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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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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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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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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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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78. 검은 용 레이드Raid(2)

DUMMY

현세에 부활한 대악마라도 되는 양 허공에 검은 줄기가 요동친다. 백 여 미터 이상이 동굴로부터 나왔고, 아직도 더 뻗는다. 그대로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믿을만한 모습이었다. 제냐는 다루던 뇌기를 마무리했다. 뇌전의 기운은 마지막에 하나로 뭉쳐졌다. 조금 더 압축되었고, 여기저기로 뻗치던 줄기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외형들이 정리된다. 완벽한 구형, 원형이 되어서 완결된다.


완벽한 원 내부에, 막대한 전압을 가진 어마어마한 양의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순수한 뇌정의 기운이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폭발물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대개 단순하고 비슷했다.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상상의 산물들이 비슷한 궤를 그리고 있어서였다. 분자, 원자 따위의 이동을 대강 그려보면 초상술사들이 해내는 일은 공통적인 모양을 띈다.


자연계의 법칙과 조금 벗어나 있었지만, 그걸 상상하는 초상술사들의 삶은 자연계에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물리법칙 내에서 상상력을 빌드 업 시켜 나가는 건 아주 당연한 흐름이다.


번개의 공이 제냐의 앞에서 풀려났다. 묶여 있던 위치 고정이 끊어졌다. 방향성은 이미 부여했고, 속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1. 몇 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번개의 구가 빠르게 날아갔다. 뇌전 계열의 투사체들이 그러하듯 허공에서 이리저리 꺾이면서 날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깔끔한 곡선의 궤적을 그리면서 난다.

하나로 정돈하면서 뇌전 스킬이 원래 갖고 있던 디폴트 값들을 많이 없애버리고, 새로 추가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중첩 스킬이 어려웠다. 보통 있는 그대로의 스킬을 부품 스킬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인즉슨, 어떤 식으로는 수동적으로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스킬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분해하고, 부품으로 쓸만한 적당한 모양으로 깎은 뒤에 전체 중첩 스킬의 일부로 넣는다. 그렇게 해서 맞물려 초상술사들마다 완벽하게 다른 중첩 스킬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부품 하나하나를 깎고 전체 모양에 있어서 발상이 조금씩은 다르니까. 비슷한 궤는 형성이 되어도 완벽하게 같은 스킬은 나올 수가 없는 구조였다.

천만에 천만을, 억에 억을 곱하고 더하면 혹여나 모를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고 없다고 봐도 좋았다. 사람마다 조정을 하는 데는 자신의 손재주가 들어가고, 스펙에 따라서 또 변환율이 달라지고, 취향에 따라서도 미세한 차이가 생겨나니까.


부품 하나하나에 개성이 묻어나게 되고, 그것이 여러 개 모여서 전체 스킬의 외형을 이루었을 때는 고유 스킬이라고 봐도 좋은 물건이 탄생하다. 스킬들 자체에 계급이 있어 일반, 희귀, 유일, 전설로 나뉘기는 하지만. 마스터 마기아를 노리는 초상술사들의 중첩 스킬부터는 이미 자체적으로 희귀나 유일급 스킬들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봐도 좋았다.


완숙하게 마스터 마기아의 경지에 접어든, 고수급의 초상술사들이 중첩 스킬을 펼친다면 유일급 그 이상의 스킬들을 제 입맛대로 다룬다고 보는 게 정확했고.


릿샤가 다루는 것 역시 유일급에서 아주 전설급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전설급에 준하며, 그와 겨루어도 일시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전설급 스킬들을 다시 깎아 만들고 개중에서도 위력이 높은 종류들과 비교하자면 포텐셜이 부족하겠지만. 릿샤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


그래서 저 앞의 용이 발광을 하지 않는가.


용이 벌린 아가리 사이로, 깔끔하고 완만한 곡선의 궤적을 그리던 번개의 구가 쏙, 하고 들어갔다. 콰과광! 하는 폭음과 함께 그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번개가 터져 나가 입 안과 내부를 지져버렸다. 그러나 현재 염열의 기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검은 용이 신경쓸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상당한 타격이기는 했지만, 재생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검은 용에게 치명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커터칼에 조금쯤 베인 정도라고 보는 게 좋으리라. 신경은 써야했지만, 지금은 상체 전반에 입고 있는 화상 때문에 겨를이 없었다.


크워어어어어.


괴물은 울부짖었고, 수백 미터의 몸뚱이를 거의 다 드러냈다. 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꼴이었지만, 검은 용은 이내 땅으로 추락했다. 하늘에 뻗어 있었던 굵고 검은, 그리고 길다란, 잘못 그린듯한 선 하나가 떨어졌다.


쿠우우우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암석이 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그 거체가 떨어지자 데슈칸 산맥의 경사면이 지진을 일으켰다. 작은 진동과 함께 수십, 수백 여 그루의 나무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러고도 그 꼬리 부위가 동굴에서 다 나오지 않아서, 동굴로부터 이어지는 길다랗고 잘못 생긴 듯한 선이 누워 있었다. 화염의 기운은 검은 용의 표피 내부로 거의 침투를 했다. 잘못 전이되었다가는 대형 화재가 날법도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데슈칸 산맥을 홀랑 태워먹는다면, 릿샤로서도 부담이 가는 일이다. 오브젝트를 파괴하면 경험치를 얻게 된다, 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대규모 무차별 파괴를 자행한다면 아마 선악 수치에서 악업이 쌓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악 수치의 기준이 악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면 명예 점수에도 불이익을 받고, NPC들이 대하는 태도가 은근하게 달라진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저지른 악행을 어떻게 아는가 싶기는 하지만, 살인자들에게서 은연중에 오싹한 기색을 느끼고 마는 사람의 육감을 떠올려보면 비슷하리라. 대충 그런 기능이 있어서, NPC들과의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 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면 심대한 타격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악함 수치 쪽으로 캐릭터 성향이 치우쳐야만 만날 수 있는 NPC들과 퀘스트들 역시 존재를 했다. 이전에 제냐에 의해서 게임 오버를 당한 ‘아르망디’가 그런 축이었다. 암살자라는 건 다른 창작물에서 보여지듯 그리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개중에는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 다크 나이트들이 있을 지 모르지만 그건 없다고 해도 좋은 정도의 비율이었고, 대부분은 더러운 진창을 구르며 정의롭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쓰레기처럼 죽는다.


플레이어의 경우라면 게임 오버일 것이고.


다행히 태양의 구는 잘 제어되었다. 그 염열의 기운은 MP로 이루어져 있었고, 입자 하나하나가 입력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냈다. MP란 SP라는 자연계의 기운을 릿샤가 받아들여 훈련시킨 정병들이다. 정병들은, 여러가지 형태와 성질로 변화하지만 결국 최소 단위인 1AMP(atomic mental-power point)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군대로 모여 있어도 한 명의 군인이 개성과 고유성을 절대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죽여라, 는 군 생활의 격언은 자신을 알라, 는 말과도 같다.

쪼개질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자신, 가장 작은 MP들은 입력된 수많은 명령 데이터들을 이행한다. 불길처럼 보이지만, 자연계의 플라즈마가 아닌 MP라는 초현실적인 입자가 불꽃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은 살아 움직이듯 움직인다. 열기는 바깥으로, 허투로 뻗지 않았다. 작은 잔불로 연기가 일어났지만 더 이상 화재가 커지지는 않았다. 모든 에너지는 검은 용의 안쪽으로 침투한다. 바늘이 구멍을 찾아 찔러 들어가듯이, 톱이 거대한 물체를 자르고 베어먹듯이.


불길은 의지와 단단함을 가지고 칼처럼 굴었다.


내부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용의 속은, 역시 비슷하게 어두운 톤이었다. 사람의 피가 오래도록 묵어 거뭇해진 것과 같은 톤이었다. 어째서 그런 색깔이 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초록빛이 나는 듯도 했고. 적녹이라고 색깔의 이름을 붙여도 어울린다.


지렁이였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다양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외피와 내장 사이에서 충격 흡수제 역할을 하는 비교적 부드러운 살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내장 부위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살들이 다시 나타난다. 생물체의 내부라고 생각하기는 힘든 성질이었지만, 릿샤의 불길들은 끊임없이 그 내부를 살라먹으면서 길을 뚫었다.


검은 용은 대지를 먹고 뒷구멍으로 뱉어내는 지렁이였다. 땅을 먹는 놈이 땅과 닮아있는 건 어째선지 그럴싸해 보이는 모습이다. 작은 불길들은, 곧 MP의 입자들은 공격적으로 검은 용의 몸을 탐했다. 그 모습은 평소 땅을 파고들어가는 검은 용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제는 검은 용이 대지의 신세였다.


대지는 한없이 받아주고, 군소리도 없고. 아니 그 이전에 생명도 딱히 없지만은. 어쨌든 평소에 파고들던 것의 입장이 되어버린 검은 용의 고통은 극심하다. 지렁이 주제에 통감 따위가 잘 발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지렁이는 아니었다. 보통의 지렁이는 당연히, 300미터 정도로 체장이 늘어나지도 않는다. 체고와 폭, 원통형의 몸뚱이가 가진 지름이 거대한 덤프 트럭과 비슷하게 커지지도 않는다.


백 톤의 화물들을 거뜬하게 옮기는 트럭의 모습이, 끝도 없는 수준으로 이어져 있다. 확실하게 거대형종이다. 흰수염 고래의 무게가 백 여 톤이 넘는데, 길게 늘어놓은 몸뚱이의 절반만 자르더라도 대형종의 기준이 되는 고래의 체적과 체중은 한참 넘을 듯했다.


당연히, 예전에 릿샤와 호아킨이 상대했던 검은 용보다도 훨씬 오래 묵은 놈이고 잡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HP또한 그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이거,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미 건드린 놈이었다. 보스 몹의 세세한 스펙에 대해서 건드리기 전에는 알기가 쉽지 않았다. 굴 내부는 놈의 집이었고, 오래묵은 보스 몬스터들은 자신의 권역을 가지게 된다.


보스 몹의 몸 주위에서 뻗어 나오는 MP가 감지술을 방해한다. 탁 트인 곳에 나와 조감도처럼 먼 배경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면, 밀폐된 곳에 숨어있다면 보스 몹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


데슈칸 심부에 있는 검은 용은 여러 마리였고, 릿샤와 호아킨, 최태현이 대강 파악한 바로도 대여섯 마리 정도는 있었다. 인터넷에 가장 흔하게 떠돌아다니는 공략집에 들어 있는 정보에 의한 것이다. 공략집은 의외로 믿을만한 구석이 많았고, 그것들로 장사를 하는 프로의 경우라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날짜를 갱신하면서 최신화된 정보들을 준다.


당장 그들이 인터넷에서 확인한 정보도 이틀 전의 것이었으니, 대략적으로 맞아 떨어질 테다.


개중에서 호아킨과 릿샤가 직접 수색을 해서 한 놈을 고른 것이고, 그게 지금 바깥에 나와 있는 괴물이다.


라이엔은 여전히 썬더스의 목깃을 베개 삼아서 고개를 파묻고, 누운 채로 전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가 어떻게 되었든 갈색 매들을 통제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곧바로 도망칠 것이다. 라이엔은 그렇게 되뇌인다. 겁이 많은 그녀였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서는 특히나 더.


제냐와 최태현은, 아래로 떨어지며 굉음과 지진을 일으키는 거체를 바라보며 조준점을 조정해야 했다. 허공에 떠 있던 길다란 선은 그대로 산맥을 양단할 기세로 내리쳐졌다. 쾅! 하는 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렸고, 그 뒤의 것들은 그저 울림으로 느껴졌다. 거체. 수 백여 톤. 혹은 그것을 훨씬 넘을지 모르는 무게감의 물건이었다.


그저 굼뜨고 둔한 무게만이 아니라, 근육으로 이루어진 듯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무게감이다. 질량의 폭력이었다. 그토록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서도 빠르게 움직인다라는 건 말이다. 그대로 몸뚱이를 박치기해도 성벽이 무너질 테다.


거대형종의 몬스터. 사냥 가능한 적정 레벨을 계속해서 조정해야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깨워버렸고, 화를 돋구었다. 여기서 날고 있으니까, 모른 척 내뺄 수는 있다. 그 뒷감당이 데슈칸 산맥에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 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몬스터들만 살아가고 있는 야지라면 그럴 수 있겠는데, 여기선 보이지 않는 로키 시티에까지 위험이 갈 수 있었다.


이만한 보스몹이 요란을 피우면서 가진 성질로 지랄을 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 아랫 단계의 먹이사슬 위치를 가진 놈들이 밀려난다. 그 몬스터들은 그대로 대군과 같은 기세를 갖게 되고, 순차적으로 하위의 있는 놈들까지 밀어댄다. 자연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 수 있었다. 데슈칸 심부. 레벨 100이 넘어가는 보스 몹들이라는 건 그런 존재다.


일개 생명체가 아니라 재해 따위의 개념과 규모로 생각하는 게 계산이 편하다. 그저 생물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난폭한 지진을 형상화한 무엇이라고 보는 게 좋을지 모른다. 다시금 검은 용을 그렇게 보고, 게임 내의 세계관을 인식하면 극악한 꼴이기는 하다. 심심하면 지진이 일어날 지 모르는 산맥 위의 고원에 도시가 지어져 있었고, 만 단위의 시민들이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까딱하면 떼로 몰살을 당하는 지경이 벌어진다. 옛적, 제국기 때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단위의 인력과 물자가 들어가서 요새 도시를 완성시켰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고대의 유물이 완벽하게 작동하며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MP를 활성화시키고 있었지만.


지금에서 그 유물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제냐나, 혹은 그가 닿을 수 있는 위치의 인간 중에서는 없었다. 사대고가의 일맥들이 모두 모여서, 합의 하에 제국기의 특급 아티팩트를 작동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위용이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낡은 물건들은 형형한 위세를 되찾기 쉽지 않으리라.


일단 시작한 일.


제냐도 그랬고, 파티원들 모두가 그러했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라이엔만 빼고서. 그러나 이미 임전의 각오를 다진 다른 이들 때문에, 그녀 혼자 빠지는 일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눈치는 좋은 여성이었다. 라이엔 핑은 말이다. 그 눈치로 여태까지 잘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줏대 없이, 너무 속없이 굴면서 빠진다고 하면 몬스터를 향할 칼이 그녀에게 날아들 지도 몰랐다. 전투 중에 말없이 무단 이탈을 한다는 건 그런 의미이기도 했다.


진지하게, 상황이 게임 오버로밖에 이어지지 않는 극악한 꼴이라면 그런 비난이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지켜본다. 독전관(전투를 독려하는 직책. 고대의 전쟁에서, 뒤에서 길다란 창 따위를 들고 말단병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잔인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응원했다고 한다)의 창날처럼, 주변 이들의 기세와 눈빛을 받아들이며 라이엔은 입을 다문다.


조용히 두 마리 갈색 매를 다루어 파티원들이 원하는 위치로 옮겨주면 될 뿐이었다.


미리 전음 아티팩트를 착용했다. 파티 사냥에 있어서 쓸만한 기구였다. 거대한 체구를 갖고 있는 몬스터를 레이드 할 때는 특히나 그렇다. 사람보다 아득하게 큰 놈들이라면, 한 마리를 상대할 뿐이었지만 전장의 범위가 아주 넓어져서 서로의 목소리가 잘 닿지 않게끔 되어버린다.


목소리를 전달하는, 전장 내에서의 통신 스킬이라면 릿샤가 갖고 있었다. 호아킨 역시 초보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있었다. 그리 유용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은 모두가 손가락에 하나씩 걸어두었다. 릿샤는 발동시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프리 롤Free role이다. 자유자재로 혼자 움직일 수 있기도 했고, 어련히 알아서 전장을 주관하면서 공격을 퍼부으면 된다.


게다가 전음 스킬도 다룰 수 있었고. 아주 거리가 멀어진다면 조금 무리였겠지만, 일단 한 번 전음의 끈이 이어진다면 지금 정도의 상황은 커버가 가능했다. 수 백여 미터 정도는 말이다. 전투 중에 MP가 난잡하게 흩어지고 충격을 입어서 스킬이 끊어진다면 아티팩트를 아마 사용할 테다.


아티팩트를 쓰는 건 공짜가 아니었다. 사용자의 MP를 소모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고 내장된 에너지를 쓰는 배터리 방식이라 할지라도 의지력은 소모가 된다. 의지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주요한 자원 중 하나였다. HP나 MP처럼 정량이 차례대로 닳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소모값이 있다. 사람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집중을 하면 닳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한 명의 술사가 의지력을 발휘해서 컨트롤할 수 있는 아티팩트의 수는 제한된다. 초상술사로서 주도적인 스킬 사용을 겸한다면 더욱 떨어지고. 지금 릿샤는 레벨에 비해서도 훨씬 높은 수준의 의지력을 보유하고, 다시 그 스펙에서 훨씬 높은 지점의 실제 퍼포먼스Performance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도 기술했듯 그녀가 가진, 현실의 애드윈이 가진 능력치가 높아서였다. 뛰어난 무술의 고수가 시나리오 온라인에 들어와 자신의 분야를 파고들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익힐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머리가 좋았고, 정신력이라고 부를만한 부분의 기능이 남들보다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걸 잘 다루면 캐릭터의 신체를 움직이는 데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릿샤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쪽보다는, 다시 한 번 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의지력을 다루는 데 써먹고 있었다.


랭커가 되는 이들은 그러면 모두 뛰어난 현실적 능력을 가진 이들이며, 이 게임은 재능 있는 이들을 가려내기 위한 경연장이냐, 고 물을 수도 있었다.

일정 부분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재능이 모든 결과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건 큰 요소였지만, 절대적인 요소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부분이다.


절대적인 요소는, 결과 그 자체였다.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짐작하기 어려운 무수한 불확정 요소가 실제 미래를 결정짓는데 들어간다. 그건 ‘알 수 없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 게임 역시 그러하다.

불확정적 요소를 최대한으로 키운 것이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인데다가, 사람들이 도저히 다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컨텐츠를 집어넣어 만들었다. 천재라 할 지라도 삐끗하면 게임 오버가 되는 것이고, 둔재라 할 지라도 이 게임 내에서 진지한 오의를 발굴해내면 클리어 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주인공Hero말이다.


이 게임은 결국 주인공을 찾고 있는 시나리오였다. 방대한 세계관과 사람들을 매료시킬만치 압도적인 그래픽 퍼포먼스, 현실적인 모든 체현률들은 그것을 위한다. 한 명의 주인공이 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시나리오의 마지막 씬에서 그는 어떤 구도로, 어떤 감정과 모습으로 연기를 할 것인가.


연기여도 좋고, 실제여도 좋다. 어쨌건 가상의 세계에서 롤 플레잉을 하고 있으니만큼 어떤 애드립을 보여준다고 해도 훌륭한 연출적 모습이 될 것이다.


만물박사는 총감독 바로 아래에서 거의 모든 선택을 해내는 부감독 정도가 되었다. 부감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맡는 역할은 방대하며, 사람이나 다른 기계, AI가 도저히 대체할 수 없을만한 양이 된다. 절대로 해고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부감독이라고 하는 게 좋으리라.


부감독은 각 유저들의 행동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인간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물박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만물박사 역시 무한한 데이터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처리 능력을 가졌고, 초AI라고 불릴 정도의 정보 처리가 가능한 놈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편차가 생긴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관제 시스템, 보조 시스템이 붙게 된다.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인터페이스, 게임 내 스킬 시스템 따위의 보조에 필요한 것들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의식중에도 발현 가능한 자율신경계와 비슷하리라.

그런 기본적 시스템은 일정치를 할당해서 언제나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만물 박사가 주도적으로 처리량을 더하고 뺄 수 있는 계산식이 존재한다.


어떤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유니크 퀘스트를 맞닥뜨리고, 세계 내의 요소인 온갖 NPC들과, 퀘스트 스토리와 얽히면서 방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쪽에 집중하게 되는 셈이다. 자율신경계처럼 늘 돌아가야 하는 계산력을 빼고서, 나머지 부분은 눈여겨 볼만한 플레이어에게 시스템이 집중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특별한 행동을 할수록, 게임 내에서도 특별한 보상을 주어야 했으니까. 기준은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지만, 실제로 보상을 받는 이들은 소수였다.


애초에 만물박사가 비련의 시나리오를 관리하는 알고리즘 자체도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한 명을 찾기 위해서. 보편적인 관리, 주의 관심은 모든 플레이어에게 돌아가지만 특별한 한 명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가려내는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말했듯 그 가려냄의 기준은 ‘결과’ 그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가혹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고.


살아남은 이가, 혹은 이들이 클리어 씬의 주연들이 될 것이다. 난이도 설정을 잘못했다면, 아무도 없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자로서 몇 안되는 지점까지 남게 된다면, 플레이어 캐릭터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광고판이 되리라는 점이다. 수 억 명이 플레이를 하고 있고, 또 그보다 많은 수가 플레이어였다가 게임 오버를 한 프로그램이다.

이미 사회적 현상 그 이상의 무언가를 도출해낼법한 규모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한 시대에 큰 이슈였고, 가상현실 기기와 맞닿아 있는 생활 수준을 하는 시민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화젯거리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컨텐츠라고 해도 좋았다. 실시간으로 수 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늘 노출되고 내부 정보가 인터넷 상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런 심리와 계산속을 가진 거대 기업 따위도 물론 아주 많았다. 가상현실 게임의 개발사인 태Tae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글로벌 기업 몇은 그런 경쟁에 애달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 되면 이득이라는 식으로 도전 중이기도 하다.


랭커 중에는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들도 깨나 있었다. 정식으로 프로는 아니었지만, 알음알음 그런 세계가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오로지 게임에만 집중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차후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수 억의 옵저버가 쏠리게 되었을 때 기업의 이름과 함께하기를 계약하고서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그런 랭커들의 몸값은 당연히 기대되는 광고 수익에 영향을 받고, 또 다른 여러 기업과 랭커들 간의 치열한 눈치 경쟁으로 인해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게임사에서 전혀 주관하지도 않고 만들어내지도 않았지만 여느 프로 게이머들과 비교해서도 그리 섭섭치 않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제대로 서비스 된 이후로, 게임 업계는 크게 쇠퇴하기도 했다. 게임의 기술력면으로 보자면, 또 게임 업계 전체적으로 보자면 진일보하고 있었지만. 다른 게임사들의 입장에서만 놓고 보자면 쇠퇴였다. 1, 2위를 다투던 게임들만이 간신히 뒷전으로 밀려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애매한 자리를 지키며 수익을 내던 게임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으니까.


전 세계인의 시간은 공평하게 24시간이었고, 게임을 즐길만한 인구 역시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여가시간 총량을 따져 보았을 때,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빼앗아간 파이의 부위가 어마어마한 탓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온갖 게임사와, 또 그에 결부된 거대 기업들의 질타나 눈총, 견제를 받았지만 그들의 뒤쪽에도 만만찮은 이름들이 버티어 섰기에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게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김서원이 게임에 대해서 이미 잘 알기도 하고, 시작해볼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름과 유명세 정도는 들어볼 수 밖에 없는 종류였다.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그런 타이틀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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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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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5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6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1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7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16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2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9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4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5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6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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