한다.

그 과정에서 리더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꼭 치명적인 판단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탕!


리더가 된 인물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좀비를 사살하고 우쭐한다.

콘 맥클리가 막아보았지만 한 발 늦고 만다.


[오 마이 갓....]


리더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 쏜 것은 좀비가 아니었다.

그저 다리 골절로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비감염 생존자였을 뿐이다.


탕.

어기적어기적.


원래 손이나 다리를 쏘면 인간은 고통 때문에 틈을 보여야 정상이다.

좀비 감염자는 그런 게 없다.

때문에 맨해튼에 고립된 콘 맥클리와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안일한 대응으로 속수무책 희생자만 늘어난다.

콘 맥클리는 CURE라는 조직의 일원이라는 숭고한 사명감이 있다.

애국심보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는 측면의 사명감이다.

그래서 홀로 달아날 수 있음에도 생존자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악전고투를 치루는 가운데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폐쇄된 맨해튼을 폭격하겠다는 백악관의 결정이다.

그런 가운데 한 가닥 희망이 찾아온다.

세계 최강의 사제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맨해튼에 잠입했다는 소식이다.

레모와 치운이 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눌러서 그렇지, 시난주 일족은 사실.... 암살자 집단이다.


[닌자 아니었어요? 왜 항상 정면 돌파에요?]

[어디서 시난주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암살자라고 까부는 것들과 비교한단 말이냐! 나는 절대 숨어 다니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걸어가 목을 딸 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암살자는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다.]

[진심이에요?]

[사람이 사람 말을 하지, 개소리를 내겠느냐, 이놈!]


여담으로 한국 대표 무협만화이자 초장기 연재기록을 세우는 <열혈강호>에서 천마신공(天魔神功)의 클리셰를 확립하고 유행시키는데, 그 만화에 천마군황보(天魔君皇步)라는 무공이 등장한다.

신무협 소설로 40만 부 이상 팔린 <황제의 검>에서는 천마군림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서 사용된 이후로 무협소설의 클리셰가 된다.

한국의 무협마니아들 사이에서 치운의 말도 안 되는 무위를 두고 치운군림보라는 드립이 유행하게 된다.


❉ ❉ ❉


3주에 걸쳐 유니벌스 스튜디오 백랏에서 촬영했다.

이틀의 정비시간을 가진 후 Playa Vista에 조성 중인 Tri-Stellar Studios Stage 15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대규모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는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촬영지가 달라지면서 출퇴근길이 변했다.

생활리듬이 깨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장돌뱅이 같네.”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처럼 영화인들도 이 영화 끝나면 또 다른 영화를 찾아 떠나고, 오늘은 여기서 촬영을 했다가 내일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 일을 한다.

인생이라고 별거 없다.

보따리 장사꾼과 다를 것 없다.

전생의 업보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가 그 업보를 펼쳐 놓고 한 세상 살다가는 떨이도 못하고 남은 업보를 또 다시 바리바리 싸들고 다시 생을 마감하는 거다.

구천을 떠돌다가 어쩌다 다시 세상에 오게 되면 또 장돌뱅이가 되는 거고.


10시간.


류지호의 하루 근무 시간이다.

8시까지 현장에 도착해 그날 촬영할 분량을 논의하고 9시부터 첫 촬영을 시작해 점심 한 시간 휴식을 취한 후에 5시 30분부터 슬슬 퇴근을 준비한다.

6시 정각이 되면 하던 일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근한다.

밥도 잘 나오고, 류지호의 취향에 따라 간식과 음료가 수시로 나온다.

세트장 안에 공기가 좋지 못한 것만 빼면 힘든 것 하나 없다.

<REMO> 제작은 별 탈 없이 무탈하게 진행 되고 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찍다보면 흔히 있는 일들이라 사소한 축에 낀다.

류지호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사소한 일이긴 했지만.

메이저 스튜디오가 투자·배급하는 영화는 인원 교체는 있어도 중간에 영화제작 자체가 중단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워낙에 대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감독 입장에서는 무언가 문제가 생겨도 사람이 죽을 정도가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촬영에 임하면 될 뿐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사람들은 돈 값을 제대로 한다니까.”


할리우드 세트 퀄리티는 정말 세계 최고다.

사소한 디테일은 물론 마감처리까지 정말 예술이다.

배우가 세트에 들어와 있으면 몰입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몰입이 될 정도로.

물론 1.5억 달러 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지원이 빵빵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할리우드 최고 수준인 마이크 리바의 아트웍과 미술팀의 실력도 한몫 단단히 했고.

일반적인 산업디자인이나 인테리어는 신선함과 창의적인 감각이 중요하다.

반면에 영화 미술은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쌓은 노하우가 무척 중요하다.

예산에 맞추는 능력,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노하우 등이 영화 미술의 창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영화 관련 종사자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다.

할리우드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핵심 인원을 제외하고는 영화 규모에 따라 팀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세트를 손보는 미술팀을 지켜보던 류지호의 입에서 한숨을 흘러나왔다.


후우.


서구권 영화계는 프리랜서라도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어서 최소한의 삶은 보장된다.

경력 40년인 나이 60세 노인도 톱과 망치를 들고 세트제작 일을 한다.

그들 중 톱클래스는 한국의 웬만한 대기업 임원 뺨치는 수입을 올린다.

한국에서는 청년들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프리랜서가 안고 가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기피한다.

목공 같은 일을 천시하기도 하고.

WaW 종합촬영소에서 세트 제작팀 채용공고를 내면 젊은 지원자는 극소수다.

두 명을 채용했지만, 일 년 만에 사표를 내고 떠났다.

그들은 세트 기술자가 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아트디렉터가 되고자 거쳐 가는 단계로 생각했던 것.

그들은 WaW 종합촬영소 근무를 자기소개서에 한 줄 추가하고는 어느 미술팀에 들어갔다.

그 사례를 통해 WaW 종합촬영소는 청년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종합촬영소가 어리고 똘똘한 세트제작 전문가를 키우려고 해도 현실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려고 하지만, 세트 제작 일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시기 한국영화산업에서 스태프 처우와 관련해 최우선 과제는 임금체계다.


‘4대 보험제도 일부라도 도입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해야 하고...’


그것들에 선행해서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위한 전문회사나 조합 형태를 조직해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당장 보수를 많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이 안정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 같았다.


‘그런 걸 좀 영화진흥위원회가 해 주면 안 되나....?’


명확하게 직무를 분류하고, 정확한 업무를 규정해주고, 업무가 영화작업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되는지, 그 기여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기타 등등.

산업화니 시스템이니 합리와 효율이니 말로는 잘만 떠들어댄다.

돈을 받고 연구랍시고 뭔가 하긴 하는 모양인데, 현장에 적용할 수 없는 탁상공론뿐이다.

대기업 투자배급사들도 말로만 영화에 산업화를 가져다 붙인다.

산업화의 중요한 부분을 외면한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에만 산업화와 시스템을 가져다 붙인다.


‘그래서 영화인 출신들이 더 많이 메이저 스튜디오 오너가 되어야 하는데.....’


자연계에서 진화를 하면 할수록 종은 다양해진다.

산업 생태계에서도 비슷하다.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기업과 브랜드가 다양해진다.

생태계는 끊임없이 다양성을 추구하기에 어느 한순간 브랜드와 기업이 세분화된 시장에 맞게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도가 높은 자연 생태계에서 생명체가 끊임없이 종의 세분화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듯이 산업생태계도 산업의 진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기업과 브랜드의 다양성은 증대된다.

다양성은 산업생태계가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두 기업만 살아있는 산업 생태계는 해당 기업이 문제가 될 때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문제가 확산된다.

류지호가 죽기 직전부터 한국영화산업이 다양성을 잃기 시작했다.

겉으로 장르와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 같은 착시는 있지만, 산업은 매우 협소했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K-POP과 뮤지컬, 연극계까지도 메인 플레이어가 그 놈이 그놈이었지.‘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가려면 산업 생태계 내 기업과 브랜드가 다양하게 등장하도록 해야 한다.

이전 삶과 똑같이 흘러가게 된다면 천하의 WaW 엔터테인먼트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판을 달리 해야 할 수 필요가 있다.

먹이의 변화가 종의 분화를 촉진하듯이 다양한 영화소비자의 등장을 촉진시켜서 기업과 브랜드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도록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기업들이 몰락하고 소비자의 욕망을 채워주는 브랜드만이 영화시장에서 살아남도록 조성하는 방법을 궁리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류지호는 굿 다운로드 캠페인과 함께 하나의 캠페인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영화 씨네필들이 키보드 워리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한국영화 다양성을 위해 싸우도록 유도하는 캠페인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오덕들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니까.”


특히 영화역사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이들 대부분이 영화 덕후들이었다.


✻ ✻ ✻


5개월에 걸친 프로덕션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맨해튼의 타임 스퀘어나 실제 거리에서 미처 찍지 못했던 인물들의 얼굴 쇼트를 남겨두었다가 세트에서 한꺼번에 촬영했다.

참고로 올해 원 타임 스퀘어 빌딩의 옥외 광고판을 첨단 분위기로 새롭게 단장했다.

작년 오성전자가 가로 12m에 세로 20m짜리 디지털 옥외 광고판으로 교체한 후로 남은 광고판도 전부 교체하게 됐다.

앞으로 10년을 쓸 수 있는 대형 광고판에는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는 영상물이 20분 간격으로 내보내게 된다.

마지막 촬영은 액션 시퀀스 크로마키 촬영이다.

괴물로 변한 아르메 고야크와 레모 치운 사제가 대결을 벌이는 실사 부분이다.


“마무리 잘해 봅시다!”


지난 첫 편에서 치운의 시그니처 액션이 양반무와 부채춤이었다.

최종편에서는 한국 전통의 유랑 연예집단이던 사당패와 솟대장이패의 땅재주를 가지고 왔다.

1960년대 이후로 유실 된 것이 많아서 실연을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여러 재주들(곤두, 자반뒤집기, 수세미트리, 살판 등)을 영화 액션 시퀀스에 가져왔다.

사실 제작진이 소개하지 않으면 사당패의 땅재주가 액션에 가미가 되었는지 알기 쉽지 않다.


“GO!"


크로마키 촬영에서 류지호가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모니터 스테이션에 자리 잡고 앉아 와이어 액션을 수없이 반복하는 윌리 워커와 오순택 배우를 멀뚱히 지켜보며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잡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을 정도다.

실제로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거래 정지가 된다고 어떻게 될까.

미국 증권거래 시장이 난리가 날까?

그렇지는 않다.

미국 증시는 12개의 정식 거래소와 ‘다크 풀’로 알려진 40여개 사설거래소가 있다.

뉴욕증권거래소 한 곳이 작동을 멈추더라도 주식 매매가 가능하다.

다만 주식거래 중단 사태가 장기화 되면, 투자자들이 하루에만 수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실제 9·11 사태 때는 휴일이 끼어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장기화되었다면 미국 증시에서 집단적 투매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REMO> 최종편에서는 워싱턴DC에 주식투자자들이 모여 이에 대한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TV화면을 통해 언급한다.

재난에 취약한 주식거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다.

일반 관객들은 몰라도 된다.

미국의 일정한 교육수준이 있는 백인 중산층을 겨냥한 디테일이었으니까.


뻔한 전개.

뻔한 결말.


주인공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럼에도 괴물을 처치하는데 성공한다.


미래의 승리는 더 잔인한 자의 것인가?


중동전쟁의 문제(또는 미국과 테러의 문제)는 조디 워커와 네오콘 그리고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극렬주의자들의 문제나 석유 문제를 넘어선다.

인종(민족)과 문명의 충돌로 전면화 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왜 미국, 영국, 호주 등 앵글로색슨족은 일치단결하여 초강경 논리로 설쳐댈까?

세계지배 야욕 때문에?

아니면 유대인 같이 선민의식의 발로인가?

류지호는 <REMO> 시리즈를 궁리하며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물론 답을 낼 순 없었다.

그럴 정도로 뛰어난 학식과 혜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다만 세계 곳곳에 만연하게 될 포퓰리즘의 기원을 추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보스니아 내전에 잠시 머물게 됐다.

민족주의와 ‘거짓 공포’에 젖줄을 대고 있는 증오의 감정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은 전쟁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들이 일으켰을 뿐, 보통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보스니아 내에서도 무슬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가 비교적 이질감 없이 섞여 살았다.

전쟁 발발 전까지 ‘형제애와 단합’은 2차 대전 이후 유고연방의 핵심가치였다.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정치였다.

이에 복무한 나쁜 언론이었다.

몇 년 후가 되면 무슬림이 일자리는 물론 국가정체성마저 위협한다는 거짓 공포가 미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 유럽을 휩쓸게 된다.

더 시간이 흐르면 중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악의 축‘이 된다.

이후의 포퓰리즘이 보스니아 내전처럼 물리적 내전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사회적으론 내전상태가 된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보인 언론의 거짓 선동 그리고 정치가 이를 조장한 경로나 진행순서를 미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똑같이 복제한다.

정치적 의도→미디어를 통한 거짓 공포의 확산→공포의 증오화→충돌.

한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패턴이자 공식이다.

미국과 유럽도 결코 다르지 않다.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범들에 대한 재판.

조디 워커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중동에서의 전쟁.

석유라는 자원을 독점하려고 하는 서방세계.

그들에게 투자해 이익을 챙기려는 추악한 자본들.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로버트 폭스의 The NEWS Media와 같은 서방의 일부 언론들.

그에 동조하는 각 국가의 극우정치인들.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그 같은 세계에게 들어오게 되면 판타지세계를 모험하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상업영화들에게 심심찮게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 너는 속고 있는 거야.]


영화에는 현실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예언처럼 보인다.

암튼 <REMO> 시리즈는 화끈한 액션 시퀀스, 첩보스릴러 서사, 블랙유머의 종합선물세트다.

1~2편은 서방세계의 일방적인 주장인 나쁜 세르비아를 묘사했다.

발칸반도의 역사를 공부하면 류지호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세르비아인들도 어쩌면 역사의 비극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가 아닐까....”


미국이 이슬람을 일방적으로 악의 축으로 규정하듯이 서방언론이 세르비아를 인류의 적으로 몰아간다고 해서 류지호까지 동조할 이유는 없다.

여담으로 2020년대 세르비아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치안이 좋은 안전한 국가가 된다.

한국 기업도 꽤 진출한다.

한국은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룩한 하이테크 글로벌 기업을 보유한 좋은 국가이미지가 있다.

미국 국뽕영화가 되려면 미국이 미워하는 어떤 대상이 악당이 되어야 한다.

그런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는 류지호는 미국의 적을 적나라하게 비판할 이유는 없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괴물이 된 보스니아 시골 교사 VS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미국의 영웅.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극동아시아 약소국 출신 무술고수.

최후의 승자는 미국이고, 시리즈 내내 죽어간 무수한 보통 사람들은 누구도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는 엑스트라의 삶일 뿐이다.

류지호는 <REMO> 시리즈를 끝내면서 1편에서 치운이 레모 윌리엄스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마무리했다.


[레모....]

[......?]

[결코 세상이 끝장난 게 아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단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죽은 자들을 잊어서는 안 돼. 그들이 남긴 교훈까지도.]


영화감독은 영화를 어렵게 마주하고, 반면에 관객을 쉽게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영화는 처음 볼 때는 쉽고 부담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다.

그런 동시에 다시 보고 싶게 만든다.

두 번째 보게 되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 이상 보게 되면 감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수많은 의미(가령 텍스트)의 복잡성을 발견하며 지적인 만족감까지 만끽할 수가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영화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 사색으로 영역을 넓힐 수가 있으니까.


작가의말

분량 조절에 실패했지만, 암튼 제작과정은 얼추 마무리 됐습니다.

독자님들께서도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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