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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트업(Setup) - 수정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AAKHS
작품등록일 :
2017.07.07 03:11
최근연재일 :
2017.09.20 09:45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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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4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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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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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셋트업(Setup) - 2편-57

DUMMY

먼 과거.

이제는 기록조차 거의 남지 않은,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파괴신과 맞서 싸운 ‘영웅전쟁’보다도 아득히 먼 과거.


그때의 세계는 ‘신’이라 불리는 위대한 존재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은 이 위대한 신을 받들고 따르며 번영하여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까지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변화란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며, 그것은 사전 예고 없이 다가왔다.


신이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곁을 지키며, 신의 의지를 대변하여 세계를 관리하던 ‘관리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모시고 따라야 할 대상을 잃은 그들의 공허함과 상실감은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하였다.


신이 사라진 이 세계에서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두고 관리자들은 서로 의견이 갈렸다.


신을 찾으러 가야한다는 의견.

사라진 신의 뒤를 이어, 자신들이 계속해서 이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

더 이상의 인위적인 제어나 관리를 그만 두고 자연적인 순리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도록 하자는 의견.

심지어는 신이 사라진 세계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까지.


많은 의견들이 난립하였고, 결국 관리자들은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립하는 가운데, 관리자는 서서히 세계에 대한 제어권을 잃어가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그들의 관리에 의지하던 세계는 점차 혼란에 빠져갔다.


이윽고 그들 중 일부는 사라진 신을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세계를 넘나들며, 그들은 마치 광기에 빠진 듯 그들의 신을 찾아다녔고, 그로 인해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수많은 ‘길’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어떠한 세계에서 ‘신’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신’은 그들의 세계에 있던 ‘신’과는 다른, 별개의 존재였다. 신을 찾아 헤메이면서 다른 세계의 존재에 놀라워했던 관리자들은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신’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으나, 자신들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워했고. 실망하였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떠나려던 관리자들에게, 그 세계에서의 ‘신’의 곁에 있던 어떤 자는 그들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은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고, 결국 그들은 황급히 자신들의 원래 세계로 되돌아와 다른 관리자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게 된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견을.


많은 관리자들이 이에 우려하고 반대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마침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또는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논쟁이 오갔으나, 서로의 의견은 수평선을 이룰 뿐이었고. 결국 그들은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시작했다.


바로 전쟁이었다.


시작은 언제나 그러하듯 사소한 다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관리자들이 서로의 세력을 가르고 싸우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더 지나고나니 각자를 따르는 ‘신’의 피조물들. 즉, 세계의 모든 종족들까지 세력을 나누어 싸우게 되면서 세계 전체가 거대한 전화에 휩싸였다.


시작은 반대파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신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창신파’는 그들이 다른 세계를 탐색하며 얻은 기술들과 더불어 그들이 ‘신’을 창조하기에 앞서 만들어낸 새로운 종족들을 부리기 시작하며 그 열세를 메꾸어나갔고, 이에 따라 전쟁은 점점 격화되어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만 갔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바다가 마르며, 대지가 갈라져 검게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 또다른 세력이 싸움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창신파’가 다른 세계에서 만났던 ‘신’의 군사들이 이 세계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관리자들이 다른 세계를 헤집듯이 오가면서 만든 ‘길’로 인해 다른 세계들 간의 간섭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 그들이 이 세계에서 벌이는 전쟁으로 인해 그것이 위험한 단계까지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이 세계를 ‘심판’하겠다고 하며 창신파와 반대파 모두를 무자비하게 공격해왔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닳은 관리자들은 다시금 서로가 힘을 합쳐 다른 세계에서 온 ‘신’의 군사들에 저항하였으나, 이미 서로간의 싸움으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상대였다.


결국 관리자 대부분과 많은 종족들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몰아내고, 이 세계로 이어진 수많은 ‘길’을 봉하여 침략자들의 손으로부터 세계를 구해내는 데에 성공하긴 하였으나. 이미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을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이 세계를 걸어잠근 ‘문’을 부수고 찾아와 그들의 ‘심판’을 완수할 것이다.





“요약해서, 이 세계의 ‘신’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신’을 모시는 간부였던 ‘관리자’들끼리 내분이 난 와중에, 다른 세계의 침략자들이 쳐들어왔었다는 이야기로군?”

“맞소이다.”


가옥 내부에는 변변한 집기조차 없었다. 에우로파와 킬리는 반쯤 부서진 금속제 의자와 석재 테이블에 다른 잔해를 덧대어 그 위에 걸터앉은 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략자. 다른 세계의 ‘신’이 보낸 군사들이 바로 그 ‘제카롯’이라는 자들이고?”

“그렇소이다.”


킬리의 설명을 들은 에우로파는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상황이 이미 자신의 인지 범위를 한참 벗어나있었기 때문이다.


“스케일 한번 엄청나군. 다른 세계의 군세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관이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라고 보네만···”

“영문도 모르고 홀로 이 세계에 떨어진 나와는 경우가 다르잖아! 작정하고 이 세계에 쳐들어 온 거라면서? 그것도 떼거리로.”


따지듯 반문하던 에우로파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의도하고 이 세계에 건너올 정도의 능력을 가진 그들이라면···


‘그들의 능력이나 기술이라면···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킬리의 이야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라니오스 님. 그러니까 아가씨들의 아버님께서는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관리자’이자, 유일한 희망이시라오. 본인은 그분의 의지를 존중하여 뜻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라네.”

“관리자···”


지금은 사라진 ‘신’의 바로 곁에서 그의 의지를 대변하던 초월자들. 나트와 아르나시아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점에 대한 답을 들은 에우로파였으나, 그는 여전히 이 이야기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스승님께서도 자네와 마찬가지인가?”

“맞소이다. 그분과 함께 외부의 위협에서 이 세계를 지키는 것. 그것이 초대 히아스로부터 이어진, ‘히아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의 사명이라오.”


‘히아스’라는 이름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칭하는 이름이 바뀌는 것만이 아니다. 계승을 통해 ‘히아스’가 된 자는 초대로부터 이어지는 선대 히아스의 기억과 지식, 그리고 능력의 일부까지 물려받게 된다.

그 계승에 이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는 건 자네도···‘히아스’ 말고 이름을 계승하는 자들이 또 있었던 것인가?”

“그건 아니올시다.”


앞서 킬리가 한 이야기에 대한 의심도 있었기에, 에우로파는 에미넨트의 분석 기능을 이용하여 킬리의 정체를 살폈다. 그것을 눈치챈 듯, 킬리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조사하지 않아도 이야기해 줄 생각이외다. 성급해하지 마시구려.”


킬리의 답변에 앞서 에미넨트는 빠르게 킬리에 대한 분석을 완료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에우로파를 당혹스럽게 하였다.


『대상 분석 완료. 기존 정보에 없는 생명체입니다』

“그럴만 하겠지. 에미넨트는 영웅전쟁 당시 만들어진 마장기, 우리들에 대한 정보는 없을 것이오.”


이어진 킬리의 답변은 에우로파를 크게 놀라 경계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쿠루아’라 불리는, 전쟁 당시 ‘창신파’였던 ‘관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들 중 하나라오.”

“쿠루아라고!?”

-덜컹


앞선 킬리의 태도에 거짓은 없어보였다. 그는 확실히 나트-정확히는 그의 부친과 같은 편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전에 마찬가지로 자신을 ‘쿠루아’라고 소개한, 데스틴이라는 광인을 마주치고 서로 전투를 벌이기까지 했던 에우로파의 입장에서는 반사적으로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오? 갑자기 무슨 일이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뒤로 물러서는 에우로파의 모습에, 킬리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에우로파는 더욱 더 머리가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쿠루아라고 하면···뱀파이어를 못 죽여 안달이 난 녀석들이 아니었나?”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만···아니, 잠깐!”


에우로파의 답변에, 그제서야 그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킬리 역시 놀라서는 반문하였다.


“귀관, 혹시 본인 말고 다른 쿠루아를 만났던 겐가?”

“그래, 만났지. 심지어 나트를 보자마자 미친 놈처럼 덤벼왔다고!”


일어서면서 넘어진 의자를 다시 바로세워 앉은 뒤, 에우로파는 킬리에게 데스틴과 조우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에우로파의 이야기를 들은 킬리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외에 아직까지 살아남아 활동하는 쿠루아가 있었다니···”


데스틴에 대한 것은 킬리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던 듯 싶었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쿠루아였다고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턱을 괴며 그에 대하여 우려하기 시작했다.


“데스틴···그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뱀파이어들에게 호전적이었지. 그는 아직도 그들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못한 것 같구려. 음?”


씁쓸하게 데스틴에 대해 언급하던 도중, 좀전까지 잠든 것처럼 조용하던 나트가 돌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으윽, 하악···!”

“아가씨!”

“나트!”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온 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간간히 크게 경련하기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에 걱정스러워진 에우로파는 킬리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추락에 의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던 건가···아, 혹시!”


방금 전 에우로파의 대화를 통해 의심되는 점이 떠오른 그는 고개를 돌려 에우로파에게 질문하였다.


“그자의 ‘기능’은 독···혹시 그자가 아가씨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는가?”

“그게···오른쪽 어깨 아래에 작은 상처를 입긴 했어. 하지만 피가 멎지 않는 정도였고,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는데···”


혹시 독이 몸에 퍼져서 그런 것일까? 잠시동안 나트의 몸을 살피던 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적어도 지금 이건 데스틴에 의한 것이 아니구려.”

“그렇다면?”


킬리의 시선이 나트의 왼편에 놓여있는 그녀의 검으로 향하였다. 킬리는 난감한 시선으로, 뤼간트라는 이름의 검을 노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뤼간트에 의한 것일세···! 혹시 아가씨가 이 검의 능력을 해방하였던 겐가?”

“어, 어어. 검의 모양이 변하면서 은회색 기운이 나오긴 했지.”


그러고보니 이 뤼간트라는 검. 나트에게 ‘대가’를 받겠다고 했었다. 델리우와 싸울 당시에는 그녀의 어머니인 아힌세르린에 의해 그것을 저지당한 듯 하였지만.


“유감이지만 이 상황에선 뤼간트를 저지할 만한 이가 없군···아무래도 이 검이 원하는 대가를 제공해줄 수밖에 없어보이는구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겠어!”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 나트의 모습은 에우로파로서도 보기 안쓰러운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심으로 이 소녀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귀관의 도움이 필요하다오. 아니, 지금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귀관 외에 이걸 할 수 있는 이가 없을 걸세.”


꿀꺽. 에우로파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이 마검(대가를 요구하는 시점에서 이미 마검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은 나트에게 무엇을 바라길래 이토록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까.


“잘 듣게나. 이 검이 원하는 것은···”


뱀파이어의 마검이니, 대량의 생피라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영구적인 마력 절취? 막상 돕겠다고 했지만 과연 어떤 댓가를 요구하려는지 모를 에우로파의 불안감이 더해갔다.


“이 검이 사용자인 아가씨에게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은···?”


그만 뜸들이고 빨리 말하란 말야! 불안감에 속이 터질 것 같아 악 소리지르려는 순간이 되어서야 킬리는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은 지금껏 잔뜩 긴장한 에우로파에게 억울함마저 불러일으킬 내용이었다.


“성적인 절정감. 즉, 오르가슴일세···!”

“엥??”


도저히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답변내용에 에우로파는 혹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는지를 의심하였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건지, 킬리가 재차 그에게 강조하였다.


“농담이 아닐세. 지금 아가씨께서 이 상태가 된 것도 뤼간트와의 계약 때문이라네.”

“무슨 야겜이냐!!”


킬리의 답변내용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지, 귀밑까지 새빨개진 에우로파는 그를 향해 삿대질까지 해가며 언성을 높였다. 킬리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 듯 보였다.


“야, 야겜이라니!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아무튼···”

“마마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그 그래서, 나트를···겁, 겁탈하기라도 하라는 거야?!”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킬리 역시 자신에게 따지고 있는 에우로파만큼은 아니었지만, 난감함에 의해 목소리가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지, 직접적인 행위까지 할 필요는 없네. 그···어디까지나 절정감을 느끼도록 하면 되니까···소, 손만 사용해도···”

“그런 거면 네가 해도 되는 거잖아! 아니, 그전에 본인이 직접 스스로 하면 되는 거 아냐?”

“그게, 그 점 말인데. 뱀파이어인 아가씨는···우리들 쿠루아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그러니까 그, 거부반응을 일으키다보니···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외다! 게다가 아가씨는···그러니까, 아직 그런 쪽에 대한 지식은 전무해서···”


문득 에우로파는 세인스 시에서 델리우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의 모친-아힌세르린이 뤼간트에게 협박을 할 때···


‘순진하다는 게 정말로 그 의미였냐!? 대체 어떻게 되먹은 가정교육이야, 순서가 개판이잖아!’

-덜컹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킬리는 무시한 채, 에우로파는 거칠게 가옥의 문을 열여제끼며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이봐, 언데드 양반들! 잠깐, 못 들은 척 하지마! 안에서 하는 이야기 다 들었을 것 아뇨!?”


완전히 밀폐된 구조도 아닌데다가, 거리가 멀었던 것도 아니다. 뻥 뚫려있는 창문 등을 통해 들을 것은 다 들었을 것이다. 여전히 가옥 주변에서 경계를 하듯 서 있던 죽음의 기사 무리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에우로파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지려 하였다.


“인간이여,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접촉한 자의 생명력을 빼앗는 능력이···”

“뻥 치지 마! 그 능력, 안 쓰려고 하면 발동 안 되게 할 수 있잖아!”


사실 흥분한 와중이라 마구 지른 말이었지만, 어깨를 흠칫하는 걸 보니 정말인가보다.


“잉간···우리눈 꺼츄가 업써···”

“저능아 흉내도 내지 마!”


아무래도 마법사 계열이어서인지, 리치들이 보다 지적인 어조로 에우로파에게 방금 전의 답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니, 변명이려나.


“인간이여, 알다시피 우리는 생체적 기능이 없는 언데드. 유감스럽게도 성적 감각이란 것에 대하여, 우리가 저 소녀를 어찌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 지금 상황에서 저 소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그대 뿐이다.”

“으이긱긱···!”


계약의 댓가라는 게 사용자의 오르가슴이라니!

어떤 의미로는 그 어떤 악랄한 계약에 의한 착취보다도 더욱 흉악하게 느껴졌다. 에우로파는 거칠게 바닥을 차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난 안 해, 아니 못 해!”


그러고보면 델리우와 전투하던 당시에도, 그리고 조금 전 갈데누란트와 싸운 직후에도. 뤼간트의 힘을 개방한 직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릿해지는? 단순히 지친 것만은 아닌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었다.


‘그게 단순히 지친 상태가 아니었다는 거로군···’


아마도 그 순간에도 지금마냥 ‘성적으로 안절부절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던 듯 싶다. 아니, 지금에 와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억지부리고 있을 여유는 없다네. 게다가 우리는 계속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도 없다오!”


어깨에 손을 올리는 킬리의 모습은 마치 에우로파를 붙잡아 끌고들어가려는 듯 보였다. 보아하니 그들은 나트의 상태와는 별개로 무언가 다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본래 우리는 중대한 대업을 수행하던 도중. 그대와 저 소녀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아무래도 이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행동하던 도중 우발적으로 자신들과 마주친 것 같았다. 그리고 굳이 자신들을 두고 가지 않은 채 이렇게 머물고 있다는 것은, 자신과 나트 역시 그들의 ‘대업’을 위해 협력할 것을 요구할 생각이겠지.


“서두르게나! 아가씨를 부탁하네!”

“어? 야!? 왜 이래! 난 안 한다니까?!”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라네, 어서!”


그러나 지금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킬리는 에우로파의 어깨를 잡아 떠밀듯이 그를 다시금 가옥 안으로 밀어넣더니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이봐! 킬리, 부상회장! 이 나쁜 녀석, 이러지 마!”


당연하게도, 문을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잠시동안 계속해서 문을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에우로파는 결국 한숨을 쉬더니 몸을 돌려 나트에게 다가갔다.


“아···이···하아···제길···”


그는 우선 나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감각의 정체를 모른 채 가늘게 몸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에···저기. 나트, 지금부터···그러니까···”

“이야기라면···듣고, 듣고 있···었어. 하윽···!”


나트는 무리해서 비척이며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도 간간히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음에도,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어 보고 있는 에우로파에게는 죄책감마저 생겨나게 하였다.


“그 오르···뭐라고 하는 게···뭔지 모르겠, 하윽···! 지만 널 원망···안 할 테니···”

“······”


듣고 있었다고는 하나, 대략적인 단편들만 들은 것이 분명했다. 상반신을 일으킨 채, 힘겹게 벽에 기댄 모습의 나트는 각오를 다진 듯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닥칠 ‘무언가’에 대한 각오를 하는 모습이었다.


‘아 정말 미치겠네!’


성인으로써, 남자로써, 사람으로써. 해선 안 되는 짓을 하게 된다는 죄책감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에우로파는 이를 악물며 에미넨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에미넨트. 장착 상태 부분적 해제.”

『해당 선택에 경고. 재장착 시까지 본 기의 기능 발휘가 제한됩니다』


차라리 ‘정말 저지를 생각이냐, 주인?’이라고 비아냥거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랬다면 오기가 생겨서라도 확 저질러 버릴 텐데.


“무시. 실행.”

『승인. 본 기와 사용자의 연결 상태를 해제합니다』

-철컹


곧바로 에우로파의 전신에 장착되어있던 에미넨트의 각 부위들 중 상반신과 양 팔에 장착되어졌던 곳의 연결부가 느슨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상체 부위의 장착을 해제한 그는 자신의 로브 상의를 벗어 한 손에 들어올린 채 나트의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능한 방법만 알려주는 쪽으로 갈 테니까···”

“그게···무슨···?”


에우로파는 나트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앞에 앉혔다. 이윽고 벗어든 자신의 로브 상의로 그녀의 몸을 둘러서 가렸다. 조금이라도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에, 에우로파. 무슨···!?”

“잠시 손 줘봐. 우, 우선 여기는 먼저 벗겨 두고···”

“무슨, 무슨···히악!”

“미안. 여기선 갈아입을 여벌 같은 건 없으니까···그럼, 시작한다···!”

“하응···! 어, 어째서 거길···하아아하앙!”

“먼저···여기, 여기를 이렇게···!”


로브 상의로 가려진 만큼, 촉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에. 전신의 감각을 양 손에 모두 집중시킨 에우로파는 나트의 등 뒤로부터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그녀의 양 손을 잡아 이끌며 그녀에게 ‘뤼간트의 계약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에 대한 시범과 교육을 시작했다.


‘가만, 어째서 킬리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던 거지···?’


일순 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점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곧이어 그의 손 끝에 닿는 보드라운 느낌과 질척이는 촉감에 그런 의문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작가의말


뭔가 할 말이 없는 57화입니다.

...라고 하지만, 본문 중의 에우로파의 상념을 보시는대로. 가벼운 언급 정도는 이미 깔아 두었다고 변명을 해봅니다.


사실 이 이후로 약 7~8페이지 분량의 과정묘사(...)가 있었으나

‘무슨 야설 쓰냐?!’

라는 생각이 들어 브레이크를 걸고 전부 치워버렸습니다.


몇 화 전의 글쓴이 코멘트에도 언급한 적이 있던 대로, 다소 억지성이 있는 설정이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뤼간트의 ‘계약의 대가’를 뭐로 할지에 대해서는 2편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에서도 제대로 정하질 않았거든요. 그러다 2편 초반부를 쓰면서 몇 가지 후보를 정했고, 결국 이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덕분에 나트만 이래저래 구르는군요;;



추가로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으니,

오늘 부로 결국 비축분이 다 떨어졌습니다.

일일연재는 여기까지라는 이야기죠...

아무래도 본업이 있고, 쓰는 속도도 그리 빠른 편이 아니다보니 어떻게 연재주기를 보장하기엔 애매하군요.

적어도 주 1~2화 이상은 연재하려고 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부디 양해를 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덧글과 추천, 선작이 연재속도를 빨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좀 눈에 띄는 효과가 있을까싶어 표지를 바꾸었습니다.

하드디스크 정리 중에 발견했네요.

제가 그린 그림은 아니고, 학창시절 당시 친구가 그려준 겁니다.(제 그림실력은 유치원생 이하입니다...)

원래는 훨씬 다양하게 있었는데 이젠 이거뿐이 안 남았군요...백업을 생활화합시다...

추신2. 혹시나 이 그림 원작자를 아시거나, 본인이라면 연락바랍니다. 요즘은 뭘 하고 있으려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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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건강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죄송합니다. +2 17.09.28 75 0 -
65 셋트업(Setup) - 2편-64 +2 17.09.20 53 2 17쪽
64 셋트업(Setup) - 2편-63 +2 17.09.14 54 2 20쪽
63 셋트업(Setup) - 2편-62 +2 17.09.08 87 2 11쪽
62 셋트업(Setup) - 2편-61 +2 17.09.03 59 2 16쪽
61 셋트업(Setup) - 2편-60 17.08.31 50 2 11쪽
60 셋트업(Setup) - 2편-59 17.08.30 69 1 14쪽
59 셋트업(Setup) - 2편-58 17.08.26 55 1 16쪽
» 셋트업(Setup) - 2편-57 17.08.22 106 1 21쪽
57 셋트업(Setup) - 2편-56 17.08.21 42 1 13쪽
56 셋트업(Setup) - 2편-55 17.08.20 30 0 11쪽
55 셋트업(Setup) - 2편-54 17.08.19 52 1 16쪽
54 셋트업(Setup) - 2편-53 17.08.18 59 1 13쪽
53 셋트업(Setup) - 2편-52 17.08.17 43 1 15쪽
52 셋트업(Setup) - 2편-51 17.08.16 55 1 15쪽
51 셋트업(Setup) - 2편-50 17.08.15 68 1 9쪽
50 셋트업(Setup) - 2편-49 17.08.14 57 1 17쪽
49 셋트업(Setup) - 2편-48 17.08.11 53 1 14쪽
48 셋트업(Setup) - 2편-47 17.08.10 67 1 12쪽
47 셋트업(Setup) - 2편-46 17.08.09 62 1 12쪽
46 셋트업(Setup) - 2편-45 17.08.08 127 1 18쪽
45 셋트업(Setup) - 2편-44 17.08.07 76 0 16쪽
44 셋트업(Setup) - 2편-43 17.08.06 84 0 19쪽
43 셋트업(Setup) - 2편-42 +2 17.08.05 107 1 15쪽
42 셋트업(Setup) - 2편-41 17.08.04 80 0 16쪽
41 셋트업(Setup) - 2편-40 17.08.03 103 0 15쪽
40 셋트업(Setup) - 2편-39 17.08.02 92 0 18쪽
39 셋트업(Setup) - 2편-38 17.08.01 95 0 15쪽
38 셋트업(Setup) - 2편-37 17.07.31 102 0 18쪽
37 셋트업(Setup) - 2편-36 17.07.30 91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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