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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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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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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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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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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86. 블러디 아이시bloody icy

DUMMY

게임 오버가 되어봐야, 고작 게임인데.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능력을 한껏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 제냐의 마인드는 주변의 동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태현을 비롯해, 호아킨과 릿샤에게까지 말이다. 과도한 긴장감으로 몸이 굳어봤자 실전에서 효율이 떨어질 뿐이었다.


라이엔 역시, 함께 동행하면서 그런 모험들을 즐기게 될 테였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한다면 말이다. 이번 검은 용 사냥은, 고작해야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그들의 앞에는 당면한 과제들이 많았다.


이런 식의 지독한 준비와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어쩌면 정작 마주해야 할 시나리오 퀘스트의 본 장애물들을 쉽게 느끼게 될 지도 몰랐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제냐가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다. 지독한 훈련으로 미리 승리를 잡고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겠나. 본 시합을 준비하는 훈련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제냐의 시선이 빙글빙글 돌았다. 제냐는 통돌이 세탁기처럼 돌아가는 검은 용의 하단부, 꼬리에서 3분의 1지점 즈음에 들어가 있다. 연출적으로 따로 보자면, 곧 NPC의 시선으로 보자면 검붉은 체액이 뚝뚝 흐르는 살덩이 안에 들어가 숨을 멈춘 채였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의 눈으로 본다면 희거나, 혹은 무지개빛으로 비추는 입자들 사이에 섞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꼴이고.


회전이 빨라지자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각 정보였다. 기력 감지술로 자신이 어디를 향해 이동하는 지, 그것만 파악했다. 검은 용은 그리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롤링Rolling을 하자 지진과 같은 울림이 산의 한 면에 퍼졌다. 땅이 패였고, 아래에 있던 흙이 뒤집어져 허공으로 올랐다. 정력적으로, 유연하게 살아 움직이는 몬스터 트럭이다. 다만 그것을 300M 정도의 길이로 늘여놨다. 그 거대한 체조직의 대부분이 힘을 내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듯한 무언가다.


괴물이라는 말이 그 이상 잘 어울릴 수 없는 꼴이었다. 릿샤는 허공에서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최태현이 쏘아낸 세 발의 백룡시는 뒤로 넘어가던 검은 용의 몸뚱이를 추적해, 아래로 떨어져 때렸다. 포물선을 그리고 맞추어낸 집요한 화살들이 폭발한다. 쾅, 콰쾅!


연달아서 터지는 폭음이 종말의 때를 알리는 것도 같았다.


그 진동을 검은 용의 몸속에서 느끼는 제냐는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 정말 세상이 끝나는가. 물론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아마 제냐가 게임 오버를 당해도 콘란드 대륙이 돌아가고, 또 김서원이 죽어도 지구의 현실은 이어지리라.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가 죽어 사라져도 버젓한 현실이었다. 삶이라는 건 견고하게 조직되어 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건 삶을 모방하려 했던 모든 창작자와, 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진리였다.

신에게 닿기 위해 기술을 연마할수록, 자신이 초라하다는 걸 지독하게 체감하는 게 올바른 ‘발전’이다.


닿아갈수록 아는 거다. 저 높은 위의 경지에 대해서, ‘바로’ 말이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개발자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그게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의 세계에 큰 변혁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말이다. 당장은 아니어도, 서서히 그 물결은 크게 파도쳐 다가오리라. 십 년 뒤가 다르고, 백 년 뒤면 아예 다른 세계가 되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고작’이라는 말을 늘 자신들의 창작물 앞에 붙여야만 한다. 천재, 혹은 1등. 그런 자들은 언제나 겸손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익을수록 벼가 고개를 숙인다지 않은가.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태도, 절대적인 겸손이라는 게 세상에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세상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아름답게 지어졌는지 아이러니하게,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위작僞作이었다.

당분간은 그 최고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 역시, 이해하지 못했던 특이점으로 인해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분간, 근 1-20여 년 정도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온전히 수습하고 계발하는 데에만 시간과 인력을 쏟아야 하리라.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그런 스텝의 첫번째 발자국이다. 초인공지능, 만물박사萬物博士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기능을 알아보기 위한.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자체도 아주 성공적으로 서비스되고 있었다.

언젠가 클리어 씬을 완성하는 플레이어가 나타나면, 이 게임은 끝난다. 그리고 그건 시즌1의 종료이리라. 개발진들만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어떤 눈치 빠른 플레이어들은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기도 했다.


이대로 끝나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혁신적인 게임이었으니까 말이다. 고작 몇 년 정도의 서비스를 끝으로 다시 보여주지 않기에는. 너무나 발전된 기술이었다. 다음을 위한 예비 걸음이라고 여기는 게 합당하다.

애초에 서바이벌 MMORPG라는 말도 안되는 장르를 구현한 이유도, 그러면 설명이 된다. 다음 시리즈를 위한 복선이며 암시, 빌드 업이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개발진들과, 만물박사라는 AI는 그 클리어 씬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조연으로 끝날지 모르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음에 게임 오버를 당해버릴 지도 모르는. 한국의 평범한 대학생인 김서원은 몸을 웅크린 채 바깥의 폭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태현은 안색이 조금 파리해졌다. 검은 용이 본격적으로 롤링을 하며, 소위 지랄을 하자 파괴력이 상당했던 탓이다. 최초의 등장부터 릿샤가 먹여버렸던 마스터 마기아 급의 스킬들이 검은 용의 정력을 억제하고 있었다. 마수는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슬슬 움직임이 풀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날파리같은 사냥꾼들을 잡지 못하리라는 검은 용의 판단 탓이다. 놈은 이후의 재생력 일부를 내어주었고, 당장의 스피드를 얻었다. 릿샤는 검게 변한 안색으로, 끝내 검은 용의 MP를 다 몰아내었다.


저 하늘 위에서, 다시 고도를 높인다. 이번에는 두 배 즈음 높아졌다. 데슈칸 산맥의 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아직도 릿샤가 있는 자리보다 높은 봉우리들이 있었다. 카운트 산은 데슈칸 산맥에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다른 높은 능선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지금은 하늘 위의 구름과 태양이 릿샤를 가장 반갑게 맞이한다.


검은 용이 꼬리 끝으로 제 몸을 땅에 박아 고정하고, 온 몸을 일으켜도 닿지 못할만치. 그 정도로 올라와 릿샤는 MP를 끌어냈다. 박살나지 않은 MP 배터리 용도의 아티팩트들이 기능했다. 우우웅, 무언가 시동이 걸리는 것처럼 소리를 내고 또 빛을 뿜어낸다.


팔목, 발목, 그냥 목. 가슴팍, 옆구리. 여기저기에 숨겨놓듯 걸친 악세서리들이 각기 발동한다. 거기에 더해, 인벤토리를 열어서 푸른 포션을 더욱 삼킨다. 초상술사들 전용의, 고농도 특제 포션들이다. MP의 회복력을 더 높여서 전쟁터에서 더 많은 스킬을 쓸 수 있게끔 도와준다. 다만 어지간한 의지력이 아니라면 MP 고갈과는 또다른 어지럼증이나 의지력 장애로 스킬 발휘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릿샤는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고, 완숙한 고수급이라면 크게 문제가 없었다. 물론 아예 부작용이 0이 되는 건 아니라서. 적들과 거리를 벌린 뒤 원거리 공격을 할 때만 사용하는 방식이다. 워메이지들도 상황에 따라서 날렵하게 기동하며, 전장터 근처에서 싸울 때가 있었다. 언제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서 몸을 던져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포션이다.


릿샤또한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서 검은 용이 브레스를 던져 기겁을 했다. 그 기겁에 대한 복수이거나, 혹은 만회라도 하려는듯. 릿샤는 포션 병을 따서 몇 개를 들이키고, 바로 옆으로 버렸다.


높은 바람이 불고 있는 상공. 거센 바람에 휩싸여 유리병은 똑바로 떨어지지 못하고, 산맥 아래 즈음 어딘가로 날아간다. 데슈칸 산맥의 어느 기슭으로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릿샤는 마지막 병의 몇 모금을 입에 가득 담고, 한 번에 삼키지 않았다.


포션이 끓어오른다. 그녀의 MP가 차올랐다. 초상술사들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계속해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초장거리 공격 수단이라는 건 그래서 마스터 마기아들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기도 한다.


거리는 그 자체로 힘이 되니까 말이다. 최고의 방패는 상대의 공격이 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리였다. 거기에 더해 기동성이 있다면 전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상대가 그대로 피해버린다면 답이 없지만. 지금 다행히 검은 용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릿샤를 아직도 끌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고.


거리가 멀어지면 그만큼 맞추기가 힘들다. 가까울땐 파괴력을 위해 온전히 MP들을 쓸 수 있었지만, 명중률을 위해 손실되는 힘이 있다. 정확성이라는 것도 상당한 노동이기에 그렇다. 초장거리 수준이 되면 계산해야 할 것들도 제법 많아진다. 지금은 그래도 몇 가지 조건들이 단순화된 편이기는 하다.


목표물이 워낙 거대하고. 빠르게 전장을 이탈하지 않으니까. 수직으로 그냥 내려 꽂으면 된다. 충분한 속력만 있다면, 최초의 조준이 정확하다는 전제 하에 릿샤의 공격이 그대로 맞게 되리라.


그녀는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몸이 부웅, 뜨듯 움직여서 허공에서 조금 돈다. 다리가 위로 들려 올라갔다. 완전히는 아니다. 수평하여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자세였다. 히어로가 하늘을 날 때의 그것처럼 말이다. 그 상태에서 양 팔을 뻗었고, 에너지를 채운다.


그녀의 몸과 아티팩트에서 MP가 일어난다. 불길과도 같았다. 푸른 불길이었다. 지독한 한기와, 화염의 기운이 같이 나타난다. 거기에 더해 번개의 기운까지도. 바람까지 쓰여 힘을 보탠다.


릿샤는 얼음의 공을 만들었다.


겉면만 말이다.


그녀는 허공에 뜬 채로, 아주 거리를 멀리 벌리고 있으니 공간이 여유로웠다.


제약없이, 한껏 MP를 쏟아내 공을 키운다.


순식간에, 단 몇 초만에 공의 크기는 릿샤의 몸을 넘는다.


허공에 생겨난 거대한 벌룬처럼 보인다. 사람 몇 명 정도는 들어가서 있어도 안락할만치 거대한 크기가 된다.


겉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썰렁해지는 한기를 담는다.


얼음의 구체 내부에, 열기와 번개, 그리고 바람을 담는다. 염열의 공을 바깥에 얼음으로 감싸안는 것이다.


열기를 제어하는 일 역시 MP가 많이 든다. 그녀는 그냥 빙결 속성의 스킬로 제어를 덜었다. 차라리 이게 더 계산력을 덜 소모한다.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려는 염열 속성의 MP들을 일일이 방향 제어를 거는 것보다 말이다. 그냥 바깥에 온도를 낮춰주는 한기들을 깔아서 알아서 제한적으로 움직이게끔.


거기에 안쪽으로 향하는, 구심점에 밀집하려는 정보를 넣어주면 열기는 알아서 안쪽에서 요동친다. 마구잡이로 운동을 하지만, 아예 바깥으로 뚫지는 못한다. 안쪽에서 열기를 더하는 기운은 세 종류였다. 화염과 뇌전과 바람. 그것들이 소용돌이치면서 끊임없이 파괴력을 더한다.


릿샤는, MP 그 자체에 제어와 방향성 부여를 포기했기에 오롯이 파괴력에 다 쏟고 있었다. 겉면에 있는 한기 역시 복잡한 스킬은 아니었다. 물론 최고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바람의 기운이라거나. 또 다종의 스킬들을 섞어서 최대한 끌어올린 효력이기는 하다. 내부에서 파괴력을 담당하는, 폭발물의 내용물보다는 다소 간단한 스킬 구성이라는 뜻이다.


반발하고 춤을 추며 온갖 난리를 부리는 폭탄의 내부였다.


릿샤는 한도를 두지 않고 MP를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그러면, 보통 구체를 완성시키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그 파괴력이 바깥으로 뻗어나가 애를 먹어야 했다. 한기의 구체는 겉에서 그걸 막아주면서 릿샤에게 여유를 더한다.


철저하게 통제된 에너지가 속에서 계속해서 끓어올랐다.


적절한 지점이 중요했다.


한기의 벽이 완전히 뚫리지 않을 정도로, 힘을 넣어주면서 동시에 내부의 파괴력과 열량은 계속 올라야만 한다.


릿샤는 몇 가지 제약을 풀어 내부의 온도를 극한으로 높인다. 현대 과학은 이미 태양보다도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콘란드 대륙에서는 다소 힘든 일이었는데. 릿샤는 아까의 그 구체보다는 훨씬 태양에 가까운 온도를 재현하는 중이다.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마스터 마기아의 스킬이었다. 이런 스킬을 쓰는 인간이 마스터 마기아가 아니라는 게 이해되지 않을만큼.

그리고 지금 이 스킬을 완성시키고 있는 도중에, 릿샤에게 ‘중첩 스킬 작성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완숙한 숙련도로 중첩 스킬을 쓸 때 얻을 수 있는 칭호였다. 릿샤에게 약간의 의지력 보정이 더욱 붙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스킬들을 동시에 다룰 때 계산력 보정도 들어갔고. MP들이 약간, 수월하게 말을 듣기 시작한다. MP의 양 역시 소량으로 올라가고.

이에 더해 레벨까지 100 이상이 된다면, ‘마스터 마기아’의 칭호를 얻게 되리라.


완숙한 마스터 마기아. 최초에 릿샤가 중간 목표 지점으로 설정을 해두었던 이름이다. 그 정도는 금방 닿아야, 랭킹권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다소 시간이 많이 지나, 지금에 와서야 다다랐다.

어쩌면 이 놈의 게임은 지독하게 즐길수록 더욱 많은 성취를 주는지 모른다. 릿샤가 여태까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게임을 플레이 해왔다고 여겼지만. 그것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언제나 동료들은 즐거운 힘이 되었다. 자신의 한계를 깰 수 있게끔, 새로운 자극도 주고 있었고.


제냐라는 평범한, 약간 둔해 보이고 사회성도 떨어지는 한국의 대학생은 그녀에게 큰 자극이다. 그녀는 언제나 천재의 위치였고, 오래 걸리지 않아 다른 이들의 성취나 숙련도를 따라잡았다.

늘 젊은 나이, 어린 나이에 보다 많은 업적을 거둔 이들과 일을 했다. 그런 시간들이 그녀에게 어떤 방심이나 오만함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언제나 이겨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느슨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도 그게 느슨함이라고 여기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건 혼자 있을 때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보다 나을 게 하나 없는 처지의 인간이, 자신보다 더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제야 안다. 아, 이게 인간의 한계가 아니었구나. 아, 나 더 할 수 있는 놈이었구나.

릿샤의 경우에는 년이다만


아무튼 슬랭으로 제 처지를 씹어뱉듯 묘사하지 않아도, 릿샤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이 게임의 끝을 보고 싶었다. 이전까지 약간이나마 막연했던 퍼즐이 채워졌다고도 느껴졌다. 호아킨은 분명 좋은 파트너였고, 같이 클리어 씬까지 달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는 동료였다. 그만한 재능과 집중력이 있었고.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좋은 연장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약간 부족한가, 싶었었는데.


지금의 멤버라면 릿샤는 조금 더 자신이 있었다. 보다 어려운 난이도의 퀘스트들을 깰 자신도 있었고. 저 검은 용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지독한 네임드 몹이라도 토벌을 해 낼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즐거웠다.

언제나 지는 게임도, 언제나 이기는 게임도 결국은 재미가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승부를 할만한 경쟁 상대들이 곁에 있어야 좋았다. 릿샤는 처절하게 승부를 갈구하던 성격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러다 제냐를 만나서, 다시금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해볼만한 녀석이 또다시 나타난 것이고, 아직 세상은 넓구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재확인한 참이다.


그녀의 모든 재능을 쏟아부은 스킬이 곧 완성이 되었다. 바깥에서 연구에 참여할 때 만큼의 열정이었다. 그래, 딱 그만큼의 열정 말이다. 그게 릿샤가 사는 이유였다.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가식떨지 말고. 자신한테 주어진 최선을 다하자. 그게 진짜 삶이다. 진짜 열정, 진짜 심장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그게 없다면 릿샤 애드윈, 바르샤 애드윈은 죽은 년이다.


고작 게임이라 할 지라도.

숨을 쉬고 있는 그 순간이라면 몰입을 한다. 그게 바르샤가 이 땅에 승부사로 태어난 이유였다.


거대한 얼음의 공은, 시야를 가득 메워 아래를 보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릿샤는 기력 감지술을 사용해 바깥의 시야를 얻었다. 투척, 사격 계열의 스킬이라면 그녀 역시 가지고 있었다. 궁술 계열의 플레이어들만치 갈고 닦지 못했기에 레벨이 높지는 못했지만. 발사체 위주의 마법들을 도와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궤적이 그려진다.


노란 색의 점선들이었고, 그 끝엔 화살표가 있어 검은 용의 몸뚱아리를 가리킨다.


가리키는 궤적대로, 직경 2, 30여 미터 정도는 되는 거대한 공이 떨어졌다.


무언가에 밀려나는 것처럼, 발사되는 포탄처럼. 미사일처럼. 새로운 중첩 스킬 ‘블러디 아이시 볼’은 화살보다 훨씬 빠른 속력으로 날았다.


점점 가속도를 받았고,


검은 용은 지겨운 롤링을 해대며 호아킨을 찾아 대가리를 처박고 있던 참이었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공격을 그대로 등짝에 받게 되었다.


쾅.


하고,


구태의연한 의성어로 표현되었으나 아득한 폭음이 카운트 산의 한 면을 덮었다.


얼음의 기운이 검은 용을 멈추게 했고, 지표면에 못이라도 박힌 듯 고정된 한 부근을, 내부의 시뻘건 화염이 잘라버렸다.


염열의 공은 터졌고, 검은 용을 반절로 단절시켰다.


그리고 부딪힌 부위의 살들이 타들어가며 소멸되었고, 애초에 퍼졌던 냉한의 기운이 용암의 과도한 파괴를 막았다.

카운트 산에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고, 그 위를 기어다니던 검은 용의 몸뚱아리만 일부 박살이 나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


쾅.


아직도 끝이 아니던가.


지겹게도 제냐는 한 번 더 폭음을 들었다. 저 멀리서, MP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기력술사임과 동시에 뛰어난 초상술사인 제냐는 확연하게 듣는다. 그 정도로 분명히 감각했다.

그리고, MP의 술렁임이나 요동을 느낀 뒤.

불타는 기운이 검은 용의 몸뚱이를 타고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그 공격력이 제냐가 있는 곳까지 치명적으로 닿지는 않을듯 했다. 그러나, 느껴진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공격이었다.


검은 용의 몸뚱이를 거진 파헤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격이다. 그만큼 치명상이었고, 거대종의 몸이 반절로 분리가 되었다.


검은 용은 애초에 산흙벌레다. 지렁이를 거대화시켜 둔 것이었고, 그 내부의 메커니즘은 미물이 그러하듯 쉽게 재생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반절로 잘려도 아직 멀쩡하다. 그러나 치명상이고, 일단 1회분의 HP중 상당수가 날아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검은 용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아니, 고통으로 울부짖듯 요동친다. 끊어진 두 쪽의 몸 중 어디가 본체인가. 대가리가 있는 쪽이었다. 재생력은, 두 부위를 서로 연결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끊어진 자리에 있는 릿샤의 MP가 허락하지 않는다.


아주 단호한 판결관의 그것처럼, 염열의 기운이 재생을 방해한다. 극도로 제한된 재생력은 길을 잃어버렸다. 그저 한없이 MP를 쏟아낼 수는 없기 때문에, 검은 용의 ‘하체’라고 할만한 부분들은 제 몸을 포기했다.


거기서 검은 용의 기이한 생태가 보여진다. 길다란 몸뚱이 중간중간에 내장 기관같은 게 있었다. 제냐가 파고 들어간 자리 근처에도 하나 있다. 하나하나가 코어였고, MP를 관리하고 저장하며, 발출시키는 거대한 엔진이었다. 거기에서 검은 용의 MP가 뿜어져 나간다. 몸은 절단이 되었으나 MP는 움직인다.


대가리는 끊어진 몸의 반대 극단에 있었지만. 그 의지력은 여전히 작용을 했다. 이미 떨어져나간 몸이지만 의지력으로 인해 서로 붙으려 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붙을 수 없었으나, 하체 부위에 남아 있던 ‘생명력’을 상체는 전달받기 원했다.


제냐는 검은 용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여겼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건 아니고, 제자리로 이동하는 중이다. 물론 막대한 손실은 있겠으나.


검은 용의 MP들이 그 몸 바깥으로 흐른다. 검붉은 기운이다. 고블린 프린스나, 다른 네임드 몹들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마력이라고 불러야 할법한 음울한 기운들이다. 귀신이 손을 대어 만들어낸, 비틀린 생명체이기에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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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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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1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7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16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2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9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4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5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6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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