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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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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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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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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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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87. 진검기眞劍氣

DUMMY

잘려진 단면부에서 가장 많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은 안개 따위가 숲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거대한 몸뚱이. 150여 미터 정도는 되는 반절의, 하반신. 검은 용의 몸에서 기생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듯, 땀이 연기가 되어 나오듯. 속에 있던 에너지들이 검붉은 안개가 되어 튀어나오고, 방향성을 가진 채 바람따라 흘러가듯 움직였다.


상반신, 반절로 잘린 검은 용의 나머지 몸뚱이에 가 붙는다.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상반신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잘린 자리에서의 재생이 어려웠다. 검은 용의 몸은 한계를 느꼈고, 단면부위를 버린다.


자세히 카메라를 가져가듯 시점을 돌린다. 검은 용의 상반신에서, 릿샤의 블러디 아이시 볼로 잘려버린 부분 근처를 보자.

검은 용의 몸이 떨어져 나왔다. 그 단면부는 길게 이어져 흉측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녹이고, 얼리고. 생물체의 체조직에 할만한 짓거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죽이고자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짓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반경 2, 30여 미터 정도 되는 폭발물은 큰 상흔을 남겼다. 검은 용은 상처 부위로 인해 얼었다 녹았다 불타버린. 그 상처 자국들을 모두 버린다. 끔찍하게 먹혀버린 몸뚱이의 위, 정상적인 부분 근처에서 몸이 떨어져 나갔다.

도마뱀의 꼬리가 떨어지듯 말이다. 체조직이 분리되면서, 열차가 따로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다.


그리고 다시 멀쩡한 단면에서, 하반신에서 흡수한 MP들을 모조리 소모했다. 폭발적으로 쓰인다. 제냐는, 어느 정도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MP의 요동마저도 거진 다 사라졌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는 계속 들린다. ‘크오오오오.’ 비명을 질러대는 검은 용의 괴성도 여전하다. 제냐는 눈을 슬며시 뜨면서, 양 칼을 쑤욱 몸으로부터 뽑아낸다.


뒤척이면서 그 축축한 몸뚱이 내부에서 튀어나왔고, 뱉어지듯 바깥으로 갔다. 데슈칸 산맥의 청명한 공기가 제냐를 반겼다. 몸에, 장비에, 그리고 칼날에. 검은 용의 체액으로 보이는 흰 빛의 입자들이 묻어 있었다. 금방 사라지는 종류다 허공에 나와 몸을 뒤틀고 털어내자, 금방 떨어져 나간다.


몇 걸음 걸으면서 제냐는 버려진 하반신으로부터 멀어졌다.


수 백 미터짜리 괴물과 싸우다보니 거리 감각이 조금 이상하다. 제냐는 매의 눈을 사용해서 상공의 시야를 만들었다. 기력 감지술을 사용하면서 조금 더 정밀하게 현장을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상반신이 검은 용인 것 같았다. 저 멀리, 한 백 여 보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검은 용이 몸을 뒤튼다. 괴로운 것처럼도 보였다.


검은 용에게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녀석은 재생을 해내려 꿈틀거리고 있다. 그 찰나를 놓칠 릿샤가 아니었지만 당장은 MP가 없었다. 대신 최태현이 부지런하게 화살을 갈겼다. 백룡시가 더욱 날아간다. 최태현은 푸른 물약을 거진 배부르게 먹었다. 그럼에도 MP가 부족하다. 슬슬 스킬 페이지를 쓸 때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라이엔은 천천히 허공에서 선회를 하면서, 검은 용을 중심으로 크게 돌았다. 최태현은 시야각이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음에 안도하면서, 안정적인 사격을 반복한다. MP가 일정선 아래로 떨어지면 스킬 페이지를 사용할 셈이었다. 기력술로 화살을 강화하는 걸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이템으로 공격력을 높일 심산이다.


상아빛의 대궁大弓에 자철시가 다시 세 발 걸렸다. 최태현의 MP가 소모되었고, 백룡시가 날아간다.


긴 궤적을 그리며, 유연하게 굽어서. 아래에 있는 검은 용의 몸을 두드린다. 북채가 북면을 두드리듯.

재생을 위해 힘쓰고 있던 검은 용은 큰 저항 없이 맞았다. 폭발이 아래에서 장렬하게 일어났고, 검은 용은 꿈틀거린다. 그 새롭게 생겨난 단면부에서 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재생이다. 순식간에 몸체가 반으로 줄었는데, 다시금 뒤로 하반신이 생겨나고 있었다.


검은 용의 몸이 길게 이어진다.


제냐가 튀어나왔던 하반신은 그대로 기력을 거의 잃었다. 내재되어 있는 MP가 전부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추출에 생명력까지 잃어버린 듯했다. 이미 죽은 반신이었으나, 자연스러운 변화보다 더욱 빠르게 생기를 잃었다.

곧이어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흩날리듯이 검은 연기가 되어서 하반신은 사라졌다.

마치 검은 용의 몸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하반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없어지는 듯하다. 별로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MP라는 초현실적인 에너지가 검은 용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제냐는 넓게 보기 위해 거리를 벌렸다. 매의 눈으로 검은 용의 전체 모습을 본다. 위쪽도 시야각을 돌려 더듬어 본다.


릿샤가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그런 모습이다. 별다른 충격이 없다면 반드시 스킬들을 쏟아내고 있었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녀가 잠잠히 있다면 지금 스킬과 스킬 사이의 쿨타임이던가, 혹은 공격을 받아서 회복중인 시간일 거다.


최태현 쪽으로부터는 부지런하게, 지속적으로 화살이 날아온다. 하늘에서도 눈에 띄는 궤적이다. 백룡시. 최태현이 새롭게 익힌 스킬이었다. 값비싼 아이템을 새롭게 얻었으므로, 그걸 최대한 이용해봐야겠다며 궁리를 하더니 만들어낸 기술이다.

이름답게 멋들어진 위력을 갖고 있었고, 땅을 기는 뱀을 계속해서 때려댔다. 쾅, 콰광. 마치 상당한 양의 폭약이 그러하듯. 다이너마이트라도 터지듯 화살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눈으로 보이는 폭발보다도 더 끔찍한 위력이다. MP가 담겨 있으니까 말이다. 관통력과, 물질 분해 능력 따위도 갖추고 있다. 그 정도의 공격성이 아니라면 검은 용의 몸을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지속적으로 릿샤와 최태현은 검은 용의 바깥 부분을 두드렸다. 놈의 MP를 최대한 깎아먹고, 보호막과 재생 능력을 최하로 격하시키기 위한 일들이었다.


촤아악,


하는 소리가 났다.


검은 용의 외부를 때리는 공격들의 소린 아니고. 그것의 몸뚱이가 급속도로 자라나며 나는 소음이다.


마치 지렁이처럼. 반으로 자르면 그대로 두 마리가 되어 버리는 미생물처럼. 악몽처럼 검은 용이 두 마리가 되지는 않았다만. 산흙벌레, 지렁이라는 그 본질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오랜 시간 촬영하고 초고속으로 재생하는 것처럼. 검은 용의 몸뚱이가 생장하는 소리가 기이한 괴성처럼 들렸고, 자라나는 몸이 주변의 나무나 돌흙더미 따위들을 밀치면서 지나갔다.


오랜 시간이 걸려 일어나야했을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셈이다.


웅크렸던 몸을 깨워내는 것처럼 검은 용은 비명을 지른다.


산흙벌레는, 암석이나 흙 따위를 파먹던 아가리를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에.


우스운 소리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크기가 훨씬 작았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체구라는 것이 있었고, 생장하는 몸뚱이가 전부 같이 울렸다.


최태현의 백룡시나 릿샤의 타격이 계속해서 공격을 해주고 있었다. 쾅, 콰광 하면서 전쟁 중의 폭음과 비슷한 소음이 산맥을 쩌렁쩌렁 울린다. 호아킨 역시, 울부짖는 사자가 되어 도끼로 검은 용의 외피를 해체하고 있었다.


그런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소리를 덮어버리는 굉음이 검은 용의 울음이다.


제냐는 호아킨이 죽이고 있는 대가리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돋아나고 있는 하반신 쪽이다.


검은 용의 괴랄한 생명력을 빠르게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 없었다. 재생력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공격을 하는 수밖에. 제냐는 달리면서 인벤토리를 열었다. 다 무너져버려서 평야와 비슷한 꼴이 되어버린 경사면이다. 검은 용이 꿈틀거릴 때마다 미처 다 떨어지지 못한 토사물과 나무의 잔해, 바위 따위가 아래로 굴렀다.


제냐는 그런 바닥을 용케 뛰어 넘으면서 날듯이 달린다.


인벤토리가 열렸고, 몇 종의 푸른 물약을 꺼내어 바로 마셨다. 각종 색깔을 가진 다른 물약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테미나 증가, 순발력 증가, 근력 증가, 체력 증가. 그 효과들은 미미하지만 쌓이면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각종 물약들은 순간적으로 캐릭터의 능력을 증가시켜 주었다.


인간의 배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물약들을 사용하는 건 고심해서 해야만 했다. 어설프게 스텟 증가의 힘이 담긴 물약을 마셨다가, 푸른 물약이나 붉은 물약을 마실 배가 부족하다면 낭패였다.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건 그야말로 전설적인 크기의 괴물이었으므로 말이다. 저것을 다 잡아낼 때까지 버텨야 했는데, 즉발적인 힘에 치중하다가 지속성을 놓쳐버리면 순식간에 게임 오버가 되리라.


제냐는 영리하게 마셨다. 그 자신의 회피 능력에 깨나 자신이 있었고 말이다. 몇 개의 아티팩트는 분명하게 그를 돕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종류의 구명 도구였다. 그런 목숨줄이 없다면 함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게임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거기에 스킬 페이지들을 몇 개 꺼냈다. 초상술사들 역시 스킬 페이지를 쓸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능숙하게 다룰 것이다. 초상술사가 아닌 다른 이들은 그저 내재되어 있는 스킬을 발현하는데 급급하다.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스킬이 자동적으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고, 그건 술사로서 가장 초보적인 스킬 사용이었다.


능숙한 자들은 스킬 페이지 속의 스킬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제것인양 다루어낼 수 있다. 최태현 역시, 기력술사만이 아니라 초상술사로서의 능력이 조금 필요한 이유였다. 스킬 페이지 따위를 이용해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하려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궁술에 녹여내려면 말이다.


결국 고레벨 구간으로 갈수록 여러 클래스의 갈래는 합쳐지게 되는지 모른다. 초상술을 따로 익히지 않더라도 기력술의 극한에 다다르면 반대쪽의 강점을 나타낼 수 있게 되고. 초상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마기아 이상의 원숙한 워메이지들은, 마치 기력술사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신체를 강화시켜 난전 속에 제 몸을 던져댄다. 전혀 주저하지 않고 전장 속에 파고들어 근접전, 중원거리전 등 간격을 가리지 않고 스킬을 난사하는 것이다.


거리가 떨어져도 여전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기력술사이던. 혹은 가까운 거리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킬을 난사하는 초상술사이던. 둘 다 무서운 존재임은 변함이 없었다. 제국기의 아티팩트. 로멜리아 가의 보구 두 가지는 그런 약점을 단시간에 없애주는 물건이었다.


소드 마스터에게 쉼없이 싸울 수 있는 검기를 부여하고, 거기에 원거리 공격을 거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보호막을 쥐어준다면. 자신의 남은 기력을 마음껏 격발시키며 먼 거리를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며 싸워댈 수 있었다.


검술의 파괴력, 폭발력으로 사용해야 할 기력을 전부 이동 속도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통해서, 로멜리아 가문은 산슈카 왕국의 수호 가문이 되었다. 가문에서 배출한 역대의 소드 마스터들은 늘 뛰어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물론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상당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원숙한 솜씨가 있어야만 아티팩트를 수월하게 다룰 수 있었을 테다. ‘소드 마스터’라는 건 그 아티팩트의 성능을 보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한 조건이었다.


이전 운트 작힘 가의 기사들을 상대하면서, 그리턴 가의 검술 선생이 아티팩트를 사용한 바 있었다. 켄 마누엠이라는 사내였다.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경지에 있었으니, 얼마 전까지의 제냐와 비슷한 성취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대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보여지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의 실력자였다는 뜻이다.


질좋은 도구는 주인을 가리게 마련이었다. 현실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콘란드 대륙에서는 한층 가혹하게 쓰이는 말이다. MP라는 특수한 에너지가 존재하고, 초현실적인 성능을 발휘하는 도구들이 있는 세계였으므로.


개인이 들고 유용할 수 있는 평범한 크기의 물건이, 갑자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주변을 다 휩쓸어버릴 수 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소형화된 강력한 폭발물들이 여럿 있기는 했지만. 여기는 과학적인 수준으로 따진다면 중세의 부흥기를 지나 간신히 그 다음을 바라보고 있는 정도였으니. 상당한 오버 테크놀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있는 아티팩트들은 말이다, 사실상.


그래서 아티팩트를 다루는 이들. MP를 높은 수준으로 다루는 이들. 그들과 아닌 이들과의 격차가 심했다. 신분제라는 것이 엄정하게 정해져 있는 세상이었고, 초인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지방에서 여러 전쟁이 있었고, 시끄러운 역사가 있어왔다. 어쩌면, ‘몬스터’라는 공공의 적과 생존이라는 당면 과제가 없었다면, 콘란드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 게임 내의 세계관이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안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개인의 격차가 어마어마해질 수 있는 세상이었고, 곧 그런 이들의 엄정한 양심이 요구되는 세계이다. 그래서 ‘기사도’이니 ‘학자도’이니 하는 게 낭만처럼 불리우는 시대일 지도 몰랐고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어느 충직한 기사나 초상술사의 이야기는 명시가 되어서 대륙 여기저기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듣는 이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고, 오랜 시간 회자된다.


제냐는 그런 게 참 마음에 들었다. 현대보다 확실히 살기 팍팍한 시대를 그려내고 있었지만. 순수한 열정이라거나, 낭만이라는 점에 있어서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죽은듯이, 아무런 낭만도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라는 건, 어찌보면 가장 비현실적인 무엇일지도 몰랐다. 살았으되 산 것 같지 않게끔, 죽은 눈으로 살아가는 거.


어쩌면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런 세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정과 낭만으로 가득찬, 지저분하고 고되고, 살아내기 힘든 시대를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가상 세계였지만, 정신적인 교훈이라면 얼마든지 플레이어들에게 선사할 수 있었다.


제냐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고, 잘 즐기고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청년의 입매에 웃음이 생겨났다.


재미있었다.


언제 게임 오버를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쿠워어어어어어어어.


멀리서 들리는 선박의 거대한 경적처럼 느껴진다. 검은 용의 괴성은 말이다. 대기를 떨어 울리는 소음을 들으며 괴물에게 다가가는 길은 정겹고, 즐겁다.


저곳에 동료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뭐, 손에는 칼 두 자루.


다행스럽게도 단단한 외피에 박힐만한 칼이 아니겠는가. 제냐는 달려가면서, 간신히 남아 있던 한 그루 나무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곧 검은 용의 몸뚱이가 눈 앞에 있었다. 허공에서 목 근처에 손을 가져다댄다. 칼의 손잡이를 쥔 채로, 손가락을 뻗어 갑옷 틈새, 목깃 사이의 끈을 잡았다.


금줄로 이루어져 있는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 뜯는다. 그가 날아올라 검은 용의 위로 안착하고 있는 도중의 일이었다.


목걸이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배터리’였다. 초상술사들만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건 아니다. 기력술사들 역시, 강대한 의지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사용할 수 있었다. 기력술사들은 초상술사들에 비해서 MP량이 적은 편이다. 기력을 날카롭게 가다듬는 건 잘 할 수 있지만, 대량의 병력을 다루는 일엔 서툴다. MP를 병력이라고 비유한다면 말이다.

그들이 다루는 건 소수 정예병들이었다.


그래서, 목걸이에 담겨져 있던 MP의 정수가 흘러나올 때 제냐는 그것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초상술사라면 완벽하게 대량의 MP를 컨트롤해내고 자신의 스킬로 써먹으리라. 온전하게 파괴력으로 바꾸고, 그 이상의 시너지도 낼 수 있을 테다. 중첩 스킬이라는 건 그럴 때 써먹는 거니까.


그러나 기력술사들은 아비규환처럼 쏟아져 나오는, MP배터리 속 에너지들을 다 제어해내지 못한다. 개중 일부만, 어설프게나마 한 칼에 담는 것이다.


그러나 밀도는 초상술사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초면의 대군을, 자신의 정예병력에 편승시킨다. 검날이 예기를 날카롭게 품는다. 일반적인 대군들의 수행 능력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작전을 요구한다. ‘검기’를 이루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금줄의 목걸이, 배터리 형 아티팩트에 담겨 있던 MP들 중 일부만이 그 인도에 따랐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들은 그저 뒤에 흘린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기력술사들 역시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꼼수에 가까웠다. 아직 소드 마스터로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마스터들 중에서도 완숙한 자들이 다루는 기운을 흉내내는 것이다.


이전, 제냐가 연무장에서 본 환상과도 비슷했다. 그게 어떤 작용인 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저 게임 속에 있던 히든 데이터가 아닐까 싶었다. 발생 조건도 모르고, 그 내용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제냐에게 앞으로 나아갈 기술적 경지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제냐가 상상으로 떠올렸다고 생각한, 가상의 소드 마스터가 검기를 날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위검기僞劍氣’라는 기술을 써낸 것이다.


지금은 진검기眞劍氣라고 할만했다. 초입이기는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확실하게 발을 딛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의 경지를 흉내낸다. 막대한 MP 손실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초상술사로서 MP를 다루었다면 잘 수습하고, 멀리서 원거리 공격을 짠 뒤에 확실하게 타격을 먹였으리라. 그러나 검기로 다룬다면 일부는 유실될 수 밖에 없었다.


고밀도로 MP를 압축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그러나 근거리에서, 그만큼 강력한 공격력과 절삭력을 보일 수 있었다. 단단하며 검붉은 마기로 보호막을 형성하고는 하는, 몬스터의 외피를 뚫을 때는 그것이 제일 좋았다.


초상술사로서는 투사체를 멀리서 쏘아 보내지만. 기력술사로서는, 자신이 직접 그 투사체가 되어 정확한 지점을 베는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어떤 초상술사의 스킬보다도 플레이어 자신이 날아들어 공격하는 게 가장 정확하고 절묘할 수 있었다.


약점을 보는 눈, 사냥꾼의 눈이라거나, 감각이라거나 하는 스킬들이 검은 용의 외부면에서 그나마 무른 지점을 찾는다. 가장 단단하며 강력한 보호막이 형성된 지점에 비해서 그리 큰 차이도 아니었지만.

분명 보호력 수치의 낙차는 있었다. 어쨌건 생물이 다루는 힘이었고, 기세에 따라 모습이 변했으니까. 거기다 지금은 당장 하반신을 재생해낸 직후라 더욱 그럴 테였다.


보다 무른 살, 보다 검은 용이 집중하고 있지 않은 약점 부위.


그곳을 찾으며, 제냐는 허공에서 양도를 강하게 움켜 쥐었다.


튿어낸 목걸이로부터 금빛이 흘러나왔다. 그건 연기처럼, 날아가는 제냐의 몸을 감쌌다가 금세 사라졌다. 실제로 MP가 흩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그 일부만 잡아서, 제대로 검기를 만들어냈어도 상당한 위력이리라.


제냐는 온전히 검기에 집중했다. 제대로 만들어진 검기는 다른 잔재주가 필요 없었다. 썬더 인챈트나 파이어 인챈트도 아직까지, 보다 더 집약된 MP 구조체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위력을 덧댄 것이었다.


더 강력하며, 더 밀도 높은 구조체를 만들어낸다면 무엇이든 벨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기력술을 단련하는 검술가들의 격언과도 같은 말이며, 정신이었다. 하늘 아래 베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는 것 말이다.


벨 수 있으니 조물주께서 거기에 둔 것이다.


오만한 소리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달리 말하면 하늘 위의 것은 벨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하나님께서 두신 것이라면, 싸워 볼만하다. 하늘 위의 주Lord를 제외하고는 비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몸 길이가 300여 미터 정도는 되는 거대한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낙천적이라는 말이 차라리 어울릴 지 모른다. 기력술사들은 그런 면이 조금 있었다. 초상술사들은 언제나 골방에서 나은 수식을 짜고, 원거리에서 최고의 효과를 보게 하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많아지고 생각에 생각을 얹는 유형이 많았다. 반면 직접 날아가 현장에서 부딪히는 기력술사들은, 생각이 단순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되었건, 제 몸뚱이를 들고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 갖다 대어보면. 단순한 생각이야말로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태도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탓이다.


쓸데없는 잡생각은 실전에서 기술을 발휘하는 데 완벽하게 방해다. 준비라면 그 이전에 끝냈어야 했고, 이 순간이 게임 오버의 순간이 되더라도 실제의 순간에서는 오로지 한 점만을 떠올려야 했다. 다른 잡생각이 염두에 떠오르면 닿기도 전에 졌다고 여기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제냐 역시 그러했다. 릿샤와 같은 노련한 워메이지들은, 의식적으로 기력술사들의 태도를 배울런지 모른다. 제냐 또한 그런 편이었고. 더블 클래스로서 말이다.


뒤로 흩어지는 금빛 연기. 그 잔재가 넓게 팔을 펼쳐 뻗어 들은 양도의 검날에 묻었다.


다 흩어지지 않았고, 남아서 검날을 휘감고 검기를 형성했다.


제냐의 검기가 완성되어간다. 허공에서. 고작 숨을 몇 번 내쉬고 들이마실 시간 동안 말이다. 견고한 가상의 칼날이 형체를 다졌고, 어지간해선 베지 못할 게 없는 형상을 만든다. 거기에 다시 금빛의 기운이 물들어갔고, 검기가 한층 예리해진다.


급속도로 만들어낸, 추가적 검기다. 진검기이기는 하지만, 불안정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본래 제냐의 검기의 위에 외부 MP로 만들어진 층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이전에, 제냐를 죽이기 위해 왔던 암살자 아르망디의 스킬과 비슷했다.


심이 있었고, 겉면이 있다.


겉면의 구조는 내부의 그것에 비해 불안정하다.


불안정하다는 게 언제나 안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불안정이 의도한 상태라면 더욱이 말이다.


검기는 완벽하게 구조를 잡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게 옳다. 원래는. 그러나 달인 중에서 다시 남다른 경지에 올라선 장인들은 새로운 작법을 만들어냈다.

검기의 구조 중 일부를 흐트러뜨려, 불안정하게 만드는 식이다. 그리고 검을 흔들어, 그 구조체를 흩뿌리며 폭발을 일으킨다. 마치 초상술에서 그러하듯 말이다.


한 번 단단하게 얽혔고, 또 강력하게 응축되어 고밀도의 물질이 되었던 MP들은 다시 흩어지면서 거센 반발력을 일으켰다. 그 성질 자체가 폭발력에 힘을 더하게 되었고, 중근거리에서라면 어떤 초상술사의 스킬보다도 화끈한 위력을 보이는 공격기가 되어준다.


검기라는 건 한 번 형성하고 나면, 강력한 충격을 받아 깨지기 전까지는 손실이 많지 않은 힘이었다. 그러나 개중 일부를 일부러 버리면서, 고성능의 폭탄으로 사용하는 검법이다.


이미 검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폭발력에 완벽한 지향성을 더하고, 정확한 지점에만 충격을 줄 수 있다면 아마 검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달인 중의 달인들에서. 다시 지독한 수련을 거치는 이들이 닿는 경지였다. 제냐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런 일이다.


이미 검기를 만들어 검사들의 우러름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 위를 바란다.


위검기가 아닌 진검기였다.


데슈칸 산맥을 비추는 햇살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땅바닥을 비추었다.


태양은 고고하며, 변함이 없다. 이 땅에서 온갖 잡것들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제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하늘이라는 건 그러하다. 대지가 굳건함과 신실함의 상징이라지만, 어찌 보면 하늘이야말로 그런 성실성의 비유로서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헛소리같은 상념을 뒤로하며,


제냐가 금빛의 검기를 두른 흑도와 비스트 슬레이어를 끌어당겼다.


휙, 하고 사람같지 않은 점프력으로 길게 뛴 그다.


검은 용의 무지막지한 몸뚱이가 눈 앞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재생력으로 주변 사물들을 밀어내며 튀어나오고 있는 하반신의 말단이 있었다.


제냐가 달려드는 지점은, 그렇게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따끈한 신체였다.


무른 살이라고 할 수 있었고, 검은 용의 신경은 그 다음 마디의 하반신 구역으로 가 있다.


검은 용이 다루는 마기 역시 다소 흩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미약한 차이였지만, 그 미약한 차이가 성패를 가를 지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할 때는, 다른 모든 조건들이라도 따져봐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법이다.


구름 아래.


제냐는 크게 뻗은 왼손의 흑도와 오른손의 비스트 슬레이어를, 가운데로 끌어 모으며 검은 용의 몸뚱이에 안착했다.


쿵,


하는 소리가 난다.


거대하고 질긴 무언가를, 북채로 두드리는 것과 비슷했다.


떠올리기 힘든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양도의 칼날이 검은 용의 가죽을 때렸다.


제냐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힘임에도 조금 벅찬 것을 느꼈다.


칼날에 붙은 기력들이 날뛰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크기는 작지만, 지나칠 정도로 과밀하게 붙은 MP들이다.


하나같이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었고, 정예로서 단단하게 훈련을 시켰던 만큼 반발하기 시작하자 그 저항이 지독했다.


그 반발력을 이겨내고, 억지로 지향성을 부여해 앞으로 뻗어나가게끔 한다.


허공을 베어내다가, 가죽에 닿는 참격의 궤적을 따라 금빛의 기운이 날아간다. 그대로 그것이 검은 용의 가죽을 뚫고, 그 내부까지 자르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촤아악,


하며 마기와 가죽과 그 내부의 살이 시원하게 찢어졌고, 돋아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 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검은 용은 다른 공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지지 않을만치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금방 만들어낸 하반신을 떨 수 밖에 없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


지렁이가 불쌍하게 울부짖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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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200. 공습 24.01.06 13 0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9 0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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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196. 띄어쓰기 24.01.05 9 1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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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190. 턱 밑에서 23.12.19 10 1 16쪽
190 189. 검은 선 23.12.19 10 1 17쪽
189 188. 지난한 과정 23.12.19 11 1 16쪽
» 187. 진검기眞劍氣 23.12.18 17 1 26쪽
187 186. 블러디 아이시bloody icy 23.12.13 16 1 21쪽
186 185. 버로우Burrow 23.12.13 11 1 29쪽
185 184. 준비 23.12.12 14 1 29쪽
184 183. 원거리 딜링Dealing 23.12.07 14 1 15쪽
183 182. 초토화 23.12.07 9 1 15쪽
182 181. 낙하 그 다음 23.12.07 14 1 14쪽
181 180. 낙하의 순간 23.12.03 11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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