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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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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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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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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7.02.2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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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08. 예상된 기습

DUMMY

남南으로 내려가는 마차는 마치 시간을 횡단하는 것처럼 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경을 향하는 공녀 일행은 이제 제남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남경에서 무한과 정주를 거쳐 북경으로 갔던 행로와는 달리 내려올 때는 북경에서 천진天津과 제남濟南을 거쳐 내려오는 경로를 선택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마차 창 밖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묵진휘에게 공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제서야 묵진휘가 공녀를 바라봤다.

“이태 전 이맘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산蘆山을 내려와 제남에서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때도 지금처럼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두 해가 흘렀습니다.”

“이 사람아, 늙은이 앞에서 세월 빠르다고 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에겐 수십 년 남은 세월 중에 겨우 두 해가 지났겠지만 난 얼마 남지 않은 세월 중에 두 해가 지난 걸세.”

묵진휘의 얘기에 소노가 타박을 했다. 말은 타박이었지만 표정이나 목소리는 전혀 타박의 느낌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하, 아닐세. 흐르는 세월이야 모두 똑같은 세월이지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별하겠는가? 늙은이는 이미 그만큼의 세월을 살았으니 아쉬울 게 무엇이겠나? 세월이 무심하다 하지만 기실 늙은이 마음이 무심한 게야. 그저 장난 삼아 해 본 소리니 신경 쓰지 말게.”

“그래서 늙으면 주책이라는 거예요. 오래 산 게 무슨 자랑이라고 괜히 묵대협에게 그러세요?”

소노의 지적에 묵진휘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자 냉보모까지 나서며 소노를 타박했다. 언뜻 보기에 소노와 냉보모 간에 나이 차이가 많은 듯 하지만 사실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소노가 나이에 비해 얼굴이 노안老顔인 반면 냉보모는 타고난 것인지 관리를 잘한 것인지 중년을 갓 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얼 어쨌다고 타박이시오 타박이. 나만 늙었나?”

“호호. 두 분 싸우지 마세요. 그래 그때 고민 끝에 어디로 가셨어요?”

공녀가 소노와 냉보모가 토닥대는 것을 말리면서 묵진휘에게 물었다. 제남에서 어디로 갔는지를 묻는 것이다.

“남경과 합비를 거쳐 무한으로 갔습니다. 무한에서 열리는 영웅대회를 구경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이 친구들을 만났지요.”

묵진휘가 따뜻한 시선으로 서홍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이제 기억 나는구먼. 남경 객잔에서 자네를 처음 보았지. 자네들과 웬 무사들간에 시비가 붙었을 때 자네가 신묘한 기파氣波를 흘리는 것을 보았지. 대단한 현기玄氣가 느껴졌었어.”

묵진휘의 대답에 소노가 이제 기억이 난다는 듯이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그때 객잔에 계셨던 거군요?”

서홍이 짐짓 놀라며 물었다.

“그랬지. 그래서 자네들을 따라 우리도 무한으로 갔던 걸세. 원래는 북경으로 가려 했지. 우리도 목걸이의 행방을 찾아볼까 하고 나선 길이었으니까. 결국 자네들을 따라간 것이 옳은 결정이었지.목걸이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허허”

“맞아요. 그때 저도 묵대협과 서대협, 남대협을 처음 뵈었죠.”

“남경에서부터 뒤를 따라 오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진신개께서 무한 길거리에서 저희를 붙잡고 얘기하실 때 소노께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까?”

묵진휘도 그때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리가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군. 하하. 아무튼 인연이 작지 않은 셈이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기억들로 얘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갑자기 마차 속도가 줄면서 마부석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쪽에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마차를 세울 목적인 것 같습니다. 모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마차가 급속히 속력을 줄여 멈춰섰다.

“놈들의 기습인 듯 합니다. 공녀님께서는 마차 안에서 대기하십시오. 냉보모가 옆에서 지킬 것입니다.”

소노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묵진휘와 서홍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관도官道 중앙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일 수는 없었다.

“웬 놈들이냐? 썩 모습을 드러내거라.”

소노가 주위를 둘러보며 내공을 실어 준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낄낄낄, 노인네 성깔이 보통이 아니군.”

길옆 숲 속에서 백의白衣 무복의 젊은 무인 하나가 관도 위로 날아 내렸다. 삼십 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호리한 몸매에 하얗고 준수한 얼굴로 여심女心께나 울렸을 모습이었다.

“자네 성깔도 보통은 아닐걸?”

이번에는 흑의黑衣 무복의 젊은 무인 하나가 역시 길옆 숲에서 날아 내렸다. 단단한 체격에 짙은 눈썹이 남자다운 기상을 풍겼다. 어찌 보면 여심女心은 이 젊은이 쪽으로 더 기울 수도 있어 보였다. 날아 내리는 품새가 가뿐하고 부드러운 것이 예사 고수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옆에 있는 젊은 놈을 더 주의해야 할지도 모를걸?”

이번에는 적의赤衣 무복의 젊은 무인이 역시 나타났다.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이 지고는 못사는 성격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의 무복의 사내와 거의 동시에 황의黃衣 무복을 입은 사내와 청의靑衣 무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날아 내렸으나 그들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황의 무복의 사내는 우락부락한 생김새에 커다란 덩치였고 청의 무복의 여인은 미모가 뛰어났으나 은은하기 보다는 화려한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관도 위의 바위를 가운데 두고 마차 반대편에 다섯의 인영이 내려 서자, 마차가 있는 편에도 대여섯 명의 무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차 뒤에서 조용히 뒤따르던 공녀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나타난 호위 무사들은 소노에게 가볍게 인사했으나 별다른 말은 없이 가만히 소노 뒤편에 섰다.

“네놈들은 누구냐?”

“통성명할 사이는 아닌 것 같지 않소? 영감?”

소노가 준엄한 목소리로 묻자 적의赤衣의 사내가 능청맞게 받았다.

“동창의 개들이구나.”

“당신도 늙어 젊은 여자 꽁무니에 붙어 있는 꼴이 호랑이 모습은 아니외다. 낄낄”

소노 얘기에 백의白衣의 사내가 맞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네놈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 얼른 검을 뽑아라.”

소노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강호에선 목숨을 건 무인간의 대결에도 예의와 격식이 있었다. 그런데 정치政治와 관련되어 맞서게 되는 무인들에게선 예의와 격식을 찾을 수 없었다. 소노는 강호에서 정치판으로 뛰어든 자신의 결정이 갑자기 못마땅해졌다. 무인武人이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주구走狗노릇이나 하느냐고 나무라고 싶었으나 자신 역시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니 누굴 나무랄 것인가? 나는 정당한 정치세계고 너는 나쁜 정치세계라고 해본들 통하기나 할 것인가? 이래서 정치판은 이전투구泥田鬪狗인 것이다. 뻘 밭에서 싸우면서 어찌 뻘이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늙으면 조급증이 생긴다더니 그 말이 맞군 그래. 낄낄. 영감, 그리 황천길 구경이 하고 싶으시오?천천히 합시다.낄낄”

백의 사내가 소노를 조롱했지만 소노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소매를 걷었다. 결전의 의사표시인 것이다.

“여럿이서 얽히고설켜 얘들처럼 붙지 말고 일대일로 한 사람씩 맞서보는 게 어떻겠소?”

흑의 사내가 갑자기 제안을 해왔다. 이들의 태도로 봐선 기습을 해왔다기 보단 비무행比武行을 나온 사람들 같았다.

소노가 다른 대꾸 없이 잠깐 생각에 잠긴 순간 뒤편에 있던 호위무사 한 사람이 나섰다.

“내가 먼저 상대해주마.”

“잉어, 붕어 노는 곳에 갑자기 미꾸라지 새끼가 끼어드는구나. 아무튼 좋다. 미꾸라지라고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가 아닌 것도 아니니. 낄낄”

백의 사내가 조롱하자 다시 나머지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내가 먼저 나서지요. 나는 늙은이보다 젊은 사내가 좋더라~”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청의 여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나섰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크하하”

역시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황의 사내가 덩치에 어울리게 큰 소리로 웃었다.

앞으로 나선 호위무사가 가만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청의 여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묵진휘는 호위무사의 기파가 청의 여인에게 미치지 못함을 한눈에 알아봤다. 호위무사 역시 일급의 경지는 오래 전에 벗어난 특급고수였으나 청의 여인의 경지는 한 단계 이상 더 위였다.

묵진휘가 소노를 보며 머리를 가로로 저어 말려야 한다는 의사를 보냈지만 소노도 역시 머리를 가로로 저어 말릴 수 없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도산검림刀山劍林에 사는 무인이 자기보다 고수는 피하고 자기보다 하수만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지금 호위무사를 말린다면 호위무사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만이 남을 뿐이었다. 무인이 스스로 먼저 나섰다는 것은 이미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그럴 땐 어느 누구도 말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호위무사가 먼저 나설 때 이미 마음을 먹은 것처럼 신형을 앞으로 퉁겨내며 검으로 여인의 심장을 찔러갔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초식이다. 역시 호위무사들의 무공 특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수들에게 살수무공의 특징이 있듯 호위무사들에게도 호위 무공의 특징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공보다 우선하는 목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살수들은 상대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 호위 무사들은 주인을 지키는 것, 그 목적을 우선하기 때문에 무공도 목적에 맞게 최적화되어 발전했다.

하지만 다른 목적보다 무공 자체를 우선하는 강호에선 무공에도 풍류와 취향과 개성이 반영되고 이를 존중한다. 그가 사용하는 무공이 무인의 정체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풍류와 개성과 취향이 없는 무공은 무인의 정체성이 희미하다는 의미이며,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었다. 살수의 무공이나 호위 무공이 강호에서 경시輕視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위 무사의 검이 청의 여인의 심장 근처에 다다를 때까지도 청의 여인은 움직임이 없었고 네 사내의 표정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세 치만 더 가면 검 끝이 심장에 닿을 때쯤 청의 여인이 좌수 손등으로 호위무사의 검면을 가볍게 쳐내면서 우수 손바닥으로 호위무사의 가슴을 부드럽게 가격했다. 위낙 부드러운 가격이라 마치 쓰다듬는 듯 보였다. 그러자 호위무사가 앞으로 나아가던 관성慣性에도 불구하고 뒤로 벌러덩 넘어지더니 몇 바퀴 구른 뒤에야 입가에 가느다란 선혈을 흘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하지만 쥐고 있던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호위무사가 다시 한번 신형을 날리며 검을 큰 궤적으로 베어가면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번 공격 초식은 실로 변화가 제법 다양해 공격부위가 어디인지, 찌를 것인지 벨 것인지,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호위무사가 일으키는 그런 변화에도 청의 여인의 표정이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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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10. 반성反省 +2 17.03.01 3,191 45 11쪽
110 109. 숨어있는 눈 +2 17.02.27 3,080 46 12쪽
» 108. 예상된 기습 +2 17.02.23 3,181 48 11쪽
108 107. 구사일생九死一生 +2 17.02.21 3,255 48 11쪽
107 106. 마지막 인사 +3 17.02.19 3,501 48 11쪽
106 105. 전략戰略 +2 17.02.17 3,226 48 11쪽
105 104. 절체절명絶體絶命 +2 17.02.15 3,162 46 12쪽
104 103. 호위 +2 17.02.13 3,328 5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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