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5.22 18:55
연재수 :
326 회
조회수 :
7,392
추천수 :
549
글자수 :
3,166,534

작성
23.11.19 00:46
조회
14
추천
1
글자
18쪽

160. 그와 그녀

DUMMY

“아가씨! 고운 흑발에 잘 어울리는 백합 모양 장신구 어때!”


라이엔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흘끗 봤다. 누군가가 호객 행위를 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핀포인트로 짚어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런가.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까무잡잡한 피부. 동양인과 서양인의 중간 즈음 되어 보이는 이목구비. 중동 부근의 사람이나, 하와이안. 뭐 그런 류의 사람처럼 생긴 사내였다. 가판대에 수제로 만든 장신구 따위를 늘어놓고 팔고 있는 청년이다.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의뢰 번호패를 만지작거리면서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이상함이 없다. 고도의 연기를 하고 있는 유저가 아니라면 NPC다.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퀘스트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 어차피 의뢰를 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목제 매대에 올려둔 은색의 머리핀에 눈길이 끌리고 만다.


*


“그래서, 의뢰를 받으신다고요.”

“네.”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내는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이름은, 제냐라고 들었다. 어차피 플레이어일 것 같았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러했다.


생김새는 동양인이었고, 번역되고 있는 투라 짐작할 수는 없지만 한중일 삼국 중 한 곳일 테였다. 사내의 출신지 말이다. 저렇게 생겨놓고 전혀 관계 없는 타대륙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혼혈도 많고 이민도 많고. 이전보다는 훨씬 복잡해진 것이 현대의 사정이었으니.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뜸 신원을 묻기는 뭐했고.

라이엔은 볼을 멋쩍은 듯 긁적였다. 사람을 대하는 건 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상대방의 속내를 잘 짐작하고, 또 그 속내가 지나치게 시커멓지만 않다면 쉽지만.

눈앞의 남자는 표정이 그리 많지 않다. 말투 역시 조금 무뚝뚝했고.


이성적인 호감을 느낄 수 없다나 뭐라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단순히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인가, 알아봐야 하는 문제의 난관일 뿐이다. 라이엔이 그렇게 이성에 굶주린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기는 사내다.


둘은 실내의 소파에 마주보고 있었다. 작은 대여용 회관이었다. 만남을 위해서, 의뢰, 비즈니스를 위해서 빌려서 쓰곤 하는 공간으로, 생각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짧게 쓸 수 있다.

이런 거대도시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큰 일이고 수요가 많아서, 이런 장소또한 있었다.


중심지구의 외곽지역, 일반지구에서 몇 발짝 더 들어오면 바로인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나름대로 가구를 채워 놓은 인테리어였다. 아주 살풍경하지는 않았고, 대담의 장소로 쓸만하니, 괜찮게 꾸며놓았다.


짙은 갈색의 낡은 소파에 앉은 사내가 이야기를 했다.

바깥에서는 사르삿 도시의 햇볕이 비춰 들어왔다. 그들은 창을 옆으로 두고 실내의 가운데 자리에 서로 앉아 있는 참이었다. 햇빛이 낡고, 잘 청소해둔 마룻바닥을 쓰다듬는다.


그 쓰다듬음과 같이 제냐가 입을 뗀다.


“레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무례한 질문이었다. 라이엔에게만은 아니었고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똑같이. 전투 클래스나 비전투 계열이나 상관 없이 유저에게 직접적인 스펙이나 레벨을 묻는 것은 약간의 실례를 겸한다.

우회적으로 에둘러 표현을 하곤 했다. 왜냐면, 이 게임은 대개 믿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 번의 실수가 그대로 계정 삭제에 다시는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하게끔 한다. 그야말로 살얼음판과 같은 서바이벌 게임이고, 그래서 유저들 간의 교류에 어딘지 선이 있었다.


나름대로 하드 코어 액션 MMORPG인 것이다. 좋은 것만 보고자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고, 그저 편안한 무드에 여가 시간으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전투가 가능한 상황에서 상대의 전투력의 내력을 묻는 건 다소 직접적이었다. 그러나, 라이엔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입을 연다. 제냐라는 사내를 약간 믿기 때문이었다. 처음 봤는데 뭘 믿는가, 라고 할 수 있겠지만은.


여자의 직감도 아니고 그저 라이엔의 직감이다. 그녀는 직감이 좋은 편이었고, 나름대로 수완도 괜찮았다. 여태까지 살아남아 121이라는 레벨에 다다른 게 운만은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함부로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전제된 직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건 상대와 거리를 벌릴 수 있는 몇 종의 스킬과, 도주기술이 있었다. 거기에 썬더스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떤 기술을 가진 이도 잡을 수 없는 속도를 발휘 가능하다.

충분한 시간과 상대에 대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도리어 거꾸로 농락하는 일마저 된다.


고수들 사이에서, 레벨에 비해서는 견고하지 못하지만 121이라는 수치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에서 의뢰서를 고르기도 한 셈이다. 중수에서 고수 사이, 그 레벨 대의 유저들을 찾고자 한다면 월등히 높은 파티일 가능성은 적었다. 의미가 전혀 없는 짓이었으니 말이다.

보통은 파티의 평균 레벨에 꼭 맞거나, 혹은 약간 높은 정도를 찾으려 하겠지.

레이드 사냥에서의 호흡을 생각하고, 조금의 도움을 외부인에게 바라려 한다면 말이다.


적어도 중수 아래에서의 유저에게 쉽게 당할 리는 없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라이엔은 툭 던졌다. 사실대로 말하면, 제냐도 갑자기 찾아온 그녀에게 내심 당황한 면이 있다. 정말 레벨을 물어봤다기보다, 그래서 저어하면 다른 방식으로 강함의 기준을 체크할 셈이었다.

먼저 과감한 헛소리를 던지고 차선책을 최선의 제안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화술이다. 기본적인 것으로, 보통 처음 만나는 거래의 자리에서 써먹곤 한다. 제냐가.


“121이요.”

“엉.”


그래서 제냐의 입에서는 군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엉, 하고.

약간 눈이 커져 그는 라이엔을 바라보았다. ‘엄···.’


“아, 그렇군요.”


제냐는 그녀가 건네 준 의뢰번호의 목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의뢰주 용으로 받아둔 한 개의 목패와 함께 손 안에서 굴리고 있다. 그 매만짐이 제냐의 당황을 나타낸다.


“그, 생각보다 높으시네요. 의뢰서는 보신 거죠? 중수에서 고수,”

“예, 사이라고.”


라이엔은 고갤 끄덕거렸다.


제냐도 수더분한 그녀의 표정에 마주 그랬다.


툭 던진 말을 확 하고 받았지만 생각보다 심퉁맞은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플레이어간의 상도를 잘 아는 유저끼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조금 틀어졌을 지도 모르는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새로운 파티원을 맞아들이는 일이니 반응을 보는 것도 있었다.


라이엔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 음, 예. 혹시 동양계이신가요? 아뇨, 당연히 그러겠지···. 혹시 한중일 쪽 극동아시아 지방이신지···.”


제냐가 물었다. 말을 덧붙인다.


“보시다시피 저도, 그렇습니다. 라이엔 씨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이고요. 아마 한국 시간으로 늦은 낮부터 저녁, 밤까지 플레이 시간일 것 같아서요.”

“아.”


플레이 시간을 서로 알고 맞추는 일은 중요했다. 그리고, 게임 속에서의 인연이라지만 나름대로 신상을 아는 것 역시 말이다.

어쨌든 사람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 모든 게임적 활동들 역시. 1, 2차적으로 게임 시스템이 괴랄한 정신 상태의 인간들을 거른다고는 하지만. 그게 완벽하고 절대적이지는 당연히 않았다.

달리 말하면 시스템이 딱 보고 걸러낼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게 특이성을 발휘하는 인간들만 제해지고, 그나마 사회화가 된 괴짜들은 그대로 게임에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아르망디가 그러했다. 제냐는 그녀와 별 말을 나눠본 적도 없지만. 몇 번의 만남이었지만 참으로 인상이 깊었다. 플레이어의 눈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게임 속 세상에 동화된 눈이었고, 그건 나쁜 의미로의 집중과 동화였다. 약간 맛이 간 여자 같았고, 정말 암살자라도 된 양 굴면서 제냐에게 몇 번이나 달려들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데서 광기를 느끼는 것이다. 보통 유저들끼리 만난다면, 이 잘 조직된 현실 세계는 아무래도 가상의 것으로 헐거워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수준 높은 그래픽과 감각 구현으로 몰입을 하고 있다가도, 현실의 삶을 아는 사람과 만나면 그게 깨지는 법이었다.

빌런의 역할을 하던, 피해자의 역할을 하던.


그건 게임 상의 클래스일 뿐이고 퀘스트일진데. 아르망디는 암살자처럼 군 것이다. 현대 시대에 암살자가 대체 어디있겠느냐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음지에는 그런 양반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일반적인 도시민이 암살자를 만나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정말 암살자라고 한다면 이런 게임에서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는 않을 테였고, 남은 가설은 그녀가 미친 년이라는 것뿐이다.


아무튼,


제냐는 다시금 눈 앞의 라이엔을 바라본다. 검은 눈동자. 땡그랗게 뜨고서 그를 잠시 노려봤다가 딴청을 피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본다. 햇살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부드럽게 카펫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고요하고 따스하다.


그들 사이에는 스툴 책상이 하나 있었다. 얼추 갖춰놓기는 했지만, 정말 격식을 따져 채워놓은 가구들은 아니다. 갈색의 소파 두 개. 그 사이에 작은 나무상 하나. 갑작스레 찾아온 고용인에게 질겁해, 어색함을 풀어볼까 해서 다과를 조금 둔 차였다.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는 철제 다기에 스킬로 열을 가해서 찻잎을 우려낸다.

또 인벤토리에 넣어둔 단단한 컵에 따라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철을 쓰는 다구는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게 편하고 유용하다는 점에서 제냐는 그냥 쓰고 있었다.

사실 다구茶具라고 하는 것도 그가 붙인 이름이고. 실상은 사르삿 거리를 걷다가 적당해 보이는 컵과 손주전자를 사들인 것뿐이다.


제냐는 잠시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물어보아야 할 게 많기는 하지만.


“뭐, 세세한 이야기는 차차 팀이 되고서 풀어 나가죠.”

“에?”

“같이 하시죠. 파티. 마침 딱 찾고 있던 분이었는데.”

“아, 좋아요. 네.”


라이엔은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대화의 속도에 당황했다. 그녀 역시 빠른 것을 좋아하기는 했다만. 스킬 상세도 물어보지 않지 않았나. 레벨이나 총체적인 스펙, 전투력은 몰라도 당장 임무에 필요한 스킬 정도는 물어볼 법한데.


“스킬은 혹시 어떤 걸···.”

“아하하.”


라이엔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답한다.


“썬더스라는 이름이에요.”

“엥.”

“테이머Tamer입니다. 엘리트 몹 계열이고. 한 번에 여러 마리를 테이밍하는 건 잘 못해요. 할 수는 있지만, 군단 계열 스킬은 전혀 익히질 않았던 터라···.”

“아.”


제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툴에 둔 찻잔으로 손이 간다. 은은하게 우러나오는 홍차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후룹.

맛은 좋았다. 철제 도구에 대강 열을 가해 우려내도 맛만 좋다. 차를 사랑하는 이들이 보면 무도한 짓이라며 욕을 할지도 모를 난폭한 조리법이기는 하다.


“그러면, 다루시는 건 한 마리입니까?”


라이엔이 고갤 끄덕거렸다.


“한 마리면 되나요? 저희 일행이, 저까지 포함해서 총 넷인데. 한 명은 스스로 날 수 있다곤 하지만 다른 한 명이 유별나게 큽니다. 게다가··· 장거리라면 결국 다 타얄 것 같은데.”


라이엔은 턱을 쓰다듬는다.


“음······. 뭐, 거인종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거대화 스킬을 패시브로 익혀버려서 집채만하다던가.”


제냐는 고갤 가로저었고.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어요. 썬더스는 나름대로 강하거든요. 거대한 매인데···. 뭐 스킬도 여러 종 있고. 이 레벨까지 우연으로 올린 것만은 아니라. 군단 계열은 약해도 엘리트 몹 계열은 그래도 여러 종 있습니다, 스킬이.”

“흐으음.”


일단은 납득한다. 본인이 저렇게 말을 한다면야 뭐. 라이엔의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걸 일일이 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레벨을 물어본 것 자체도 약간의 무리였다. 그저 상대의 반응 따위를 좀 보기 위한.


“저희가 퀘스트 작업을 하고 있는 터라. 아마··· 저희랑 다니시다 보면 연계 퀘스트 상황에 조금 휘말리실 수도 있습니다.”

“오.”


그녀는 살짝 감탄을 했다. 연계 퀘스트. 받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희귀도가 낮고, 또 규모가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보통 연계 퀘스트를 장기적으로 하고 있는 파티는 흔치 않았다. 그런 플레이는 아무래도 비밀스러워지기 마련.

이 게임은 본질적으로 서바이벌 게임이었고, 누군가 툭 하고 밀어버리면 그대로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게임 내의 플레이에서 말이다.


많은 보상을 얻을 수도 있고, 또 다양한 상황에 휘말리는 퀘스트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이들과만 팀을 꾸리는 게 자연지사다.


커뮤니티 따위에 올라오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정보들도, 보통 연계 퀘스트가 다 끝난 이후에 올라오게 된다. 실제로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파티들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용병 길드에 대놓고 공고를 하는 경우도 잘 없을 테고.

보통은 신뢰 관계가 없는 타인을 들여놓느니, 그저 자기들끼리 힘에 부치더라도 어떻게든 헤쳐나간다.

사람의 선택에 따라 다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부류의 장기 퀘스트라면 그 공고 자체도 나름대로 지역 사회의 이슈가 될 수도 있었다. 길드의 게시판, 한구석에 붙어 있던 작은 종이가 이런 파티로 이끌 줄은 몰랐었다.


“거점은 사르삿인데···. 파티원들 레벨이 있다 보니 근처에서 사냥하기도 좀 그래서요. 데슈칸 산맥의 심처까지 들어가려고 합니다.

플레이 타임을 정해서, 가능한 최대한 많이 왕복을 하게 될 것 같고.”


라이엔은 알았다는 듯 주억거린다.


“그렇군요. 뭐, 알겠습니다. 저로서도 행운이네요. 혼자 떠돌아다니면서 연계 퀘스트는 아직 받아본 적도 없는데.”

“그래요.”

“그렇죠. 시나리오 온라인의 키 포인트는 제대로 해석된 게 없기도 하고. 단기적인 퀘스트가 아니라면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는 걸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연계 퀘스트는 모두 유니크 퀘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단기 퀘스트의 경우에는,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져 반복이 되었다. 각 지방에 ‘이 정도’의 수준인 사람들이 해결하세요, 라는 식으로 퍼져 있는 것이다.

거기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NPC에게 반복 역시 가능한 경우가 많았고.


그러나 연계 퀘스트가 되면, 그건 복합적인 작용이다. 여러 NPC들의 사연이 얽히고, 난수 프로그램으로 인해 움직이는 AI들의 가상적 자유의지가 퀘스트를 짜낸다.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잼Jam과도 같았다. 만물박사와 개발진들이 만들어내는 잼 말이다.


완벽하게 디지털로 조물된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잼이었다. 그것은 아날로그의 형상을 기이할 정도로 깊이 닮아 있다.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담아낼 수 없을까? 그게 이 게임을 만든 인간들의 핵심적인 고찰이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단순하게 말해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뒤로 그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다. 신이 만들어낸 아날로그의 형상은, 아무리 정밀하게 분절해도 디지털 세계에 완벽히 담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없이 그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감각기관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면. 결론적으로는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구현한 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서 연구에 개발을 거듭하다 튀어나온 것이 만물박사다. 초월적인 성능을 가진 AI시스템은 하드웨어적으로도, 소프트적으로도 완벽했다. 정확하게 조율되어 두 분야의 초성장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물박사라는 초AI의 성능은.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태Tea의 개발진들 역시, 스스로 무엇을 했는지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 비밀을 파악하라’는 것이 태Tea 사社에 투자를 하고 있는 거대 기업들의 요구였고.

그 요구에 부응해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시나리오 온라인이다. 일단 만들어낸 초월적인 기계를, 테스트를 해봐야 할 것 아닌가. 어디까지 구동이 되는가. 어떤 일까지 시키고, 또 가능한가.


놀랍게도 수 억 그 이상의 유저들이 함께 플레이하는 가상 세계가 만들어졌다. 이전까지의 VR 시뮬레이션들은 사실 ‘가상현실’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밀한 것으로 말이다.


인간이 균열을 느낄 수 없는 초정밀한 가상현실 세계는 여러 요소들이 춤을 추듯 호응한다. 자연계를 모방했고, 인류의 역사적 흐름과 개인의 희로애락을 모방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서 변주를 만들어내는 데, 거기에 연계 퀘스트의 핵심이 들어 있었다.


같은 연계 퀘스트가 나올 일은 거의 없다. 게임 내에서 AI들의 기억은 연장되고, 시간은 앞으로 흐르니까.


천문학적인 확률로 거의 모든 요소가 같은 상황의 나열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스토리’가 되어버린 연계 퀘스트는 모두 유니크 퀘스트다. 유저들이 말하는 ‘유니크 퀘스트’라는 건 좋은 수준의 보상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게임을 원활하게 플레이하는 데 얼만큼 도움을 줄 수 있느냐, 라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의 유니크 퀘스트는 다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저 이 게임을 어떤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소설을 보듯한 감각으로 즐기는 유저들이라면 일단 연계 퀘스트 자체에 의미를 두기 충분했다.


라이엔 역시 그런 부류였다. 그녀도 클리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당장 그녀의 앞을 질러나간 추월자들이 한가득이다. 고수보다도 아득하게 수준 높은 랭커들이 있었고. 그들의 감각이나 시간 투자를 따라갈 엄두는 조금도 나지 않는다.

라이엔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뿐이었다.

oriento-gy_DN08336U-unsplash.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3 0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6 0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1 0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2 0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7 0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1 0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3 0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9 0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5 0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14 1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9 1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7 1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2 1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3 1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4 1 17쪽
192 191. 터뜨리다. 23.12.20 16 1 13쪽
191 190. 턱 밑에서 23.12.19 10 1 16쪽
190 189. 검은 선 23.12.19 10 1 17쪽
189 188. 지난한 과정 23.12.19 11 1 16쪽
188 187. 진검기眞劍氣 23.12.18 17 1 26쪽
187 186. 블러디 아이시bloody icy 23.12.13 16 1 21쪽
186 185. 버로우Burrow 23.12.13 11 1 29쪽
185 184. 준비 23.12.12 14 1 29쪽
184 183. 원거리 딜링Dealing 23.12.07 14 1 15쪽
183 182. 초토화 23.12.07 9 1 15쪽
182 181. 낙하 그 다음 23.12.07 14 1 14쪽
181 180. 낙하의 순간 23.12.03 11 1 19쪽
180 179. 검은 용 레이드Raid(3) 23.12.02 14 1 18쪽
179 178. 검은 용 레이드Raid(2) 23.12.02 13 1 24쪽
178 177. 검은 용 레이드Raid(1) 23.12.02 8 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