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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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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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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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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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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필멸창

DUMMY

“아티팩트일 수도 있잖아.”


호아킨이, 대뜸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주 변신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인간일 때의 말투나 행동거지도 어딘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료들의 눈에는. 아니, 사실 원래 호아킨 팍스라는 사내는 그런 남성미가 있는 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다소 거칠고 으르렁거리는 면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전쟁이라는 혹독한 장소와 시간을 겪으면서, 다양한 트라우마에 짓눌려 그 매력을 잘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었지.

유사하게 전쟁과 전투, 목숨이 오가는 전장을 경험할 수 있는 시나리오 온라인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도리어 자극이 되고 치료가 되었다.

트라우마를 얻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노출됨으로써 말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지는 모른다. 개인 차가 있을 것이고, 또 여기가 실제 전장이 아니며 목숨이나 신변의 위협이 전혀 없는 곳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아무나 그런 식으로 정신적 치료를 해낼 수도 없을 거고.


“맞지. 하지만 뭐···. 아티팩트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초강력 아이템이라면 결국 그 사람의 스펙이지. 그만큼 레벨이 높은 상대를 적으로 둔 것과 비슷해.”

“흐음.”


호아킨은 고갤 끄덕이면서도 반론을 이야기했다.


“아티피서Artificer들이 많은가? 전문적인. 내 생각에, 유저나 NPC나 상관없이, 스킬보다는 아이템을 다루는 능력이 다들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 아이템은 어디까지나 기물에 불과하니까··· 몸 밖에 떨어져 있다는 말이지. 스킬만치 자유롭게 활용하지 못하고 빈틈이 있을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네.”


릿샤가 순순히 긍정했다. 그녀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여러 종류의 클래스들이 있었다. 전투직 클래스라고 해도 다양하다. 테이머도 라이엔과 같은 엘리트 몹 계열, 로웰 드버와 같은 마물 군단 계열, 초상술사들 중에서도 호아킨같은 물리적 전투 계열이 있었으니까.

그런 수많은 클래스들 중에서, 아티팩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아티피서’라는 직군 또한 있었다.


유저들이 말하기에, 아이템들 중에서도 고강한 능력치를 자랑하는 ‘아티팩트’ 수준의 것을 완벽 이상으로 다루어내어 몇 종의 스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처럼 활용하는 이들을 뜻했다.

실제 스킬을 발휘하는 것보다 반응 속도가 빨랐고, 아티팩트에 내재된 다양한 부가 기능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전투법을 확립하는 자들이었다. 아이템 스펙에 총 전투력이 많은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아이템 하나를 완벽하게 다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템들 중에서는 또한 성장형型이나, 사용자의 역량과 능력에 반응해 변신 수준의 숨겨진 힘을 나타내는 종류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티피서들이 최고로 치는 아이템은 단연 그런 종류이다. 제냐가 사용하고 있는 비스트 슬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장형 아이템이었고, 짐승형의 몬스터들을 잡아 죽일수록 도검은 진화한다.

제냐의 기력술이 강화되어서 도검을 감싸는 힘이 늘었기에 버티는 점도 있었지만, 검 자체의 내구성 역시 변신하고 있었다.


그런 아티피서 직군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하자면, 그런 직군이 따로 있을만치 아이템에 대한 적응도나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건 분명 시간이 드는 일이었고, 아무나 해내지는 못한다. 스킬의 경우라면 차라리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며 숙달시키는 이들이 많은데, 아이템을 다루는 능력은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게 평균적인 정황이었다.

그게 릿샤나 호아킨같은 베테랑 플레이어들이 실제 플레이를 하면서 느낀 경향성이었다.


3대 요소라고 하는 스킬, 아이템, 스탯 중에서 유저들이 온전하게 위력을 발휘하는 건 순서대로 스탯, 스킬, 아이템이었다. 몸에 일체화되어 있을수록 아무래도 연습하기가 쉽다. 이건 NPC들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10의 근력 수치를 갖고 있는 자들도 컨트롤 능력에 따라 그 절반의 효력만 쓰는 자가 있었고, 완벽한 이해와 운동 능력, 컨트롤 감각으로 12~15의 힘을 내는 자들도 있었다.

스킬이나 아이템 역시 마찬가지고, 혹은 더욱 극심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유물 급이겠지.”

“유물이라.”


최태현이 받았다. 라이엔은 거진 멍때리는 표정을 하며, 가부좌를 틀어앉은 뒤 턱만 매만지고 있었다. 제냐는 천장을 처다봤다. 유물이라.


릿샤가 이야기한다.


“음. 적어도 산슈카에서 국보에 준하는 취급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되지 않아. 마스터 마기아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레벨로 나누어져 있다지만 명확한 구분도 아니고, 적어도 50 이상의 차이는 나야 확실하게 실력차가 나게 마련이야.

방어 스킬 본Bone을 뚫을 정도라면 국보 급이겠지. 레벨 200에 준하는 견제기를 볼 수도 없는 원거리에서 쏘아내는 효력이니.”

“흐음.”


제냐도 대강 고개를 주억거렸다.


릿샤의 레벨은 12-130정도였으나, 자신을 대강 150에 근접한 수준으로 두고, 지금 날아온 정체불명의 공격을 200레벨 언저리의 수준으로 둔 셈이었다.


타당한 추론이다. 오히려 조금 자신을 과소평가했을 정도로. 그간 그네들이 겪어온 아수라장은 보통의 난이도가 아니었다. 일부러 어렵게 돌아간 감이 있을만치.


“아무튼, 시작 됐다는 거지.”


제냐가 입을 열었다. 일행들은 그를 보았다.

가장 어린 나이에, 사회 경험도 별로 없다. 이건 게임 속이었고, 그저 우연히 만난 인연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왜인지 팀원들 간의 신뢰는 제법 견고했다.

제냐를 향한 신뢰감도 어느 정도 있었고.

그건 굳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근처에서 살갗을 맞대듯 지내며 알게 되는 사실들에 근거했다.


애초에 이 퀘스트의 주인이 제냐 킴이기도 했고 말이다.


릿샤가 긍정한다.


“응. 지겹기도 했는데. 이제야 뭐가 돌아가네.”


이 놈의 게임은 영 페이스를 맞추거나 읽기가 힘들었다. 제 좋을 때 무언가가 덥썩 날아오고, 변화하고, 시작된다.

‘서바이벌’이라는 단어를 참 잘 갖다 붙였다고 느껴진다. 유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건 전개는 늘 갑작스럽다.


“예. 일단 퀘스트 로그에서, ‘알아보라’고 했으니까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보는 게 좋겠죠. 각자 연줄을 통해서, NPC들에게 묻건 플레이어를 이용하건 정보를 좀 수집하죠. 여태까지 안한 것도 아니지만. 로그에서 안내하고 있으니 상황이 달라지기라도 했을 겁니다.”


“그래.” “그러지.” “그려.” “그래요.”


호아킨, 릿샤, 최태현, 라이엔의 반응이었다.


릿샤의 보호막이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고, 그네들은 각자 사르삿을 들쑤시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


“실패했다고.”


프린스 알사드. 푸르스름한 머리칼이 인상적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 주름이 패여 있었고, 눈빛은 권태로워 보인다.

산슈카 왕국, 중부 콘란드 대륙에 위치한 어느 소국의 권력자는 그런 생김새였다.

대공은 자신의 영領에서 있었고, 그 심부인 저택의 집무실에 앉아 있다. 그의 손에는 마치 화살과도 같은 철대가 들려 있었다. 아주 약간 낡은 듯도 보이고, 무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반짝거리는 보석류가 장식으로 붙은 물건이었다.


가만보면, 전형적인 화살의 모양은 아니었다. 마치 창을 그만한 크기로 작게 줄여놓은 듯도 하다. 그 끝에 깃이 없었고, 창날이 예리하게 빛났다.


“예······.”


검은 늑대단의 한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알렌’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이전에 한 차례, 제냐를 암살하기 위해 다가가 싸운 적이 있던 사내다.


금발. 깊은 갈색 눈동자. 평범한 체격. 공작 저의 집무실에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기사용의 그것이었다. 검게 칠해진 철제 갑옷이다. 일반적인 강철에 특수한 재료를 섞어 강도와 탄성을 높였다. 정작 검은 늑대단이 이것을 입고 싸우는 일보다, 다른 복장일 때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공작의 앞. 공작은 집무실의 응접용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몸을 앞으로 세워 팔꿈치를 무릎에 기대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철제 화살, 처럼 보이는 창의 모형이 들려 있다. 그것의 첨단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그 반대쪽 끝단을 만지는 등. 세르게이 알사드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장난감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나 눈빛에는 어딘지 따분함이 묻어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주인이다. 알렌 파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일관된 그 ‘속모를’ 태도는 공작에 대한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인간성 따위가 느껴진다면 차라리 조금 편하련만. 저렇게 평온한듯 있다가 언제 누구를 내친다거나, 사지로 보낸다거나, 목을 자르라는 명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같은 분위기의 인간이었다.


사람의 기색과 분위기를 잘 살피고, 성격을 잘 맞추는 알렌이었다. 그는 알사드 대공이 두렵다. 크게 화를 내거나 그의 앞에서 잔악한 짓거리를 많이 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가 시키는 수많은 임무들이나, 전혀 드러내지 않는 속내는 그의 인성에 대해 충분한 추리적 근거가 되어준다.


“······흠.”


알사드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렌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말이다. 집무실의 내부는 넓다. 수십 명이 들어와 있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응접용의 소파는 서로 마주본다. 흔한 배치였다. 가운데에는 이것저것 집기나 다구를 놓을 수 있는 낮은 테이블.


쩔그렁.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테이블 위의 유리였다. 단단한 물성을 가지도록 장인이 특수 제작을 하고, 초상적인 공법을 덧씌웠다. MP가 조금이라도 쓰인 물건을 모두 아티팩트라고 한다면 이런 공업품도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으리라.

테이블의 유리 위에 공작은 소리가 나도록, ‘아티팩트’를 내려놓았다.


그가 손에서 가지고 놀던 창 모형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티팩트’라고 부를만한 물건이었다. 원방에 있는 적을 단숨에 처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의미와 기능을 가진 녀석이었다.


고국기의 아티팩트였고, 3급에서 2급 사이에 있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다소 능력이 떨어져서 원래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본래의 위력에 비해, 대공이 사용하고 있는 기능만으로 다시 셈한다면 3급과 4급 사이가 될까. 산슈카에서 취급하는 아티팩트의 기준이 왕국기, 제국기, 고국기의 순으로 높아진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왕국기로썬 보물에 준하는 물건이다.


유저들이 본다면 환장을 할 정도는 되리라.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이만한 물건을 얻는 이들도 극소수일 테였다. 지금까지 게임이 서비스 된 이후 모든 플레이어들을 통털어서 말이다.


그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사용했으니, 대공은 분명 무언가 수확이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생각은 철저하게 빗나갔고.


알렌의 잘못은 아니었다. 알렌은 충직하게 명을 이행했을 뿐이다. 수도 사르삿에서 망을 보고 있던 놈이 통신을 하고, 그 통신을 이어받아서 저택에 있던 알렌은 곧바로 보고를 했다.


그 보고 덕에 대공의 심기가 조금 사나워졌던 참이고.


“실패라.”


대공이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대공이 싫어한다면, 그 휘하의 기사들도 당연히 싫어하는 단어였고 말이다. 사실 기사들에게 직접적인 호오好惡는 없었으나 대공의 처분이 그에 따라 떨어진다는 데서 싫어하게 된다. 대공은 사람을 도구처럼 잘 버리지는 않는다.

오로지 인간적 정이나 인격에 의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오히려 도구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하며 내치는 게 프린스 알사드다. 단순히 휘하 인력들의 사기를 위해서 오래 참을 뿐이었다.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알렌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에게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대공 역시 알고 있을 테였고. 그럼에도 물어봤을 때는, 일단 대답은 해야 한다.


“잘··· 모르겠으나 이 우둔한 머리로··· 아마 유물의 위력은 충분했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그간 상정했던 수준을 넘어 대상들의 강력함이 더 진화한 게 아닐지···.”


알렌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전에도 느낀 바가 있었다. 제냐 킴. 잊기 어려운 이름이 되었다. 원래는 알지도 못하는 사내였는데. 암살 대상으로서 정보를 숙지하고 사르삿에 갔고, 근처 어둠숲이라는 필드에서 암살을 시도했다.

검은 기사단의 노련한 기사 셋이 덤벼들었고, 따로 고용된 암살자가 더해져 4대 1의 결투를 벌였으나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몇 번 정도 악몽을 꿀 정도였다. 별 유명세도 없는 이름이었고, 그저 뜨내기에 불과한 용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알사드 대공 휘하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어느덧 제법 유명해져 버렸다.

대공의 명에 의한 암살로부터 몇 번이나 살아남은 자로 말이다.


여태껏 대공이 처리하지 못한 적은 달리 없었다. 대공이 막강하고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그가 그만큼 신중한 데다가 가능한 암살 계획만을 늘 세우기 때문이었다.

실제 세부 사항은 그 휘하의 부하들이 수립하고 시행하지만, 대략적인 방향이나 난이도는 결국 대공이 정한다.


프린스 알사드.

게으른 대공은 자신의 대공 령에 틀어박혀 앉아서, 중부대륙 일각의 모든 권력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대공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자들. 그런 자들의 전력을 분석하고 적절한 대상을 보내 죽이곤 하는 식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지계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알렌은 대공이 무서운 인간이라고 늘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는, 알사드 대공이 천재이리라는 확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으나 앉아서 천리를 본다.

아무에게도 들킬 수 없고 알릴 수 없는 계획을 세우니, 다른 이들은 그가 일하지 않는 인간으로 보인다.

대공의 위에 앉아서 치러야 할 수많은 책무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덕택에 게으른 대공의 별명을 얻었지만 알렌은 그게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이름이며, 도리어 그의 잔혹함을 돋보이게 하는지 알고 있다.

그만큼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자도 드물 것이다. 대공의 머릿속에서는 천 단위의 인물들이 세세한 움직임을 보이며 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늘 실제와 거의 흡사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제냐라는 인물의 특이성은 거기서 더 드러난다.

근래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에게 실패라는 단어를 안겨주었던 인물이 많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연속해서, 여러 번이라니.


“진화라······.”


알사드 대공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알렌은 고개를 내린 채, 표정을 보이지 않으며 가만히 있었다.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기사라고 다리가 저리지 않는 것은 딱히 아니었다. 그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버틸 수 있을 뿐이다. 불편한 건 모두가 같다.


알렌의 불편함이 점점 더 차오를 때, 대공이 말했다.


“···알겠다. 일단. ···벨라크 경을 올려 보내. 수고했다.”

“···예.”


알렌은 대공의 숙고 시간동안 숨조차 작게 몰아쉬며 가만히 있다가, 그의 명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일어나 방을 나섰다.


툭.


대공은 손을 올렸다. 자신이 내려 놓았던 철제의 창 모형 위로 말이다.


[필멸창]이라고 불리는 도구였다. 고국기의 아티팩트이니, 그 역사가 어지간한 나라보다도 오래된 물건이었고. 알사드 공작 가에 전해지고 있는 보물 중 하나였다. 가장 쓸만한 점은, 다른 누구도 공작 가에 이런 보물이 있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다. 선대의 공작들 중에서도 세르게이 못잖은 꿍꿍이의 계략가들이 있던 모양이다.

세르게이는 가문의 오래된 창고 구석에서 이걸 발굴해내었고, 공작가의 초상술사들을 동원해 기능을 알아내고, 복구해서 다시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나 적어도 선대에는 쓰인 적 없던 물건이다. 적어도 수십 여 년 이상, 길면 백 년 단위로 쓰이지 않았던 물건을 다시금 쓰는 중이다.

기능과 효력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지간한 초상술사나 전사라고 할 지라도, 또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지라도.

저택의 제 방 안에 앉아서 상대를 암살할 수 있다니. 지독하게 편리하지 않은가.


기능은 간단했다. 대공 령에서 수도 사르삿 정도의 거리를 포함하는 원형의 경계 내에, 타겟을 정해서 공격할 수 있는 물건이다. 타겟이 되는 이의 신체 일부나 혹은 MP입자가 필요했다. 타겟이 되는 자는 제냐 킴.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세시앙 인이며 산슈카에는 뿌리가 없는 뜨내기 용병이었다.


그러나 거슬리는 작자였고, 또 계속해서 실력이 늘며 어지간한 베테랑 기사만한 솜씨를 가진 유망주이기도 했다. 공작에게는 단순히 죽여야 할 인간에 불과하고, 그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흠집 낸 사내였다. 몇 명의 암살객들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기에, 고국기의 아티팩트를 써서 죽이려 했던 건데.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니.


알사드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제냐 킴이 그에게 있어서 최악의 장애물이나 불편함은 아니었다.

그러나 슬슬 그 정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타국의 귀족이나 명망 높은 신분의 인간, 혹은 어떤 사연을 가진 이들을 죽여대던 그였다. 자국에 있는 비천한 용병 하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의 능력에 문제가 있게 되는 셈이다.


알사드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놈 하나를 죽일 정도는 된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마 권태만을 느끼던 그의 마음에 파문처럼, 짜증과 화가 일 것이리라.


제 속마음 하나도 변변찮게 알지 못하는 미치광이의 계획은 여전했다.

그는 이 나라의 전통이 짜증났고, 그에게 주어진 주변의 모든 환경을 예전부터 짐이라고 여겼다.

산슈카에는 변화의 바람이 필요했고, 그는 그 변화의 바람으로 다른 이들이 얼마가 쓸려가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정도로 무언가 일을 저질러보고 싶은 생각 뿐이다.


그가 큰 일을 벌여 수십 만, 수백 만의 인간이 죽고 중부 대륙의 역사가 바뀌고. 몇 개의 나라가 망하거나 혹은 그 국경선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전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알사드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렇다면, 이 지루한 마음에 조금의 재미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방해물의 역할을 해주는 제냐 킴은 원래는, 그에게 흥미를 끌만한 존재여야 했으리라. 그러나 조금의 여지도 보이지 않고 정확히 계산의 반대로 움직이는 비천한 용병이라는 건, 흥미보다는 짜증스러운 존재였다.


알사드는 철제 모형을 다시 집어들었다.


고국기, 역사적으로도 잘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예전의 어느 마스터가 만들어낸 보구이리라. 아직 기능을 전부 활성화시키지 못했는 데도, 어딘가의 기사단장이나 귀족을 죽이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왕의 손에 들려 있다면 처형 도구로서 아주 쓸만했을 것이다.


상대가 있는 곳 근처 허공에 MP로 이루어진 창을 생성하고, 그것을 쏘아 날려보낸다니.


참으로 편리하고 탐나는 기능이지 않을 수 없다.


유물을 사용하는 데는 MP가 필요했고, 내장되어 있던 MP는 지나치게 오랜 세월동안 삭아 없어졌다. 아마 ‘배터리’ 역할을 하는 어느 장치가 고장난 걸지도 모른다.

유물은 사용할 때마다 계속해서 단기적인 재충전이 필요했고, 이번의 분량을 소진했다. 벨라크는 대공 령의 워메이지 중 한 명이었고, 선임급의 사내였다. 초상술전단의 십인장 정도는 되는 사내였으며, 대공이 필요할 때마다 자주 부르는 이름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그의 마음에 맞게 명령만을 수행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능력보다도, 대공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자극하지 않는 점이 더욱 장점으로 여겨진다. 대공으로서는 말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벨라크 경이 집무실에 당도했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제2 초상술전단 선임 술사 벨라크 주이스입니다.”


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대공은 고갤 끄덕거렸다. 누가 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나온 혼자만의 제스쳐였다.


“들어와.”


약간은 탁한 목소리에, 끼익거리며 문이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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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5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4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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