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동서남북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연재수 :
252 회
조회수 :
778,710
추천수 :
12,451
글자수 :
1,158,507

작성
17.03.21 12:50
조회
2,798
추천
49
글자
11쪽

120. 풍정風精

DUMMY

체구와는 반대로, 검劍을 쥔 체격이 큰 노인과 도刀를 쥔 체격 작은 노인이 일정령주를 향해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에 성장로는 두 노인 사이에 서서 별다른 기수식 없이 검을 땅으로 내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성장로는 이미 싸움의 승패를 가늠하곤 마음을 비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성장로는 무인이 아니었다. 무인은 승패를 미리 가늠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떤 점에선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바둑에 있어 반상무인盤上無人의 경지. 바둑을 둘 때는 앞에 앉은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몰입의 경지. 그것이 무인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로는 이미 회에서 조직의 문화에 젖어버린 사람이었다. 무인이 조직의 문화에 젖으면 진정한 무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조직의 생리가 무인의 생리에 우선하기 때문에.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곧바로 절망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빈객은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도 눈 앞의 상대가 내뿜는 엄청난 기도를 느끼며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바라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치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두 노인이 동시에 일정령주를 향해 검강을 발출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공격이었다. 두 노인은 승산이 없을 경우 상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을 틈을 탄 선공先攻이 한 가닥 희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정령주는 두 빈객과 차원을 달리하는 고수였다. 두 빈객의 날카로운 강기들이 싸늘하고 날카로운 파공음을 울리며 일정령주에게 날아들었지만 일정령주가 가볍게 두 손을 휘돌리자 새빨간 붉은 기운이 넘실대더니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강기들을 녹여버렸다.

‘어떻게 강기들이 녹아버린단 말인가?’

일정령주의 간단한 일수一手에 자신들이 사력을 다한 강기들이 녹아버리자 두 노인은 아연실색했다. 평생을 도산검림에서 살아온 두 노인도 강기가 녹는 것은 처음 본 것이다. 아니 들은 적도 없었다. 그만큼 일정령주의 장풍掌風은 극도의 양강지공陽剛之攻이었다.

원래 마교는 불을 숭상했고 신성하게 여겼으며 모든 힘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천마의 무공은 양기陽氣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많았다. 일정령주가 익힌 무공도 천마의 고절한 극양지공 중 하나인, 하늘을 태운다는 의미의 흔천신공焮天神功이었다.

기습과도 같은 합격 선공이 막히자 두 노인은 옆에 있는 성장로를 돌아봤다. 무슨 대책이 없겠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성장로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장로라고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가 누군지 아는가?”

성장로가 힘없는 목소리로 일정령주에게 물었다.

“모른다.”

성장로는 일정령주의 대답에 더욱 허탈했다. 최소한 적이 누군지 궁금해야 하지 않은가?

“그대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싸우는가?”

성장로가 검보다는 말에 마지막 희망을 담았다.

입장을 바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목숨을 건 마지막 승부에서 최소한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자신은 상대가 구체적으로 누군지 몰랐지만 마교라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반대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죽이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수 있겠는가? 최소한 누군지는 알고 죽여야 하지 않겠는가?

“관심 없다. 네 놈은 마교돈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일정령주의 생각은 단순했다. 마교도이면 같은 편이며 아니면 적인 것이다.

성장로는 일정령주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너무 안통했던 것이다. 성장로가 뒤편에 있던 젊은이, 유긍연에게 눈빛을 보냈다. 당신은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네놈들은 누구냐?”

유긍연이 성장로에게 물었다. 성장로는 유긍연의 질문에 실낱 같은 희망이 비춘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직이오. 아직 우리가 표면적으로 활동한 적은 없지만 강호에서 우리와 같은 세력을 구축한 곳은 없소. 무림맹이라 하더라도 우리 세력에 미치지 못하오. 마교인 당신들과 우리가 연합한다면···”

성장로가 회에서 검토한 적도 없는 실낱 같은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렇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너무 아쉬운 것이다. 이제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누구와도 연합하지 않는다. 친구와 적만이 있을 뿐.”

유긍연이 성장로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더 할말은 없겠지?”

일정령주가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성장로에게 말했고, 성장로는 실낱 같은 희망이 꺼져 하늘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일정령주의 손바닥에서 시뻘건 장풍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두 빈객과 성장로를 덮쳐갔고, 두 빈객과 성장로는 시뻘건 불기둥이 쏘아져 오는 광경을 보면서 일출日出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주은백은 적발인과 제법 오랜 시간 대치하고 있었다. 이지理智를 잃은 적발인도 공격을 해오지 않았고 주은백 또한 이지를 잃은 적발인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정령주와 성장로 일행과의 싸움은 싱겁게 곧 끝이 나고 말았다. 일정령주의 한 번의 방어와 한 번의 공격으로 성장로와 두 빈객은 칠공에서 새까만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극강의 열기에 내장이 모두 타버렸을 것이다. 반면 외양은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극강極强의 기운을 내가중수법을 발휘해 격공장隔攻掌에 실은 탓일 것이다.

주은백은 번민을 끊기로 했다. 비록 이지를 잃은 적이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온 집안의 원수다. 어찌 한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을 거두어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님의 원혼을 위로하리라.

주은백이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하자 적발인도 주은백의 기세를 느꼈는지 도집에서 도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주은백은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도를 들고 대항하는 것이다. 주은백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일년간 산에서 수련한 풍정風精을 끄집어 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주은백이 검을 들어 정성을 다해 위에서 아래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베어갔다. 주은백은 허공을 베어갔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주은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정성을 기울여 베는 듯하게 보였다.

주은백의 검이 거의 땅에 닿을 듯한 순간 불그스름한 노을이 섬광같이, 화사하지만 조용하게 사방으로 폭사했다. 하지만 정말 섬광 같은 것이 폭사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하기는 곤란했고 다만 푸른 하늘이 잠시 노을로 물들었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주은백의 검으로부터 섬광 같은 것이 사방으로 조용하게 폭사하는 순간 적발인도 무언가를 베는 듯 찌르는 듯 유려하고 화려하게 도刀을 움직였고, 도의 움직임에 따라 붉은 강기들이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것처럼 온 사방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적발인과 주은백의 처음 대결에서는 서로의 강기들이 뒤엉키며 회오리가 일고 먼지가 비산하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굉음이 연이어 들렸고 땅이 움푹 꺼졌으나, 이번 격돌에서는 노을 빛 섬광과 붉은 빛 강기들이 잠시, 아주 잠시 번쩍였을 뿐 다른 굉음이나 바람 같은 것이 일지는 않았다. 당연히 먼지도 비산하지 않아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볼 수 있었으며 땅도 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격돌은 한 폭의 그림처럼 온 대기大氣를 붉은 빛과 노을 빛으로 물들였고, 그 장엄함과 숭고함으로 인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과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대단하구나.”

유긍연이 한마디 내뱉자 옆에 있던 서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허~ 저 두 사람이 누구길래?”

“적발인도 대단하지만 저 젊은이는 정말로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저런 무공이 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허 참~”

사령주들도 월광령주를 제외하곤 모두 한마디씩 감탄해마지 않았다.

다만, 유혜연만은 신음 소리가 뒤섞인 짧은 한숨만을 쉬었을 뿐이다. 아름다움 이전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지한 듯한 두 사람의 모습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점차 화폭에서 붉은 빛과 노을 빛이 증발되 듯 현실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주은백의 무복은 군데군데 베어져 있었고, 몇 군데에서는 베어진 무복 사이로 붉은 피가 언뜻언뜻 보였다. 겉모습은 적발인도 비슷했다. 화려한 무복은 거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으며 군데군데에서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적발인이 입으로 계속 피를 게워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은백이 꼿꼿한 자세로 적발인을 응시하고 있는 반면 적발인의 다리는 조금씩 떨려가고 있었고 종내 도를 땅에 꽂아 몸을 지탱하게 되었다.

“훌륭하다.”

적발인이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뱉으면서 땅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주은백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맑고 깊은 눈동자는 이지를 잃기 전의 정상상태로 돌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격돌의 충격으로 이지를 잃은 상태에서 정상상태로 돌아온 듯했다.

“우리는 두 번째 만나는 것이지?”

적발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주은백에게 물었다. 좀 전에 입으로 많은 피를 게워내는 것으로 봐선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했지만 그의 말이나 얼굴에서는 상처의 고통이나 흔들림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

주은백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섬서성 한중漢中을 아느냐고 물었지? 주가장周家莊의 사람이라고 했지? 주연향周蓮香과는 무슨 관계냐?”

적발인이 주은백에게 여러 개의 질문을 동시에 던졌다. 하지만 여러 개의 질문은 사실상 하나의 질문이었다.

“고모님이시다.”

“그렇군. 어쩐지 눈매가 닮았다 했지. 크윽”

주은백의 대답에 싱긋 웃음을 짓던 적발인이 다시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토해내는 피 속에 작은 살덩이들이 뒤섞인 것이 내장조각들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적발인의 상처는 아주 깊은 것이리라.

피를 토하면서 두 다리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지만, 적발인은 팔에 힘을 주고 도刀에 의지해 여전히 꿋꿋이 서있었고, 이내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어깨에 입을 닦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주은백을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동서남북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2 131. 제안提案 +2 17.04.12 2,704 50 11쪽
131 130. 과거過去 +2 17.04.11 2,699 45 10쪽
130 129.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 +4 17.04.09 2,689 48 11쪽
129 128. 신뢰信賴 +5 17.04.07 2,764 45 10쪽
128 127. 투항과 저항 +3 17.04.06 2,668 48 11쪽
127 126. 현무당 특수조 +4 17.04.03 2,814 48 11쪽
126 125. 정저지와井底之蛙 +3 17.04.01 2,754 43 11쪽
125 124. 또 위기 +2 17.03.30 3,197 48 10쪽
124 123. 허정虛穽-빈 구덩이 +3 17.03.27 2,784 55 11쪽
123 122. 무인武人과 정치인政治人 +2 17.03.25 2,855 44 11쪽
122 121. 속죄贖罪 +2 17.03.23 2,772 48 11쪽
» 120. 풍정風精 +2 17.03.21 2,799 49 11쪽
120 119. 재회再會 2 +2 17.03.19 2,858 49 10쪽
119 118. 패거리 +4 17.03.17 2,953 49 10쪽
118 117. 무복武服 +3 17.03.15 3,074 47 9쪽
117 116. 승상부丞相府 +4 17.03.13 3,060 42 10쪽
116 115. 쪽지 +2 17.03.11 2,980 43 10쪽
115 114. 역할분담 +3 17.03.09 3,021 47 11쪽
114 113. 감탄고토甘呑苦吐 +3 17.03.07 2,993 43 11쪽
113 112. 눈물 +3 17.03.05 3,213 47 10쪽
112 111. 부서지는 햇살 +2 17.03.03 3,173 45 12쪽
111 110. 반성反省 +2 17.03.01 3,191 45 11쪽
110 109. 숨어있는 눈 +2 17.02.27 3,081 46 12쪽
109 108. 예상된 기습 +2 17.02.23 3,181 48 11쪽
108 107. 구사일생九死一生 +2 17.02.21 3,256 48 11쪽
107 106. 마지막 인사 +3 17.02.19 3,501 48 11쪽
106 105. 전략戰略 +2 17.02.17 3,227 48 11쪽
105 104. 절체절명絶體絶命 +2 17.02.15 3,163 46 12쪽
104 103. 호위 +2 17.02.13 3,329 54 11쪽
103 102. 함정 +2 17.02.12 3,303 47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