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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님의 서재입니다.

S.N.L (Save and Load)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최근연재일 :
2019.07.16 14:09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20,643
추천수 :
281
글자수 :
390,692

작성
19.01.3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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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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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1쪽

SNL - 36

DUMMY

“윤아야, 뭐땀시 짐을 챙겨쌌냐? 말 좀 해보랑께.”

“할머니,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가야해요.”


날이 밝자마자 김윤아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가하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짐을 챙긴 후에는 몇 안 되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동수단을 구하려했다. 하지만 현숙이를 옮길 수 있는 트럭을 빌리기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김윤아는 박덕자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고 먼저 시내로 떠나보내기로 했다.


“저도 금방 따라갈 테니깐 시내 한가운데에 방 잡은 다음 거기서 꼼짝도 말고 기다리세요. 현숙이만 잘 해결하면 전화할게요. 알겠죠, 할머니?”


박덕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급한 김윤아의 태도에 캐묻는 걸 미루고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덕자를 마을버스정류장에 바래다주고 돌아온 김윤아는 현숙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시내로 데리고 가도 현숙이가 머물 곳이 없었다. 주차장 같은 곳에 묶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며칠 동안 현숙이를 맡아줄 지인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인근 야산에 묶어놓는 것인데, 늙은 현숙이만 홀로 외딴 곳에 묶어놓고 방치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칫하면 현숙이가 들개 같은 야생동물한테 공격받을 수도 있고, 물과 먹이를 챙겨주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연로한 박덕자를 혼자 두고 현숙이 곁에서 현숙이만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김윤아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머리를 싸매던 김윤아의 시선에 문득 재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느새 흑복으로 갈아입은 재영은 차분한 자세로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챙겨 온 장도리 두 자루와 김윤아에게 빌린 조선낫 한 자루를 가볍게 휘두르며 상태를 체크했고, 그 후엔 마루에 앉아 신체와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분하다 못해 평온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오히려 지켜보는 김윤아가 더 불안했다. 소총을 든 군인들이 몰려와도 불안한데 장도리와 낫으로 어쩌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로 괴물을 이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무기’하면 총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 다음으로 칼이나 활, 창 따위를 떠올린다. 물론 그것들이 뛰어난 무기인 것은 맞지만 망치와 같은 둔기도 오랜 세월동안 효용이 입증된 무기였다. 중갑옷 이상의 단단함을 지닌 괴물을 상대할 때에는 날선 무기보다 둔기가 유리할 때도 많았다.


“장도리를 우습게보지 마세요. 이래봬도 중세 때 쓰던 워해머랑 거의 똑같거든요. 조선낫은 옛날에 민란 터지면 백성들이 하나씩 꼬나 쥐고 나오던 물건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더 좋은 무기도 있잖아? 칼이나 창 같은 거 말이야.”


재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무기가 더 강한가?’는 굉장히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주제였다.


“제각각 장단점이 있어요. 모든 무기를 들고 다닐 게 아니라면 자기 무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극복해야 하죠. 결국엔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지,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도검류는 허가증이 없으면 불법이고 길이 때문에 몰래 가지고 다니기도 불편해요. 미성년자인 저한테는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최고죠.”


김윤아는 미성년자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자기는 도망칠 궁리만 하는데 어린 재영이 의연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재영이는 싸우는 게 무섭지 않아?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야?”

“그럴 리가요? 저도 엄청 무서워요. 아무리 싸워도 싸움 직전에 심장이 떨리는 건 낫지를 않더라구요.”

“그렇게 무서우면 어떻게 싸울 수 있는 거야?”

“음······ 글쎄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언니가 화상을 입은 거랑 비슷한 거예요.”


재영은 김윤아가 어렸을 때 불장난을 하다가 다리에 입은 화상을 언급했다.

김윤아는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는 그때 도망칠 수도 있는데 불을 끄느라 화상을 입었잖아요.”

“하지만 그건 큰 불이 날까봐 어쩔 수 없이······”

“다르지 않아요. 불이 번져서 할머니와 현숙이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던 거잖아요. 저도 그것과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싸우는 거예요.”


김윤아는 재영의 말을 이해했지만 그와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그럼 왜 정전위에 등록하지 않은 거야? 그럴 거면 다 같이 싸우는 게 낫지 않아? 너는 나 같은 겁쟁이도 아니잖아. 미등록인 채로는, 피 흘리며 싸워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널 비겁자라 욕할 거야. 그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야.”

“저는 자원봉사자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타인을 돕는 건 제 목적을 이루는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죠. 그런 건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 목적만 이룰 수 있으면 사람들이 부산물을 어떻게 평가하든 관심 없어요.”

“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나는······”


‘나는 너처럼 할 수 없어.’


김윤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재영은 김윤아 자신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재영처럼 행동할 수 없는 스스로가 못내 한심스러웠다.

재영은 김윤아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니가 굳이 저처럼 할 필요가 있나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니까요.”


재영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김윤아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기 위해 쉬운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 회차에서 빼앗았던 선택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재영은 김윤아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전 회차를 통해 억지로 싸우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싸울 이유를 찾든가, 싸움으로부터 도망치든가, 결정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김윤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김윤아는 끝내 도망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재영은 빙긋 미소 지었다. 오히려 미안해야할 쪽은 자신이었다. 김윤아는 천성적으로 투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런 사람을 전 회차에서 억지로 싸우게 만들었으니 모든 걸 거부하게 될 수밖에.


“전혀요. 미안할 필요 없어요. 저는 괜찮으니까요.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몇 시간 뒤면 균열이 열릴 거예요. 어서 떠나세요. 탈것이 없어도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으면 현숙이랑 같이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김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돌아서서 짐 가방과 현숙이의 고삐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재영의 말대로 이동수단이 없어서 늦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했다.

재영은 점점 멀어지는 김윤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김윤아가 싸움을 회피하면서 이번 회차도 결국 꽝이 돼버렸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다음 회차에 어떻게 하면 될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박수찬과 정전위가 토룡을 사냥할 때 개입해 하데스를 없앤 다음, 이곳으로 내려와 김윤아를 도우면 간단하게 끝날 것이다.


“지금 불러오기 해버릴까······?”


스스로의 질문에 재영은 고개를 저었다. 불러오기는 한 번 밖에 남지 않았다. 언제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으니 섣불리 사용하기보다는 이후의 경과를 지켜본 다음에 하는 게 더 안전했다.

재영은 기지개를 켰다. 따뜻한 햇살이 기분 좋은 봄날 오후였다. 집 주인은 모두 떠나고 객만 남아 집을 지키는 모양새가 왠지 우스웠다.


“이게 주객전도인가? 하하하.”


실없는 농담에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윤아는 현숙이를 이끌고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김윤아는 자신과 재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김윤아의 눈에 재영은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영웅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그저 그런 소시민 중 한 명일뿐이었다. 정화자가 된 이후로 ‘왜 하필 내가?’라는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다. 차라리 이 힘이 더 자격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자괴감이 김윤아를 괴롭혔다.


김윤아의 계획은 국도를 따라 시내까지 쭉 걸어가는 것이었다. 현숙이의 속도가 느리긴 해도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 속도면 해가 지기 전에 위험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저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만 지나면 국도로 접어드는 길목이 나왔다.

정류장을 지나던 김윤아는 정류장에 앉아있는 낯익은 노파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아니, 아직까지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말했잖아요! 시내로 가서 방 구해놓으라고!”


박덕자는 김윤아가 온 방향을 살피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울 학생은 어쩌고 혼자 오는 거여?”

“재영이는 할 일이 남아서 좀 더 있다가 온대요.”

“위험하담서? 참말로 서울 학생 혼자 괜찮은 거여?”

“그 아이는 저보다 훨씬 강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해서, 우덜만 내빼는 거여?”

“······.”


김윤아는 말없이 박덕자 옆에 앉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박덕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괴로운 부분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윤아야.”

“네······ 할머니.”

“너두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겄냐?”


박덕자가 김윤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조모의 깊은 시선을 마주한 김윤아는 잠시 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 할머니······ 호, 혹시 알고 있었어요······?”

“내 새끼를 나가 모르믄 누가 알겄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재영도, 그녀의 조모도 비밀을 알고 있었다. 허탈하기도 하고 혼자 바보가 된 것 같기도 했지만,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느껴졌다.


“하지만 할머니······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은 집주인이 지켜야제. 손에게 떠넘기면 안 되는 벱이여.”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믄 되겄제.”


처음엔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김윤아는 곧 의미를 깨달았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라.

김윤아는 두 주먹에 힘을 실었다.


“저 잠깐 다녀올게요. 할머니는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으세요.”


박덕자가 고개를 저었다.


“할미 혼자 내빼서 뭐하겄어. 여서 현숙이랑 기다리고 있을 테니께 걱정일랑 말드라고.”


느릿하게 눈을 감은 박덕자는 평화롭게 잠든 듯한 얼굴로 손녀딸에게 말했다.


“몸성히 갔다 와야 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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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SNL - 56 19.07.04 67 1 16쪽
56 SNL - 55 19.06.28 76 1 16쪽
55 SNL - 54 19.06.22 62 1 11쪽
54 SNL - 53 19.06.16 99 1 14쪽
53 SNL - 52 19.06.10 77 1 18쪽
52 SNL - 51 19.06.04 62 1 11쪽
51 SNL - 50 19.05.30 109 1 12쪽
50 SNL - 49 19.05.24 88 1 18쪽
49 SNL - 48 19.05.18 110 1 17쪽
48 SNL - 47 19.05.12 97 1 15쪽
47 SNL - 46 19.05.06 113 1 19쪽
46 SNL - 45 19.05.02 95 2 12쪽
45 SNL - 44 19.04.28 112 1 13쪽
44 SNL - 43 19.04.24 111 1 17쪽
43 SNL - 42 +1 19.04.20 126 3 18쪽
42 SNL - 41 19.03.04 147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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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SNL - 39 19.02.16 189 3 17쪽
39 SNL - 38 19.02.10 159 3 17쪽
38 SNL - 37 19.02.06 173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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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SNL - 35 19.01.24 170 4 15쪽
35 SNL - 34 19.01.22 193 2 17쪽
34 SNL - 33 19.01.18 19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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