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3 21:45
연재수 :
341 회
조회수 :
8,082
추천수 :
754
글자수 :
3,273,464

작성
23.11.19 02:30
조회
19
추천
2
글자
10쪽

161. 바구니

DUMMY

라이엔, 곧 아윈 핑에게 있어서 이 게임은 선형적 구조가 아니다. 레벨 1부터 시작해서 카운터 스톱까지 가고, 스타트 지점부터 출발해서 클리어 지점까지 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그 근처 과정 어딘가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컨텐츠들을 즐기며 누리면 되는 휴식이었다.


그녀야말로 게임을 게임답게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삶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리고 혹은 언제나.


가끔은 제대로 된 쉼도 필요했고, 아주 약간의 휴식이라면 사람에게 늘 필요했다. 누구도 완벽하게 긴장한 상태로 집중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으니.

기계조차 끓어오르면 쿨다운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에게 비련의 시나리오는 달성해야 할 목표라기보단 즐겨야 하는 누군가의 책과도 비슷하다. 유니크 퀘스트, 연계 퀘스트라는 건 소설의 중간에 들어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같았고.

그녀는 반색했다.


“여태까지 여기저기를 다녔지만 연이 없었어요.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호호.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마저 가미했다. 제냐가 생각한 건 아니었다. 라이엔 스스로 느끼기에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그렇게 웃지 않는다. 아주 어색한 인간 앞에서나, 혹은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웃을 때 그런 소리가 난다.


“뭐··· 그렇죠. 아무튼 잘해봅시다.”


제냐는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라이엔은, 마음에 드는 의뢰서를 잘 골랐다고 느끼며 고갤 끄덕거렸다.

의뢰자가 내어 준 홍차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다.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야 후룹거리면서 맛을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중국은 차 문화가 발달했다. 개인차에 따라 대륙적 특색은 아무 의미 없는 게 되기도 하지만. 라이엔은 좋아하는 편이다. 까다롭지는 않아도 맛있는 것을 마시면 기분은 좋다. 혀도 구분할 정도는 되었고. 지식은 별로 없지만.


여러모로 즐거운 날이라고 생각하며, 라이엔은 그 날의 플레이를 종료했다. 길지 않은 대담이어서 좋았다. 근교로 산책갈 시간이 날 것 같았다.


*


“우, 아아아아아아아.”


최태현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람을 먹었다. 현명한 짓은 아니었다. 구름이 그의 곁에 있었다. 간혹 아래로 보이기도 했다.

높은 상공이었고, ‘바람처럼 빠르다’라는 말을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태현은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다.


매가 드는 바구니다.


‘매’.


물론 일반적인 매는 아니었다. 보통의 그것,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조류에서 아득하게 벗어난 체구를 가진 날짐승이다. 최태현이 타고 있는 바구니는, 아주 튼튼하고 특별한 가죽으로 짜여져 있다.

광물을 실처럼 뽑아낸 특수한 직물도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검으로 베어도 흠집이 나지 않을 정도로 질기며 안정적인 소재였다.


그 바구니에는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위로 뻗은 손잡이는 ‘매’의 발톱에 걸려 있었다. 콱 움켜쥔 발톱은 정확히 손잡이의 끈뭉치를 붙든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긴 손잡이의 일부는 매의 다리에 얽혀 있었다.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잘 풀어져서 양 다리에 반씩 얽혀 있다.


처음 봤을 때는 ‘이게 정말 가능한 짓인가’ 생각을 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다 보니 나름대로 안정감이 있었다.


“우아아아아아.”


입을 벌면 들어오는 바람, 얼굴을 때려대는 풍압은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바구니는 나름대로 사람이 타기 좋게 지어져 있다. 넉넉한 내부 공간이었고, 장시간 타고 있어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쪼그려 앉아도 되고, 서 있어도 좋다. 다리를 조금 펼 수 있었다.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두 명이 타도 좋을 정도이다.


거기에 내측에 튀어나와 있는 보호 장구들이 있었다. 몸을 고정하는 끈들인데, 몸에 잘 맞게 조정을 한 뒤 튼튼하게 묶어내면 아무리 거세게 흔들려도 풀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묶는 매듭법이 있어서, 설명해준대로 매어야 했다.


최태현은 바구니의 한쪽 벽면에 등이 딱 붙어 있었고, 상체 전반을 묶은 끈에 의지해 몸을 늘어뜨린 채다. 다리는 아래로 펴셔 비스듬하게 뻗고 있었고. 이제 그 상태에서, 바구니는 한없이 뒤로 늘어지고 눕혀져 벽면에 붙은 그는 먼 상공을 노려봐야 했다. 위로 치켜든 고개. 수퍼맨이 나는 것처럼 배는 땅바닥을 바라본다. 바구니와 함께 힘없이 나부끼는 몸이다.


초인의 몸뚱아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어떻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감각이었다. 바구니에는 뚜껑도 있어서 사실 닫아도 좋았지만, 그는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는 명목 하에 열린 구멍으로 바깥을 본다.

‘보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풍압이 그의 몸을 때리기는 한다.


바구니는 튼튼하게 짜여있으나 성기다. 사람의 몸이 빠질 정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저항을 줄였다. 날기에 불편한 짐덩이를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의 속력은 아주 빨랐다.


날개를 펴고 활강을 하고 있는 날짐승의 배 즈음이 보인다. 고개를 더 바짝 치켜들면 말이다. 아주 흉흉하게 날이 서 있는 매의 발톱도 있다. 매의 날카로운 감각을 말하듯 보이는 그것이 최태현의 목숨줄이었다.


‘개멋진나 최’라는 괴랄한 닉네임과 달리 표정은 그렇지 못하다. 게임 속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고통이 아니며 혐오스러운 감각이 아니기에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은 받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랑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스릴이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놀이기구를 탈 때 느끼는 지루함이 십분 이해가 갔다.

실제 전투기를 타는 것과는 또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게임에서 구현해내는 감각은 그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더 강렬하다면 강렬했다.


만일 최태현이 부담스러웠다면 설정 인터페이스에 들어가 동기화 비율을 최소로 낮췄을 테다. 그런 식의 플레이 역시 가능하다. 수동 방식의 컨트롤. 모든 것이 유저 스스로의 컨트롤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세밀한 수제 컨트롤을 즐기는 이들은 동기화를 최대로 한다. 대부분의 고수급, 랭커들이 플레이하는 세팅 값이기도 했다.


최태현은 초보일 때부터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느껴지는 저항감. 받게 되는 중력. 온갖 것들이 그의 몸을 눌렀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이대로 장시간을 날아갈 때, 일반적인 사람은 아마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력술사로서 키워낸 캐릭터의 몸은 지나칠 정도로 튼튼했다.

스릴은 계속 느끼면서 감각과 정신은 아주 또렷하다. 혈류도 멀쩡했고. 구토 증세나 어지러움도 없었다.


“어브어허헙.”


멍청하게 입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이 목젖을 친다. 그는 고글을 쓰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같은 재질이다. 실제로 유리는 아니었고, 포션 병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재질이었다. 이런 류의 소도구들에 간혹 쓰인다. NPC들이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어 상점에 팔았다. ‘비행을 즐기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이템이다.

보호구로서도 깨나 쓸모가 있어서 구비해두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이 상태에서 개조는 불가능했다.


플레이어들 용의 ‘물약 상점’표 ‘기본 포션’과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게임 플레잉에 도움을 주려 만든 게임적 배려의 부분이었고, 그것으로 지나친 현실성 훼손을 지양한다.

포션 병의 소재를 파악해서 아이템을 만들어내고, 가볍고 투명할 수 있고 튼튼한 양산형 무구를 만들어내어 전쟁을 이긴다던가 하는 플레이는 불가능하다.


잘 깨지지 않는 고글 너머로 창공을 바라본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정오를 지난 지 한참인 햇살은 머리 위를 넘었다. 그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라 칭함은, 당연히 제냐와 그의 파티원들이다.


최태현은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었으나, 릿샤는 저 위 날짐승의 등에 탔다. 짐승의 주인인 테이머 라이엔과 함께였다. 호아킨과 제냐는 다른 짐승의 등에 탄 채다.


둘 정도가 쾌적하게 비행을 할 수 있는 적정 탑승 인원인 듯, 자리가 나지 않는다며 이런 특수한 보조석을 준비해주었다. 나름의 신기함은 있기에 맛은 산다. 때때로 입을 벌려 바람으로 목젖을 건드려보는 것 역시 재미가 있었고.


하루종일 챗바퀴를 도는 것 같은 일상을 겪고 돌아와서, 비련의 시나리오에 들어온 뒤엔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멍때리고 스트레스를 비워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요즈음에는 특히 더 그러했다.

일감이 많아지기도 했고, 고객들 중에 기기 이상으로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수리, 설치 기사 쪽이었고 부품의 자체적인 이상은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장 마주하는 하청 업체의 직원이 그이기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가 속한 회사로 잘못 컴플레인이 오는 경우도 많았고.


가상현실 기기 산업의 호황이 이어지고 있으니 좋기는 하다만. 고단한 삶은 영 그저 그렇다. 당장 호황이 그의 월급 인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고.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서 잘릴 걱정이 줄어드는 것만 해도 이득이라면 이득이다만.


“으버버버버법.”


심심할 때쯤 되면 다시금 입을 벌려주면서, 최태현은 성긴 바구니에 타 산슈카의 창공을 횡행했다.


*

kat-med-DEnqFr761IA-unsplash.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5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1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7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16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2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9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4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5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6 2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