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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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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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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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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01. 짜증

DUMMY

*


“이런,”

“음, 마음은 알겠네.”


호아킨이, 제냐의 입모양을 보고는 먼저 말을 받았다.


“후우우우우···.”


제냐는 거칠게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거 잠은 자야 될 거 아니요, 사람이.”


제냐는 호아킨의 만류에 쌍욕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투리 투를 따라하면서 불공정한 현실을 비판했다.

허허허. 호아킨은 그저 웃는다.

지금 시간에는 호아킨과 최태현, 그리고 제냐만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다 시간이 맞지는 않는다.


겨울이 다가온다. 제냐는 대강의 시험을 모두 마쳤고, 슬슬 방학 기간에 들어선다. 이번에 학기가 끝나면 두 학기가 남는다. 1년. 두 학기. 그리고 세상 밖으로.

삶이 여정이라고 한다면 한 단계가 분명히 끝나는 날이리라.

그건 그렇고, 게임 내에서의 상황은 제냐를 아주 못살게 굴고 있었다.


“아무 때나 들이닥쳐서 창질이라니···.”


제냐가 불만을 토한다. 릿샤는 최근에 좀 바쁜 것 같았다. 라이엔은 가끔 직장에서 회식이 있다거나, 잔업이 있으면 당연히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었고. 게임을 위해서 현실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호아킨이나 최태현, 제냐도 마찬가지다. 제냐는 단순히 아직, 투자해야할만한 곳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게임 내에서 어떤 멋진 여행을 하던, 그는 아직 여행을 시작하지도 못한 초보자에 불과할 지 모른다. 앞으로의 인생과 사회를 여정에 비유한다면 말이다.


“그러게. 근 2주 정도··· 고생 많았네.”


호아킨이 마음을 알아 주었다.


“그래도 릿샤가 준 아티팩트가 있으니까 좀 낫지 않나.”


최태현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에 앉아서 등받이를 안고 있었다. 거꾸로 앉아 그 끝에 턱을 괴고 있다.

그들이 늘상 거주하는 대여 건물의 회의실. 릿샤가 자주 앉는 집무용 의자가 아니라 달리 회전하는 의자를 가져와서 저러고 있었다.


‘창槍’은 아무때나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밤이건, 낮이건 말이다.

제냐가 로그인을 해 있을 때건, 로그아웃을 한 상태건.


로그인을 하고 있을 때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게 가능했다.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로그아웃을 한 상태는, 대개 휴식 시간이다. 밤이라거나, 숙소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현실의 김서원도 그렇고, 게임 내의 제냐 역시 그랬다.

휴식 시간을 방해받는 건 상당히 서글픈 일이었고, 고달픈 일이다.


창의 위력 역시 상당했다.


별로 제약도 없이 저 먼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쏘아내는 것 같은데도, 공격력이 상당히 좋다. 릿샤는 제냐의 고통을 보고 아티팩트를 만들어주었다. 전문적인 아티팩트 메이커로서의 능력은 깊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싼 재료를 사고 이미 반쯤 완성된 소재들을 모아서 고급품으로 조립하는 능력 정도는 충분했다. 릿샤 스스로사 뛰어난 초상술사였으니.

일단 뛰어난 수준의 초상술사이며, 스킬을 발휘할 수 있는 마기아Magia(술사, 초상술사를 의미)라면 아티팩트 메이커로서의 능력을 절반 정도는 완성한 셈이었다.

장공인 계열의 클래스로 특별히 애를 써서 캐릭터를 육성한 자들만치, 완벽한 만듦새를 내기에는 조금 부족했지만 말이다.


릿샤는 제냐에게 10개의 반지를 선물했다. 자동 반응식이고, 응용할 수 있는 방향성도 그리 많지 않다. 단순한 효과였고, 1, 2회 정도 사용되면 버려야 한다. 그래서 10개나 주었다.

균일화된 모습의 보석 금반지였다. 작은 큐빅 정도의 보석이 박혀 있고, 반지의 안팎으로 세밀한 문장과 도형이 음각되어 있는.


릿샤가 심혈을 기울여 발휘하는 보호막 스킬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의 위력이었다. 반지에 내장되어 있는 보호 스킬의 위력은 말이다.


제냐에게 악의를 가진, 특히 투사체 종류의 공격이 다가오면 자동 반사적으로 발동한다.


릿샤의 보호막 스킬이 가동되며, 제냐를 기준으로 반경 1, 2미터 정도의 거리에 구형의 막이 생겨난다.


보호막의 위력은 확실했고, 외부 충격을 받아 깨지지 않는다면 다회 사용이 가능했다.


제냐로서는 보조 목숨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맨몸뚱이로 활보할 때보다는 훨신 기분이 나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심하면 곧바로 게임 오버인 위력의 창을 계속 경계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스트레스였다.


상대는 연속적으로 창을 날렸다. 2, 3일 정도를 약 10시간 여 간격을 두고 공격을 한다.

아마 프린스 알사드이리라, 고 제냐와 일행은 생각하고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은 그를 어떻게 할만한 재간이 되지 않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추측컨데 프린스 알사드일 어느 공격자는, 그렇게 4, 5회 정도 연속적으로 공격을 하고 나면 5일 즈음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금 창이 날아든다.


어느 정도 공격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걸도 알고, 패턴도 알았으므로 좀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 패턴이 무조건 맞다고 확신을 한 뒤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딱히 아니었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공격 횟수를 제한하는 건 아주 초보적인 사냥법이 아니겠는가.

제냐라고 할지라도 그럴 것이다.

공격에 잘 걸려들지 않는 발빠른 사냥감을 낚아채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방심을 만들고 유도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결국, 제냐는 근 이 주 여의 시간 정도를 한없는 경계심 속에서 보냈다. 육체적인 스트레스만큼이나 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다.

실제로 무언가가 날아들면 피하느라고 애도 써야했고.


길드 건물에서 몇 번.

그리고 사르삿 시내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던 와중에 몇 번.


경고도 전조도 없이 날아드는 창이었다.

한 번은, 단테스 무구점에 들러서 영감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창이 날아들기도 했다.

건물의 외벽을 깔끔하게 박살내고 들어오는 통에, 미처 피할 시간도 없었고 그걸 알아채지도 못했다.


야외에 있었다면 적어도 기척이라도 느꼈을 텐데 말이다.


노인, 단테스 도노반이라는 NPC의 집무실이 엉망이 되었고, 할아범이 죽을 수도 있던 터라 제냐가 그냥 창날 앞에 섰었다.

릿샤의 보호막은 요긴하게 쓰였고, 다행히도 한 번을 깔끔하게 막아냈다.

두 번 이상은 어려운듯, 창을 막아냈으나 보호막 역시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사용되었다’는 언질을 주듯, 반지 형태의 아티팩트 역시 대놓고 금이 갔고 말이다.


그 효용을 다하면 내구력이 닳도록 만든 아이템일 지도 몰랐다. 릿샤에게 당시 문의했던 바로는, 보호막의 보호 에너지 총량이 있고, 그보다 한참 아래 단계의 충격이라고 한다면 받아내고 자연 회복도 일정 부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창의 경우에는 반지의 에너지의 상당수를 단번에 소모해야 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 개의 반지 당 두 번을 막아내면 무조건 부서지게 되어 있었고, 그래서 금이 간 것이라고 말이다.


직관적인 아이템 표현에 제작자의 설명이 더해지니 이해하기는 쉬웠다. 제냐는 자신의 손에 걸린 반지를 목숨의 개수로 늘 세고 있기도 했다.

그게 무슨 불편함이란 말인가.

그렇잖아도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인생인데.


프린스 알사드건 뭐건, 제냐는 그저 빠르게 끝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퀘스트를 서둘러 정리하고. 그 다음 씬을 감상하고. 또 정리하고. 게임에만 스물 네 시간을 투자할 수도 없었다. 일행들 중에서 당장 일자리가 없고 시간이 널널한 게 사실 제냐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닿지도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건드려대는 적敵의 소행에는 짜증이 심했다.


“간신히 살아만 있는 꼴입니다.”


제냐는 검은 머리칼을 헝클였다.


대머리, 라고 하면 화를 낼 지도 모르지만.


민머리인 호아킨도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최근 적의 행적은 짜증을 낼만큼 번잡스러웠다. 제냐가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적의 표적은 제냐 킴 한 명으로 고정되어 있는 건지,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별 일이 없었다.

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정체가 묘연하다.


여태까지 연줄이 닿아 있던 여러 NPC들이나 플레이어, 또 그들이 속한 집단을 통해 정보를 모아왔지만 뚜렷한 것은 없다.


산슈카는 평범한 나라였다. 그러나 평범한 나라라는 건, 정의로운 이들만이 위에 서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나라였고, 그 속에는 암적인 존재들 역시 있었다.

파벌 간의 정치적 다툼이 심했고, 각자가 다른 꿈을 꾸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정통파나, 그래도 왕실의 입지가 강한 곳이라서 하나의 길로 나라의 정책이 움직이고 있기는 했지만. 불만을 품는 사람이나, 대놓고 다른 길을 찾으려는 인간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 중 대표적인 이름이 늘 거론되는 ‘게으른 대공’, 알사드 대공이었고 말이다.


알사드 대공이 적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사르삿 시내에서 이렇듯 대담하게 스킬 샷을 날리며 암살 행각을 벌일 정도라면, 그 정도가 되지 않고서는 말이 안되기도 했고.


건물이 박살나는 일에 대해서, 제냐는 수비대에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다. 어쨌건 실제로 제냐가 머무르는 공간에 MP로 이루어진 스킬이 날아 들어와 기물이 파손되고 있었으니. 수비대 역시 조사할 거리는 있을 테였다.


그러나 결국 공권력의 어느 중간 부분에, 제냐 자신의 적이 닿아 있다면 그다지 믿을만한 건 못되는 상황이다.

‘적’과 그에 닿아 있는 끈들을 피해서,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모으는 게 급선무였다. 로멜리아 가문과, 이전에 협력한 적 있었던 그리턴 가의 일원들은 충분한 도움이리라.


그간 라이엔의 도움으로 데슈칸 산맥에 가서 그리턴 가의 가주, 하이샨의 자문을 듣기도 했었다. 로멜리아 가는 수도에서 그다지 입지가 없었지만 그리턴 자작은 달랐으니까.

그러나 따로 조사를 해보고, 알아보겠다는 언질만 있을 뿐 이렇다할 확답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일 지도 몰랐고.


라이엔이 부리고 있는 갈색 매들은 확실히 초월적인 속도를 발휘할 수 있었고, 그녀 역시 레벨이 오르고 실제 실력이 늘면서 더욱 빠르게 동료들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사르삿에서는 거리가 깨나 떨어진 외곽지, 로멜리아 령까지 가서 오랜 친구를 보고 또 조언을 얻기도 했지만, 딱히 그럴싸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물론 염려야 많이 받고, 플레이어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NPC들의 구체적인 추론을 들을 수 있었지만.

제냐는 그렇게 수소문을 하면서, 정확한 답은 아니라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비련의 시나리오가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게임이며, 현실을 지향하고 또 극악한 난이도와 불편함을 강요한다고 할 지라도. 게임인 이상 키 포인트는 결국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퀘스트를 풀 수 있을만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만한 ‘정답’ 말이다. 세상에는 ‘정답’이라는 게 물리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았다. 시나리오 온라인 바깥의, 현실 세계 말이다.


그게 신이 지은 세상과,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 현실의 차이였다.


어쨌든, 최대한 작게 또 잘게 부숴서 숨겨 놓았다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답이 있으리라.


이 씬을 넘기기 위한 답 말이다.


제냐는 턱을 매만진다.


불평은 불평이고, 짜증은 짜증이고.

할 일은 해야 한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현실을 닮은 게임 속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취업은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진로를 제대로 찾을 수는 있을런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약간은 어둡게 느껴지는 중앙대의 경영대 재학생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일단··· 대공이 있는 곳으로 가볼까요, 그러면.”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야. 사르삿이 주 무대라고 여태 생각하기는 했지만. 직접 근처에서 뭔가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나도 동감. 어차피 찾아볼만치는 찾아본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는.”


호아킨과 최태현이 차례대로, 제냐의 제안에 답했다.


릿샤와 라이엔은 지금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들까지 포함해 다섯은 그간 충분히 탐문 수색을 진행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RPG는 이런 식으로 플레이를 하는 거라고, 몸으로 익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어딘가에 게임의 개발진들이 남겨둔 단서가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답도 없이 거대한 도시를 찾아 헤맸다.


물론 잘 만들어져 있는 체제와 조직들을 충분히 활용하기는 했다만.


당장 다섯 명의 파티원들은, 높은 등급의 용병 길드원이었다. 모험가 조합에도 물론 소속되어 있었고. 둘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처럼 중복된 조직원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두 개를 이용하면 결국 정보력은 더 늘어난다.


그 외에 사르삿에 존재하는 정보 조직들, 양지나 음지를 가리지 않고서 그런 이들을 조금 이용했다.

명예 점수를 꽤 쌓았기에, 나름대로 이름 있다고 하는 이들을 수소문하고 말을 거는 게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길드를 통해서 수많은 의뢰들을 해결했고, 개중에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저들이 해결하지 않던 퀘스트들 또한 있었다. 대개 소규모의 집단으로서는 답이 없는 레이드 몬스터의 퇴치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데슈칸 산맥을 이잡듯 뒤지고, 또 그 외에도 산슈카 왕국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며 보스 몬스터 토벌을 감행했다. 고작 한, 두 달 여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파티원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산슈카를 제 집 안방처럼 여기고 들쑤시고 다녔다.


귀족들과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일에는 또 그만한 돈이나 사연이 얽혀 있게 마련이었다.

간접적으로, 그런 군부의 일이나 모험가, 용병 조직과 닿아 있는 권력자들과의 루트가 희미하게나마 생겼고. 그런 인맥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개는 그럴싸한 답조차 주지 않는 게 실정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산슈카의 정세에 대해서만 더 빠삭하게 알게 되는 지난 시간이었다. 원래 릿샤나 호아킨의 경우에는 중부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고, 또 산슈카에서 플레이 타임의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알고 있던 정보의 중복일 때도 많았지만.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흠.”


제냐는 생각을 하며 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회의실에 있는 집무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 테이블 위에는, 릿샤가 만들어 남겨둔 아티팩트가 하나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릿샤가 처둔 보호막 아티팩트의 효과가 발동되고 있었다. 무한정, 또 무적의 효과를 지닌 방어막을 당장 만들 기에는 품이 많이 들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몇 번 정도는 창이 날아와도 버틸 수 있는 방어막을 만들어두었다. 그것을 계속해서 갱신하는 식으로 최근에는 체제를 바꾸었다.

그에 더해서 제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반지형의 보호막 아티팩트 역시 있었으니, 당장은 한숨을 덜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안전이라는 게 제냐의 엉덩이를 가볍게 만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릿샤가 그간 만들어둔 아티팩트는 여러 종이었다. 원래 아티팩트 메이커 쪽으로는 그다지 연구를 많이 하지 않은 그녀였다. 만든다고 해봐야, 그녀 자신이 쓸만한 것들. 즉발적인 스킬을 위해서 쓸 소모적이고 단발적인 아티팩트들 위주의 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또 반영구적으로 쓸만한 장기적 아이템들을 만드는 건 완벽하게 장공인 클래스의 솜씨가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는 건 능력 향상에 언제나 도움이 된다. 물리학도인 릿샤 애드윈, 아니 바르샤 애드윈이었지만. 가끔 길이 막혔다고 느껴질 때는 다른 분야의 이론을 뒤적여 보는 것도 제법 영감을 불러오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기분으로, 또 제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것저것 만든 아티팩트 중 하나가 책상 위의 그것이다.


제냐는 툭, 하고 눌렀다.


버튼 형태의 물건이었다. 둥그렇게 생겼고, 가만보면 그저 손바닥만한 어패류의 껍질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 껍질 상단에는 붉은 버튼이 하나 튀어나와 있다. 외형은 별로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이 대여 건물 자체를 그들의 요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버튼을 눌렀고, 눈에 보이지 않는 MP가 퍼져 나갔다. 삐이, 하는 초고주파가 살짝 흘렀다. 아주 예민하며 초인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세 사내였다. 호아킨은 개중에서도 변신술사로서 다종의 패시브 스킬들을 갖고 있었고. 평소, 변신술을 쓰지 않고 인간형일 때도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벌써 꽤 쌓여 있었다.


호아킨은 똑똑하게 옅은 소음을 들었다. 제냐가 책상에 다가가 버튼을 누르는 것도 보았고.

릿샤가 만든 감청 장치였다. 도청 방지, 재밍 장치라고 해도 좋았다. 어떤 불온한 의도로 이 근처에 감지 계열 스킬 따위가 펼쳐져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고 막는 힘이 있었다. 물리적인 타격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스킬과 더불어 쓰면 좋은 효과이다.

주기적으로, 릿샤가 MP를 아티팩트 내부에 충전해놓고 로그아웃을 한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하루에 몇 번 정도 번갈아가며 눌러주는 게 일상이었다.


호아킨이 가장 똑똑히 들은 소음이 잠시 지나갔고, MP가 건물 내부, 외벽 너머 약간까지의 범위를 권역으로 지정해 훑었다. 지금 이 일행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스킬이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흠.”


제냐는 다시금 한숨같은 소리를 뱉었다.


호아킨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툭, 몸을 쓰러뜨려 드러 누웠다.


한가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좋았다. 적의 위협은 여전했지만. 고작해야 게임 속의 일이 아닌가.

당장 업무가 있으니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뭐한 일상에. 가벼운 기분으로 이처럼 휴가를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시나리오 온라인의 장점이었다.


호아킨은 별다른 일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기분을 만끽했다. 제냐는 그간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어딘지 심통맞은 얼굴이었고.


늘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목석같은 놈, 혹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화내는 꼴을 보니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호아킨의 입장에서, 제냐를 볼 때 말이다.

최태현은 일행들 중에서는 제냐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고, 그 속내가 그리 어른스럽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냐가 머리를 불쾌한듯 흐트러뜨렸다가, 다시 정리하듯 쓸어 넘겼다. 제 손으로.


“아무튼 오늘도 별다른 소득은 없군요. 수비대에 얘기를 넣은 것도 딱히 반응이 없고. 길드 쪽이나 귀족, 미하일 상회 쪽에 넣은 것도. 사르삿에서 얻을만한 정보는 대강 다 얻은 거 같으니까···. 나머지 두 사람이 들어오는대로 이야기를 하고 바로 떠나보도록 하죠.”

“그러자고.”


호아킨이 누운 채 답했다. 일행의 리더는 거진 제냐가 맡고 있었다. 잘 하나 지켜보자, 는 심산으로 대강 맡긴 느낌도 있었는데. 저 어린 한국인 청년은 대개의 일들을 잘 해내고 있었다. 각기 성향도,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다른 인물들의 의견을 잘 취합해서 일들을 처리했으니 말이다. 분명한 목적의식도 있는 편이었고.


호아킨은 그 정도면 만족한다. 한 개의 배에 올라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나리오 온라인이라는 게임, 그 위를 타고 흘러가는 배다. 배의 이름은 ‘여행’이었고 또 조금 더 파고들어보자면 ‘가상의 여행’이었다.

삶에 있어서 지칠 정도로, 힘에 겨울 정도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전력이 있던 호아킨에게는 딱 좋은 이름이었다.


조금 더 파티Party 건물에서 쉬다가, 필드를 돌아보며 전투 감각을 끌어올리고, 로그아웃할 생각이었다.


제냐는 ‘끙’ 소리를 내며 탁상 위에 엉덩이를 올리고 앉아,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뒤로 하고 있었다.


“음.”


최태현은 빙글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질렸는지, 서서히 다리를 뺐다.


그렇게 쉬고 있는 사내 셋이 있었고, 제냐의 등 뒤 창문에서는, 이전과 같이 작은 점 하나가 생겨나 점점 커졌다.


제냐는, 문득 서늘한 감각이 들어 뒤를 쳐다보았다.


한 낮.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사르삿의 거리.


그 위 허공, 양 옆으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가도의 허공에서 창 하나가 생겨와, 직진했다.


플레이어들은 그게 누군가가 쓴 스킬이겠거니, 했다. 딱히 위협은 없겠지, 그저 환상 계열의 무엇이겠지 말이다. 일반적인 주민들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이상할 건 없는 세계이기도 했고, 사르삿은 산슈카에서 가장 치안이 좋고 안전한 도시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도심 지역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신뢰받는 수비대가 있었고, 왕실 조직과 그 휘하의 병력들은 공고한 체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생각을 깡그리 무시하는, 공격 스킬이 그대로 허공을 날아 길드 건물의 외벽을 두드렸다.

다행으로, 릿샤가 미리 깔아둔 보호막 스킬이 발동되며 파란 빛의 장벽이 펼쳐졌다. 반투명한 느낌의 그것을, 후려 갈기는 묵빛의 창.


꽝!


주변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물건이 떨어지거나, 가구가 부서졌거나, 하는 일이 있다고 느꼈다. 근 몇 주간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워낙 많았고, 또 유동 인구가 개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유심하게 그 일들을 관찰하는 이는 달리 없었다.

현대인들이었다면 사진을 찍는다거나, SNS 따위에 그것을 퍼뜨린다거나 하겠지만, 있어봐야 고작 마을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 불과했다. 아직 소문이 형성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고.


‘대공’으로서도, 이게 어떤 소란이나 소문이 되기 전에 제냐를 처리하고 싶었지만, 영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불편한 시간이었다. 제냐보다 불편하기야 하겠냐만은.


꽝, 소리가 나기 직전에 제냐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묵빛의 창날을 보았고, 누워 있던 호아킨도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대로 날아들어도 호아킨은 빗겨가는 궤도였다. 최태현도 그러했고. 지난 시간동안 워낙 반복되었던 일이라 유난스럽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망치로 집안 가구를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건물 외벽의 보호막이 충격을 받아 흔들렸다.

MP를 다루는 이들한테는 선명하게 보일 보호막의 형상이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한테는 아주 흐릿한 무언가로 보이리라. 릿샤가 특별히 ‘유형화’ ‘유색화’에 방점을 찍지 않고 만들어낸 보호막이었으니까. 은밀하게 사용하기 좋은 스킬이었다.


그런 보호막의 바깥을 두드렸고, 푸른 벽이 일렁거렸다. 제냐는 창문 바깥에 나타난 반투명한 푸른 장벽과, 그것을 꿰뚫으려다 실패하는 창날을 본다.


“후우우우우······.”


이제는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그저 한숨만을 쉬었다. 그는. 대신 앉아 있던 주먹을 조금 말아 쥐었다. 그의 손에는 반지가 주렁주렁 끼워져 있었다. 손끝은 약간 떨린다. 반사적인 수준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다.

게임 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인 그래픽과 감각성을 자랑하는 게임이었고.


제냐는 스트레스를 받고 옥죄어 오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정확히, 김서원의 성격이다.


제냐, 킴, 서원은 결심을 확고하게 굳혔다.


대공 그 새끼를 면전에서 한 번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고 말이다.


“이런 씨···.”

“어허.”


호아킨은 그저 넌지시, 욕지기를 내뱉으려는 제냐를 제지 정도만 했다. 다 큰 사내의 말버릇에 대해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마인드 컨트롤을 도와줄 생각은 있었다.


건물 외벽이 조금 흔들렸지만, 멀쩡하다.

한 번의 공격이 있었으나, 4, 5번은 더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이다.


제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릿속 한 켠에 치미는 불안한 상상은, 이게 공을 들인 함정이며 이 다음 순간에 한 십 수개 정도 되는 묵빛의 창이 그를 노리는 광경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라고 자조적으로 내뱉으며, 제냐는 책상에서 내려섰다.


턱.


발이 카펫을 밟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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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28. 괴물의 위용에 대하야 24.03.19 15 1 13쪽
228 227. 구조하러 온, 괴물 24.03.19 17 1 16쪽
227 226. 대립 24.03.19 14 1 14쪽
226 225. 술사조 조장 24.03.19 12 1 11쪽
225 224. 부부단장, 히베 24.03.18 14 1 24쪽
224 223. 작게 숨을 내뱉었다. 24.03.17 15 1 23쪽
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5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 201. 짜증 24.01.07 14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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