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연재수 :
349 회
조회수 :
8,287
추천수 :
762
글자수 :
3,324,406

작성
24.03.03 03:50
조회
18
추천
1
글자
36쪽

205. 거북이 사냥

DUMMY

그러나 게임의 시나리오를 쓰는, 파악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선순환이 도리어 뇌관이 될 수도 있었다. 아직 시대는 완벽하게 개화開化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점차 발전해가고 있었으니까. 시기적으로 본다면, 이 콘란드 대륙은 고대나 중세의 생활상이 섞여 있었고. 여러가지 초상 스킬들 따위와 유별난 공학자들의 기지로 인해서 이따금씩 근대에서나 볼법한 발명품들이 있는 식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안정적으로, 근대나 현대로 넘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에너지’가 점차 모이고 있었다. 평화기를 지나면서 각국의 병력들도 늘어가고, 아티팩트들 따위도 점차 많아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컨트롤할 아티피서, 기력술사, 초상술사들도 수를 더해가고.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런 식의 축적이 계속되다가 늘 대전쟁이 일어나고는 했었다.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그저 곧이 곧대로는 발전을 향해서 걷지 못하는 법이었다. 지혜로운 위정자들이 위에 버티고 서서 세상을 잘 이끌어간다면 희박한 확률로 정도만을 걷겠지만.

세계의 흐름이 흔들림 없이 가기 위해서, 지혜로운 지도자가 백 명이 필요하다면. 비탈길로 빠지고, 전쟁의 화마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덕한 권력자가 몇 명만 있으면 족했다.


그게 제냐가, 연계 퀘스트의 로그log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산슈카의 위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퀘스트가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단순히 로멜리아 가의 안위에 관한 퀘스트였지만. 조금씩 그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이는 연계 퀘스트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거기다가 유니크 급이었으니까. 메인 스토리급 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영향력이 큰 스토리의 지류에 합류한 것은 분명했다.


제냐는 퀘스트 로그를 반복적으로 읽고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할수록, 그런 미래가 떠올랐다. 이 게임의 시스템이 인도하고 있는 미래의 모습 말이다. 위기라고 달리 말할만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화로운 이 중부 대륙에서 일어날 전쟁 따위밖에는 없었다.


그 전에, 산슈카가 아마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중부 대륙에서도 중심지. 콘란드 대륙의 배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중앙 지역이다. 대륙 안에 있는 내해內海나 거대한 강줄기들이 여럿 있기는 했지만. 산슈카가 당장 바다에 접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다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물들이 아주 많이, 흐르고 있었기에 물이 부족하지는 않다.


주변으로 다양한 나라들이 있어서, 모두 산슈카보다는 더욱 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중심지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자면 변방이라고 할만한 소국이다.

가장 오래된 고국古國이요 예전에는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나라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세를 잃고 타국에 둘러싸여 얌전히 살아가고 있는 조용한 소국에 불과하다. 그런 나라에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생각보다 대처가 둔할 수도 있었다. 산슈카에서 거대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여기지 못할 수 있으니까.


혹 고대 시절의 산슈카를 생각하며 아직도 경계심을 놓치지 않는 위정자들이 주변국에 있다면 얘기가 좀 다를 수 있겠다만.


아무튼 제냐는 벌어질 수 있는 가능한 ‘최악의 일’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했고. 자신에게 주기적으로 날아오고 있는 원거리 공격 스킬과, 그것을 쏘아낼 불명의 권력자에 대해서 그 시나리오를 연결시켰다.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게으른 대공이 산슈카를 뒤집어 엎으려는 속셈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으른’ 대공이 과연 무슨 의도로, 무슨 수로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먼저는 적을 알아야 한다.


일전에 일행들은 사르삿을 떠나서, 대공이 있는 곳을 가보자고 한 바가 있었다. 일행이 모두 모이면, 한 번에 움직일 셈이었다.

적의 정체나 존재에 대해서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강력한 위협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홀로 대적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만일 정말로 ‘대공’이 적이라고 한다면, 그 적의 앞마당에 가는 건 더욱 큰 위험일 것이고.


솔직히 제냐 일행은 체급이 조금 부족할 지도 몰랐다. 대공의 권력을 상대로 한다면 말이다.


레벨이 100을 넘었고, 평범한 100레벨 근처의 강함은 아니었지만. 대공 쪽에서도 무언가 비장의 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늘 그렇듯, 그들은 소수 정예이고 상대는 다수였으니까. 상대 인원들 하나하나를 압도적으로 짓누를 수 있는 무력적 수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한다면, 은밀한 행동조차도 하기가 어렵다.


대공 휘하에 있는 기사단. 개중에서 아주 고강한 작자들만 아니라고 한다면. 제냐 역시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놈들이 셋, 혹은 다섯이 덤빈다면. 그러다가 덜미를 잡혀서, 수십 단위가 자신에게 모인다면?

그대로 꼼짝없이 게임 오버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동료의 존재이다.


대공령, 혹은 알사드 령, 공작령 따위로 불리는 곳.


사르삿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그리 멀지도 않다. 말을 타고 급하지 않게 달려서, 이틀 정도면 닿는다. 명마를 사용해서 전력 질주를 한다거나, 다양하고 특별한 수단들을 이용하면 당연히 훨씬 줄일 수 있는 거리였고.


대공령으로 떠나기 위해서 밑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제냐는 그리 많이 챙길 것들이 없었는데. 릿샤의 경우에는 늘 준비거리가 많다. 그녀가 초상술사이기 때문일 테다. 어떤 아이템이나 스킬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전투력이 급변하는 계열이었으니까. 초상술사는 다른 말로 ‘준비자者’라고도 한다.

아주 먼 거리를 넘어서 공격을 하는 초장거리 공격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듯. 곧, 거리가 ‘힘’이듯. 초상술사에게는 ‘시간’과 ‘준비’가 곧 힘인 셈이었다.


제냐와 같은 기력술 계열, 그러니까 중근거리에서 싸우는 전투직의 경우에는 전투력의 낙차가 그리 심하지 않을 테였다. 대신 오랜 기간 전투를 대비한 초상술사들처럼 폭발력을 내진 못하리라.


라이엔은 굳이 따지자면 초상술 계열이었다. 그러나 ‘테이머Tamer'이기에 조금 다르기는 하다. 엘리트Elite 쪽이었고, 한 번에 폭발적인 위세를 자랑할 수 있는 쪽은 아니다. 예전, 제냐 일행이 같이 싸웠던 ’로웰 드버‘라는 NPC의 경우에는 보다 본격적인 초상술사 계열이었지만.


라이엔 핑은 소수의 몇 마리 몹mob을 정예화 시켜서 자신의 무기로 삼는 쪽이었고. 로웰 드버의 경우에는, 무수한 몬스터들을 즉석에서 세뇌해서 자신의 군대로 삼는 쪽이었으니까. 라이엔 핑은 평소에 계속 시간을 들여서 주력 몬스터인 ‘썬더스’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버프 계열의 스킬을 조금 더 익히고 현장에서 중첩하여 걸어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가진 전력의 본체는 ‘썬더스’라는 생물이다. 현장에서 갑자기 거대한 변화를 일궈내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제냐는, 단테스로부터 받은 보호용의 아티팩트, 화살막이만을 추가로 얻고 당장 할 것이 없었다.


“잠시 퀘스트라도 같이 깨시겠습니까?”

“아?”


라이엔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갑자기 제냐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제냐는, 사르삿에서 활동을 하며 받아두었던 여러 개의 퀘스트들 중에서, 그다지 대단치 않아 미뤄두었던 것 하나를 생각하며 물었다.


“어어··· 그, 그럴까요···?”

“예. 어차피 다른 사람들 오기까지 시간도 좀 걸릴 거 같은데.”


벌컥.


그 때 길드 하우스의, 회의실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오.”


최태현이었다. 그 역시 업무를 마치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 게임에 막 들어온 모양이었다. 라이엔과 제냐가 있는 것을 보고 반겼다. 제냐가 물었다.


“퀘스트 콜?”

“어어···?”

“콜?”

“그, 그래. 좋아.”


제안하는 제냐의 말에, 최태현은 뭔 소린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제 어둠숲은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한다고 해도 말이다.


네임드 몹, 보스 몹.


엄밀히 따지자면 비련의 시나리오는 ‘실제와 비슷한’ 가상세계를 지향한다. 고로, 이곳에 존재하는 생물체들은 모두 고유의 개체값이 있다. 똑같아 보이는 몬스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전부 다른 구석이 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레벨 이상의 몹들인 경우에는 이름이 있는 경우가 흔했고. 인간들, 플레이어들은 알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개중에서,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내면서, 인간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리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이 네임드니, 보스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어둠숲은 중수에서 고수로 넘어가는 지점에 사냥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실제로 제냐 일행이 많이 애용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제 완연히 고수 급에 발을 디딘 상태였고, 하드 유저인 일행의 특성 상 레벨보다도 높은 강력함을 지니게 되었다. 어둠숲의 몬스터들은 대개 격하의 존재들이다. 보스 몹이라고 하더라도, 단신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셋이 몰려다닌다는 건 상당한 불합리였다. 어디까지나, 몬스터들의 입장에서 말이다. 초보자 존에 난입한 중수들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상당히, 합이 잘 맞아서 시너지까지도 나는 셋이었으니까.


쾅!


‘거대 거북’이 날아가 쓰러졌다.


어둠숲의 생태계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조금 있다. 저 생물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의문점들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거대한 수림은 왕국의 영토 내에 떡하니 있었고, 마기가 들끓으며, 자연스런 생태계의 법칙과는 조금 동떨어진 양태를 보여준다, 늘.


아무튼 ‘거북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보스 몬스터 한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놈이 살만큼 거대한 호수는 숲 내에 없는 것으로 아는데.

집채, 보통 집채도 아니고 저택만한 몸뚱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놈이었다.


어둠숲의 네임드 몬스터 중 한 마리였고, 레벨은 100에 준한다. 몬스터로서도 레벨 100이라는 건 중요한 기점이었고, 그 이하의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가 되는 지점이다.

본격적으로 MP들을 다룬다거나, 특별한 공격기가 없으면 상대하기 난해할 정도로 각 장점들이 하나씩 있거나 한다.


예전 제냐와 최태현이 함께 잡기 위해 고생을 했던 ‘프린스 오브 고블린’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 막강한 재생력과 여기저기를 노 딜레이로 터뜨려대는 공격기. MP를 다루는 일에 있어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보이지 않았는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거대 거북도 그에 비해서 크게 떨어지는 존재는 아니었다. 고블린 프린스가 어둠숲의 맹자 중 한 마리라고는 하지만. 거대 거북도 아주 꿇리지는 않는다. 단지, 고작 몇 개월 전에 비해서 제냐와 최태현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 뿐이다.

확실히 괄목할만한 성장세이기는 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도, 상당히 상위권에 들만한 성장세일 테다.


쾅!


거대한 폭발음이 한 번 더 일었다.


어둠숲. 아주 키가 큰 침엽수종들이 빼곡하게 서 있는 장소였다. 그 넓이는 적어도 작은 도시 정도는 될 테였고. 수많은 몬스터들과, 개중에서도 강력함을 자랑하는 괴물 중의 괴물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기이한 마력魔力이라도 작용을 하는지 햇빛이 잘 들지 않고, 안개가 끼인 듯 싶은. 어두침침한 곳이었는데.


그런 곳의 나무들을 박살내면서, 거대한 거북이가 나동그라졌다.


‘거대’한 거북이를 날려버리기 위해서는.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 최태현이 쏘아낸 것이었다. 백룡각궁. 그가 계속해서 애용하고 있는 활이었고, 사용자가 주입하는 MP에 따라 위력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무기이다. 물론 한계야 있겠지만, 아직까지 최태현이 그 한계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개멋진나 최, 가 말이다. 강성, 탄성, MP수용성 등 어느 것이든 뛰어난 자철시를 이용해 날려버린 참이었다. MP를 주입하면 주입할수록, 자철시가 소리를 냈다. 소리를 낸다는 건 곧 ‘진동한다’라는 말이었지만. 명중률에 지장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MP들이 깔끔하게 화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강력한 위력을 품은 가장 고점高點에 다다르면 시위를 놓는다.


말이 화살과 활이지, 거인 대포나 다름없는 무언가를 최태현은 뻥뻥 쏘아대고 있었다. 다양한 스킬샷들이다. ‘스킬’을 통해서 MP를 사용하면 조금 더 위력이 높아진다. 고수급 이상의 플레이어들 중에서 특별한 인간들은 그냥 자신이 MP를 다루어서 스킬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위력을 내는 경우도 더러 있다지만.


최태현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길드원들 전부가 그러하다.


자철시는 미사일처럼 날고, 집채만한 거북이의 등딱지 한 쪽을 맞춘다. 그러면 숲의 어느 일대를 오시하며 걷던 괴물 거북이는, 그대로 몸이 뒤집혀져서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나무들을 부숴뜨리며 몸을 처박는다.


우르릉, 쾅! 하는 따위의 굉장한 굉음이 울린다. 전에 제냐가 ‘흑사黑蛇’를 잡을 때 보던 모습이었다. 검은 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크기를 갖고 있던 몬스터였다. 당시에 제냐는 사냥을 하면서 숲의 일부를 개간하다시피 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점점 괴수들과 만나게 된다. 괴수들은, 그 몸뚱이가 거대하고 담고 있는 에너지의 양도 초월적이다. 어떤 필드Field에서 전투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거진 토목 공사 수준의 일이 전투 중에 벌어지곤 한다.


가장 확실하게 그런 싸움을 한 게 얼마 전의 검은 용과의 싸움이다. 데슈칸 산맥의 봉우리 하나, 그 한쪽 면을 전부 쓸어내면서 발버둥치던 거대형의 괴물.


몬스터들 중에서는 거대해서 두려운 게 있고, 정반대의 종류도 있었다. 레벨이 높고 강력하면서, 몸집이 작다고 한다면. 그 작은 몸집 안에 다른 거대형종에 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힘이 집약되어 들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울 지 모른다.


그런 건, 그 몬스터를 압도할 수 있는 소수의 정예가 다가가서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조금 떨어지는 수준의 몇십 명이 다가가봐야 학살을 당할 뿐인 괴물이다, 그런 종은.


지금 등딱지를 얻어맞고 숲 속을 구르는 거북이는 물론, 제냐 일행에게 어느 쪽의 위협도 아니었다.


“크르르르르라라!”


거북이가 울 때 어떤 소리를 낼까. 제냐는 딱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성대가 있다고 한다면, 대강 파충류 종류의 울음 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저건 거북이의 울음 소리가 맞는가.


“흐음.”


확답할 수 없다. 어쨌건, 거북이라고 부르는 게 편의상 가장 정확한 괴물이었다. 실제 몬스터 이름도 ‘어둠숲의 거물 괴북이’였고.


보스 몬스터였고, 고수급에 다다르지 못했던 제냐였다면, 상당히 고생을 했었을 놈이다.


‘퀘스트’는 별 게 아니었다. 한동안 사르삿에서 충분히 떼돈을 벌어들인 ‘아이젠 하우드’가 또다른 미친 짓을 하기로 한 것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물량을 정력적으로 소화해내면서, 물건들을 팔아넘긴 그였다. 이 세계는 ‘초상스킬’, ‘초상력’, 뭐 그런 게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대개는 중세나 고대 따위의 생활상이 엿보이지만, 가끔 사르삿같은 대도시에는 근현대를 떠올리게 하는 문물들이 있고는 했다. 시대의 과학력을 뛰어넘은 이상한 기물들처럼.


아무튼 그런 공장용의 아이템을 사용해서, 아이젠 하우드는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흰뿔큰사슴이나, 거대 딱정벌레의 고기로 만든 요리들을 많이 팔았다.


한동안 제냐가 그 물량을 잡아다 주지 않았음에도 충분한 모양이었고, 이후에는 따로 의뢰를 넣어서 조달한 듯하다.

원래 팔아먹던 음식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체계가 잡혀 있어서, 공정 라인Line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젠 하우드는 또다시 괴랄한 식재료에 눈을 돌리게 된다. 어둠숲에 존재하는 거대한 괴물 거북이.


지금 배를 발라당 까뒤집고, 나무들을 박살내며 발버둥치고 있는 저 놈이었다.


“썬더Thunder-,"


제냐는, 초상 스킬을 발동했다. 뇌정精이 모여들었다. 한적한 숲이었다. 원래는 빼곡한 숲이었으나, 거대 거북이를 몇 번 구르게 한 것만으로도 아주 시원한 공터가 만들어졌다. 어둠숲까지 오고가는 길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금 길드는 상당히, 체계적이었으며 많은 것들이 갖춰진 상태였으니까. 이동을 하고자 한다면 라이엔의 갈색 매들을 타면 된다.

퀘스트를 수행하자고, 길드 하우스에 말을 하고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다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팔을 뻗은 제냐의 앞에 번개의 기운이 뭉쳤고, 그것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삐죽거리는 형상을 만들었다. 가시와도 같은 게 얽히고 설켜서, 아주 위협적인 공의 형태를 완성시켰다.


“스피어.”


제냐는 초상 스킬의 이름을 읊으면서 발동시켰고, 곧 날려보냈다. NPC 중에서도 수퍼 마스터라고 불리는 작자들의 경우에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스킬을 써먹고 거대한 MP를 제 수족처럼 부릴 테였다. 어떤 도구의 완벽한 수동 조작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특혜를 받더라도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MP를 그만한 수준으로 다루기가 아주 어렵다. 그건 본질적이며 타고난 재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진지하게 MP에 대해서 고민을 하더라도, 결국 게임 속의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에. NPC들과는 몰입도나 그것을 대한 진지함이 다를 수밖에 없고, 최상위권에 올라갔을 때 차이를 만들어낸다.


제냐 역시 그러하다. 아직 ‘수퍼’ 마스터. 마스터 급 이상에 올라간 이들 중에서도 별격의 존재들을 뜻하는 말고, 보통 레벨 200대 후반에서 300대 즈음. 그 부근을 지나는 ‘강함’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랜드’ 마스터, 라는 단어는 지금 전 대륙에서 영향을 떨치고 있는 초대륙적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붙는 이름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그러한 강함을 지닌 이들에게 붙이는 이름이기도 했다.

레벨로 따지자면, 500 근처의 괴물같은 강함을 가진 캐릭터들이 그랜드 마스터의 이름을 쓸 테였다.


제냐의 레벨은 아직도 120대였다. 물론 아직까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만한 실력인 건 아니었지만. ‘수퍼 마스터’의 경지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릿샤를 비롯해서, 길드원들이 안정권이라고 여기는 경지가 그것이었다. 수퍼 마스터. 레벨 200대 후반이나, 300정도의 강함.

산슈카는 중부 대륙의 세력도 상에서 변방에 위치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일국一國이었다. 이 왕국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플레이어들은 고작해야 2, 3년 여 정도 이 세계를 여행해본 게 고작인 이방인들이다. 일국의 권력자와 싸운다고 한다면, 아득바득 자신의 체급을 높여두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언제 시나리오 퀘스트가 발동을 할 지도 모르는데, 한없이 레벨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건이 터지고, 급변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상황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인과관계를 알아보고, 퀘스트 로그들을 찾아내는 것이 알맞은 행동법일 테였다.


지금의 레벨과 전투력으로도, 단번에 개죽음은 당하지 않을 테니까. 전략을 잘 짜고 은밀하게 돌아다닌다면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다.


수퍼는 멀었지만. 그래도 마스터는 넘는 수준의 초상술사였다, 제냐는. 제냐 킴, 김서원은 결국 기력술사로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초상술사로서도 마스터 마기아의 경지에 올랐다.


릿샤에 비한다면 한참 부족하긴 하다. 그가 쓸 수 있는 스킬적인 변형들은 가짓수가 아주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이전에 비해서 공격력이 늘어난 게 사실이었다. 릿샤의 경우에는 오로지 초상 스킬에만 자신의 자원을 다 때려박을 수 있어서, 단시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는 게 가능하지만. 준비에 따라서.


제냐는 같은 MP라고 하더라도 기력술사로서 쓸 부분들이 있고, 초상술사로서 쓸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초상술사라고 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썬더 스피어의 능력은 확실하고 강력하다. 수퍼 마스터들처럼 손짓 한 번으로 벼락을 부리며, 마치 전능한 척 흉내를 낼 수는 아직 없었지만. 그래도 거대 거북이 한 마리 정도야.


거대한, 제냐의 몸보다도 거대한 푸른 빛의 방전하는 구체였다.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한 형태였다. 겉면은.

어차피 전체가 전기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평범한 뇌전도 아니며 폭발하고 상대를 집요하게 불태우는, 끔찍한 에너지였다. 물론 제냐의 MP로 만들어져 있기에, 목표물을 잘 가리고 아무 것이나 망가뜨리지는 않을 테지만.


썬더 스피어가 난다.


허공을 쭈욱, 길게 날았다.


그래서 약 200여 미터 정도는 멀리에 있는 거북이의 뱃가죽에 닿는다. 거북이는 뒤집어져서, 발버둥을 치다가, 자신의 몸에 회전을 걸어버렸다. 뒤집어진 채로 빙글빙글 도는 상태였고, 주변에 있는 거대한 침엽수림이 믹서기에 갈리듯이 분쇄가 되고 있었는데.


그 중심부로 썬더 스피어, 거대한 구체가 날아가 박힌다.


‘거대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제냐의 몸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가히 저택만한 몸뚱이를 가진 거북이의 배에 부딪힐 때의 모습은, 날벌레가 날아가 무는 것과도 비슷해보였다.


그러나 날벌레치고는, 깨나 따끔했다.


콰아앙-!


강렬한 폭음이 먼 거리에서도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방전.


어마어마한 광량이 거북이의 뱃거죽 위로 터져나온다. 수십 개의 섬광탄을 동시에 떨어뜨려 터뜨린 것처럼. 혹은, 군용 광탄 따위를 쏘아 올려서. 어둠을 수십 분간 밝히는 그런 모습처럼.

일순 어둠 숲의 어둠이 물러가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빛의 양만 화려한 게 아니었다. 번쩍이고, 눈을 잠시 감아야 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빛을 터뜨린 썬더 스피어는.


그대로 칼날처럼 거북이의 뱃가죽 속을 파고들어갔다. 뇌전의 검. 무엇보다도 강력한, 벼락으로 벼려진 검. 쇳덩이보다 단단할 거북이의 겉 껍질을 파고들어가, 그 살을 태웠다. 검은 용의 몸 속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제냐의 의지와 닮아 있었다. 제냐가 시전한 스킬이었고, 그의 MP였으니까 말이다.


MP는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마치 생명체와 비슷하기도 하다. 오래도록 초상술을 수련한 초상술사들은, 자신의 MP를 무슨 애완동물인 것처럼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충분히 착각할만하다. 스스로 부여한 방향성대로 움직이고, 관성마저 있어서.

이전에 계속해서 발휘했던 방향성대로 더 쉽게 움직이는 성질이 있었으니까. 생명은 없지만, 그 에너지 속에 ‘정보’ 자체는 주입되어 흔적이 남는다.


마치 오래도록 같은 동작의 운동을 하다보면 근육에 인이 박혀서, 다음에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머슬 메모리, 라고 체육학 따위에서 말하는 것일텐데.

MP도 비슷했다. 그건 어떤 의지도 없으며 생명체의 일부분도 아니었지만. 콘란드 대륙 내에 존재하는 그 특이한 힘은 계속해서 부리면 부릴수록 정련하는 게 가능한 무엇이었다.


기력술사들이 한 개의 검을 최고강도로, 또 최고도의 예리함으로 벼려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초상술사들도 자신들만의 특기에 어울리는 MP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제냐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전격 공격에 가장 어울리는 MP가 되었다. 화염 계열의 것이 떨어지는 성능인 건 아니었으나. 뇌전의 기운으로 다룰 때 약간 더 움직이기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차이’의 체감이란 MP의 성질에 대해서 초상술사가 이해해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제냐는 확실히 수준이 올랐다.


고작해야 게임 속에서의 일이었기는 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게임 속에서의 일이나 깨달음도, 잘 벼려내어, 또 소중히 가꿔 가져나가면 게임 밖에서도 어딘가에서 써먹을 수 있을 지도.


가장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다른 예리함으로 관찰을 해보고. 또 진지하게 파고들어가다 보면, 거기에서 인생이나 세상의 진리라는 게 있기도 한 법이었다.


남의 떡에 집중을 해서 여기저기에 시선을 뺏기는 것보다는, 무엇에라도 조금 진지하게 집중을 하고 마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에게는 모두.


비련시 온라인을 만들어낸 개발자들은 어쩌면 그런 의도를 담아서 이 게임을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들이 계속해서 은근히 ‘불편함’을 강조하며 플레이어들에게 고생을 강요하는 걸 보면 말이다.


우우우우우웅.


하고.


대기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썬더 스피어가 일으킨 폭발이 길었다. 거대 거북의 회전이 멈추었다. 아니, 돌고는 있지만 새로운 동력이 없었다. 거북이의 눈깔이 뒤집혔다.

이미 거북이인지, 뭔지도 잘 모르겠는 생물체이기는 하지만. 일단 네 발에, 비늘이 있고. 등에는 등딱지가 있다.

대가리는 맹수, 이리와도 비슷한 것 같았는데.


뒤집혀진 그대로, 힘을 잃어 아주 느리게 회전한다. 원심력도 거대한 폭발과 함께 날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거북이의 배에는, 마치 메스를 댄 것처럼 긴 자상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번개가 마음대로 날뛰고, 또 마지막에 다시금 바깥으로 튀어나오면서 낸 상처였다. 번개가 논 자국. 궤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번개는 가장 날카로운, 금속성의 칼처럼 거북이에게 굴었고.


거대 거북은 아가리는 쩍 벌린 채로 눈에 촛점을 잃었다. 완벽하게 죽은 건 아니었다. 제냐도 그렇고, 라이엔이나 개멋진나 최 역시 느낄 수 있는 바였다. 그래도, 레벨 100 정도의 보스 몬스터이다. 고작 몇 방의 공격에 생명력이 다 날아가지는 않는다.


단박에 절대적인 파괴력을 담아서, 대가리라도 날려버리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거기에다가, ‘검은 용’처럼 특별한 재생 능력을 가진 놈들은 대가리를 날려버리더라도 살아 있기도 했었고.

거대 거북은 다행히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외피가 어마어마하게 딱딱해서, 그걸 까부수는 데 고생을 하게 되는 타입의 괴물이었지.


이미 껍질을 한 번은 부수었다. 회전도 멈추었고. 놈은 저항 의지를 잃었다. 몇 초, 혹은 1, 2분 여 정도.

그 정도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지금 자리한 세 명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기에 아주 넉넉한 시간이었다.


최태현은, 그나마 멀쩡한 침엽수 한 그루의 중턱에, 자철시 몇 개를 박아넣고, 그 위에 대강 서 있었다. 대단한 균형감각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정도 디딜 곳이 없었을 텐데. 흔들리지도 않고 잘도 화살을 쏘아냈다.


나무의 중턱에서 최태현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몇 방 제대로 쏜 것도 아니었는데. 벌써 몬스터가 그로기groggy 상태였으니까. 손맛이 영 시원찮다, 는 게 그가 느끼는 심정이었다.


최태현도 130대 정도의 레벨이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전투력을 재본다면 적어도 100 중후반 대의 강력함을 가지고 있을 테였다.

릿샤는 보다 200에 근접한 수준일 테였고.


제냐는 최태현보다 레벨이 조금 낮았지만, 태현과 비슷한 수준의 강함이었다. 레벨이 꼭 전투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에. 제냐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스킬들의 위력이나, 그의 전투적 노하우가 레벨의 차이를 좁히고 있었다.


라이엔은 비교적 자신의 레벨에 근접한 강함을 가진다. 150대의 레벨이었고, 아마 정밀하게 체크한다면 10이나 20 정도는 강할 수 있겠지만. 남다른 저력은 별로 없다. 빠른 시간 내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 역시 어려울 테였고.


릿샤를 비롯해 나머지 길드원들은, 성장을 조금 아끼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계속해서 전투 후의 보상 포인트를 먹이고 있는 주요 스킬이나, 혹은 아이템, 칭호들 따위가 어느 정도 파밍Farming(게임에서, 농사를 짓듯 차근차근 여러 요소들을 수집하고, 게임을 안정적으로 클리어해나가는 과정)이 끝나면 계단식으로 확 레벨을 올릴 테였다.


그 시기가 오면 아마 라이엔은 조금 뒤쳐질 테였다.


어쨌든 레벨업을 하면서 얻게 되는 여러가지 보상들이 있었고, 또 레벨에 따른 ‘제한’같은 것이 각 분야에 있어서. 이전까지 쓰지 못하던 아이템이 풀린다던가. 혹은 상위의 스킬들 중 레벨 제한이 있는 것을 쓸 수 있게 된다던가.

혹은, ‘가상 점수’를 이용해 직접적으로 환산 가능한 돈이나 명예 점수, 스탯 가중치 따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체급을 높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혜택들을 제하고서 지금의 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레벨을 한 번 확 올릴 때쯤에, 아마 한 번 더 전체적인 전투력이 급등할 테였다.


제냐를 비롯해서, 각자가 애쓰고 있는 주력 스킬들, 주요한 초상 스킬이나 기력술이나, 변신술 따위의 것들은 쉽게 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많은 고생을 하고, 전투 경험치가 쌓여야 꿈쩍을 하는 기술들이었으니. 단기간에 성장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알사드 공작령으로 향하고자 한 참이었다.


“킁.”


최태현은, 발치의 화살대들을 밟고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전통에서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자철시. 보랏빛의 자紫를 쓰기도 하고, 자석의 자磁를 쓰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고수급들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다.


그 소재의 강함이나 MP수용성 역시 이유기도 하고. 한 가지는 이것의 ‘자력’을 MP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조금 더 트리키Tricky한 공격들이 가능해지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은은하게 보랏빛이 돌고 있는 화살들을 밟고서, 자철 하나를 더 꺼낸다.


그가 허리춤에 비스듬히, 비껴 매고 있는 화살통이었다. 그 바닥에 자력이 형성되어 있고, 자철시는 강력한 자력을 발휘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소유주가 약간의 MP를 흘려보내며 그 자력을 조정해서, 빼낼 때는 큰 힘 들이지 않지만. 평소에는 전통을 맨 채로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화살이 쏟아지는 일이 없다.


MP를 충분히 먹인 자철시. 그리고 사용자에게도 ‘궁술-자철시’ 스킬이 생긴다면 장난같은 일들이 가능해진다.


최태현은 한 발의 자철시에 자신의 MP를 쏟아부었다. 백룡각궁. 한기를 품고 있는 활대였다. 산슈카로부터 아주 먼 지역에 있는, ‘백룡’이라는 별명을 가진 몬스터의 뿔이 주된 소재가 되는 활이다. 이전에 잡았던 ‘검은 용’과 비교를 한다면 어떨 지는 모르겠다. 최태현이 알고 있는 바로는, 그보다는 훨씬 몸의 크기가 작기는 했다만.


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도 개채값이 상이하게 다를 때가 있었으니. 어떤 놈은 데슈칸의 산흙벌레에 비해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그의 활의 소재로써 쓰인 놈은 제법 강력한 놈인 듯 싶었다. 살 때 가격도 깨나 비쌌거니와.

MP를 견뎌내는 그 수용성의 한계가 아주 높았기에 말이다.


‘백룡’은 설산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몬스터라고 한다. 도마뱀의 몸통에 말의 다리, 늑대의 대가리와 박쥐의 날개를 갖고 있는 괴수였다. 그 뿔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고, 진귀한 아티팩트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같은 소재라고 하더라도 장인의 솜씨에 따라서 아티팩트의 위력은 천차만별이 또 되지만은.

아무튼 제법 쓸만한, 아니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최태현은 설산에 살던 그 괴수의 뿔에, 몇 가지 인챈트를 그 동안 부여했다. 제냐가 비스트 슬레이어나 지룡의 발톱 대거에 인챈트를 하고 강화를 해낸 것처럼 말이다.

그의 경우에는 빙한의 기운과 바람의 기운을 부여했다.


어쨌든 자연계의 어느 성질이나 기운이 부여되었다는 건, 추가적인 공격력을 의미한다. 상성에 따라서는 최태현이 다룰 수 있는 에너지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수도 있었고.


속성력도 결국은 MP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뿐인, 특수한 MP인 셈이었지만.


최태현은 자철시에 MP를 쏟아부었다.


화살촉과 활대, 깃에 걸리는 MP가 있고, 직접 쥐고 있는 백룡각궁에 부여되는 MP가 있었다.


각궁에 부여되는 MP보다는, 화살에 넣는 것이 훨씬 양이 많았다.


백룡각궁은 포대의 역할이었고, 이미 활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MP의 양이 상당하다. 애초에도 그러했지만, 사르삿에서 명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솜씨를 몇 번이나 거치면서 더욱 많아졌다.


최태현의 MP에 호응해서 활대와 화살이 울어댄다. 그 떨림과 소리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최태현은 완벽한 일치감을 느꼈다. 그 떨림이 통제되지 않는 종류가 아니었고, 완벽하게 자신의 몸처럼 느껴져서. 화살을 쏘아 날리는 정확성에 도리어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듯한 기분이다.


도구를 다루는 장인들은 가끔, 도구가 자신의 수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단순히 정신병이나 착각이라고 말 할 수도 있는 것이기는 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물성物性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난다면. 그 물건이 마치 ‘호흡’하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칼을 다루는 자, 망치를 다루는 자. 여러 종류의 장인들이 그럴 테였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계의 물질의 흐름을 파악을 하고 난다면. 그리고 그 흐름에 완벽하게 자신을 맡겨서 힘을 실어보낼 수 있다면.


도구는 생겨먹은 그 평범한 외형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고, 어떤 위업偉業을 이루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태현은 활을 꽉 쥐어 잡았다. 왼손으로 활대의 그립 부분을 틀어쥐었고, 자신이 잡은 손 위쪽으로 자철시의 화살촉이 올라간다.


연보랏빛을 띄고 있는 화살이 부르르 떨며 운다.


최태현의 시야에는, 가상의 붉은 점선이 나타난다. 이대로 화살을 쏘아 날리면 어디로 날아갈 지를 미리 보여주는 스킬 샷의 도움이었다. 시스템의 보정이 들어 있는 것이기도 했고.


화살이 울지만 궤적은 떨리지 않았다.


활대의 내부에 잠자고 있던 MP들이 하나 둘씩 일어섰다. 잠에서 깨어나, 찌뿌둥한 몸뚱이를 풀어내며 바깥으로 나온다.


그 MP들에 강렬한 한기와 바람의 기운이 부여되었다. 바람은 허공에 길을 만들어줄 테였다. 화살촉에 바람이 어렸다. 최태현의 MP 역시, 희뿌연 연기처럼 형상을 나타내며 화살 전체를 감쌌고. 거기에 한기가, 성에처럼 어렸다.


실제의 성에는 아니었다. 반짝거리고 희끗거리는 기운이, 그 위에 가루처럼 묻어나는 것 뿐이다.


최태현은 눈을 부릅떴고, 거대한 거북이의 배때기를 노렸다. 그 정중앙. 아주 높은 거목의 중턱에 올라서 있기에. 집채만한 놈의 위를 잡을 수 있었다. MP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활을 쥐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누적된다.


정련된 기운이 화살을 강하게 만든다.


초상술사의 MP와는 또 다른 종류였다. 초상술사의 그것은 조금 넓게 퍼지고, 뭉툭하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태현이 부리는 MP는 집약되고, 겹쳐지고 겹쳐져서, 하나의 날카로운 기세를 완성한다.


처음에는 화살과 활대 근처에 머무르던 넓은 부피의 기운이, 점차 그 안으로 스며들고, 아주 얇은 부피감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존재감은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다.

아주 가녀린, 박피薄皮가 백룡각궁과 자철시의 겉에 둘러졌다.


‘완벽’한 상태라고 최태현은 느꼈다.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시위를 잡던 오른 손아귀의 긴장을 풀어냈다.


쉬익,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미사일만치 강력한 화살이 거북이에게로 날아간다.


*

david-courbit-M8xxVih_V_U-unsplash.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0 229. 좋은 밤 24.03.19 12 1 16쪽
229 228. 괴물의 위용에 대하야 24.03.19 15 1 13쪽
228 227. 구조하러 온, 괴물 24.03.19 17 1 16쪽
227 226. 대립 24.03.19 14 1 14쪽
226 225. 술사조 조장 24.03.19 12 1 11쪽
225 224. 부부단장, 히베 24.03.18 14 1 24쪽
224 223. 작게 숨을 내뱉었다. 24.03.17 15 1 23쪽
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5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9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20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4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