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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동서남북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연재수 :
252 회
조회수 :
778,664
추천수 :
12,451
글자수 :
1,158,507

작성
16.12.29 01:08
조회
3,871
추천
57
글자
10쪽

54. 궁구窮究

DUMMY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앞에 있는 나뭇가지의 싱그러운 새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춤추고 저 멀리 보이는 나뭇잎들도 이리저리 어울린다.

이 바람의 크기는 얼마인가?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저 멀리 나뭇가지도 흔들리니 적어도 여기서 저기까지의 거리 이상의 크기일 텐데 여기서 저기까지만 하더라도 얼마나 큰 크기인가?

만일 저 크기를 아주 작은 크기로 압축하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닐 것인가?

한중漢中 인근 어느 깊은 산 중턱에 작고 초라한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앞은 시원스레 트여 있어 전경前景이 멀리까지 쭉 뻗어 있다. 스승님의 무덤이다. 무덤 옆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주은백이 상념에 잠겨있다.

산에 들어왔을 때 잔설殘雪이 남아있던 산꼭대기도 푸르른 녹색으로 덮였으니 제법 시간이 흐른 셈이다.

‘바람을 느끼고 바람을 생각하거라’

무공 수련중인 주은백의 등뒤에서 스승이 일깨웠다. 하지만 주은백은 바람을 느끼기 보단 검을 느꼈다. 물론 스승님이 일러주는 무공 구결口訣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 주은백의 태도를 눈치 챈 스승은 종종 검을 느끼지 말고 바람을 느끼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주은백은 새겨 듣지 않았고 스승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느끼라고 한대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바람을 느끼려 할 것이다.

지금 주은백은 스스로 바람을 느끼려 했고 바람의 정수인 풍정風精을 찾으려 했다.


주은백이 눈을 감고 스승님과의 대화를 회상한다.

“저기 푸르른 나무가 보이느냐?”

“네”

“나무의 뿌리도 보이느냐?”

“보이진 않지만 뿌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모든 세상 만물에는 각각의 근원인 뿌리가 있다. 하지만 뿌리는 눈에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의 뿌리는 어디에 있겠느냐?”

“바람에도 뿌리가 있습니까?”

“세상 만물에 뿌리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 바람의 뿌리는 강물의 뿌리와 같이 병치倂置의 작용에 있다. 병치의 작용을 알아야 풍정을 얻을 수 있다. 강물이 어찌 강물인지를 생각해 보거라”


주은백이 눈을 떴다.

병치의 작용을 알아야 한다···.

병치란 무엇인가? 한 곳에 두 가지 이상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병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병치의 작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강물이라··· 바람의 뿌리가 강물의 뿌리와 같은 원리라···

스승의 말씀이 머리를 맴돈다. 머리 속에서 뭔가가 잡힐 듯하면서도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주은백이 상념에 더욱 깊이 잠겨갔다.


아~

강물을 생각하던 주은백의 머리에 지난 여름에 보았던 동정호의 석양이 떠올랐다.

그렇다. 호수와 강물은 다르다. 분명히 스승님께서는 강물을 생각하라 하셨다. 호수는 고여 흐르지 않는 물이다. 반면 강물은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이다. 바람도 공기가 흐르는 것일 것이다. 고여 있다면 바람은 없다. 그런 의미로 강물과 바람은 같이 흐르는 것이다.

왜 흐르는가?

그렇다. 땅 바닥의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은 흐른다. 높음과 낮음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병치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병치의 작용이다. 흐르는 물은 힘을 갖기 시작한다. 즉, 병치의 작용으로 힘이 생기는 것이다. 높낮이가 큰 곳에서 물은 폭포가 되어 엄청난 힘을 발출한다.

바람도 필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고 흐르기 때문에 힘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에 있어 높낮이는 무엇인가? 어떻게 병치의 작용이 생기는 것인가?

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졌건만 주은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풀어야 할 것이 남은 탓이다.



널찍한 관도를 두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아 쾌적함을 담고 있었다.

날씨가 쾌적하면 기분이 쾌적해지고 기분이 쾌적해지면 입 밖으로 말이 쏟아지기 마련이건만 두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말없이 발걸음만 내딛고 있었다.

묵진휘의 몸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치유되고 있었지만 워낙 상처가 중했던 탓에 아직 완쾌에 이르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고 걷는 중에도 몸을 의식하지 않고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어 가면서 잠깐 보았던 어린 아이의 죽은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분명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훈련 받은 살수殺手는 아니었다.

‘어떻게 두려움에 뜨는 어린아이를 자객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

적들의 간악함에 몸서리기 쳐졌다. 하지만 이내 우학사 마을에서 구경 삼아 본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생각났다.

전쟁에서 적을 속이는 것은 병법의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했다. 그 말도 분명히 맞다. 자신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속임수에 당했다. 도대체 자신이 무얼 알고 있었던 것인가? 작은 속임수는 허용되고 큰 속임수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가? 속임수에 크고 작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묵진휘의 마음이 심란했다.

전쟁을 특수한 국면으로 간주하지 않고, 속임수에 경중輕重을 두지 않으면 간악함과 흉계가 세상을 뒤엎을 것인데 그런 세상이 어찌 사람이 사는 세상일 수 있을 것인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산을 내려온 지 불과 일 년여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무수한 일에 휘말려 들었고 사람을 죽였으며 종내 자신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 들었다.

세상이 원래 이리 복잡한 것인가? 아님 자신이 알지 못하는 큰 실수를 저질러 이리 복잡하게 된 것인가?

심란함에 심란함이 더해졌다.

노산을 향하면서 수일째 거듭해오는 스스로를 향한 의문들이었다.


저 멀리 노산 자락이 보이고 있었다.

스승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님 얼굴이 떠오르자 머리 속의 상념들이 마치 두려워 숨기라도 하듯 사라졌다. 모처럼 개운한 기분이다. 노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 묵진휘의 머리 속에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황야···

자신의 숱한 의문들이 이황야의 얼굴 앞에서도 초라한 모습으로 작아졌다. 애초 그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 앞에 의문이 설 수 없었다.

자신과 이황야가 비교되었다. 이황야는 태산같이 우뚝한데 비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이 작고 초라한 자신이 있을 뿐이다.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쓰라림 속에서 순간 환한 생각 한줄기가 피어 올랐다.

스스로를 괴롭히던 의문들. 답을 찾을 수 없던 질문들.

하지만 답을 찾지 못했지만 스승님과 이황야의 얼굴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그 의문과 질문들이 작아졌고 종내 사라졌다.

그렇다. 꼭 직접적인 답을 찾아야만 지울 수 있는 의문들과 질문들이 아니다.

생각을 달리하면 없어져 버려 자연히 해결될 수 있는 의문과 질문들이다.

답을 찾기 위해 지향志向하고 포기와 휩쓸림을 지양止揚할 때, 그 둘이 일통一統될 때, 현재 관점의 궁극에 도달하여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는 달관達觀에 이를 수 있음을 묵진휘는 깨닫기 시작했다. 아직 개념화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다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었다.


복거유는 상념에 잠겨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묵진휘를 가만히 쳐다 보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복거유가 묵진휘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복거유가 묵진휘와 대결한 첫 느낌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수준. 언뜻 들어 알고는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자신이 접할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경지.

현재를 생각하면 허망했고, 미래를 생각하면 절망스러웠다. 분명 수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직으로의 복귀를 포기했다.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곤 묵진휘를 막연하게 뒤따르기 시작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를 지금의 그이게끔 만든 기연奇緣이 무엇인지를.

처음에는 그 기연이 훌륭한 스승이라 생각했다. 묵진휘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 있으리라. 자신과의 격차는 훌륭한 스승의 존재 유무로 인한 것이리라.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지금 그는 스승을 만나러 가고 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

하지만 노산으로의 여행과정에서 복거유는 가까이에서 묵진휘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묵진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했다.

복거유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봤다. 자신도 열심히 수련했다. 하지만 깊게 사유思惟하지 않았다. 자신은 무공을 몸으로 익히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묵진휘는 몸의 수련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머리로도 수련하는 듯 했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을 상승 무공 원리, 반복 수련, 끊임없는 사유를 통한 궁구窮究···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임을 복거유는 알게 되었다.

줄탁동시줄啄同時···

병아리가 온 힘을 다해 안에서 껍질을 쪼고 밖에서는 어미도 동시에 껍질을 쪼아주어야 비로서 한 마리의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복거유는 몰랐지만, 그도 사유를 통한 궁구의 과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불가佛家의 화두話頭처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이런 상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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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84 ge**
    작성일
    16.12.29 05:32
    No. 1

    눈 뜨자마자 이 글부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4 ge**
    작성일
    16.12.30 10:49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10 임규진
    작성일
    16.12.30 11:02
    No. 3

    선작수가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렇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한분이라도 계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거의 완성된 글이니 연재는 계속 될 것입니다. 제목 변경은 말씀대로 조금 더 지난 후 고려해 보겠습니다. 고맙게 읽어 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화천애
    작성일
    17.02.02 20:12
    No. 4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물물방울
    작성일
    17.08.18 17:55
    No. 5

    대박나기를 기원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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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 재회 +7 16.12.30 3,740 58 10쪽
57 56. 그리움 +2 16.12.30 3,688 53 10쪽
56 55. 회오리 +2 16.12.30 3,815 57 10쪽
» 54. 궁구窮究 +5 16.12.29 3,872 57 10쪽
54 53. 숙원宿願 +2 16.12.29 3,514 54 11쪽
53 52. 결별의 시작 +2 16.12.29 4,186 55 11쪽
52 51. 멸구滅口 +4 16.12.27 4,207 57 9쪽
51 50. 위장 +3 16.12.27 3,554 5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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