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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트업(Setup) - 수정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AAKHS
작품등록일 :
2017.07.07 03:11
최근연재일 :
2017.09.2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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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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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트업(Setup) - 2편-43

DUMMY


거대한 홀 내부. 중앙에는 일곱 가지 색의 광채를 발하는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었으며, 벽면과 천장에는 갖가지 화려한 문양과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밝고 역동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홀 내부였지만 지금 이 순간 이곳의 분위기는 전례가 없을 만큼 어두웠으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뱀파이어가 배신했다.”


플레어 드래곤. 루샤-라의 한 마디에 장내의 분위기는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는 앙숙이었음에도 지금은 의견을 같이하는지. 그의 의견을 거들 듯 프리즈 드래곤 사리드-시는 분개하여 동의했다.


“역시나! 놈들, 기어이 머티어리얼 녀석들에게 붙은 건가!”

“하지만, 아직 단언하기엔···”


선더 드래곤 드카-델이 반문하였지만, 그 자신의 목소리에서조차 자신감이 없었다.


“이것이 루 라오의···뱀파이어 전체의 의지일까요? 리히터와 체르니의 독단일 수도 있잖아요?”

“그, 그래. 아직 그녀는 이렇다할 행동을 하지 않고 있어. 게다가 얼마 전 델리우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렇게 나올 리가···”


오션 드래곤 바마-본과 글레어 드래곤인 마브로-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의견은 반론이라기보다 오히려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지르-쟌. 방금 전까지 그들과 싸우고 온 그대의 생각은.”

“제 생각은···”


둠 드래곤 타르-탈의 질문에 테라 드래곤 지르-쟌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다른 인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쟌, 고민할 필요나 있겠어? 원래 델리우나 퓨레드나의 녀석들은 비겁한 겁쟁이들이라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뿐이라고. 당신들도 알잖아? 녀석이 얼마나 음침하고 교활한 녀석인지 말야!”


잔뜩 흥분한 듯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데스틴의 모습에 불쾌해진 마브로-멜이 두 눈을 치켜뜨며 그를 향해 윽박질렀다.


“네놈에게 의견을 내라고 허락한 적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 멋대로 입을 놀리느냐, 독의 쿠루아!”

“너야말로 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 노랗게 질린 겁쟁이 주제에!”

“뭐, 뭐라고···?! 이놈이!”

“둘 다 그만 두세요!”


지르-쟌은 서로 험악하게 노려보는 마브로-멜과 데스틴을 말린 뒤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전 다른 분들과 다른 생각이에요. 저는 지금이라도···아니, 지금이야말로 뱀파이어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호한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데스틴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쟌? 이번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어스 드래곤이 죽었는데! 수장인 테라 드래곤으로써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여전히 지르-쟌은 단호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데스틴을 바라보았다.


“델리우는. 퓨레드나의 맹주는 뱀파이어들 중 그 누구보다도 명예를 중히 하는 자에요. 그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한 대의명분이 없기 때문이겠죠. 더불어 마브로-멜의 이야기대로 아직 루 라오가 아무 명도 내리지 않았기에 그는 행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이 장소에 모인 모두를 한번씩 둘러보았다. 그녀는 당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델리우에게 행동할 만한 대의명분이 없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라오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죠. 저는 그녀와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기 전에!”

“쟌···”


데스틴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그녀의 의견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말대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매우 가능성 낮은, 반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점에는 생각을 같이하고 있었다.


“설마···우리가 당신들,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의탁한 것이 그들을 자극한 것일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리가르의 안색은 어두웠다. 자신들이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죄책감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자책하지 마세요 리가르. 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우리는 쿠루아라고! 오직 뱀파이어를 없애기 위한 병기로 만들어진 우리를 받아들인 걸 녀석들이 좋게 볼 리가···”


머리를 감싸쥐며 고뇌하는 리가르에게 이터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타이밍이 부자연스러워. 녀석들의 행동은 우리 때문이 아냐.”

“이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들의 배후에···아니, 이 사태 그 자체의 배경에 무언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그것을 위해서라도 뱀파이어와-루 라오와 대화를 해야한다고 봐요!”


이터의 의견을 거들며 지르-쟌은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해보였다. 그녀는 정말로 뱀파이어들과 대화를 해볼 작정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대화라고? 바보같은 소리! 놈들에게 숙이고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밖에 안 돼! 이봐, 너희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이건 대화가 아냐, 굴복이지!”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 데스틴은 다른 엘리멘탈 드래곤들을 둘러보며 호소하였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의 의견에는 동의하는 듯 다수의 엘리멘탈 드래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불리하다는건 알아. 머티어리얼 드래곤들도 상대하기 버거운 상황에 뱀파이어들까지 배신했지. 하지만 대신 우리들이 있잖아!”

“데스틴!”


뱀파이어가 배신했다. 그 점을 마치 기정사실인양 단정하고 편을 가르려는 그의 화법에 지르-쟌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의로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쿠루아다. 뱀파이어를 처치하는 데에 있어 우리 이상의 전문가는 없어! 놈들에게 너희와의 맹약을 깬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홀 내부가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는 수많은 감정과 의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데스틴. 당신은-아니 당신들 쿠루아는 뱀파이어를 죽이는 병기로 만들어졌다는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었나요?”


그 정적을 깨고 지르-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데스틴은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그건···하지만···”

“그런데 다시, 스스로 병기로 되돌아가겠다는 건가요? 이 상황을 더욱 커다란 혼란으로 몰아가면서까지?”

“······”


분위기의 흐름이 단숨에 바뀌었다. 지르-쟌은 고개를 숙인 데스틴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들어올려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에메랄드색의 눈동자가 마치 진짜 보석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데스틴. 진실을 알기 위해.”

“진실?”

“그래요. 나아가 당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지르-쟌은 무언가 더 이야기하는지 그 입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점차 그녀의 모습과 주변 전체가 일렁이더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데스틴은 꿈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진실···이라.”


눈을 뜨자마자 강렬한 태양빛이 눈을 자극해왔다.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데스틴은 자신의 뺨에 손을 대며 몸을 일으켰다.


“진실 따윈 없었어, 쟌···”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등 뒤에서 용병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제 일어났군. 여기 자네 몫이라네.”


그는 데스틴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육포와 삶은 계란, 약간의 말린 채소와 과일이 들어있었다. 주변에는 다수의 짐마차와 상인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이 휴식을 마치고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은 끝나서 곧 이동하기 시작할 걸세. 유감이지만 걸어가면서 먹어야할 걸세.”


뱀파이어를 쫓기 위해 세인스 시의 제오카 상회 지부에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무런 연고도, 명성도 없는 그에게 상회장은 고사하고 관련 인물들의 일정이나 행선지 등을 알려줄 리가 만무하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던 도중, 마침 세인스 시에 오기까지 함께 행동하였던 용병단이 새로운 호위 의뢰를 받아 왕도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보아하니 ‘할 일’이라는 것이 왕도에 있는 것 같군. 무튼 덕분에 한 번 더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반가울 따름이네. 미처 챙겨주지 못할 뻔 했던 보수도 줄 수 있었고 말이지, 하하하.”


다른 단원에게 얼핏 듣기로, 그는 원래 귀족가의 자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위로 많은 형들이 있어 작위나 재산을 계승할 수 있는 서열이 되지 못했던 그는 일찌감찌 가문을 나와 용병의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용병이라는 거친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말투나 행동은 아마도 그 영향이리라.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요.”

“아닐세, 자네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어 그랬겠지.”


용병단장 역시 부하들을 통해 세인스 시의 주점에서 데스틴이 벌인 이상한 행동에 대해 들었으나, 굳이 그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헌데, 굳이 저를 다시 고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유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건 아닐세. 우리가 왕도에 가는 상단의 호위를 맡은 와중, 자네가 마침 왕도에 가려고 하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마침 우리는 동료가 더 필요했고. 그 뿐일세.”


용병단장의 설명에, 데스틴은 오히려 더 의문스러워진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길이 그렇게 위험한가요? 정비상태로 보건데 제법 관리가 잘 되는 것 같고, 하물며 왕도로 가는 길이면···”


의문이라고는 해도 사실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 듯. 여전 태평스럽게 육포를 씹으며 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손으로 계란의 껍질을 까고 있는 데스틴을 향해 용병단장은 진중한 표정으로 설명하였다.


“물론 왕도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동 기지가 있지만, 최근 기지까지 가는 길 주위에 몬스터의 수가 늘면서 그 위험도가 급증했거든.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기이한 트롤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군.”

“그래봤자 트롤일텐데요. 놈은 화염과 산에 약하니 적당히 상대해도 되지 않나요? 약점이 둘이나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데스틴의 반응에 용병단장은 잠시 당황하였다. 분명 트롤이 그 두 가지에 약점이 있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나. 거대한 덩치와 괴력,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나, 무엇보다 여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는 회복력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트롤이라···후우, 하긴 대비하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실제 트롤을 상대해 본 적이 없이 이야기로만 접한 자이거나, 또는 정말로 트롤 정도는 손쉽게 처치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이거나.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의 경우는 분명히 후자일 것이다.


“···그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군. 놈은 트롤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련되어 있고, 심지어 지능도 높아서 부하 몬스터들을 부리고 전술적인 행동까지 할 정도라고 들었네. 실제로 기사단과 용병들이 몇 차례나 토벌을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지.”

“단장! 앞쪽으로 와서 이것 좀 봐 주십쇼!”


대열 앞에서 가던 용병 중 한명이 소리쳤다.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 달려가는 용병단장을 따라 데스틴 역시 멈추어 선 상단 대열의 선두로 이동하였다.


“이건···!”


공간이동기지로 향하는 길을 따라 몬스터들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외뿔 늑대, 고블린, 그리고 오크 등으로 이루어진 시체들은 상당한 거리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다.


“오래 된 시체는 아니군. 몇 시간 정도? 앞서 가던 누군가를 추격하던 것 같은데.”


시체들이 널브러진 길을 따라 말발굽 자국과 바퀴자국이 보였다. 바퀴자국이 단 두 줄인데 비해 말발굽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일반적인 짐마차는 아니라고 용병단장은 생각하였다.


“바퀴의 간격도 넓고, 끌고 있는 말의 숫자도 많아. 상당히 큰 마차인가본데···이상하군.”


이 정도 크기의 마차라면, 분명 상당한 재력가이거나 높은 신분의 인물이 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어째서인지 호위병력의 발자국이나 그들이 타고 있을 말발굽의 흔적이 없었다.


“딱히 전투를 벌인 흔적도 없어. 이 많은 몬스터들을 대체 어떻게 처치한 거지?”

“마법입니다.”


데스틴의 답변에 용병단장은 보다 자세히 몬스터들을 살펴보았다. 몬스터들은 다양한 속성의 공격을 받았는지 불에 탄 흔적이나 전기에 그을려진 흔적, 상처 주변이 유독 차가워진 채 관통된 흔적 등이 있었다.


“아마 마차를 탄 채 도망가면서 마법으로 요격을 했나봅니다. 꽤 수준이 높은 마법사들 같군요.”

“···과연.”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하고 몬스터들의 상처를 발견한 용병단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단하군. 단 한번의 공격으로 한 놈씩 처치할 정도면 보통 마법사가 아냐.”


용병단장과 데스틴을 비롯한 용병들이 몬스터들을 관찰하고 있는 가운데, 상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가 불안함 가득한 표정을 한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들인가? 바쁜 와중에 가는 길도 멈추게 하고서는.”


이미 설명을 들었고,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의 시체들을 본 그는 대략적인 상황이 어떤지 정도는 이해했다. 용병들마냥 몬스터들을 관찰하기에는 그에 관한 지식도, 심리적 여유도 없는 목소리에 용병단장은 두 손을 들어보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자아, 자. 일단 진정하십시오. 적어도 지금 이 주변에서 몬스터의 기척은 없어보입니다. 문제는 공간이동 기지까지 남은 길에 대한 위험성입니다.”

“아앙?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피력하는 상인의 반응에 용병단장은 손가락을 들어 비교적 크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지금 보이는 시체들 외에도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발자국의 크기를 보건데 아마 트롤이나 오우거 정도의 큰 몬스터도 있어보이는군요.”

“오우거?”


아무래도 이 상인은 실제로 오우거를 본 적은 없는지 별 감회가 없어보였다. 애초에 그의 초조함의 원인은 자신들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마차 바퀴자국 주변의 발자국 숫자를 보면 녀석들의 숫자는 상당합니다. 어쩌면 백 단위에 육박할 수도 있을 정도로요. 그에 반해 죽은 몬스터의 숫자는-특히 인간형 몬스터의 시체의 수가 턱없이 적군요. 어쩌면 수십 이상의 몬스터가 여전히 길목 상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용병단장도 뒤늦게야 상인의 초조함의 원인이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상인에게 하려던 이야기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계속 가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저는 세인스 시에 돌아가는 것을 추천드리고 싶군요.”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자고?”


어지럽게 찍힌 다양한 발자국의 수를 보면 몬스터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아보였다. 최소한 수십 이상, 심지어 오우거 등의 강력한 몬스터도 포함되어 있는 무리의 습격을 받는다면 상단의 안전은 고사하고, 자신을 비롯한 용병단원들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일까지 왕도에 도착하지 못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그 손해를 자네가 변상해 주기라도 할 텐가?”

“물론 손해가 나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살아 있어야 돈도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심한 용병 같으니, 무엇 때문에 자네들을 고용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상인은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용병단장에게 삿대질을 하였다.


“제오카 상회에서도 인정한 실력 좋은 용병들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고용했거늘. 그렇게 몬스터가 무서워서 어떻게 지금까지 용병 일을 해온겐가, 아앙?”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상인이 차후 자신들에 대해 안 좋은 평가를 퍼뜨리게 된다면 이후 자신들의 용병단으로서의 신용이나 평판 등에도 타격이 올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예정대로 가던 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흥.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주변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용병들이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단장. 차라리 이딴 상인들 따위 어찌되든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라도 물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 돼. 그래서는 계약 위반이다. 무엇보다 그런 비겁한 행위는 할 수 없어.”


용병단의 입지 문제도 있었지만,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비록 가문을 나왔다고는 해도,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몸에 밴 귀족으로서의 사고관이나 자긍심은 남아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느 정도 피해는 각오해야 할 수도 있겠군. 우선은 계속 이동하자.”

“단장!”

“단, 만약 셋 이상의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면 그때는 우리 단의 생존을 우선으로 하지. 그 정도로 참아주게.”

“···알겠습니다요, 단장.”


그렇다고 해도, 그가 만약 외골수적으로 자존심이나 체면만을 고집했다면 지금까지 온전히 용병 일을 할 수 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단원들을 납득시켰다.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에니체드. 이제 그만 출발하도록 하지. 몬스터 시체 관찰은 그만 하고 이제 가세.”


무슨 이유에서인지 데스틴은 저 앞쪽에서 아직까지도 몬스터들 옆에 쭈그려앉은 채 그것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시체가 흩어져있던 다른 곳과는 달리 그의 주변에는 마치 일부러 그러모으기라도 한 듯 십수 체의 고블린과 외뿔 늑대들의 시체가 모여있었다.


“에니체드, 듣지 못했는가? 이제 그만 다시 출발합세!”

“예? 아 예.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재차 그의 (사실은 본명이 아닌) 이름을 부르고나서야 제정신을 차린 듯 그는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정창인가···그리운 마법이군. 그래, 그녀가 자주 쓰던 마법이었는데···”


이미 마법으로 생성된 수정의 창은 완전히 사라진 뒤였음에도 그는 몬스터들이 어떤 마법으로 죽었는지를 알아내었다. 그는 다른 용병들과 걸음을 맞춰 이동하면서도 다시금 수정창 마법에 의해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있는 곳을 몇 번이고 흘겨보았다.




작가의말

데스틴이 거의 따라잡았군요.

47화에서 접촉합니다.


프롤로그와 회상부 등의 내용에서 예상하시겠지만, 저 부분에서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인물들의 대다수는 이미 고인이 되었죠.

생존자 중 일부가 이후 이야기에 등장할 예정이기는 합니다. 2편 중에는 아니지만요.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이 길게 가네요. 예정했던 플롯에서 일부를 쳐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비축분도 이제 별로 없는데...)

작성과 연재를 거의 병행하는게 이렇게 힘들군요. 무작정 이미 연재한 분량을 와장창 쳐내는게 상당히 제한적이다보니.



다음 화는 쉬어가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2편 초반부에서 아르나시아가 보였던 행동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파트가 될 겁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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