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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와 아가타

혜수, 여행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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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독자
작품등록일 :
2019.10.11 05:14
최근연재일 :
2019.11.2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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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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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 끝의 시작

DUMMY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모든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에 입꼬리가 기분좋게 올라가 있던 모습이, 부끄러운 수치로 다가오기 시작한 그때. 혜수의 표정은 점점 냉담해져 갔다.


“우리 가족은 제대로 된게 하나도 없어. 여기 독일 부모들처럼 아이들 학교 생활을 잘 지도해 줄 수 있는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동생은 매일 언니한테 버럭 대들고!”


“예서야. 동생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이유가 뭐니? 그리고 그렇다고 너가 부족한건 또 뭔데? 사람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지금 그게 부모한테 할소리야?”


한밤중의 신선한 공기를 타고 지나가는 창 밖 바람소리가 화나 보이기도 하고 구슬퍼 보이기도 했다.


6년전 혜수네 가족은 부푼 꿈을 안고 독일로 왔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민을 결심한 이유를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유를 둘러대며 지식인 인척 포장을 해낼 수 있었다.

미세먼지로 인한 심각한 대기 오염, 방사능 노출, 엇나간 교육열, 성난 취업난, 아이들에게 넓은 견문을 물려주기 위해 등등. 그러나 진심으로 그녀는 그저 한 단어로 그 이유를 말할 수도 있었다.

‘현실도피'


“엄마. 우리 집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둘째 딸 예나는 아빠와 언니의 싸움이 신선하지도 걱정되지도 않는 듯 잠이 가득한 얼굴로 혜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아직도 많이 가야해. 힘들텐데,,, 조금이라도 자보렴.”


“어차피 엄마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더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걸지 마요.”


딸 예서의 끝 맺음은 언제나 이랬다.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난 변하지 않을테니, 난 잘못한게 없으니까.’

이렇게 외치듯 끝을냈다.

딸 예서와의 대화가 일방적으로 끝이나면 혜수와 석찬은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침묵을 지킨 채 서로 위로의 눈빛을 나누었다. 예서는 부모와의 대화가 끝나자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가야하는거야? 아, 짜증나. 나 벨트 풀고 있을래. 답답해서 못하고 있겠어.”

“그래, 아빠가 조심히 갈테니 잠깐 풀고 있어.”


그런 딸을 보며 두 부부는 이민 후 겪은 많은 변화와 사춘기 스트레스가 겹쳐서 그러려니 이해해야 했다.

언제나 명랑하고 속깊은 둘째 딸 예나는 고단한듯 두 눈을 감고 그대로 등을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차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당신도 피곤하면 눈좀 붙여요. 내가 조심히 운전할테니 걱정말고.”

“아니에요,,,잠도 안오고, 여보 혼자 운전하게 놔두고 나만 편히 있으려니 맘이 편치 않네.”


석찬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조금전 소란스러움이 미안하다는듯. 혜수의 배려깊은 마음이 고마운듯.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길로.


혜수는 예전처럼 남편과 부드러운 눈길을 나누며 행복감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수 없는 노릇이다. 마음속 불쾌감이 손가락끝에 박힌 가시처럼 그녀를 찌를때마다 죄의식과 분노가 밀려왔다.


‘상상만으로도 미칠것 같이 수치스러운 일을 내가,,, 내가 해버렸다. 불안하지만 희망이 있고, 우린 잘 해나가고 있다고 위로할 수 있는 일상이 다시 돌아올까? 신이시여. 저를 용서하실 수 있나요?’


감히 용서를 구하는 마음마저 죄악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혜수는 묻고 싶었다. 정말 다시 믿음이란걸 가지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이번 크로아티아에서의 여행은 잘 맞춰진 도미노 행렬같이 순조로웠다. 해안가의 거친 돌로 인해 걸을때마다 심한 지혈 효과를 얻어야 했던 발은 첫날 우연찮게 발견하여 싸게 산 아쿠아 슈즈로 해결되었고, 모터 보트를 타고 다닌 인접한 섬들은 잊을 수 없는 영화의 한장면 같이 머릿속에 기억되었다.

또한 느닷없이 돌변하여 분위기 파괴자 역할을 하던 첫째 딸 예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을 마음껏 할 수 있어 평소보다 휠씬 부드럽고 순했다.


그럼에도 혜수에게 이번 여행은 내면의 소용돌이를 깊이 잠재우며 멋진 연기를 해낸 서커스같은 나날이었다.


“조금 잠이 오려고 하는데 음악좀 틀어 줘요. 과자도 있으면 부탁해요.”

“그럼 신나는 노래가 좋겠네. 과자는 손 닿는 여기 즈음에 놓을게요.”

이제는 올드 K Pop이지만 혜수와 석찬에게는 아직도 신나는 댄스 그룹들의 노래가 차례로 흘러나오고 차안 분위기도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나에게 다정 다감한 우리 신랑. 내 인생을 버티게 해준,,, 하지만 이제는 곧 사라져 버릴 버팀목.’

혜수는 남편을 한번 바라보았다.

결혼 후 언제나 혜수의 옆에서 바람막이가 되어준 남편이다. 시댁과의 불화에서도 주변 이웃들과의 잡음에도 석찬은 언제나 아내 혜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신뢰와 사랑이 깨진 후에는 남의 편일뿐인, 남편.

갑자기 경쾌하지만 짐짓 코믹스러운 트로트의 기사가 떠올랐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 찍으면 남'


신나는 음악에 맞춰 팔 운동을 한다며 손을 번갈아 가며 코믹하게 상체를 흔드는 신랑의 모습에 혜수는 피식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흘러나왔다. 당황한 혜수가 빨리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차는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차로 먼거리를 여행하다보면 유럽에는 긴 터널이 많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알프스 산맥이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긴터널이 등장했다.

독일에서 출발해 크로아티아로 향하던 때에는 낮이라 그러했는지 그리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랬는지 터널이 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혜수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왠지 모를 공포와 답답함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창밖으로 터널을 둘러보니 왔던 길이 2300m 그리고 남은 길이가 3500m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안돼. 이대로 있다가는,,, 다시 걸려들고 말것같아..’

답답해 숨이 멎어버릴것 같은 공포. 끝이 없이 이어지는 출구없는 폐쇄된 공간. 그곳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답답함.


#

혜수는 독일 이민 후 여행을 하며 자신에게 폐쇄 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민 초창기에는 누구나 그렇듯 유명 관광지를 먼저 둘러보게 된다.

그중에서 독일의 관광 명소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로 혜수네 가족은 당일치기 가족여행을 갔었다. 처음 보는 순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이유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것이 멋져 보였다.

예전 아름다운 성이 보존되어 있는것도 신비롭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도 혜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케이블을 타고 내려가면 지금은 많은 음식점과 상점들로 빼곡한 그곳에 예전 성당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Kirche(성당)을 관광할 수 있었다.


성당 내부는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웠고 웅장함도 느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촛불 봉헌도 마친 후 왠지 모를 숙연함을 안고 성당 밖으로 향하다 출구 옆쪽으로 성당 꼭대기 종탑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 입구가 보였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멋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안내 직원의 말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고 끝이 없이 이어졌다. 중간 중간 문을 통해 잠시 이동을 마치면 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나선형 계단이 빙빙 돌아 나타났다.

그렇게 올라가다 더이상 벽에 나있는 조그만 창문도 작은 틈도 없이 벽과 계단만으로 이어진 길에 들어서자 혜수에게 이대로 갇혀 버릴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출구도 끝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시간도 멈춘 채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함. 또 다시 또 다시 반복되는 길들. 그 안에 작고 여린 나.

혜수는 갑작스런 공포감에 더이상 걸을 수 없이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석찬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여보 갑자기 왜그래? 속이 안좋아?”

“아니,,,여보, 나,,, 나 답답해 죽을것 같아. 창문이나 뭐 그런거 이제 없나? 바깥 공기를 쐬면 좀 나을것 같은데”


석찬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내려가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와 버렸다. 이제 꼭대기까지 얼마 안남은 상태이기도 하였고, 종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내가 돌아가기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 우리 다시 돌아서 내려가자.내가 잡아줄께. 얘들아 엄마가 갑자기 너무 힘들어 하신다. 우리 돌아서 내려가자.”

첫째 예서는 놀란 눈으로 “엄마, 왜여?”하며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예나는 힘든 것을 참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야 한다니 억울한 표정이다. 게다가 엄마까지 아프다고 하니 곧 울음이 터질듯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여보 거의 다 온거 같으니까 빨리 올라가자. 밖으로 빨리 나가는게 나을것 같아.”


다행히 나선형 모퉁이를 두번 돌아서자 창문이 다시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니 종탑 꼭대기로 나가는 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혜수는 출구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혜수는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이색적이고 고풍스런 유럽의 모습에 좀전까지 느꼈던 공포를 떨치고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즐겁게 사진을 찍고 사방의 풍경을 두눈 가득 담은 후, 폐속 깊이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셨다.

혜수는 머리가 다시 맑아지고 팔다리에 다시금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사방을 배경으로 여러 풍경을 다양한 각도로 사진에 담아내며, 독일에서의 새로운 삶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두눈을 감은채 그려낸 미래는 참으로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 내려가야 할 때가 오자 혜수는 좀전의 공포가 떠올라 순간 머뭇거렸다. 그러나 되돌아 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깊은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나선형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과장되게 씩씩한 첫발을 내딛고는 남편과 애들에게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계단을 내려갔다. 출구까지 어느정도 남았는지 예측해가며,

‘괜찮아, 곧 출구가 보여. 이쯤에서 문이 나오고, 그래 내 말이 맞잖아. 조금만 더 힘내면 돼.’ 스스로 최면을 걸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날 이후 혜수는 그와 같은 답답함이나 공포가 느껴지려고 하면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그러한 환경 자체를 피하며 살아야 했다.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에서도 잠수함을 타고 바닷속을 구경한 후 돌아오는 길에는 갑판 위로 올라가 수면 위 붉게 물드는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 혜수는 함께 하지 못했다.

‘바닷속 잠수함도 폐쇄된 공간인데, 위험할 수 있어.’


#

사실 혜수는 완전히 어두워진 그 시각,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고속도로 위에서 답답함을 참아내고 있었다.


‘집까지 아직도 600km···’


유럽의 도로에는 주택가와 출퇴근 길 주요 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가로등이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다. 강한 전조등이 앞길을 비추기는 했지만 옆 창문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둠 그 자체였다.


‘사방이 어둠이야.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출구없이 이어지는 공간속에 갇혀 있는 느낌. 답답해.’

혜수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리고 날이 밝지 않으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그저 속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 답답함이 그녀 마음속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인한 것인지, 끝이없이 펼쳐지는 어둠이 주는 폐쇄감에 대한 공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긴 터널로 진입하여 달리는 순간 혜수는 그녀가 줄곧 폐쇄 공포증의 올가미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수 머리위로 숨가쁘게 지나가는 터널 안의 조명등은 그녀의 공포증을 더욱 격하게 물들였고 혜수는 헉헉대기 시작했다.


“여보, 괜찮아? 왜그래?”

석찬은 아내의 모습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연신 아내의 어깨를 흔들고 손을 주물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모든 것은 희미해져 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터널 밖이야. 조금만 기다려. 여보! 혜수야!”

“아빠, 엄마 왜그래요? 아빠 빨리 차 세워봐요.”

“엄마! 정신 차려 엄마! 아빠! 앞에 조심"


급격하게 호흡이 막히고 공포감에 모든 기능이 정지되는 듯한 순간, 그녀는 해방감을 느꼈다. 죄악이 끝나고 심판을 받으러 가는 이때. 이승에서의 무거움을 벗고 영원의 공간에서 죗값을 치르리라.

‘주여, 저를 받아주소서'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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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도망 19.11.19 25 1 15쪽
25 25. 나의 미래 19.11.15 25 1 11쪽
24 24. 도피 19.11.15 26 1 13쪽
23 23. 감정을 삼키다. 19.11.11 31 1 13쪽
22 22. 꽤나 다정한 모습 19.11.09 34 1 13쪽
21 21. 만남 19.11.09 36 1 16쪽
20 20. 행복과 불안 19.11.04 46 1 12쪽
19 19. 그와 당신 19.11.01 48 1 14쪽
18 18. 너는 이제 내꺼야 19.10.31 49 1 13쪽
17 17. 영희, 그녀 19.10.28 48 1 13쪽
16 16. 20살의 크리스마스 19.10.25 43 1 14쪽
15 15. 능력있는 사람 19.10.24 43 1 14쪽
14 14. 이성준 19.10.23 47 1 15쪽
13 13. 가족이라는 족쇄 19.10.22 55 1 17쪽
12 12. 비밀 19.10.21 54 1 15쪽
11 11. 느끼지 마! 생각하지 마! 19.10.18 59 1 14쪽
10 10. 그 남자 19.10.17 54 1 16쪽
9 9. 그 남자랑 끝내! 19.10.16 58 1 13쪽
8 8. 제 인생을 구경중이신가요? 19.10.15 64 1 13쪽
7 7. 그와의 로맨스 19.10.14 65 1 13쪽
6 6. 우리 잘해보자. 19.10.14 67 1 7쪽
5 5. 나는 누구였을까? 19.10.13 69 1 9쪽
4 4. 언니, 내가 지켜줄게. 19.10.13 7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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