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23 00:06
연재수 :
353 회
조회수 :
8,543
추천수 :
765
글자수 :
3,360,040

작성
24.01.06 19:52
조회
15
추천
1
글자
22쪽

200. 공습

DUMMY

제냐는 자고 있었다.


결국 퀘스트의 주체는 제냐 킴이라는 사실에는, 팀원들 모두가 동의를 했다.


퀘스트 자체를 하나의 가상 생물이라고 보았을 때, 달리 말하면 가장 크게 어그로Aggro가 끌리는 게 제냐라는 말도 되었다.


제냐는 로멜리아 가와 얽힌 산슈카 국 내의 퀘스트의 주인이었다.


고로, 한 명에게만 어떤 공격이 온다면 그 대상은 제냐가 될 확률이 높다.


대여한 건물. 모두가 모여서 떠들거나 정보를 나누는 회의실이 있었고 각자 잠자리에 들고 로그아웃을 하는 침실이 있었다. 최태현과 제냐는 한 방이었고, 호아킨이 홀로. 그리고 릿샤와 라이엔이 한 방이었다. 가급적이면 한 방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 밤중에 습격 이벤트라도 펼쳐지면 도울만한 이들이 근처에 있는 게 좋으니 말이다.


왕국의 수도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이번 퀘스트는 특히 그러했다.


한밤 중.


제냐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멀리로부터 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밤 중이라는 뜻은, 제냐로서는 로그아웃한 시점이라는 말이었다. 시간대가 아예 다른 릿샤나 호아킨의 경우에는 뭐 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각자의 일을 보고 퇴근 후 시간을 맞춰 게임에 들어온다면 아무래도 한낮 즈음이 된다. 한국의 시간으로 보자면 말이다.


밤중에서도 아직 새벽에 이르지는 않은 시간이었고, 다섯 시간 빠른 리얼 타임을 쟀을 때 실제의 제냐, 김서원은 자고 있었다. 자신의 원룸 방 안에서 말이다.


점이 다가오며 퀘스트 씬은 진행되었다.


퀘스트 이벤트를 처리하기 위한 임시 AI가 제냐 킴의 캐릭터 속에 생성되었고.


한밤 중의 사르삿 거리.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낮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통행 금지령 따위가 있는 도시는 아니었고, 여기저기 조명이 켜진 채 늦게까지 장사하는 가게들이 있었다.

유흥가라거나, 밤 늦게까지 음식과 마실 것을 파는 가게들이 모인 곳은 낮보다도 더 시끄러울 정도다.


제냐와 일행이 자리잡은 대여 건물은 그런 시내 한복판에서는 조금 벗어났다.

‘시내’라고 할만한 유흥가는 중앙 지구에도 있었고, 일반 지구에도 있었다. 외곽에도 있었고 말이다. 각 지구에 하나씩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럿이었다.


아직 잠들지 못한 NPC들이나, 어떤 플레이어들. 그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누군가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의 눈에는, 검은 점이 위에서 휙,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거리를 지나고 있던 어느 유저의 시야에 잡힌 모습이었다.

워낙 빠르기에 제대로 보지 못한 면도 있었다. 전투 중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중수급에 위치한 플레이어였으나 투사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검은 점.


곧, MP로 이루어진 창은 목표로부터 조금 떨어진 허공에 생성된다. 유물, 아티팩트, 필멸창을 작동시키면 말이다.

수십 Km, 혹은 백 수십 여 Km를 넘어 발동되는 유물이다. 사르삿 내는 완벽하게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받는 입장에서는 시간도 장소도 따지지 않는 무차별적인 공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허공에 나타나서, 마치 미사일마냥 쏘아진 창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바랆을 갈랐다. 쌔애애액,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필멸창의 효력으로 만들어진 창은 실제 창이라기 보다, 투척식의 초상 스킬이다. 썬더 스피어를 쏘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의 창으로 완벽하게 착각할만큼 모양을 잘 잡아두기는 했지만, 물질적으로 그만큼 견고하지 않다.


나타난 직후와 사라지는 직전에는, 흐릿한 형상으로 만들어지며 물리력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애매한 정체성이 도리어 은밀한 암살에는 더욱 요긴하게 쓰인다.


어둔 밤, 거리 위의 허공을 가르는 창날이 낮에 있었던 일과 비슷한 궤도로 날았다.

아까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건물을 노리고 들어가는 데, 큰 창문이 아닌 이번엔 옆에 있는 외벽을 뚫으려 한다.


제냐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그에게 몇 종의 스킬들이 알람 역할을 해주었다. 감지, 감각 계열의 스킬들에 들어 있는 패시브 효과에 따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불길한 예감 따위를 인지하는 레어 스킬들이 몇 있었고.

플레이를 하면서 전장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전투를 반복해 온 플레이어는 그런 류의 패시브 스킬들도 많이 쌓게 되는 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쌓은 것이고, 그런 류의 스킬들이 쌓여 있기에 살아남은 것이기도 하다.


번뜩,


하고 어둔 방 한 가운데서 제냐가 먼저 눈을 떴다.


그리고,


무언가 인지하기 전에 먼저 몸을 옆으로 홱, 굴렸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의 외벽이 잘려나갔다.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창날의 끝에는 막대한 MP가 모여 있었다. 그 자체가 MP로 이루어진 투사형의 초상 스킬이다. 그러나 창날 끝은 기력술사들이 MP를 벼려 만드는 강고한 칼날마냥, 특히나 고밀도의 MP가 모여 있다.


건물의 외벽은 두부나 어떤 강도 약한 것이 부서지듯 순식간에 터져나갔고, 난폭하게 구멍이 뚫리며 저항없이 무너졌다.


제냐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고, 정확하게 제냐가 있던 자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침구류의 상단이 모두 반으로 잘려나갔다.


침대의 머리맡 부분을 막아둔 나무판자가 반쪽이 되며 박살났고, 배게라거나 이불, 깔개 따위가 잘려나간다. 정확하게 제냐가 누워있던 정수리를 노리고 온 셈이었다. 그대로 누워 있었더라면, 정수리를 관통한 창날이 그대로 수직으로 제냐를 찔러 양단했으리라.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쿵,


“허억.”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냐는 침대에서 넘어져 방바닥을 굴렀다. 제법 넓은 방이기는 했다. 창가에 있는 책상의 의자가 팔에 걸려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냐는 간편한 형식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천옷이었고, 평소에는 거기에 가죽과 철판을 합친 하드 아머를 끼고 여러 장구류들을 걸친다. 마지막으로 망토까지 걸치고.

지금은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혹은 자는 방 안 근처에 가지런하게 정리를 해서 놓아둔 상태였다. 의자를 제냐의 팔이 쳤고, 의자의 등받이에 걸어둔 조끼와 벨트가 철그럭거렸다. 단검이나 각종 소도구, 포션 따위를 그 때 그 때 달고 다니는 용도의 물건들이다. 벨트의 경우에는 비스트 슬레이어나 발톱 대거를 끼우기도 했고 말이다.


제냐는 헛숨을 들이켰다.


눈이 땡그래졌다.


어둔 방 안이었지만 선명하게 보였다. 바깥에서 별과 달빛이 방 안으로 새어들고 있었다. 단지 그 광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력술의 묘용은 각 감각 기관의 강화에도 있다. ‘부엉이의 시력’이라는 패시브 스킬도 있었고 말이다. 아예 완벽한 어둠이 아니라고 한다면, 제냐는 문제 없이 싸울 수 있었다. 이건 다른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콰직,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창은 사라졌다.


제냐는 그것이 사라질 때의 그 흔적만 흐릿하게 보았다.


침대에서 구르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자세를 다시 잡고 침대 쪽을 바라보았을 때는 말이다.


침대 위를 훑고 지나간 창날은 그대로 지나가, 발치에 있는 나무 판자를 갈랐고, 제냐가 자고 있는 침실의 안쪽 벽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사라졌다.


낮에 본 현상과 완벽하게 동일했다.


세상 끝까지 꿰뚫어버릴 기세로 와서, 제냐가 있던 자리만을 훑고 이내 곧 사라진다.


“······.”


제냐는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벌리고 있던 입이었다.


그리고 순간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


이대로 잘 수 있나?


아마 잘 수는 있으리라. 다음에 깨어날 보장이 없었지만.


제냐는 미안하지만, 릿샤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언가 보호막 계열의 아티팩트를 준다던가, 스킬을 써준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면 쉬는 것 역시 편히 쉬지 못할 듯했다.


공격이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일어난 걸로 보아 아무런 제약 없이 난사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닌 것 같기는 했다만.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했다.

잠결에 비명횡사하는 건, 제냐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식은 땀이 옆으로 흘렀고, 제냐는 방을 나서 릿샤가 있는 침실 근처로 걸어갔다.


복도에 나갔을 때는, 이미 심상찮은 기척을 느끼고 일어나 있던 호아킨과 최태현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옆 방이었기에 유달리 크게 느낀 모양이었다.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릿샤와 라이엔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후우우···.”


제냐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


필멸창이라고 불리는 아이템의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고강한 워메이지 수준의 초상술사가 MP를 채워넣고, 한 반나절 정도 부팅Booting 시간이 필요했다. 내부에 프로그래밍된 술식이 제 기능을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또한 4, 5회 정도 연속적으로 쓰고 나면 제한이 걸려서 당분간 사용하지 못한다. 적절한 사용 횟수는 2, 3일에 한 번 정도로 반복해서 써주는 게 좋다.


MP를 많이 잡아먹지만 위력이나 효율이 확실하다. 죽이고 싶은 원수가 옆 도시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공격하는 이의 위치는 전혀 노출시키지 않고서 말이다.

상대는 심증으로 공격자를 추리할 뿐, 물적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알사드 대공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지 않는 것. 그게 대공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였다.


완벽한 수비가 완성된 상태라고 한다면, 작은 공격 능력만으로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 유물은 그 정도가 아니다. 지나치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강력한 성능이었다.


상대는 이번에도 죽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냐 킴’이라는 세시앙 인 용병의 동태는 사르삿 내에서 계속해서 추적되고 있었다. 통신용의 기기는 비교적 저렴하고, 양산이 가능한 것을 사용한다. 통신 가능 구간마다 대공가의 인물들이 있어서 순차적으로 정보를 전달받고, 종래에 대공가까지 오게 된다.


번거로운 작업이었고, 눈에 띌 수도 있겠지만 대공은 이런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다.


사르삿은, 떨어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거기에서 프린스 알사드가 죽이기로 마음 먹은 누군가를 놓치는 건, 거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죽이면 큰 문제가 일어난다거나, 여러 제약이 걸린 인물이 아닌 경우에야 말이다.


알사드 대공의 신분으로 당장 사슈나 가의 인물을 죽일 수는 없었다. 왕실에 대한 존경 따위 대공에게 있지는 않았지만, 번거로운 일을 피해야겠다는 사이코패스의 계산만은 냉엄하게 그의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고달픈 계획이다. 다 이루어내기는 난점이 많았고.


“큭.”


대공은 미친 놈처럼 방 안에서 혼자 웃었다. 유물을 간단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그 보고를 막 전달받은 이후의 상황이었다. 그는 집무실에서 달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는 목조 의자에서 일어나 응접실의 소파로 향했다.


깍지를 끼고 뒷머리를 받치면서,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노구이지만 아직 쓸만했다. 고장난 구석도 많지 않았다.


가문에서 전해지는 특제의 아티팩트 중에서는 기력의 보강을 효과로 하는 것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기력술사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재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때로는 돈으로 해결되는 부분도 일정하게는 있었다.

세르게이는 많은 지원을 받는다면, 간신히 기력술사의 말석에 위치할 정도의 재능은 갖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맨 손으로 거리에서 시비가 붙어도 일반적인 인간에게 지지 않을만큼은 된다는 뜻이었다.


그게 초인들이 싸우는 전장터에서 어떤 유의미한 사실이 되어주진 않는다. 그러나 지휘관으로서, 혹은 야욕을 가진 미치광이로서. 남들보다 건강하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현실이었다. 그는 오래 살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그리고 뱀처럼, 천천히 옥죌 생각이었다. 산슈카 왕국과, 왕국을 비롯한 인접국들. 나아가서 중부 대륙 전체를 말이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노년기에 접어들어 기력을 잃을 동안 전부 가능할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슬슬 계획을 실행하고, 시작해봐도 좋을 시기이기는 했다.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늘 그가 쫓아 달려가야 하는 입장이다. 거슬리는 용병 놈 하나를 자꾸 죽이지 못하는 게 짜증은 났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한 위협이 되고 있으리라. 놈은 이 정도로 놔둔다. 어차피 세상사가 전부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대공은 계획의 다음 구간을 생각했다.


여기저기에서 밑작업을 해둔 것들이 있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퍼즐이었으나 조금 진취적으로 움직여봐도 될 듯하다. 그간 그의 밑에서 고생을 해준 병졸들이 제법 능력이 있는 놈들이 많았다. 검은 기사단의 활약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전부 정의로운 부류는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의 양심에 비춰봐도 그다지 쓸모없을 일들이리라. 오로지, 세상을 망가뜨리고자 하는 미치광이 권력자의 입맛에는 맞는 임무들을 훌륭히 수행했다.


“크크큭.”


대공은 미친 사람처럼 달밤에 홀로 웃었다. 즐거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무언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대공은 뜬 눈으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응접실에서 짧은 잠에 들었다.


그러다 새벽녘 대공의 안위를 걱정한 집사장의 인도에 따라, 잠시 후 침실로 자리를 옮긴다.


*


“이상 현상?”


사르삿의 수비대, 일반 지구와 외곽지구의 경계선을 담당하는 11부대의 부대장 요할은 올라온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 라는 말과 표정을 간신히 삼킨 반응이었다. 그에게 이야기를 건넨 사내는 그래도 믿음직한 작자였다. 부하들 중에서는 말이다.


상관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건 부하로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실력도 있고 말이다.

요할은 그래서 마냥 짜증을 내지는 못했지만, 설명을 더 요구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어··· 사르삿 근처에서 기이한 비행 물체를 봤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낮에도 그렇고, 밤에도 그렇고요. 무언가 시커먼 형상이 화살이나, 날아가는 창대처럼도 보였다고···. 그래서 사르삿 시내 129번지 지구의 어느 건물 외벽을 박살냈다고 합니다. 그 밖에 다른 시내 지역에서도 몇 번 목격이 되었고요. 음···.”


부하, 마일드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거기, 보고서에 적어뒀습니다. 보름 가량 약 15회 정도 기현상이 벌어졌다고 하는 군요. 워낙 순식간의 일이고, 그저 잘못봤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최근 부득이하게 보고자들의 증언이 겹치고 내용도 대강 일치를 합니다. 어떤 초상술의 발현으로 봐야하지 않을런지···.”


마일드는 씩씩한 사내였다. 투박하게 생겼고. 몸이 커서 옆으로도 앞뒤로도 체구가 크다. 건장한 사내였고, 수비대에 전부 그와 같은 병사들만 있다면 아마 시민들의 체감하는 안전도가 더 올라갈 지도 모른다.

더듬거리며 보고한 내용을 말한다.


요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일드가 보고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초상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일반적인 상식과 자연 현상을 뛰어넘는 기현상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었다. 초인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갖가지 능력들은 국력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전장의 양상을 바꿔놓기도 한다. 말석이지만 군부에 몸담고 있는 지휘관으로서, 요할이 그런 일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초상술에도 양식이 있고 결국은 사람이 쓰는 문제였다. 적어도 전조 현상도 있고, 그것을 쓰는 이의 목적이나 처지도 존재를 하리라, 분명. 그런 것들을 다 빼놓고 그저 허공에서 뭔가가 날아갔다니···.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기물 파손이라도 하려고 날려대는 걸까. 용병들 중에 무뢰배들이 가끔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럴싸한 일이었다. 그런 작자들이 마음대로 설치지 못하도록 수비대가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흠.”


요할은 보고서를 다시 한 번 훑었다. 121지구에서 7건. 08지구에서 3건. 199지구에서 4건··· 201지구에서 1건. 201지구?

11부대의 지휘관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갈색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사내였다. 수염이 거뭇하게 나 있었고, 찌들은 눈이다. 그러나 그 안광 속에 있는 예리함만은 살아 있었고, 근처 동료들의 평가도 영 못믿을 사내는 아니다, 라는 식인 지휘관이다.


요할이 입을 열었다.


“야, 이거 201지구에서도 일어났다고. 맞아? 네가 쓴대로 말야.”


요할이 툭 던졌고, 마일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맞습니다.”


“······알지? 200지구 이상부터는 중심 지구 핵심···.”

“예. 알고 있습니다. 그 내부에서 초상술을 함부로 발현하는 미치광이는···.”


수비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럿이 있지만, 도시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서가 개중 큰 이유였다. 물론 군대란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었으나, 현재 중부 대륙은 평화기를 지나고 있었다. 산슈카 왕국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일으킬만한 나라도 아니었고, 현재의 왕 역시 그러하다.


그들이 주요하게 힘을 쏟는 부분은, 대도시를 이루고 초상술과 기력술, 초상공학 따위가 발전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것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쪽이었다. 헐거운 정신상태를 가진 초인들이 난리를 피우지 못하도록.

시민들의 삶이 일정 궤도 이상에 올라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또한 인간 간의 전쟁은 없더라도 도시 바깥, 황무지에서 몬스터들이나 강도 따위의 움직임은 있으니 그것들을 정기적으로 토벌하기도 하고.


세상이 살기 좋아졌고, 기적처럼 보이는 초능력들이 횡행하는 시대였으니. 그로 인한 부와 평안함도 있지만 반대급부로 그로 인한 문제거리들이 있었다. 그 문제거리들에 대한 최소한의 억제력이 곧 국가의 수비대원들이었다. 베테랑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산슈카는 각종 공업, 사업 따위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재활르 체제 개선과 군부대의 유지에 많이 쏟아넣고 있었다.


어쨌거나 살기 좋은, 건실한, 치안도가 높은 사회를 건설해야 점차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나라가 발전하리라는 지엄하신 국왕 폐하의 생각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왕의 통치 근거에 동의를 하고 있었고, 군인들의 왕실을 향한 충성도 역시 높은 편이었다. 산슈카 국이라는 역사가 오랜 고국의 일원들이라는 점도 그들의 자긍심 중 일부였고.


“흐으으으으음.”


그리고, 여러 대도시의 특별 수비대들 중에서도 수도의 수비대들은 더욱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고 말이다.

이 나라의 왕과, 그가 기거하는 왕궁이 있는 곳이었으니.

왕궁 근처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한낱 영주가 통솔하고 다스리는 여타의 대도시들과 달리, 이곳은 산슈카의 오랜 역사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왕실의 피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었고.


산슈카의 지형도는 단순하고, 찌그러진 원형이었다. 왕궁이 가장 최심부, 중앙에 있었고, 그것을 구심점 삼아서 원형의 중심 지구가 있다. 그 밖에 일반 지구가 있고, 그 일반 지구의 최외곽과 성벽 바깥으로 외곽 지대들이 있었다. 각 지구의 번호는 0에 가까울수록 외곽지를 뜻했다. 반면 숫자가 높을수록 왕궁에 가까워지는 걸 뜻했고.


200번대라고 한다면 왕궁 근처의 중심 지구들이었다. 각종 고관들과 고귀한 신분의 귀족들, 이 나라의 핵심 인력들이 있는 곳에 불안 요소가 생겼다는 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민들이 증언하는 ‘기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결국 수비대도 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현상이 가장 많이 벌어진, ‘벨트Belt’지역에 관한 수비와 수색, 수사, 각종 치안적 업무는 11부대가 맡고 있었다. 벨트란 중심 지구와 외곽 지대를 나누는 경계선, 그 근처의 길다란 원형 띠 모양의 지역을 말했다.


제법 규모가 큰 지역이었고, 가느다란 띠라고는 하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스스로는 군부의 말단 지휘관이라 이야기하지만 그런 11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있는 요할은 분명 요직에 앉아 있는 핵심 인력이다.


요할은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 알았다. 일단 알아보자. 탐문 수색에 쓸만한 인원이 지금 얼마나 있어?”


요할의 직속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몇 단계 정도 아래에 속한 실무자인 마일드가 눈알을 위로 올리며 이야기를 했다.


“한··· 2, 3개 십인 부대 정도는 당장 차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일단 걔들 데리고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 부부대장한테는 다른 부대에 수색 지원 요청하라고 전하고. 그리고 다른 부대에 지원 요청 하면서, 초상술 연구회 쪽으로도 연락 넣으라고 말야.”

“예, 알겠습니다.”

“정말 누가 시내에서 파괴적인 초상술을 대놓고 써서, 테러를 벌이고 있는 거라면 알아는 봐야겠지. 알겠다. 수고했고, 더 수고해라. 어서 움직여.”

“예.”


마일드는 짧게 끊어 뱉듯 말하고는, 저벅이며 방에서 나섰다. 덩치 큰 사내가 있기에는 조금 좁아 보이기까지 하는 방이었다.

요할은 평소에 집무실에 그다지 불도 밝게 켜두지 않았다. 일렁거리는 랜턴 몇 개 만이 집무용 탁상 위와, 방 내부를 일부 밝히는 중이다.


랜턴의 불빛에 비추어서, 요할은 마일드가 정리한 현황 보고를 다시금 읽으며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다.


미쳐버린 용병 새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자연적인 현상일까. 어떤 일이 되었듯, 알아보는 건 중요하고 또 나쁘지 않다. 더군다나 중심 지구 근처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면.


요할은 이틀 정도 감지 않은 머리칼을 펜대의 뒤쪽으로 긁적거렸다. 마른 기가 나는 모발이었지만, 찝찝함이 생긴다. 병영 내의 씻을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움직였다.


*

library-of-congress-fXgSXA_6wmg-unsplash.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4 233. 쟈섹의 고민 24.03.22 13 1 16쪽
233 232. 달밤의 요란 24.03.20 18 1 14쪽
232 231. 비극, 누군가의 입장 24.03.20 11 1 12쪽
231 230. …아직도? 24.03.20 13 1 12쪽
230 229. 좋은 밤 24.03.19 13 1 16쪽
229 228. 괴물의 위용에 대하야 24.03.19 15 1 13쪽
228 227. 구조하러 온, 괴물 24.03.19 17 1 16쪽
227 226. 대립 24.03.19 14 1 14쪽
226 225. 술사조 조장 24.03.19 12 1 11쪽
225 224. 부부단장, 히베 24.03.18 15 1 24쪽
224 223. 작게 숨을 내뱉었다. 24.03.17 16 1 23쪽
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6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4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8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5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6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9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7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6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9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4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