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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님의 서재입니다.

퇴마하는 작가님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이상한하루
작품등록일 :
2023.10.23 09:05
최근연재일 :
2024.03.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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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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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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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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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오디션(2)

DUMMY

조감독이 대본의 페이지를 펼쳐서 밑줄이 그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903호남편’이라고 되어 있는 여기 밑줄 그어진 부분을 연기하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상대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동수 작가가 말했다.


“장기태씨. 903호남편은 드센 아내한테 맨날 구박받는 좀 불쌍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 대본 읽어 보시면서 감을 잡으시고 대사가 안 외워지면 대본 보면서 하셔도 돼요.”


장기태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것처럼 대본을 바라봤다. 자신이 연기할 ‘903호남편’의 대사가 펜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문제는 대사가 족히 다섯 줄은 넘어 보인다는 것. 물론 한 대사가 그렇게 길다는 건 아니고 씬의 대사분량을 합치면 그렇다는 것이다. 학교 때 연극무대에 섰을 때 이후로 이렇게 많은 대사를 연기하는 건 처음이다.


‘무슨 대사가 이렇게 많아?’


장기태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대본에 시선을 두고 빠르게 지문과 대사를 읽었다.


‘집중해야 해, 집중! 그리고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하자.’


너무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차가워졌다. 대본의 내용은 딱 봐도 허동수 작가의 말처럼 드센 아내한테 혼이 나는, 불쌍한 남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역할이다. 학교 때 연극무대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그 당시의 감정을 되살렸다.

장기태는 다시 자신에게 되뇌었다.


‘연기 욕심 버리고 과하지 않게 하자. 단역이 튀는 연기하면 주조연의 연기가 가려지니까···


*


내가 장기태 지원자에게 903호남편 연기를 시켜보자고 제안하자 김욱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역부문에 지원한 배우에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연역할을 맡기겠다고 하니 의아했던 모양.


그렇다고 술 취한 취객 연기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조연 역할을 시켜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나도 장기태의 취객연기를 보고 실망한 건 사실이다. 그냥 고만고만한 단역 배우들의 평범한 연기 수준이었으니까.

취객 연기만 봐서는 내 미래 인터뷰 영상에서 언급됐던 장기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내 미래 인터뷰 영상에서 말했던 장기태가 아니라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라고 해도 일단은 확인을 해봐야만 했다.


‘제대로 된 연기를 시켜보면 알 수 있겠지.’


장기태는 대본을 들여다보며 혼자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갑자기 주어진 상황이라 아무래도 당황했을 테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김옥 감독은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다른 지원자들의 프로필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동안 대본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장기태가 고개를 들었다.


“준비됐습니다.”


장기태가 들고 있던 대본을 내리고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얼굴의 근육을 풀었다.


‘대본을 안 보고 할 생각인가?’ 대사의 분량이 꽤 많아서 기존 배우들도 짧은 시간에 대사를 암기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난 혹시 장기태가 너무 긴장을 해서 대본을 안 보는 줄 알고 말했다.


“장기태씨. 대본보고 하셔도 돼요.”

“안 보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책상에 놓여있는 대본을 펼쳤다. 다시 봐도 대사가 꽤 많은데 과연 그 짧은 시간에 암기를 했을지 걱정이 됐지만···


“그럼 조감독님 시작하시죠.”


조감독이 대본의 지문을 읽었다.


“씬 25. 903호 거실. 밤. 903호아내가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고 903호남편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열린 문틈으로 혜정과 이한영이 902호 현관 앞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이한영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903호아내가 얼른 문을 닫고 호들갑스럽게 903호남편에게 달려간다.”


조감독이 지문을 읽는 동안 장기태는 903호남편처럼 텔레비전을 보며 히죽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조감독이 지문을 읽었다.


“903호아내가 소파에 누워서 낄낄거리는 903호남편의 엉덩이를 찰지게 팡 때린다. 903호남편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조감독이 903아내의 대사를 했다.


“지금 저런 거 보면서 웃을 땐 줄 알아?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나 해? 903호남편, 놀란 얼굴로···”


장기태가 대사를 했다.


“왜? 무슨 일인데? 어디 불이라도 났어?”

“어휴, 내가 미쳐. 그게 아니라···옆집 여자 있잖아. 902호여자.”


장기태의 대사


“어, 902호여자? 그 여자가 왜?”

“아파트 앞에 몽글빵집 주인 알지?”


다시 장기태의 대사.


“그 산적 같이 생긴 주인놈?”


조감독이 다음 대사를 하려는 순간 내가 연기를 중단시켰다.


“조감독님, 잠깐만요.”


나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있는 장기태를 찬찬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연기가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 하긴 단역만 하던 사람인데 당연한 결과겠지. 연기의 기본이 안 된 것 같아.’


눈치를 보니 옆자리 김욱 감독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나머지 스태프들도 단역에 지원한 배우한테 왜 중요한 역할을 시키는지 이해를 못하는 표정. 그렇지 않아도 지원자가 많아 시간이 부족한데.

아까 잠깐 본 취객연기도 별다른 특징이 없었고 이번 연기도 그렇고. 눈앞의 장기태에게 더 이상 기대를 가질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아. 그럼 내 인터뷰 영상에서 봤던 장기태는 대체 누구야? 이 사람이 장기태가 아니라면 903호남편 역할의 배우가 나타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오늘 오디션에서도 장기태 역할을 뽑지 말자고 하면 김욱 감독도 난색을 표할 텐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기태씨, 수고하셨습니다.”


내 말에 조감독이 다가가 대본을 회수하려는데 장기태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작가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 번만··· 꼭 한 번만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장기태의 말에 조감독이 말했다.


“저희가 오늘 대기하고 있는 지원자가 워낙 많아서···. 죄송합니다.”


조감독이 장기태의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건네 받았다. 대본을 빼앗긴 장기태가 참담한 표정으로 돌아서는데 그의 눈빛에서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보통의 단역 배우한테서는 저런 눈빛을 보기가 어렵다.

연기는 눈빛으로 하는 것이다.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의 연기는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연기력을 인정받는 대부분의 배우들도 미세한 눈빛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근데 왜 아까 연기할 때는 저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던 거지?’


*


“그 산적 같이 생긴 주인?”


장기태가 자신의 대사를 하고 조감독이 지문을 읽으려는 순간 허동수 작가가 연기를 중단시켰다.


“조감독님, 잠깐만요.”


순간 장기태는 허동수 작가의 제지가 뭘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전까지 기대에 차 있던 허동수 작가의 눈빛에 지금은 실망이 가득했던 것이다.


장기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가 너무나 한심한 수준이었다는 걸. 연기를 하는 내내 배역에 몰입하기보다는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하자는 생각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연기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잊어버렸다.


연기는 어떤 경우에도 진실해야만 한다는 것!


학교 때 교수님이 항상 강조했던 말이 그것이다. 카메라에 잡히는 배우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어야만 한다.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배역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진실한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근데 방금 자신의 연기에는 그런 진실한 마음이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대사를 외워서 읽었고 연기를 머리로 계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물론 단역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연기를 했지만 허동수 작가의 실망한 눈빛을 보니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일부러 기회를 주셨는데 부끄러운 연기로 작가님을 실망시키다니.’


부끄러움과 함께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보여줬어야 했어. 그게 진정한 배우의 자세야.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 진실한 연기를 작가님한테 보여주고 싶어,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만약 이대로 오디션에 떨어진다면 이 순간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감독은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허동수 작가의 얼굴에도 진한 실망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장기태가 마음으로 빌었다.


‘제발··· 작가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장기태의 바람은 허동수 작가의 한 마디에 날아갔다.


“장기태씨, 수고하셨습니다.”


조감독이 다가와서 대본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장기태가 저도 모르게 대본을 움켜쥐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 번만 다시 연기해보고 싶습니다.”

“저희가 오늘 대기하고 있는 지원자가 워낙 많아서···. 죄송합니다.”


조감독의 손이 장기태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잡아당겼다.


‘바보 같이··· 다 끝났어. 앞으로도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장기태가 대본을 내주고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서는데 허동수 작가가 말했다.


“조감독님 잠시만요.”


장기태가 돌아보니 허동수 작가가 옆에 있는 김욱 감독에게 뭔가를 상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허동수 작가가 무슨 부탁을 하고 김욱 감독이 난색을 표하는 그런 분위기. 장기태의 마음 속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어쩌면···’


잠시 후 김욱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동수 작가가 말했다.


“장기태씨. 한 번 더 연기 해보시겠어요?”


장기태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오디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렇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장기태는 허동수 작가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길 작정이었다.


“조감독님. 한 번만 더 부탁할 게요.”

“알겠습니다, 작가님.”


조감독이 가져갔던 대본을 다시 장기태에게 돌려줬다. 창기태는 다시 돌아온 대본이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래.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자. 단역이 아닌 내가 주연, 조연 배우가 됐다는 생각으로··· 작가님이 집필하며 상상했던 그 캐릭터에 가깝도록···’


장기태는 대본 속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903호남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갔다. 조감독이 빠르게 지문을 읽었다.


“903호아내가 소파에 누워서 낄낄거리는 903호남편의 엉덩이를 찰지게 팡 때린다. 903호남편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장기태가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저기 소파를 이용해서 연기해도 될까요?”


장기태가 판단하기에 903호남편의 캐릭터는 대본에 나와 있는 대사만으로 보여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인물의 평소 습관이나 태도, 행동하는 모습도 연기의 일부이고 그런 것들이 캐릭터를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기태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 장기태는 자신이 또 연기 욕심에 빠져서 오버했다고 후회했다.


‘단역 오디션 보면서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장기태는 아직도 자신이 연기하는 903호남편이 대사가 제법 있는 단역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장기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냥 하겠습니다.”

“누가 소파 좀 중앙으로 갖다 줄래요?”


허동수 작가의 말에 현장 스태프 둘이 구석에 있던 소파를 번쩍 들고 와서 장기태의 앞에 놓았다. 허동수 작가가 말했다.


“장기태씨. 더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아닙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


장기태가 심사위원들을 바라보면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에 드러누운 장기태가 바지의 혁대를 느슨하게 풀고 셔츠도 밖으로 끄집어냈다. 장기태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감돌더니 미친 사람처럼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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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이한영의 과거 +8 24.03.15 1,215 64 12쪽
64 새로운 능력(2) +5 24.03.14 1,480 67 12쪽
63 새로운 능력(1) +4 24.03.13 1,566 62 12쪽
62 방송출연, 영혼탐정(3) +2 24.03.12 1,632 61 12쪽
61 방송출연, 영혼탐정(2) +3 24.03.11 1,687 60 13쪽
60 방송출연, 영혼탐정(1) +2 24.03.10 1,799 64 13쪽
59 시청률(3) +5 24.03.09 1,852 67 13쪽
58 시청률(2) +6 24.03.08 1,868 70 12쪽
57 시청률(1) +4 24.03.07 1,935 68 13쪽
56 첫 방송(3) +2 24.03.06 1,926 69 13쪽
55 첫 방송(2) +1 24.03.06 1,889 65 12쪽
54 첫 방송(1) +5 24.03.05 1,970 61 13쪽
53 제작발표회(2) +1 24.03.04 1,977 67 12쪽
52 제작발표회(1) +3 24.03.03 2,049 64 12쪽
51 크랭크인(2) 24.03.02 2,109 69 14쪽
50 크랭크인(1) +2 24.03.01 2,198 68 12쪽
49 몽글빵집의 혼령(2) +1 24.02.29 2,148 66 12쪽
48 몽글빵집의 혼령(1) +1 24.02.28 2,207 72 12쪽
47 몽글빵집 +12 24.02.27 2,282 68 12쪽
46 대본리딩(2) +2 24.02.26 2,318 6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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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션(2) +6 24.02.24 2,393 66 12쪽
43 오디션(1) +1 24.02.23 2,406 70 13쪽
42 염매(2) +4 24.02.22 2,423 78 13쪽
41 염매(1) +4 24.02.21 2,579 77 13쪽
40 마지막 퍼즐(2) +2 24.02.20 2,628 75 12쪽
39 마지막 퍼즐(1) 24.02.19 2,702 7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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