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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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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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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6.12.2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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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4. 아픔

DUMMY

“네게 조부가 되시고 내겐 스승님이신 묵태부 어르신께서는 선대 황제시설 충신의 사표師表였느니라. 선대황제께서도 그런 어르신을 총애하여 오랜 세월 마치 친구처럼 대하셨다. 어르신께서는 학문도 나라에서 으뜸이셔서 따르는 유생儒生들이 천하에 산재했었지. 그런데 갑자기 조정朝廷에서 물러나셔서는 여기 항주로 낙향하셨지. 옛 집터가 이곳에서 산등성이 하나 돌아가면 지금도 그렇게 있다. 낙향하시곤 미리 그리될 줄 알고 계셨다는 듯이 선대황제께서 붕어崩御하셨지. 조정이 혼란에 쌓였지만 스승님께선 선대황제의 장례가 끝나면 곧 진정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그런 잔학무도한 사건이 발생한 거야”

우학사는 길게 얘기하는 것이 조금 힘이 드는지 여기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날도 나는 스승님을 아침부터 찾아뵈었고, 저녁 무렵 인사를 드리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인시寅時가량 되었을 무렵 여기 온 동네가 시끄러워졌지. 산등성이 너머 묵태부께서 계시는 장원이 흉수들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죽어있다는 거야. 나는 그 소리에 경황이 없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달려갔지. 휴우~”

우학사가 길게 한숨을 쉬느라 다시 말을 잠시 끊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참해도 그렇게 처참할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비린내가 진동해 아침도 먹지 못한 내가 헛구역질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집안에 있었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죽어있었다. 칼에 찔리고 도에 베여 어떤 시신은 손이 짤려 있었고 어떤 시신은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나는 먼저 스승님을 찾았지. 스승님께서는 서재에 반듯하게 엎드려 계셨다. 다행이 시신은 멀쩡한 상태였으나 검에 깊이 찔리신 듯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미 서재 바닥에 흥건히 굳어있었다. 서재에 있는 가구와 서랍, 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흉수들이 뭔가를 찾으려 뒤진 듯 보였다. 진휘 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도 스승님과 비슷한 자세로 이미 숨이 끊어져 계셨다. 마찬가지로 흉수들이 뒤진 흔적이 뚜렷했다. 그리곤 너를 찾았지. 아무리 집안 곳곳을 뒤져도 너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놈들이 너를 데려갔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알게 되었지만 스승님처럼 흉수의 습격을 받은 전대 황제의 신하들이 여럿이더구나. 모두 충신으로 이름 높았고 선대 황제 붕어 전후로 낙향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날의 참담했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지 말을 마친 우학사는 심력心力을 거의 소진한 듯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묵진휘도 얘기를 듣는 어느 순간부터 두 주먹을 있는 힘껏 말아 쥐고 있었기에 손바닥에 손가락 끝이 꽂혀 피가 베어나올 듯 했다.


곳곳에 부서진 기와장이 흩어져 있고 주춧돌들이 가지런히 남아 있어 옛집의 흔적은 분명했지만 이제 변변한 지붕은커녕 담벼락 하나 남은 것이 없는 옛 집터는 을씨년스러웠다.

밤을 세워 우학사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얘기를 전해들은 묵진휘는 날이 밝기 무섭게 옛 집터를 찾아왔다.

묵진휘는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여러 감정들로 인해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웠다.


우선 낯설었다. 자신 스스로 가족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할아버지라 부르는 스승님과만 살았다는 듯이 가족에 대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떠올리자니 낯설고 어색했다.


다음에는 분노했다. 묵진휘는 분노한 적이 없었다. 분노할 일이 없었기에. 분노를 배운 적이 없었건만 묵진휘는 분노가 어떤 것인지 이제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비명에 돌아가시던 할아버지와 가족들, 장원의 모든 식구들 모습이 생생히 머리에 떠올랐다. 이유도 모른 채 눈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남편이, 부인이, 친구가 죽어가는 모습을 자신도 죽어가면서 바라봐야만 했던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겠는가? 그 비통한 심정을 누가 감히 다 알 수 있으랴? 흉수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궁금했다. 흉수들은 도대체 왜 그런 잔혹한 짓을 저질렀던가?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 답답한 심정이 불길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웠다. 근엄하신 할아버지, 따듯한 할머니, 서글서글한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그들이 그리웠다. 얼굴 한번 본적 없지만 우학사의 얘기를 듣는 동안 묵진휘의 머리 속에 가족들 얼굴이 하나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얼굴처럼. 이제는 볼 수 없기에 너무나 보고 싶었다. 어머니 품에 안겨 보고 싶었고 아버지와 산책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싶었다.


한밤에 자신을 안고 뒤쫓아 오는 칼을 피해 산길을 달린 유모도 보고 싶었다. 살아 있다면 이젠 자신이 유모를 돌볼 수 있으리라.


묵진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흉수를 찾아 궁금함과 분노를 풀리라 다짐했다. 묵진휘는 고개를 들어 그 다짐을 하늘에 새겼다.



추위가 늦게 물러가는 감숙성 난주에도 조금씩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도 날카로움이 사라졌고 겨우내 얼었던 땅도 녹아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주의 객잔에 며칠째 머물고 있는 유혜연의 마음은 여전히 추운 겨울 마냥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지났건만 주은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혜연의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심란했다.

주은백이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가, 주은백의 마음이 변해 자신이 싫어져 오지 않는 것인가 싶어 두렵기도 했다가, 그냥 길이 지체되어 조금 늦어지는 것이겠거니 싶어 스스로를 위로도 했다가, 약속자체를 잊었는가 싶어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걱정했고 두려워했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서운해 하기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었다.

“그 놈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놈은 아닌데···”

파파도 이상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뱉었다.

“방에만 있었더니 답답하구나. 여기 난주 구경이나 하면서 조금 더 기다려보자꾸나. 난주는 삭도면削刀麵이 유명한 곳이다. 맛도 좋을뿐더러 삭도면을 만드는 것도 볼만한 구경거리라 더구나. 같이 가보도록 하자”

파파가 시름에 잠겨있는 유혜연을 끌고 객잔을 나섰다.

삭도면은 무 같이 생긴 밀가루 반죽을 한 손에 들고 젓가락 같이 생긴 가늘고 날카로운 칼로 반죽을 얇게 삐쳐 면발을 만들었다. 그런데 면발을 만드는 모습이 자못 신기했다. 물이 끓고 있는 큰 솥으로부터 대여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가늘고 날카로운 칼로 반죽을 힘차게 삐쳐내면 조금 넓으면서 얇은 면발이 허공을 날아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솥으로 쏙쏙 들어갔다. 제법 빠른 속도로 칼질을 하는데도 한 번의 실수 없이 삐쳐진 면발이 솥으로 들어가는 광경은 기예단의 공연인 듯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파파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나온 유혜연도 그 순간만큼은 근심을 지우고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출출했는데 잘 되었다. 이 참에 아예 들어가 맛도 좀 보도록 하자꾸나”

파파가 다시 유혜연을 이끌고 삭도면을 파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두 그릇을 주문했다.

“그 놈이 약속을 어길 놈은 아니다. 조금 늦는 것일 게다. 만일 며칠 지나도 그 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필히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그러한 것일 테니, 우리가 청해로 돌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놈이 청해로 직접 찾아 오거나 달리 기별을 넣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거라”

파파가 유혜연을 위로했다.

“파파가 어떻게 그사람 마음을 알겠어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했잖아요? 분명히 마음이 변해 오지 않는 것일 거예요”

유혜연이 시무룩하게 응수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 할미가 이토록 오래 사는 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천하 제일일 게다. 믿기지 않는다면 이 할미랑 내기를 해도 좋다.”

“흥~ 제가 아직도 어린 줄 아세요? 파파가 저를 위로하려고 하시는 말씀인줄 저도 다 알아요.

유혜연이 이번에는 뽀로통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혜연의 마음은 조금 풀려 있었다. 왠지 할머니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 파파는 경험이 많으니 사람 보는 눈도 뛰어 나실 거야. 파파 눈에 은백 오라버니가 신의 없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필히 그럴 거야.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아진 거야’

유혜연은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다음날 유혜연은 파파의 손에 이끌려 난주의 자랑이라는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을 보러 갔다. 원래 주은백이 오면 같이 보려고 청해를 떠날 때부터 생각해 놓은 곳이라 선뜻 따라 나서기 싫었으나 주은백이 오면 한번 더 보면 된다는 파파의 얘기에 마지 못해 따라 나섰다.

병령사 석굴은 흙벽에 수백 개의 아름다운 불상이 조각으로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불상의 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려져 않지 않았다.

하지만 파파와 불상을 둘러보면서 유혜연은 어렴풋이 수많은 불상이 만들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지금 불상을 둘러보는 자신만해도 마음에는 걱정과 두려움과 서운함이 들끓고 있는데 옛사람들도 그러했으리라. 그래서 누군가 두려운 마음을 이겨내기 위한 간절함으로 이처럼 벽에 불상 하나를 조각했고, 그걸 본 또 다른 사람은 걱정을 이겨내기 위한 간절함으로 다른 모양의 불상 하나를 조각했으리라. 그렇게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모여 수백 개의 불상을 이루게 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수많은 불상 하나하나의 간절한 마음이 유혜연의 가슴으로 스며들었고, 그런 간절한 마음에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뒤엉켜 유혜연의 마음이 어느 듯 홀가분해졌다.

아~ 이렇게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유혜연의 눈에서 절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유혜연은 그렇게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해지고 있었다.


다시 난주에서의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끝내 주은백은 난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주를 떠나 다시 청해로 돌아오는 날, 유혜연은 파파 품에 묻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지만 허물어지진 않았다. 병령사석굴을 마음에 떠올림으로써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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