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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동서남북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연재수 :
2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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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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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58,507

작성
17.03.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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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21. 속죄贖罪

DUMMY

“그 때도 얘기했었지? 내 평생 유일하게 진심으로 좋아했었다. 네 고모.”

“좋아하면 그리하는 것이냐?”

적발인이 억지로 고모를 취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선 안되지. 절대 그러면 안되지. 그런데 내 속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 함께 살고 있지. 그 놈은, 그 놈은 기다릴 줄을 모르는 잔혹한 놈이다. 그 놈은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미친 괴물이지. 큭큭.”

적발인이 자조自嘲적인 웃음을 날렸다. 주은백은 적발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좀 전에 봤던 이지理智를 잃어버린 자신을 괴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 속에 있는 놈이니 네 놈이 책임질 일.”

주은백은 단호했다. 비록 이지를 잃어버린 광기가 그리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그 놈도 분명히 나니까. 크크. 변명 같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네 고모님 무덤을 찾아갔었다. 사람을 풀었더니 금방 위치를 알 수 있었지. 물론 제정신일 때지. 그곳에서 자결로 네 고모님께 용서를 구하려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사부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지. 내 속에 괴물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굶주림 속에 있던 어린 나를 구해준 사람이기도 하지. 그를 배신할 수 없었다. 대신 평생 증오하기로 했지.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자책과 증오. 지옥같은 나날이었다. 이제 편안해질 수 있겠군. 자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크윽~”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처럼 호흡도 흐트러짐이 없이 제법 길게 말하던 적발인이 결국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피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피를 게워냈다. 이전 호흡도 가빠지는 듯했다.

주은백은 적발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광기가 고모님을 해한 것이다. 도대체 그 광기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눈앞의 적발인인가? 아니면 그 사부라는 자인가?

주은백은 머리 속이 헝클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민하지 말라.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크윽~. 행여 내 사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마라. 그는··· 강하다. 인간이 아니다. 잊어버려라. 헉헉··· 부탁이 있다. 내 목을 짤라 네 고모님 무덤에 받치도록 하라. 그래서 네 고모님 원혼을 달래주도록 해주게. 크윽~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바네. 내 이름은 차···시···천.”

적발인은 점차 호흡이 가빠졌고, 고통이 밀려오는 듯 신음을 집어 삼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하는 것이다. 속죄의 대가로 자신의 목을 바친다고.

적발인, 차시천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더니, 이제까지 버텨왔던 팔에 힘을 풀자 도를 잡고 있던 팔이 꺾이더니 도와 함께 털썩 땅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곤 다시는 미동도 없었다. 죽은 것이다. 스스로 말한 자책과 증오의 생이 드디어 마감을 한 것이다.

주은백의 가슴은 오히려 답답했다. 그토록 찾아왔던 집안의 원수 적발인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한 것이다.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에서 마지막 의무로 여겨왔던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제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리라. 그런데, 그런데 이 답답한 심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은백이 쓰러져 있는 차시천의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미소를 띤 얼굴은 아니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자유를 찾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주은백이 그렇게 차시천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누군가 주은백의 손을 살며시 잡아왔다.

주은백은 그 따스한 온기에 답답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유혜연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차시천의 얘기를 들으면서 주은백의 집안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발인 차시천의 한恨 맺힌 일생이 유혜연의 가슴에 슬픔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고스란히 주은백의 몫임을 느낀 것이다.

유긍연이 말없이 주은백과 유혜연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은후와 사령주도 마찬가지였다.

주은백과 유혜연이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화사한 봄날의 푸르른 신록 속에서 가슴 시린 슬픔의 가을이 공존共存하는, 역설의 미학美學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하염없이 가만히 적발인을 바라보고 있던 주은백이 유혜연의 손을 놓곤 공터 가장자리로 가더니 한적한 곳에 검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 사람 정도가 편안히 누울 땅을 파는데 걸리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땅을 판 후 주은백이 차시천의 시신을 가져다 땅 속에 편이 뉘었고 이내 흙을 덮어 나갔다. 그리곤 돌을 구해 조그만 봉분이 되도록 쌓아 올렸다.

“오늘 북경으로 가긴 틀린 것 같군요. 다시 마을로 내려가서 하루 더 있다 가시죠.”

유긍연이 서은후를 바라보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자 서은후가 고개를 끄덕인 후 유혜연과 주은백을 이끌곤 다시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령주는 보이지 않았고 성장로와 두 빈객의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 유긍연이 마지막으로 남아 공터를 휙 한번 둘러 본 후 발 밑에 떨어져 있던 길다란 나무 토막 하나를 발로 툭 차올려 잡더니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곤 다시 나무 토막을 휙 집어 던졌다.

유긍연이 집어 던진 나무 토막은 허공을 날아 차시천의 묘 앞 땅바닥에 푹 꽂혔고, 표면에 새겨진 유려한 글씨는 누군가 정성 들여 세운 비목碑木처럼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차시천지묘 車時天之墓



북경 외곽의 이름 없는 조그만 산 밑에 화려한 비밀장원 한 채가 서있었다. 비밀장원 안에는 여러 채의 전각이 현묘한 배치를 이루며 세워져 있었는데 결코 돈만 많은 졸부가 세울 수 있는 장원이 아니란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밤이 깊은 비밀장원 곳곳에는 조그만 횃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으면서 장원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참으로 운치가 있구려.”

곽태감이 연신 감탄을 뱉어냈다.

“과연 승상부의 비밀장원은 다릅니다. 기품과 격조가 누구도 쫓아오기 어려울 듯 합니다.”

평소 아부치레가 적은 조부태감까지도 감탄을 쏟아냈다. 동창의 비밀장원과 비교하면 격조의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하하~. 이곳은 승상부 비밀장원이 아닙니다. 승상부 비밀장원이 너무 누추해 태감 어른을 모시기적합치 않아 제가 개인적으로 잠시 빌린 곳입니다. 조금 있다가 이곳 주인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하하”

승상 사응렬이 호탕하게 웃으며 태감을 받드는 척했지만, 곽태감과 조부태감에게는 자기과시에 다름없는 공허한 소리로 들렸다. 애초 호탕한 웃음 속에는 겸손과 공손함이 함께 깃들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승상께서 이리 극진한 대접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허허.”

“우선 저리로 드시지요.”

승상이 가리키는 전각은 다른 전각에 비해 오히려 작은 듯했으나 기둥과 창문의 장식과 문양 등이 고급스러웠고 처마 밑에는 다채로운 색깔로 채색한 것이 화려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곽태감과 조부태감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전각 중앙에 놓인 큰 탁자에 이미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져 있어 거기서 풍겨나는 향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그득할 정도였다.

“대단합니다. 내 평생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올시다. 어디서 이리 대단한 숙수를 모셔왔소? 황궁수라간의 숙수들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오. 하하”

곽태감이 정말로 감동한 듯 탄성을 자아냈다.

“자~이리 앉으시지요.”

사 승상이 상석 자리를 곽태감에게 권유했다. 곽태감은 평소 그러지 않던 사 승상이 왜 이러는지 잠시 의아했지만 이제 과거의 사 승상으로 돌아간 것이라 여기고 이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호탕한 웃음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 상석 자리에 앉았다. 곧 이어 사 상승이 곽태감 맞은 편에 앉았고 조부태감이 측면에 앉았다. 비록 측면이라곤 하나 웬만한 탁자의 가로 면과 비교해도 작지 않을 정도의 길이였기에 조부태감이 앉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세 사람이 앉자 사 승상 뒤편 방문이 열리더니 화사한 여인 하나가 나비가 날 듯 살포시 들어왔다. 화사하면서도 고상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미인 그대로였다.

“술을 올릴까요?”

옥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목소리였다.

곽태감은 들어온 여인을 바라보며 이미 눈동자가 풀려갔다. 원래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큰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체념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가지만, 권력과 금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들은 체념과 포기를 알지 못한 채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오히려 끊임없이 추구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몰락하지만.

평소 여우 같고 의심 많은 곽태감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으니, 미인을 너무 좋아했고 미인에게 약하다는 것이다. 사 승상은 익히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도록 하라.”

사 승상이 허락하자 들어온 여인이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갔고, 여인이 나가자 곽태감의 눈에 불안한 빛이 일렁였다.

“저 여인은 누구요?”

“이 곳 주인을 모시는 아이입니다. 곧 다른 시중드는 아이들이 들어 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하하”

사 승상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다시 방문이 열리며 시중 드는 여인 셋이 술을 들고 들어왔다.

“너는 저기 앉거라. 어르신을 극진히 모셔야 한다. 너는 저기, 그리고 너는 여기 앉도록 하거라. 하하”

사 승상이 세 여인이 앉을 곳을 지정해주었다. 들어온 여인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곽태감에게 배당했지만 곽태감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곁에 앉은 여인도 대단한 미인이랄 수 있었으나 좀 전에 들어왔던 여인과 비교하면 천양지차天壤之差의 간극이 있었다.

곽태감은 갑자기 달아올랐던 기분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산해진미의 기름진 음식도 입안에서 모래처럼 여겨졌고 그윽한 향의 술도 쓰기만했다.

세 사람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 곧 술자리는 무르익어 갔지만 곽태감에게는 술을 기울일수록 들어왔다 나간 화용월태의 여인 모습이 점점 눈에 어른거렸고 갈증은 커져만 갔다.

‘이상하구나. 예감이 좋지 않아.’

조부태감은 안절부절 하는 곽태감을 보면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의 노련하고 여우 같은 곽태감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 승상은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그런데 곽태감은 이미 무장해제당한 사람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조부태감은 불안했지만 곽태감에게 어떤 주의나 경고를 줄 수 없었다. 이미 그런 것을 받아 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사막에 내팽개쳐진 사람에게 물 말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밤이 깊을수록 곽태감의 갈증은 점점 커갔고, 조부태감의 불안은 점점 깊어갔지만, 사 승상의 호탕한 웃음 소리와 여인들의 교태 섞인 웃음소리도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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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27. 투항과 저항 +3 17.04.06 2,668 48 11쪽
127 126. 현무당 특수조 +4 17.04.03 2,814 48 11쪽
126 125. 정저지와井底之蛙 +3 17.04.01 2,753 43 11쪽
125 124. 또 위기 +2 17.03.30 3,197 48 10쪽
124 123. 허정虛穽-빈 구덩이 +3 17.03.27 2,784 55 11쪽
123 122. 무인武人과 정치인政治人 +2 17.03.25 2,855 44 11쪽
» 121. 속죄贖罪 +2 17.03.23 2,772 48 11쪽
121 120. 풍정風精 +2 17.03.21 2,798 49 11쪽
120 119. 재회再會 2 +2 17.03.19 2,858 49 10쪽
119 118. 패거리 +4 17.03.17 2,953 49 10쪽
118 117. 무복武服 +3 17.03.15 3,074 47 9쪽
117 116. 승상부丞相府 +4 17.03.13 3,060 42 10쪽
116 115. 쪽지 +2 17.03.11 2,980 43 10쪽
115 114. 역할분담 +3 17.03.09 3,021 47 11쪽
114 113. 감탄고토甘呑苦吐 +3 17.03.07 2,993 43 11쪽
113 112. 눈물 +3 17.03.05 3,213 47 10쪽
112 111. 부서지는 햇살 +2 17.03.03 3,173 45 12쪽
111 110. 반성反省 +2 17.03.01 3,191 45 11쪽
110 109. 숨어있는 눈 +2 17.02.27 3,081 46 12쪽
109 108. 예상된 기습 +2 17.02.23 3,181 48 11쪽
108 107. 구사일생九死一生 +2 17.02.21 3,256 48 11쪽
107 106. 마지막 인사 +3 17.02.19 3,501 48 11쪽
106 105. 전략戰略 +2 17.02.17 3,227 48 11쪽
105 104. 절체절명絶體絶命 +2 17.02.15 3,163 46 12쪽
104 103. 호위 +2 17.02.13 3,329 5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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