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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 공방

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디귿(D)
작품등록일 :
2022.05.12 14:41
최근연재일 :
2023.04.19 19:10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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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6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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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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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47. 샤이르와 루리아(5)

DUMMY

꺄아아악!


으아아악!


사람들은 힘껏 비명을 지르며 살기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고작 한 명이 죽었다. 저택을 에워싼 수많은 경비병과 경호원이 있었다. 합리적인 판단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살인자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능은 합리적이지 못했다.


촤악!


컥!


퍽!


으윽···


이리저리 날뛰는 사람들 속에서 살을 베는 소리와 둔탁한 충돌음, 갖은 신음과 비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머리 위로 피가 튀고, 도망치던 사람이 쓰러져 나뒹굴었다. 참석자 사이에 정체를 숨기고 있던 무리들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젠장, 뭐야 이게?”


광기에 사로잡힌 연회장은 순식간에 대량 살육 현장으로 바뀌었다. 샤이르는 이 위기를 벗어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덴! 마구간에 있는 덴이 이 소란을 들었을까? 지금이라도 덴이 온다면······.’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지 고작 3년··· 이제 막 초보 단계를 지난 샤이르의 눈에도 학살자들의 엄청난 무력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무리 덴이 강하다 해도 이들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단상에 서 있는 남자는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남은 수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도망쳐야 합니다. 서둘러 밖으로!”


샤이르는 루리아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샤이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시면 안 돼요! 어서······.”


갑작스런 상황에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직된 줄 알았다. 하지만 루리아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눈에 띄면 더 위험해요. 그냥 이대로.”


어차피 이들로부터 완전히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도움의 손길이 올 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샤이르는 루리아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적당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곳으로.”


탁자가 부서지고 넘어져 자연스럽게 방벽을 만들고 있었다. 샤이르는 황급히 루리아를 탁자 뒤로 잡아끌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구석에 몸을 숨기는 것을 본 학살자는 없는 듯 아무도 좇아오지 않았다.


“젠장··· 어쩐지 찜찜하다 했더니··· 저 미친놈들은 도대체 뭐야?”


작은 틈 너머 세상은 피와 비명뿐이었다. 이젠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이 더 많았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연희장의 모든 사람이 시체가 될 판이었다.


와장창!


절망의 순간 창문이 부서지며 다수의 무리가 연회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중에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덴이었다.


“데에······.”


반가움에 소리치며 뛰어나가려는 샤이르를 루리아가 잡아당겼다.


“아직.”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루리아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탁자 너머로 덴의 고함이 들렸다.


“웬 놈들이냐?”


덴은 검을 빼들고 학살자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함께 뛰어든 다른 경호원도 합류했다. 그 중에 쌍둥이 자매도 있었다.


일방적인 학살은 검과 검이 부딪히는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다.


“도련님! 샤이르 도련님!”


“루리아 아가씨! 어디 계세요?”


학살자들을 상대하며 각자의 고용인을 찾았다. 다른 무리들도 고용인의 이름을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무차별적인 학살은 이제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하진 못했다. 경호원들의 공격은 거셌지만, 학살자 무리를 압도하진 못했다. 되려 시간이 흐를수록 밀리기 시작했다.


“다니르 님이 오시려면 얼마나 걸리지?”


“아무리 빨라도 10분 이상은 걸릴 거야.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찾아야······.”


챙!


사라의 허점을 노린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모라가 쳐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의 실력은 엄청났다. 한 명 한 명이 최소 명인 이상의 실력이었다.


“그 빌어먹을 도련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떠들 시간 있으면 아가씨나 찾아.”


학살자와 검을 부딪치며 루리아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은 학살자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루리아의 안전이었다. 잠시도 수색을 멈출 수 없었다.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도련님!”


덴도 샤이르를 찾으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없는 덕에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왜 못 나가게 막는 거야? 지금 저들과 합류해서 도망쳐야지.”


다급한 마음에 억지로 지키던 예의는 사라졌다.


“저 남자.”


루리아의 시선이 단성에 선 남자를 향했다.


“저 남자는 움직이지도 않았어.”


샤이르의 반말에 대한 반감인지, 굳이 예의를 지킬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인지 루리아도 반말로 대꾸했다.


멀뚱히 전투를 보고 있는 남자의 존재감은 검을 휘두르는 수십 명을 압도했다. 만약 단상 위의 남자가 나선다면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될 게 뻔했다.


“그럼 이대로 있자는 거야? 어차피 경호원들이 당하면 우리도 같은 처진데?”


“기다려. 분명히 올 거야.”


“도대체 뭐가 온다는 거······.”


퍽!


앞을 가리고 있던 탁자가 부서지며 충격이 샤이르의 등을 덮쳤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샤이르는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샤이르가 서 있던 자리엔 학살자 중 한 명이 철퇴를 치켜들고 서있었다.


“그··· 그만둬······.”


바닥에 쓰러졌던 샤이르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온몸 가득한 고통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학살자는 루리아의 머리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빠른 속도로 휘둘린 철퇴가 루리아의 머리에 닿기 직전 강한 바람이 일어 학살자를 날려버렸다.


마법 스킬 : 강풍(强風)


기회를 노리고 있던 루리아의 바람마법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학살자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까지 나가떨어졌다.


우당탕


바닥을 뒹구는 학살자의 궤적을 따라간 시선에 루리아와 샤이르가 있었다. 쌍둥이 자매와 덴은 동시에 고용인의 이름을 외쳤다.


“루리아 아가씨!”


“샤이르 도련님!”


고용인을 확인한 그들은 몸을 날렸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학살자들의 공격에 바닥에 쓰러지고, 벽에 부딪혔다. 크지 않은 상처였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학살자 무리 일부가 루리아와 샤이르를 향해 다가왔다. 덴과 쌍둥이 자매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검을 휘둘렀지만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학살자 무리는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서서히 루리아와 샤이르에게 다가갔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다.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니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상처는 점점 늘어가고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해.’


‘젠장! 젠장! 젠장!’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여유를 찾은 학살자들은 아직 살아남은 이들을 하나둘 쓰러뜨렸다. 저들을 막지 못하면 고용인들에게도 똑같은 위기가 찾아오기 직전이었다.


루리아는 바람마법에 맞아 나가떨어진 학살자의 철퇴를 집어 들었다. 철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주변에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건 철퇴밖에 없었다.


학살자는 철퇴를 꼬나든 루리아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챙!


루리아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철퇴를 놓쳤다. 충격은 고스란히 손에 전해져 강한 고통을 남겼다. 두 손을 움켜쥐고 고통을 참는 루리아를 향해 학살자는 검을 치켜들었다. 예상대로였다. 검이 휘둘려지는 순간 준비하고 있던 바람마법을 시전했다.


마법 스킬 : 강풍


루리아의 등 뒤에서 한데 뭉쳐 불어온 바람은 점점 빨라져 학살자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텅!


하지만 바람마법은 학살자의 검에 막혔다. 그의 몸을 제법 공중으로 띄우긴 했지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다. 방심을 노린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루리아는 다시 바람마법 공격을 준비했지만, 학살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검날이 루리아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아!”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외치며 샤이르가 학살자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챙!


순간적으로 궤적이 바뀐 학살자의 검날이 샤이르의 공격을 막아냈다.


“지금이야!”


샤이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바람마법이 학살자의 가슴을 노렸다.


마법 스킬 : 강풍


퍼억!


이번엔 명중이었다. 가슴에 바람마법을 맞은 학살자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제법인데? 나한테 한 번 빚 졌······.”


또 한 명의 학살자가 멋있는 척 하던 샤이르를 걷어찼다. 학살자의 발에 차인 샤이르는 다시 한 번 벽에 부딪혔다.


이미 마정석의 마나는 바닥 나 있었다. 루리아가 익히고 있는 유일한 대인 공격 마법인 강풍을 연달아 세 번이나 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기도 없고, 마법도 쓸 수 없었다. 학살자의 공격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윽!”


학살자의 손이 루리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엄청난 힘이 몸에 전해졌다. 숨도 쉬어지지 않고 고통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전에 목이 부러져 죽을 것도 같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을 잃기 직전 묵직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그만.”


짧은 한 마디에 루리아의 목을 죄고 있던 손이 풀렸다.


“콜록, 콜록······.”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루리아는 겨우 트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기침을 뱉었다. 그 위로 그림자 하나 드리워졌다.


“아르리안 가문의 장녀이신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 단상 위에 서 있던 남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날 인연이 아닐 텐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렸군.”


“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겨우 벽에 기댄 샤이르가 외쳤다.


“이쪽은··· 모흐란의 반쪽짜리 장자인가?”


“이 개자식··· 쿨럭, 쿨럭. 욱!”


남자의 말에 발끈해 소리치던 샤이르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한 움큼 피를 토한 샤이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노려봤다.


“눈빛이 좋군. 반쪽짜리란 말은 사과하겠네. 그런데 무슨 말이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니?”


“말 그대로다··· 본 게 없으니 보지 못했다는 거야.”


“무얼 보지 못했다는 거지?”


“바보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못 봤는데 뭘 봤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어?”


“제법이군.”


남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속고만 살았어?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그냥 믿··· 아악!”


비아냥거리는 듯한 샤이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엄청난 비명이 터졌다.


“도련님!”


덴은 샤이르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학살자의 공격을 받고 나가떨어졌다.


“아직도 못 봤다고 생각하나?”


샤이르의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고통을 참으려 숨을 헐떡인 덕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아악!”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검으로 허벅지를 찌른 게 분명한데 검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처와 비명만 남았다.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


“이··· 개··· 새끼···야. 그냥 죽여······.”


거칠게 몰아쉬는 숨 사이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후움··· 그럼 이건?”


“아아악!”


이번엔 루리아의 비명이 연회장을 울렸다. 허벅지에서 솟은 피는 드레스를 빨갛게 물들였다.


“아가씨!”


쌍둥이 자매도 몸을 날렸지만 덴과 같은 처지가 될 뿐이었다.


루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어때? 생각이 나나?”


“미친 변태자식··· 고작 14살짜리 여자애한테 그게 할 짓이냐?”


“아아악!”


다시 한 번 루리아의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반대쪽 허벅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개자식아! 차라리 나한테 해! 나한테 하라고!”


루리아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샤이르를 쳐다봤다.


‘왜···?’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호오··· 멋진 대사군. 이 소녀를 좋아하나?”


“병신··· 너 따위한테 고개 숙인 놈이 모흐란 상단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계집이나 괴롭히는 병신이 그런 걸 알 턱이 없지.”


샤이르의 도발에 남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좀··· 과하지만··· 강단이 있는 건 보기 좋군. 그래. 사내가 그 정도는 해야지.”


“누가 인정받고 싶대? 개소리 말고 덤벼! 덤비라고!”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소녀여, 좋은 친구를 뒀구나.”


남자는 손을 살짝 들어 신호했다. 신호와 함께 학살은 다시 시작됐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네. 다음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길 빌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연회장에 서 있는 사람은 학살자들과 나중에 들어온 경호원밖에 없었다. 참석자, 시녀, 시종 할 것 없이 모두 학살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학살을 끝낸 무리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남자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대가 한 말에 책임을 지게. 이곳에서 그대들은 아무 것도 못 본 것이 되어야 하네. 영원히.”


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연회장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사만다였다.


“이놈! 아가씨께 떨어져라!”


사만다는 고함과 함께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법 스킬 : 다연발(多連發) 강풍


수십의 바람이 다양한 방향에서 남자를 향해 쏟아졌다. 남자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퍼버버벙


바람은 남자에 닿지 못하고 전부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다. 폭발한 바람이 만든 충격파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사만다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적이 방어하는 동작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디오스.”


남자는 뜻을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 *


이야기를 마친 루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지 표정도 어두워보였다. 아현은 루리아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사만다는 마법으로 명인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뛰어난 마법사였어. 그런 사만다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훼시켰다니······.”


만약 사만다가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남자가 직접 경호원과 사만다를 상대했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대량 학살을 벌인 거야?”


루리아는 검은 모래에 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목격자란 이유만으로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두려움도 있지만, 사실을 알게 돼서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말하지 말아라. 전혀 안 섭섭하니까.”


“널 위해서야.”


“네~ 네~ 알고 있습니다요. 아, 맞다! 그런데 샤이르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널 지키려던 걸까? 설마 너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 아냐? 응? 요 기지베~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엉큼하게.”


“말하기 창피하지만···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그때 한 말이 전부 진심이었더라. 너도 알잖아. 그 애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 자존심만큼은 절대 굽힐 수 없었던 거야. 웃기지? 고작 14살 밖에 안 된 애가 자존심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하하··· 보통 그런 걸 객기라고 하지 않아? 아무튼 대단하긴 하네. 그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잖아. 그럼 너는 그 모습을 보고 반한 거고?”


루리아는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단순해서 좋겠다.’


얼씨구, 너만 할까.


“그럼 그 뒤로 친해진 거야?”


“응. 샤이르는 그 저택에 살아서 방학 때마다 만날 수 있었어. 마침 둘 다 카델을 목표로 했고, 사만다에게 같이 마법을 배웠거든.”


“아, 그 일로 사만다도 샤이르를 좋게 본 거구나?”


“응. 이유야 어쨌든 그 애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까.”


“역시 사람은 모르는 거구나.”


아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루리아는 멀뚱멀뚱 눈만 껌벅였다.


“샤이르 말이야. 참 한결같이 재수 없는 놈인데··· 네 이야기를 듣고 보면 그렇게 나쁜놈 같지도 않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지 잘난 맛에 사는 놈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고.”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속은 굉장히 여리고 착한 아이야.”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네.’


동기들은 아직도 샤이르가 루리아의 가문을 이용하려 먼저 접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샤이르와 어울리는 루리아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다른 애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놀라는 표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루리아가 직접 입을 열기 전까지 밝힐 수 없었다.


“으그그~ 늦었다. 그만 들어가자.”


아현은 기지개를 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기 전 인사를 건네려다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넌 대체 왜 평소에 그렇게 말이 없는 거야? 처음엔 그냥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말 엄청 많이 하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내가? 난 그냥 필요한 말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지금은? 그거 알아? 네가 나보다 말 더 많았어.”


“그랬어? 움··· 아마 네가 편해서 그런 거 아닐까?”


루리아의 예쁜 얼굴에 방긋 미소가 어렸다.


‘미··· 미친··· 자꾸 그렇게 웃지 말라고.’


한겨울 밤 소복이 내린 첫눈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미소는 아현의 혈압을 끌어올렸다.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조만간 코피가 터질 것 같았다.


“나 먼저 들어간다. 너도 일찍 들어가. 내일 또 고생해야 되잖아.”


“응.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잘자.”


아현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기숙사로 향했다. 루리아에게서 멀어지자 혼자 품었던 의심이 솟아올랐다.


‘아디오스(Adios)?'


루리아는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다. 너무 인상에 남아 사전이나 고서적을 찾아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현에겐 익숙한 단어였다.


‘그럼 그 남자도 버서사이인가?’


한 번도 본적 없는 다른 버서사이의 흔적은 늦은 밤 아현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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